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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종(尹紹宗)은 자가 헌숙(憲叔)이고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한 윤택(尹澤)의 손자다. 공민왕 때 장원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뽑혀 보임하였고 거듭 〈자리를〉 옮겨 정언(正言)이 되었다. 시사(時事)를 아뢰는 상소의 초를 잡아 이르기를, “황천(皇天)이 백성들을 생기게 하였으나 각자 있을 바를 얻지 못하였기에 반드시 성인(聖人)을 임금으로 삼아 〈하늘을〉 대신하여 다스리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왕위를 천위(天位)라고 말하고 민(民)을 천민(天民)이라고 하였으며, 관료를 두고 직책을 부여하는 것은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의 제도에는, 중서성(中書省)에 영(令)·시중(侍中)·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叅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의 다섯 관직이 있으니 이는 하늘의 5개의 별을 본뜬 것이고, 추밀원(樞密院)은 하늘의 북두성(北斗星)에 해당합니다. 백관(百官)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은 바가 없으니 비록 낭관(郞官)같은 미미한 것이라도 역시 모두 늘어선 별자리에 대응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기(名器)와 관작(官爵)은 임금 자신이 가진 바가 아니라 바로 하늘의 소유로서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은 명기를 자신의 사유로 여겨 망녕되게 줄 수 없으며, 신하도 자신의 재주와 덕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로부터 제왕은 천하의 민들을 네 등급으로 나누었으니 사(士)·농(農)·공(工)·상(商)이라고 합니다. 농·공·상은 각자 그 일을 대대로 이어받아 윗사람에 이바지하였으나, 사(士)만은 일을 하지 않고 학문의 길로 들어가 책을 읽고 자신을 수양하며 집안을 바르게 하고 임금을 섬기며 민을 다스리는 도를 모두 배운 뒤에 관(官)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반드시 직책을 다하게 되며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정치를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자(仲尼)가 이르기를, ‘명기(名器)는 임금이 맡은 바이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치가 잘못되면 나라도 따라 망하는 것이니, 대개 명기가 가벼워진다면 조정이 엄격하지 못하게 되고 왕실이 낮아지며, 왕실이 낮아지면 소인들이 〈왕실을〉 능멸하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민의 뜻이 안정되지 못하며 아래 위가 분별되지 않고 사직이 위태로워지게 됩니다. 우리 조종들께서는 능력이 없으면 관직에 있지 못하게 하였고 현명하지 않으면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죄가 있으면 반드시 죽이고 공이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어리석고 현명치 못한 자들은 관직에 있을 수 없었고 모든 관리들이 바르게 되었습니다.
경릉(慶陵)〈충렬왕〉이 〈원(元)에〉 입조하였을 때 중관(中官) 이대순(李大順)은 〈원〉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자기 형에게 별장(別將)을 제수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경릉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형은 오위(伍尉)이니 산원(散員)을 뛰어넘어 별장으로 제수하는 것은 조종의 법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대순이 세조에게 말하기를, ‘바라건대 우리 왕을 깨우쳐 주십시오.’라고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관직을 주는 일에는 법이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임금이 있으니 짐이 어찌 그 일에 관여하겠는가? 네가 스스로 청탁하라.’라고 하였으니 우리 조종이 명기를 중시하여 예전에도 그러한 예가 없었습니다. 신축년(공민왕 10년, 1361)과 계묘년(공민왕 12년, 1363) 이래 나라의 재정이 부족하자 관작(官爵)을 공에 대한 포상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인들이 함부로 군공(軍功)을 세웠다고 거짓말하고 뇌물로 연줄로 만들어 순서를 넘어 벼슬을 받았습니다. 그 근원이 한번 열리게 되자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장사꾼과 공장(工匠)이나 심지어 공·사노비까지도 모두 관직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양머리에 개꼬리 격으로[羊頭狗肉] 안팎에 포진하여 명기를 우습게 알고 정치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조정의 관작을 흙이나 먼지처럼 보고 모두들 구부려서 주우려고 하니 심지어 ‘중랑장(中郞將)은 소똥을 쓸고 봉익대부(奉翊大夫)는 값이 베 한 필이다.’라는 속담까지 나왔는데, 이는 명기가 크게 천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비록 오위로서 산원에 오르고 산원으로 중랑장이 되어도 역시 기뻐하지 않습니다. 