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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
―속 「치몽稚夢」
손 창 섭
1
아침이 되었다.
소년들은 어젯밤 일을 생각하였다. ‘맨대가리’는 마침내 소년들의 둘도 없는 누나요, 친구요, 애인이기도 한 을미를 독점해버렸고, 을미는 또한 너무나 간단히 소년들의 꿈을 배반하고 맨대가리의 품속에 아름다운 몸과 마음을 묻어버렸다. 소년들은 한결같이 을미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울분과 비애로 해서 잠을 설치며, 당장 내일로라도 이 집을 영 나가버리고 말리라고 몇 번이나 서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침이 되고 보니 그렇게 쉽사리' 실천에 옮겉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날이 새자 맨대가리가 먼저 일어나 돌아가고 나서, 한참이나 더 있다가야 을미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 앞을 세 소년이 막아서듯 버티고 섰다.
“을미 누나, 우리들은 오늘 안으루 이 집을 나가버리구 말 테야!”
대표격으로 상균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모두들 외면을 하거나 머리를 푹 수그리고 서 있는 것이다. 을미도 고개를 떨어뜨리고 낯을 붉혔다.
“어디든 갈 데라두 있니?”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소년들은 참말 갈 곳이 없었다. 허턱 나갈 궁리만 앞섰던 것이다. 소년들은 저희끼리 마주 보고 찔끔했다. 그래도 뱃심 좋은 상균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갈 데가 없어두 나갈 테야! 길거리에서 자두 좋아.”
을미는 길케 한숨을 쉬었다.
“느들 하룻밤 새에 내가 그렇게두 보기 싫어졌니.”
그러고 잽싸게 고개를 뒤로 드는 을미의 볼에 눈물이 수르르 흘러내렸다. 소년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또 서로 낯을 마주 보았다. 기수가 변명하듯 떠듬거 렸다.
“누나가 나쁜 게 아냐. 누난 보기 싫지 않어. 그 맨대가리 아저씨가 나뻐.”
그러더니 기수도 울먹울먹하며 도로 외면해버렸다.
“알겠어. 느들 마음두 알 수 있어. 허지만 박 선생두 술만 안 취하문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냐. 모두 내가 잘못이었어. 내가 어리석었나봐, 나는 느들을 너무 믿구 있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만 해두 느들이 없었으면 나두 어머닐 따라 죽구 말았을 거야. 그렇지만 느들이 있기 때문에 느들만 믿구, 느들에게서 위로를 받구 살아왔어. 난 한평생 느들 하구 헤지구 싶지 않았어. 그렇지만 느들이 한사코 나를 버리고 가겠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이 집을 나가버 리겠어. 느들은 당장 나갈 데가 없지만 나는 다방 숙직실에서 자두 그만이야. 느들이 보구 싶으면 내가 가끔 찾아오군 할게. 나를 잊지 말아줘. 나를 영 버 리구 떠나가지 말어줘. 응!”
을미는 마침내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어깨를 추며 울기 시작했다. 새삼스레 죽은 모친이 생각났고, 20년 가까이 소중히 간직해온 처녀성을 엊저녁 너무나 맹랑히 바쳐버린 박치룡이와의 관계도 서글펐고, 그로 말미암아 이 순진한 세 소년들과의 애틋한 관계에도 금이 가는 것 같았고, 직장을 중심으로 해서 세상과의 고달픈 접촉이며 여자로서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앞날 등을 헤아릴 때 걷잡을 수 없는 감상적인 비애가 을미를 엄습해왔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박치룡 씨가 옷을 주워 입더니,
“있다 저녁에 다방으로 나갈게.”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는 일 없이 훌쩍 뛰어나가버렸을 때, 을미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두 팔로 자기의 푸진 가슴을 꽉 끌어안고, 입술을 깨물며 참았던 것이다.
“누나, 난 안 나갈 테야 여기서 누나랑 언제까지나 같이 살 테야!”
을미가 어깨를 추며 느껴 우는 바람에, 먼저 다감한 기수가 그러고 나서 자기도 쭐쭐 처지는 눈물을 두 주먹으로 닦아냈다.
“나두 어른이 될 때까지 여기 있을 테야!”
“난 누나가 그렇게 슬퍼할 줄 모르구 그랬어.”
태갑이와 상균이도 그만 무안하고 민망해서 자기껏 위로와 변명의 말투였다.
“고맙다. 느들만 같이 있어 준다면 난 암만 슬픈 일이 있어두 참겠어.”
을미는 눈물을 씻으며 방으로 들어가서 화장을 고치고 돌아 나왔다. 세 소년을 둘러보며 쓸쓸하게 웃고,
“오늘 저녁은 내가 한턱 낼게 저녁 때 다방으루들 들러!”
그렇게 일려놓고 출근하는 을미의 뒷모양이 여느 때보다 풀기가 없어 보였다.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상균은 별안간 장난꾼처럼 웃더니,
“을미 누나 어젯밤에 맨대가리하구 육체 관계 했을 거야.”
