|
사38:18,19 산 자는 주께 감사하며 24.11.3 추수감사주일설교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 특별히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산 자는 주께 감사하며”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 추수한 것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구약의 절기 중 초실절은 첫 수확 거둔 것을 감사하는 날이고 수장절은 마지막 추수를 다 거두고 곡간에 들이면서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 수장절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추수 때에 모두 알곡 되어 천국 곡간에 들어가게 되길 축복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감사의 반대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몇 가지 단어가 자연스럽게 생각났습니다. ‘불평’, ‘불만’, ‘원망’ 등입니다. 이것을 단계로 나눠보면 먼저 마음에서 불만을 품는 것이고 그 불만을 입으로 내뱉으면 불평이고 불평이 최고조에 달하여 미움과 합하면 원망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습관이 참 무서운데 불평, 불만, 원망도 습관이 되면 무엇을 줘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전에 받은 것은 생각 못하고 안 준 것만 원망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불평, 불만,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감사하는 자가 되길 축복합니다.
성경에 불만, 불평, 원망이라는 단어는 모두 47번 나옵니다. 불만은 4번, 불평은 6번, 원망은 37번입니다. 이것도 불만을 품었다거나 불평을 늘어났다거나 원망했다는 것은 거의 출애굽한 이후의 광야생활에서였고, 나머지는 잠언이나 서신서에서 불평하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는 권면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감사’라는 단어는 188번 나옵니다. 무려 네 배가 더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감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37:7,8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악을 행하는 자들로 인해, 악한 꾀를 이루어 자기 길이 형통한 자들로 인해서도 불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불평하는 것은 악을 만들 뿐입니다. 감사는 선을 만드는 것입니다. 원망은 미움을 더하고 감사는 사랑을 더합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마음도 더 생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히스기야 왕의 고백입니다. 그가 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된 줄 알고 하나님께 낫기를 구하여 응답받았습니다. 그의 생을 15년 더 연장 받았습니다. 그가 병에서 고침 받고 건강해진 뒤에 회상하면서 기록한 것이 본문입니다.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스올을 지옥이라고 번역하지 않은 것은 스올은 완전한 심판이 끝난 죄인이 가는 지옥이 아니라 심판받기 전에 머물고 있는, 대기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잠자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주께 감사할 수도 없고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고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한다는 것은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산 자 오직 살았을 때 주님께 감사할 수 있고 주의 신실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았을 때, 오늘! 지금! 현재! 감사해야 합니다.
로마의 16대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쓴 ‘명상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만큼이나 유명한 책입니다. ‘고백록’은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방탕했던 생활, 자신의 죄에 대한 솔직한 회개를 고백한 것이고 ‘명상록’은 황제가 삶에 대한, 인생에 대한 명상입니다. 철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아우렐리우스황제는 주후 161년에서 180년까지 로마를 다스렸는데, 그는 로마의 악명 높은 폭군들과 달리 아주 현자로 알려진 황제입니다. 이 때는 로마제국이 번영을 누렸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명상록’ 첫 부분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감사를 드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황제로서 모든 것이 넉넉하고 만족스러워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 밑에 입적되어 자랐습니다. 그에게도 불우한 시절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명상록’은 그동안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감사로 시작합니다. 첫 시작이 이렇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베루스 덕분에 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갖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평판과 추억 덕분에 겸손과 남자다운 기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 덕분에 경건과 선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나쁜 짓만이 아니라 나쁜 생각도 삼가는 마음과 나아가 부자들의 생활태도를 멀리하는 검소한 생활방식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나는 누구 덕분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는 고백을 무려 열 번 이상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에게 영향을 준 가족과 친구, 스승에 대한 고마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제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손양원 목사님의 아홉 가지 감사가 있습니다. 두 아들을 잃고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 장례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3주 동안 감사 고백을 매일 적어보라고 했는데 이것은 미국에 유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일기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우렐리우스황제인 것 같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루스티쿠스 덕분에 내 성격을 개선하고 손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폴로니우스 덕분에 격심한 고통을 당하거나 자식을 여의거나 오랫동안 병을 앓아도 언제나 한결같고 살아 있는 본보기를 통하여 같은 사람이 진지하면서도 상냥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또한 알렉산드로스 덕분에 누가 이국적이거나 틀리거나 불쾌한 표현을 쓰더라도 헐뜯거나 나무라지 않고 적절히 일깨워줌으로써 그가 사용했어야 할 올바른 표현을 재치 있게 일러주게 되었다. 프론트 덕분에 나는 악의와 변덕과 위선이 폭군의 특징이라는 것과 우리 사이에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대체로 인정머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귀족’에 설명을 덧붙이기를 ‘능력 있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자’라고 했습니다. 