평상시도 이와 같은데, 만약 위급한 난리라도 나면 전하께서는 무엇으로 다시 상을 주어 전공 세울 것을 권장하시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군공이나 재주와 덕망이 없으면 비록 가까이 두고 아끼는 사람들이라도 함부로 벼슬을 주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공장이나 장사꾼들로 하여금 각자 생업에만 종사하게 하고 천인들이 조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한다면, 민의 뜻이 안정되고 아래 위가 구분되어 조정의 위엄이 설 것이며, 왕실도 존엄해 질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말에 이르기를,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들을 멀리한 것이 전한(前漢)이 흥륭했던 이유이다. 소인들을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들을 멀리한 것이 후한(後漢)이 기울고 패퇴한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치란과 흥망의 구분은 임금이 가까이하고 믿는 것의 득실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천하가 위태롭고 어지러우며 나라에 재앙이 잦은 때를 만나 구중궁궐에 깊이 은거하면서 때로 한 달 씩이나 정무를 보지 않고 완악한 아이들이나 뭇 소인들을 가까이하면서 재상이나 덕망 있는 원로들은 드물게 만나고 계십니다. 저 완악한 아이들과 소인들은 오로지 전하의 뜻이나 맞추어 안색을 따르려 할 뿐이며, 하는 짓거리는 사냥질, 먹는 것과 남녀 간의 교합뿐입니다. 전하께서 그들이 어울리고 잘 따르는 것을 즐겨 날마다 그들을 가까이하시니 어찌 성대한 덕에 커다란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궁궐은 엄숙하여 잡스러운 부류들이 살며시 엿볼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지금 소인들이 출입하기를 마음대로 하니 궁궐에 위엄이 서지 않게 되었으니, 궁궐이 위엄이 서지 못하는데 주상께서 어찌 홀로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대언(代言) 김흥경(金興慶)은 불학무식하여 그저 네네 거리기나 할 뿐, 나라를 위해 선악을 따져 〈임금을〉 올바르게 바뀌도록 할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입니다. 전하께서 그의 민첩한 대접과 아첨을 좋아한 나머지 교명(敎命) 출납과 사대부의 진퇴를 맡기시니 온 나라의 일이 모두 김흥경에게 먼저 보고된 다음에 전하의 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한쪽의 말만 들으면 간사한 자가 생겨나고, 한 사람에게만 일을 맡기면 화란이 만들어지니 어찌 미래에 이사(李斯)나 조고(趙高)의 재앙이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살펴보건대 3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근년에 역적 신돈(辛旽)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7월에 일식이 있어났습니다. 7월은 3음(陰)의 달인데, 이때 신돈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 역모를 꾸몄습니다. 올해 3월은 5양(陽)의 달로서 양이 매우 융성하지만 1음(陰)이 혼자 있어 대양(大陽)을 이길 수 있으니 이것은 작은 변고가 아닙니다. 신하 중에 반드시 전하의 〈눈과 귀를〉 가리고 현혹시키는 자가 있어, 군자의 도가 사라지고 소인의 도가 커지려 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천변(天變)을 두려워하시어 김흥경의 권력을 빼앗아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시고 궁중에 있는 군소배들은 내쫓으십시오. 구중궁궐에만 틀어박혀있지 마시고 늦게 일어나지 마시며, 한 신하에게만 단독으로 정사를 맡기지 마십시오. 날마다 재상과 덕 있는 원로 및 충직한 선비를 만나 조종의 어진 정치를 힘써 행하면 사직의 복이 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하늘의 민을 잘 기르는 사람은 흥하고 민을 해치는 사람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이니, 반드시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순응하여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듯이 민을 잘 기른 다음에야 민심(民心)이 따르고 천명이 굳어지는 법입니다. 태조께서는 태봉(泰封)이 사치와 잔학을 일삼자 하늘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한 후 흉악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민을 사랑하고 길렀습니다. 의복은 겨우 추위와 더위를 막았고 궁실은 비바람만 막을 정도였습니다. 깊은 어지심과 두터운 은택으로 근본을 기르니, 모든 임금이 서로 이어받아 검소함과 덕을 다하여 민을 기르는 일을 마음으로 삼았습니다. 경령전(景靈殿)·효사관(孝思觀)과 현릉(顯陵)·의릉(毅陵)의 두 능은 그 제도가 검소하여 조금도 사치스럽거나 화려하게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자손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지 현재 23년인데 마침 재앙을 만나는 때에 나라의 가는 길이 많이 어렵습니다. 역적 신돈이 권력을 잡자 다른 마음을 품고 전하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미혹시켜 나라의 맥을 훼손시키더니, 결국 전하께 인희전(仁熙殿)의 부역을 일으키게 하여 백성의 골수를 뽑고 백성의 기름을 짜내게 하였습니다. 목재를 운반하고 쇠를 두드려 공급하는 비용이 날마다 만금(萬金)에 달하며, 일을 맡은 관리들은 사나운 호랑이보다 포악하고, 재촉하는 명령은 몰아치는 비바람보다 빨랐습니다. 온 나라의 민이 역역(力役)에 피곤하여 삼농(三農)이 때를 잃고 노약자들은 부양을 받지 못하니 부모와 처자가 서로를 보호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창고에는 반 달치의 저축도 없고 백성들은 열흘치의 양식도 없었습니다. 5도와 양계(兩界)에서 여러 해 동안 저축한 군수(軍需)는 모두 공급하여도 역시 부족하게 되자 삼한(三韓)이 떠들썩해지고 모든 원망이 역적 신돈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 6년 사이에 홍수와 큰 가뭄이 있어 백 만의 생령(生靈)들은 끓는 물속에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신돈의 위세가 두려워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머리를 떨구고 손을 모은 채 천지에 호소하여 이르기를, ‘이 역(役)은 모두 역적 신돈과 중관(中官) 김광대(金廣大)의 아첨에 따라 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에도 역(役)이 끝나지 않자 민은 다시 이를 원망하길, ‘이 역은 신돈이 비록 수창하였지만 실은 김광대가 부귀를 확고히 하려고 힘써서 찬성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한의 민이 김광대를 원망하는 것은 역적 신돈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국가가 경인년(충정왕 2, 1350) 이래 동쪽의 왜구를 막고 병신년(공민왕 5, 1356) 이후에는 북쪽의 달단(韃靼)을 막았습니다. 기해년(공민왕 8, 1359)·신축년(공민왕 10, 1361)의 전쟁으로 우리 민으로 사망한 사람이 절반이나 되며, 3년이 못되어 다시 계묘년(공민왕 12, 1363)의 난리에는 죽은 사람이 신축년의 배나 되었습니다. 기해년부터 지금까지 15년 사이에 수재와 가뭄이 계속 이어져 아사자들이 계속 되어 민 가운데 남은 사람들은 겨우 열에 하나였습니다. 전라·경상도의 두 도에서는 해마다 큰 기근이 이어졌고 금년에는 더욱 심하였습니다. 3월도 큰 추위가 계속되고 4월에는 비가 오지 않아 보리가 영글지 않았고 볍씨를 심지도 못했으니 우리 민이 장차 무엇으로 살아가겠습니까? 민은 임금의 하늘이며 먹는 것은 민의 하늘인데, 민이 먹을 것이 없으면 죽게 되고 임금에게 민이 없으면 무엇으로 혼자서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지금 경중의 창고가 완전히 비고 양계와 5도가 또한 기근을 겪고 있으니 불행히 신축년과 계묘년의 변란이 생기면 무엇으로 군량을 대비하겠습니까? 백성이 토목공사와 부렴(賦斂)으로 괴로워 그 원한이 하늘을 찌르니 빨리 풀어주지 못하면 비록 급박한 어려움이 있어도 누가 다시 전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아! 경령전(景靈殿)은 태조 황고(皇考)의 별묘(別廟)이고, 효사관(孝思觀)은 태조의 진영이 있는 곳이며, 현릉(顯陵)과 의릉(毅陵)은 태조와 그 황고의 묘입니다. 그러나 그 제도는 인희전(仁熙殿)과 정릉(正陵)과 비교하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 동방은 천하에서 예의의 나라로 부르는데 자손의 후비 능전(陵殿)이 도리어 조종(祖宗)보다 지나치니 천하 후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 후비 때문에 천하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려 하십니까? 또한 흉사를 대비하는 것은 예가 아닌데도 김광대(金廣大)는 그 일을 일으켜 총애를 굳히려고 거짓으로 전하를 속여 미리 석실(石室)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분하여 탄식하면서 크게 상서롭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재앙과 이변이 거듭 닥쳐 백성이 굶주리고 있는데, 또한 임금이 좋아하는 꽃나무 구경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김광대가 화원(花園)을 만들어 전하의 덕을 훼손하고 민심을 이산시키니 그 죄는 진실로 목을 베어야 합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김광대의 죄를 바로 잡으시어 도시(都市)에서 참수하신 후 능전과 석실의 역을 중지하시고 화원을 부수어 하늘의 분노를 풀고 민의 원한을 그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기 전에 헌납(獻納) 김윤승(金允升)이 이를 알고 사의(司議) 우현보(禹玄寶)와 함께, 윤소종이 여러 달 동안 휴가를 내고 직책을 비웠다는 것을 핑계로 탄핵하니 파직되었다.
우왕 초에 전교시승(典校寺丞)을 제수 받았고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가 전의부령(典儀副令)·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로 바뀌었다. 윤소종(尹紹宗)이 산업을 돌보지 않아 집이 매우 가난하였는데 지신사(知申事) 이존성(李存性)이 우왕에게 보고하여 쌀 10석을 내려주고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옮기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李成桂〉가 회군하였을 때 윤소종이 군영으로 찾아가 정지(鄭地)를 통해 만날 것을 요청한 후 「곽광전(霍光傳)」을 품고 가 바치니, 그 뜻은 왕씨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창왕이 왕이 된 후 〈윤소종(尹紹宗)은〉 전교령(典校令)으로 승진하여 동료들과 함께 아뢰기를, “우리 조정의 옛 제도에, 원구(圓丘)·종묘(宗廟)·사직(社稷)·산릉(山陵)·진전(眞殿)·신사(神祠)의 제향 시에 쓰는 축문(祝文)과 도전(道殿)·불우(佛宇)에서 쓰는 사소(詞疏)는 본시(本寺)의 관원 한 사람이 매달 번갈아 근무하면서 목욕재계하고 써서 올립니다. 임금도 목욕재계한 후 직접 수결하고, 천지(天地)·종사(宗社)는 반드시 직접 제사하며 불우·도전·신사에는 간혹 대신(大臣)을 시켜 대행하기도 합니다. 근래에는 기양(祈𧟄) 행사가 너무 많아 어떤 때는 정자(正字)나 소신(小臣)을 시켜 대신 수결하도록 했는데 한번 그렇게 되자 지금은 네 철의 큰 제사[四時大享]만 임금이 친히 수결하고 나머지는 모두 대신 수결하게 하여, 〈조상과 신령을〉 성의있게 공경하는 뜻과 크게 멀어졌습니다. 바라옵건대 조종의 옛 제도를 따라 축문(祝文)과 사소(詞疏)는 목욕재계한 후 친히 수결하시고, 원구·사직·종묘·적전(籍田)의 큰 제사는 반드시 모두 친히 제사지내도록 하십시오. 