요즘말로 ‘금수저’를 뜻합니다. 대체로 인정머리 없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감사는 신에게 드렸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도 신에게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신의 은총으로 나는 훌륭한 선조들과 부모와 착한 누이와 좋은 스승들과 훌륭한 가솔들과 친척들과 친구들을 거의 다 갖게 되었다. 내 자신을 감시하도록 일깨워주면서도 존경심과 애정으로 나를 즐겁게 해주는 아우가 있고 내 자식들이 멍청하지 않고 불구가 아닌 것도 신의 은총이다. 내가 곤궁하거나 그 밖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때마다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것도 신의 은총이다. 내 아내가 그토록 고분고분하고 곰살궂고(다정하고 싹싹함) 검소한 것도, 내 자식들을 위하여 유능한 스승들을 구한 것도 다 신의 은총이다. 이 모든 것에는 신의 도움과 행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신의 은혜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에 대하여도 감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드린 것입니다. “내가 할아버지의 소실 곁에서 더 오래 양육되지 않고 청춘의 꽃을 고이 간직하며, 때가 되기도 전에 어른 노릇을 하지 않고 그 시기를 조금 더 늦추게 된 것도 신의 은총이다. 내가 수사학과 시문학과 다른 학문에서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못한 것도 신의 은총이다. 내가 거기서 큰 재능을 보였더라면 거기에 매달렸을 테니 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황제였음에도 좋은 것, 잘 된 것만 감사드린 것이 아니라 안 된 것도, 늦어진 것도, 부족한 것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누리는 것, 때로는 가져가신 것, 때로는 부족하게 하신 것, 때로는 안 되게 하신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요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드려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것을 말씀합니다. 고전4:7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이 말씀은 세 가지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는 즉 고린도 교회에 서로 계층이 있고 구별이 있었습니다. 이 구별을 금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구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받은 것, 가진 것, 누리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힘쓰고 노력해서 이룬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추수감사절은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17세기 초 영국 교회는 여러 가지로 타락했습니다. 예배는 형식적이었고 성직자는 신자들을 돌보기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여기에 대항하여 참된 신앙생활을 하자고 나선 사람들이 청교도들입니다. 그러나 영국 정부와 국교회 당국은 이런 청교도들에게 여러 가지 제재를 가하여 박해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경대로 살려고 하면 핍박이 따라옵니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먼저 네덜란드의 라이덴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국제무역이 활발하여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에서 10년을 더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네덜란드도 참된 신앙생활을 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국제무역이 활발해 자유로웠지만 온갖 죄악이 범람하여 자녀들이 죄악에 쉽게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신대륙 식민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가서 참된 신앙 공동체를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들 102명은 1620년 9월6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습니다. 신대륙에서 개인적인 행동을 금하고 신앙의 원칙 아래서 공동생활을 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이들은 도착한 곳을 자기들 고향의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라고 하고 자신들을 필그림,곧 순례자라고 불렀습니다. 플리머스에 도착한 것은 1620년 11월11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매서운 겨울을 이기지 못해 절반이 죽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봄은 왔고 이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어려울 때마다 금식기도를 하며 버텨냈습니다. 한 번은 금식기도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한 농부가 제안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농사가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하지 않고 여건이 유럽보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신앙과 정치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광활한 대지가 열려 있습니다. 금식 대신에 감사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농부의 제안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금식기도 주간을 선포하는 대신에 감사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축제를 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주일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받았는데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이 받고도 감사는커녕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감사가 사라질 것을 말씀했습니다. 롬1:21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딤후3:2에도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실함에 대한 진가는 어려울 때, 고난당할 때 드러납니다. 어려울 때 어떤 마음으로 임하는지, 그 고난을 어떤 자세로 극복해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중에도 입술로 어떤 고백을 드리는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여 의심하지 않고 감사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지, 그럼에도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고 행하는지를 보면 그의 신앙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숨을 쉬는 것도 감사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도 주가 인도하신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감사입니다. 때론 가져가심도 감사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자녀삼아주신 것도 감사입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요, 감사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