초하루와 보름의 제전(祭奠) 및 모든 기양은 대신을 뽑아 섭행하게 하시고 그 때도 정전(正殿)에 행차하여 친히 축문과 사소를 내리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창왕이 이를 따랐다. 다시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신등이 올린 몸소 제사를 지내시라는 건의를 윤허하셨습니다. 그러나 금번 종묘의 큰 제향을 지내면서 대신을 태위(太尉)로 삼았으니 이는 전하께서 친히 제사지내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말씀하길, ‘예문(禮文)이 준비되지 못하였고 제물(祭物)도 아직 갖추어지지 못하였는가?’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정말 뚜렷한 믿음이 있다면 개울이나 연못가의 풀이라도 신명(神明)께 올릴 수 있는 법입니다. 어찌 예문이 준비되지 못했고 제물이 준비되지 못했다는 것으로 그 성의마저 버릴 수 있겠습니까? 또 ‘국사(國事)를 임시로 맡아 어찌 감히 제사를 주관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실 수 있지만, 순(舜) 임금이 선양을 받고 우(禹) 임금이 천명을 받은 것은 모두 섭정한 것인데도 백관들을 거느리고 직접 문조(文祖)와 신종(神宗)의 묘(廟)에 갔습니다. 순과 우 임금은 천하의 큰 성인이니 후대의 제왕(帝王)들이 당연히 본받아야 하는데도 전하께서는 이를 본받지 않으시니 신 등은 전하를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지금 전하께서 친히 제사를 지내지 않으시면 세 가지 옳지 못한 일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는 것이니 이 일은 성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질병이나 큰 사고 없이 구중궁궐에 편안히 있으면서 신하에게 섭행하게 하였으니 곧 이는 경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 친히 제사지내겠다고 허락하고 양부(兩府)에 명해 백성에게 널리 알리게 했지만 얼마 안 되어 섭행하라고 명령한 것’은 나라 사람들에게 불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실[誠], 공경[敬]과 믿음[信]의 세 가지는 임금이 간직해야할 큰 보배입니다. 이 세 가지 덕목을 버린 자가 자신의 나라를 지킨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예(禮)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4일 동안 산재(散齋)하고 3일간 치재(致齋)해야 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단정하게 공수하여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올바른 도를 듣고 바른 사람을 가까이 하시면 산재를 〈지냈음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오늘부터는 치재에 정성을 쏟으시어 태묘(大廟)에 가셔서 몸소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하고 즉위하신 것을 고해 효성을 펴소서.”라고 하였다. 창왕이 〈이 건의를〉 도당(都堂)에 내려 의논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윤소종(尹紹宗)은〉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어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극론하였다. 또한 동료인 허응(許應)·민개(閔開) 등과 함께 다시 상소하여 이인임을 논죄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위로 올리지 못하였다. 때마침 등창이 나서 휴가를 청하자 허응 등이 상소를 묵혀 두었는데 윤소종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긴 후 서연(書筵)에 가서 앞서의 상소를 올리니 이인임의 족당들이 이를 미워하여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 내용은 이인임전(李仁任傳)에 있다. 윤소종이 서연에서 상서하길, “『주역(周易)』에서는 ‘무지몽매한 자를 바른 도로 함양하는 것이 성인의 공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천명(天命)이 부여한 성(性)은 원래 선할 뿐 악이 없는 것으로, 사람은 애초 요·순(堯舜)같은 성인과 작은 차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성왕(聖王)은 태교(胎敎)를 받고 강보(襁褓)에 싸여 있을 때 보육하는 사람이 있어 그 몸을 보양하여 모든 행동이 마땅하게 되고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또 스승이 있어 덕의(德義)를 가르쳐서 기호(嗜好)의 지나침을 절제하게 되고 견문의 잘못됨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단아한 선비를 특별히 뽑아 출입과 기거를 같이하여, 보는 것은 반드시 바른 일이었으며 듣는 것은 반드시 바른 말이었습니다. 외물(外物)의 유혹이 저절로 들어갈 수 없고 천성의 참됨이 제대로 길러질 수 있었습니다. 작은 한 순간이라도 가르침은 받아들이는 기반이 깨끗하여 막힌 데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요·순처럼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보면, 전하께서 『논어(論語)』를 배운지 지금 13개월이 되었지만 매일 새로 알게 되는 것이 많아도 서너 글자일 뿐입니다. 아직은 간혹 읽기가 어려울 것이지만 전하가 지니신 밝고 총명한 자질은 하늘로부터 타고 나셨으니,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잠시 서연에 행차하셨다가 곧바로 내전으로 들어가 친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바깥일에만 마음이 팔려 책에 〈마음을〉 두지 않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공부에 게으른 양상이 밖으로 드러나기까지 합니다. 사부(師傅)가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고 훈과 음이 제대로 통하지 못했는데도 책 읽는 도중에 벌떡 일어나버립니다. 또한 갑자기 식사할 때를 놓쳤다는 핑계를 대면서 안으로 들어가시니 성학(聖學)이 어디에서 말미암아 나아갈 것이며 성덕(聖德)이 어디로부터 말미암아 밝아질 수 있겠습니까?
상왕(上王)의 즉위 초기에는 총명(聰明)이 배움으로만 향하였지만 간신이 나라를 훔칠 계책을 꾸미면서 바로 경연을 없애고 우리 상왕을 잘못 인도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전복될 뻔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대신들이 전조(前朝) 일을 경계로 삼아 먼저 경연을 열어 성학을 권하여 전하께서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되실 것을 바랐습니다. 만약 배움을 게을리 하신다면 종묘(宗廟)는 어찌되며 생령(生靈)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올해 맹추(孟秋)초하루에 태풍이 불어 곡식을 상하여 국가와 백성의 생명을 해치게 되었으니 하늘의 꾸지람으로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서경(書經)』「홍범(洪範)」편에서 이르기를 ‘〈임금이〉 성스러우면 때맞추어 바람이 불 것이고, 〈임금이〉 우둔하면 끝없이 바람이 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전하께서 학문을 게을리 하는 단서가 보이자 구징(咎徵)의 바람으로 여기에 응하게 한 것입니다. 하늘이 우둔하다고 전하를 경계함이 어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옛적에는 8살에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10살에는 바깥의 스승을 찾아가 거기서 살았습니다. 옛날 노(魯) 양공(襄公)은 나이 겨우 6살에 나가서 천하 제후들의 회맹(會盟)에 참석까지 했으니 어찌 식사를 꼭 깊은 궁궐 안에서만 했겠습니까? 옛적에 정자(程子)가 강관(講官)이 되자 상언하기를, ‘임금이 하루 동안에 환관과 궁첩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적고 어진 선비와 대부를 만나는 시간이 많으면 자연히 기질이 바뀌어 덕의 바탕이 이루어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매일 아침 모후께 문안을 올린 뒤에 편전(便殿)으로 나와 식사를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 강관(講官)과 관각(館閣)의 학사(學士)들에게 명령하여 항상 좌우에서 모시게 하고 조용히 말을 나누고 도리를 설명하도록 하여 오후나 한밤중까지 이르도록 하십시오. 천명(天命)의 거취, 인심의 향배, 농사의 어려움, 정벌과 수자리의 노고, 치란의 근원, 흥망의 자취, 고금의 예악, 인물의 현부(賢否) 등을 매일 앞에서 진술하게 하면 전하의 들으심이 오래 되어 자연스럽게 〈모든 일에〉 통달하고 그것이 습성이 되어 요·순과 같은 덕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항상 깊은 궁중에 거주하여 부녀자나 환관의 사악함에 물들어 성스러운 〈천성이〉 무지몽매하게 되는 것에 비교한다면 그 이익됨이 어찌 매우 크지 않겠습니까? 총애받는 근신들의 습속이 오만방자한 것은, 참으로 성덕(聖德)을 해치는 쓸데없는 풀과 같으며 현명한 선비와 대부의 훈도(薰陶)는 성덕을 기르는 비나 이슬과도 같습니다. 궁인(宮人)과 내신(內臣)도 역시 정자(程子)가 경연에서 올렸던 건의를 써서 모두 나이 마흔 내지 쉰 이상 되는 중후한 사람을 뽑아 좌우에 두시고 나이가 적은 자는 좌우에 두도록 하지 못하게 하여 임금을 사악하고 사사로운 곳으로 이끄는 것의 근원을 끊도록 하십시오. 입으실 어의와 쓰실 기물은 주(紂)임금의 상저(象箸)와 옥배(玉盃)를 경계로 삼고, 우(禹)임금의 좋지 않은 의복을 본받도록 하십시오. 사치스럽고 화려한 물건은 전하 앞에 들이지 말게 하시고 천박하고 속된 말은 듣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지금의 영서연(領書筵)과 지서연(知書筵)은 옛날의 태사(太師)와 태부(太傅)이며, 시독(侍讀)은 옛날의 소사(小師)와 소부(小傅)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정전(正殿)에서 독서교육을 받으실 때 지서연이 들어오면 반드시 일어서서 자리를 비껴나 강의를 듣고 그가 물러갈 때도 일어나셔야 합니다. 시독이 들어오고 물러갈 때도 역시 자리에서 피하여 얼굴빛을 고쳐 사부를 존중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이른바 탕(湯) 임금이 이윤(伊尹)에게 있어서 반드시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쓰지 않고도 왕의 역할을 한 것이며, 제(齊)의 환공(桓公)도 관중(管仲))으로부터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쉽사리 패자(覇者)가 된 것입니다. 성덕을 길러 완성하는 일에 있어 이보다 급한 것은 없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태조 이래 5백 년 이어온 왕업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삼한(三韓) 억조창생(億兆蒼生)의 바람을 염두에 두시어 미미한 신하의 간절한 말에 죄를 주지 마시고 살펴 받아들이시어 수양하고 반성함으로써 천년만년의 태평성대를 여십시오.”라고 하였다. 시독 정도전(鄭道傳)이 이 글을 보고 말하기를, “논의가 간절하고 지극하여 임금께 올리는 말로서의 매우 적합하다.”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윤소종(尹紹宗)은〉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의 천거로 좌상시 경연강독관(左常侍 經筵講讀官)이 되었다. 조준이 일찍이 윤소종을 따라 공부하였기에 옛정이 있어서 상소문이 있으면 윤소종이 모두 원고를 작성하였다. 애초 윤소종이 이숭인(李崇仁)의 재주가 높은 것을 질시하였고, 또한 이색(李穡)이 이숭인만 칭찬하고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영흥군(永興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윤소종이 이숭인을 조준에게 참소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윤소종이 동료들과 함께 변안열(邊安烈)을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6번이나 올려 이를 따르게 하였다. 왕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보고자 하여 정몽주(鄭夢周)를 시켜 강의하게 하자, 윤소종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중흥하시는 데에 마땅히 2제(帝)와 3왕(王)을 본받아야 하지, 당(唐) 태종(太宗)은 취할 만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하게 함으로써 제왕의 정치를 선포하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옳게 여겼다. 처음에 우왕을 강릉(江陵)으로 옮길 때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유만수(柳曼殊),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우홍수(禹洪壽),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유광우(兪光祐) 등이 호송했다. 또 창왕을 폐위하는 날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최원지(崔元沚)와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용생(柳龍生)은 궁궐 문을 지키고,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정희계(鄭熙啓), 자혜부윤(慈惠府尹) 이방과(李芳果), 밀직부사 김인찬(金仁贊),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 등은 국보(國寶)의 전달을 맡고, 밀직사(密直使) 강회백(姜淮伯)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은 창고를 봉하였기에, 왕이 그 공을 따져 윤호 등에게 공신호를 내려주었다. 이에 윤소종이 말하기를, “상벌은 나라의 큰 권한이니 남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정벌에 나선지 40년 동안 공신으로 일컬어진 사람은 6명뿐이었고, 김락(金樂)과 김철(金哲)은 태조를 대신해 죽었지만 일찍이 6공신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미 화령백(和寧伯) 등 9명을 종묘에 고하고 상을 주었습니다. 윤호 등의 공은 사람들이 들어본 바가 없으니 이를 삭제하기 바랍니다.”라고 건의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상소하여 간쟁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왕이 이조총랑(吏曹摠郞) 이황(李滉)을 보내 조계종(曹溪宗) 승려 찬영(粲英)을 맞이하여 왕사로 삼자 윤소종(尹紹宗)이 겸대사헌(兼大司憲)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대궐문에 엎드려 간쟁하였다. 성석린이 말하기를, “불교는 청정(淸淨)과 적멸(寂滅)을 종지로 삼아 국가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옛적 성탕(成湯)은 이윤(伊尹)을 스승으로 삼고 문왕(文王)은 태공(太公)을 스승으로 삼아 상(商)·주(周)를 태평의 정치로 이끌게 하였지만, 부처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윤소종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스승을 구하려 하신다면 원로대신들이 있는데 어찌하여 승려를 〈스승으로〉 쓰려 하십니까?”라고 하였고, 물러나 글을 번갈아 올려 말하기를, “강상(綱常)은 천하 국가의 큰 근본으로 요 ·순과 3대가 장구한 시간 나라가 지속되면서 훌륭한 정치를 이룩했던 것은 이 도를 썼기 때문입니다. 한(漢) 명제(明帝)가 불교를 숭상한 이래 국가에 난리와 멸망이 계속 이어졌고 양(梁)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너무 깊이 불교에 현혹되어 종묘에 국수[麵]를 희생(犧牲)으로 삼고 비단에 조수(鳥獸)의 모습을 짜 넣는 것도 금지하였다가 마침내 후경(侯景)의 난까지 이르러 대성(臺城)에서 굶어죽었습니다. 당(唐) 헌종(憲宗)은 부처의 뼈를 궁궐로 맞이하니, 형부시랑(刑部侍郞) 한유(韓愈)가 극단적 말로 간하기를,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래 이를 더욱 근실하게 섬길수록 통치연대가 더욱 짧아진다.’라고 하였지만, 헌종이 듣지 않다가 얼마 뒤에 갑자기 죽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는 깊이 그 적폐를 고치기 위해 후대의 왕과 신하들이 사사로이 사찰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당시 태사(太師) 최응(崔凝)이 불교의 폐지를 건의하자 태조께서는, ‘신라 말엽에 불교의 교리가 사람들의 골수까지 들어와 사람들마다 생사와 화복을 모두 부처가 주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 지금 삼한이 겨우 하나가 되어 아직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교를 제거한다면 반드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훈요(訓要)를 만들어서 이르기를, ‘마땅히 신라가 불사를 많이 일으켜 멸망에 이르렀음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성조(聖祖)께서는 허황된 일의 근원을 뽑아냄으로써 후대 왕들이 〈그 뜻을〉 계술(繼述)할 것을 매우 간절하게 바랐던 것입니다.
신 등이 듣건대 전하께서는 조계종 승려 찬영을 궁궐로 맞이하여 왕사(王師)로 받들려 하시니 신 등은 전하를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삼대의 제왕들은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며 음양을 섭리하는 자를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탕왕은 이윤을 스승으로 삼아 하(夏)를 정벌하여 민(民)을 구하였고 6백 년 동안 제사를 한 상(商)을 개국하였습니다. 무왕(武王)은 태공(太公)을 스승으로 삼아 힘을 올려 주(紂)왕을 토벌하여 8백 년의 주(周)를 열었습니다. 요진(姚秦)은 호승(胡僧) 구마라습(鳩摩羅什)을 스승으로 삼았지만 얼마 못가 망하였습니다. 앞의 원(元)은 번승(蕃僧) 바라발제(婆羅跋蹄)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말엽에는 천자의 존귀함으로도 종처럼 지공(指空)을 떠받들며 복과 장수를 바랐지만 마침내 응창(應昌)에서 패망에 도달하였습니다. 불교의 교리에는 부친도 없고 임금도 없습니다. 요진과 원은 오호북적(五胡北狄)의 풍속으로 제왕의 통치를 본받지 않고 강상(綱常)을 훼손하였기에 하늘로부터 벌을 받아 빠르게 망해버렸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나라를〉 중흥하여 법을 만들고 모범을 보여 성스럽고 신성한 자손이 되어 억만세 동안 지키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 또다시 오랑캐들의 잘못을 답습하고 오랑캐의 교리를 스승으로 삼으려 하십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정사를 세울 때 명분을 따라 그 실제를 책임지게 해야 합니다. 이른바 스승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도를 본받기 위함입니다. 불교는 신하와 자식에게 임금과 어버이를 배반하게 하고 산림으로 도망가서 적멸(寂滅)을 즐거움으로 삼도록 합니다. 만약 그 법을 본받으시려면 삼한(三韓)의 민(民)들의 〈머리를〉 깎아 9묘(廟)의 제사를 아예 단절시킨 후에야 그 명분에 맞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임금과 어버이를 무시하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마시고 요·순과 공맹(孔孟)의 도를 존중하여 삼한 태평의 왕업을 열도록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왕이 억지로 이를 따랐다. 찬영이 숭인문(崇仁門)까지 왔지만 대성(臺省)에서 리(吏)를 보내어 쫓아버리자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왕이 대성(臺省)에서 면대하여 건의하는 법을 없애자 윤소종(尹紹宗)은 동료들과 함께 상소하여 이르길, “요·순(堯舜)은 사악(四岳)의 〈제후에게〉 자문하고 사방의 문을 열어 두었으며, 4목(目)을 밝히고 4총(聰)에 달하여 좋은 의견들이 숨김없이 제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아랫사람의 사정과 뜻이 혹시 막혀 전달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긋나거든 너희들이 바로잡아 겉으로 복종하는 체 하다가 물러나 뒷말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또한, ‘너희들도 역시 왕성하게 말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삼대의 성왕(聖王)들은 모두 이 방식을 따라 심지어 나무꾼에게까지 자문하였고 온갖 공장(工匠)들도 기술에 관한 일을 가지고 간언을 올렸습니다. 또 비방(誹謗)의 말을 적는 나무가 있었고 좋은 일을 올리는 깃발도 있었습니다. 보통사람들[匹夫匹婦]의 말이 모두 위에 전달되니 아래 위가 섞이어 태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周)가 쇠퇴하게 되자 비방하는 사람은 감시자를 두어 이를 금지시키도록 하여 마침내 문왕과 무왕이 이룩했던 천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진(秦)은 충직한 간언을 요언(妖言)으로 삼아 금지시켰으므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생겼으며, 직언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천하를 얻고도 2세에 망하였습니다. 한(漢)부터 원(元)에 이르기까지 언로가 열렸으면 잘 통치되고 안정되었으며, 언로가 닫힌 나라는 어지럽다가 망해버렸습니다. 다른 성씨가 나라를 훔친 이후 대간(臺諫)이 입을 닫았고, 무진년(우왕 14, 1388) 요동(遼東)정벌에 이르러서도 한 사람도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전하께서 친히 보셨던 바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5일에 한 번씩 조회를 보시고 대간을 시켜 시정(時政)의 옳고 그름을 직접 아뢰게 하시니 삼한(三韓)이 기뻐 춤추며 태평성대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간에게 명령하여 직접 아뢰는 일을 금지하시니 어찌 이것이 중흥의 대업에 있어 큰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마디로 나라를 잃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대간에게 직접 아뢰도록 명령하시고 그 나머지의 일은 각 관아에서 역시 그 직책에 따라 건의를 올리도록 하여 총명을 넓히시고 올바른 통치를 이루십시오.”라고 하였다.
〈윤소종(尹紹宗)이〉 다시 상소하여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임금의 눈과 귀이므로 잠시라도 〈임금의〉 좌우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근래 신우 부자 사건은 국체에 관계되므로 전하께서 대간에게 명령하여 가서 그 정황을 점검하게 했는데, 이는 종묘사직을 중요시한데서 나온 임시 조치였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대간을 지방으로 나누어 파견하여 전하의 눈과 귀로서의 임무를 어긋나게 하였으니 이는 중흥을 하는 아름다운 법이 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대성(臺省)을 밖으로 내보내지 말고, 다만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고 어려움을 요구하는 임무를 맡기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그 건의를 따랐다. 왕이 장단현(長湍縣)으로 행차하려고 하자 윤소종이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상소하여 이르길, “전(傳)에 말하기를 ‘임금의 거둥은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 한다. 기록해서 본받지 않는다면 후대의 계승자는 무엇을 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장단으로 행차하여 전함(戰艦)을 사열한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평안할 때 위기를 잊지 않는다는 뜻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성씨가 나라를 훔친 이후 놀이와 사냥질로 생령(生靈)에게 해독과 고통을 주어 원망의 소리가 상국(上國)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이제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옛 제도를 일으켜 회복하였으니 마땅히 사냥을 경계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즉위하신 초기에 덕정을 닦지 않으시고 다시 가짜 조정[僞朝]의 전철을 따르려 하십니까? 농사철이 바야흐로 시작하는데 국왕의 행렬은 수많은 말과 수레가 함께 가니 도로에서 접대를 위한 비용을 대느라 그 폐단이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완급을 말씀드리면, 하늘 제사[郊天]와 왕릉 참배 및 친경(親耕)과 문묘(文廟) 참배가 먼저 우선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번 거둥을 일단 중지하여서 국인(國人)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소종(尹紹宗) 등이〉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가만히 조종의 제도를 살펴보건대, 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토지를 주지 않아 선비로서의 행동을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다른 성씨가 나라를 훔친 뒤로는 간흉들이 뜻을 얻어 관직을 팔아먹고 옥사로 돈을 받아 조종의 법을 모두 훼손시켰습니다. 사대부들은 토지와 노비에 대한 문서를 스스로 만들어 간흉들에게 뇌물로 주고 관직을 받아 예의와 염치의 풍속을 무너뜨렸습니다. 전하께서 중흥하시면서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규전(圭田)을 지급하여 벼슬하는 사람들을 우대하니 그 뜻이 정말로 훌륭합니다. 반정(反正)의 초기에는 마땅히 절의를 숭상하고 탐욕과 사악함을 경계하시어 선비의 습속을 일신해야 합니다. 바라옵건대 변정도감(辨正都監)에 명령을 내리시어 사람들이 뇌물로 준 토지와 전민(田民) 및 팔아먹은 고신(告身)을 회수하여 풍속을 권장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상소를 보류해 둔 채 내려 주지 않았다. 윤소종을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승진시키고 나머지 대간들도 역시 다른 관직으로 승진시켰는데 이는 그들이 탄핵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소종이 일찍이 상호군(上護軍) 송문중(宋文中)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시중(李侍中)이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치지 못하니, 만일 하루아침에 소인의 흉계에 빠져버린다면 뉘우친들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심덕부(沈德符) 등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노하여 윤소종에게 죄를 주려 하였다. 우리 태조 〈李成桂〉가 청하여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 가운데 직언하는 자는 윤소종 뿐이니 죄를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언(代言) 이사위(李士渭)도 또한 말하기를, “윤소종이 여러 번 글을 올렸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그에게 죄를 주면 바깥의 논의가 반드시 전하께서 직언하는 신하를 싫어한다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윤소종을 높은 관직에 임명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시중의 공은 사직에 있는 것인데 윤소종 등이 감히 그를 욕하니 어찌 죄를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드디어 금주(錦州)로 쫓아 보냈다. 처음에 윤소종이 동서되는 최을의(崔乙義)와 노비를 두고 다투다가 결론이 나지 않자 우왕의 총애하던 신하 반복해(潘福海)에게 청탁하여 〈노비를 자기 것으로〉 얻어내었다. 상시(常侍)가 되어서는 논박하는 것을 즐기어 왕이 그를 매우 싫어하며 늘 반복해에게 청탁했던 일을 거론하여 헐뜯었는데, 이때에 결국 유배를 보내버렸다. 뒤에 회군(回軍)한 공을 기록하여 토지를 내려주고 그 죄를 용서하였다. 간관이 정몽주의 사주를 받아 상소를 올려 논박하자 관직을 박탈하고 멀리 유배되었다가 정몽주가 죽은 후 용서를 받았다. 본조에 들어와서 병조전서 수문전학사 동지춘추관사(兵曹典書 修文殿學士 同知春秋館事)을 제수 받았다가 죽었다. 아들은 윤회(尹淮)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