했다. 그러자 기수가 대뜸 자기가 모욕을 당한 듯이 눈썹을 곤두세워가지고,
“임마, 그럴 테야? 너 정말 그럴 테야?”
하고 칠 듯이 대들었고 태갑이도,
“자아식 그런 소리 허문 못써.”
사뭇 경멸하는 태도로 나무랐다. 저보다 한 살씩 아래인 기수나 태갑에게 그런 꼴을 당하고도 할 수 없었던지 상균은 멋쩍게 씩 웃고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2
그날 밤 이후 맨대가리는 거의 저녁마다 찾아왔다. 대개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서야 그는 술에 취해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을미와 소년들은 고단한 하루의 노동에 지친 몸들이라 곯아떨어지기가 예사였다. 처음으로 맨대가리가 와서 자고 간 날 이후에도 소년들은 을미의 청에 따라 전과 같이 아랫방에서 을미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을 잤다. 무슨 소리에 놀라 소년들이 눈을 떠보면 어느새 들어왔는지 박치룡(맨대가리)은 술내를 훅훅 풍기며, 을미를 부둥켜안고 돌아가는 꼴이 어렴풋이 보였다. 을미의 옷을 벗기려덤비는 모양이었다. 소년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을 감은 채 그래도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 을미는 소년들이 깰까봐 겁먹은 소리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쟤들이 깨문 어쩔라구 그려세요. 정말 이렇게 망칙스레 구실려건 전 차라리 죽어버릴래요.”
그러면서 두 팔로 힘껏 남자의 가슴팍을 떠미는 것이었다. 그러자 박치룡은,
“깨문 어때. 사람이란 누구나 다하는 짓이야. 요것들두 4∼5년만 지나봐, 여자 없이 배기나.”
그러더니 을미의 몸둥이를 놓아주고 홱 돌아앉아 소년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임마, 느들은 냉큼 윗방에 올라가서 자. 우리는 인제부터 야간작업을 시작해야 해. 알았나?”
세 소년을 함부로 끌어 일으키고 나서, 박치룡은 도로 을미를 욱채다가 품에 끼고 쯧쯧 소리가 나게 마구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머뭇머뭇하다가는 자기들도 봉변을 당할까봐 겁이 나서, 소년들은 재빨리 베개와 담요를 걷어가지고 자기네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소년들은 대구 가슴이 설레이고 별해서 누워도 쉬 잠이 오지 않았다. 아랫방에서는 잠시 을미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매일 밤 9시가 넘어서야 퇴근해 돌아오는 을미보다 박치룡이 되레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날도 있었다. 저녁때 소년들이 돌아와보면 문이 잠겨 있기 때문에 그는 퇴방(‘토방(土房)’ 의 방언. 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 좀 높이 편평하게 다진 흙바닥. 여기에 쪽마루를 놓기도 한다. 흙마루)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혹시 소년들이 먼저 돌아와 있을 때는,
“여…… 나의 가난한 조무래기 동지들.”
그렇게 고함을 지루며 비틀거리고 다가와서 박치룡은 그 우람한 손으로 일일이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너희들 편이다. 너희들처럼 외롭고 가련한 존재다. 그러기에 인간이 그리워서, 순박한 인정과 체온이 그리워서 모처럼 찾아온 나를 너무 괄시하지 마라. 나두 결코 나쁜 놈이 아니다! 알겠나?”
잘 돌지 않는 혀를 놀려 버릇같이 외치고 나서, 박치룡은 을미 방에 들어가 제멋대로 아랫목에 자리를 펴고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알몸뚱이로 눕기가 바쁘게 코를 골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날은 다방에 가 늦도록 지키고 있다가 을미와 함께 오는 날도 있었다. 아무튼 박치룡이라는 인물은 을미와 소년들의 오붓하고 단란한 꽃밭을 무례하게 짓밟아버린 침입자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무모한 침입자를 소년들은 함부로 배척하거나 추방할 수가 없었
다. 그것은 우선 결정적으로 그와 겨룰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이미 을미와 그사이에 맺어진 인간과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관계, 여성과 남성과의 미묘한 인연이 결코 간단히 해결 지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 소년들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인간관계의 이러한 새로운 모순에 부닥쳐 고민하면서도 을미를 위해서 참고 견디기로 한 것이다.
근 7년간이나 군에서 복무하다가 상사 계급으로 제대한 지 불과 1년 남짓하다는 박치룡은 당수를 해서 그런지 놀랍게 힘이 세고 날랜데다가, 술만 취하면 난폭한 개고기로 변하기가 일쑤이기 때문에 소년들은 그 앞에서는 기가 죽었다. 하기는 ‘술만 안 취하묻 퍽 좋은 사람’ 이라고 입버릇처럼 뇌이는 을미 말대로, 술을 안 먹었을 때는 가장 너그럽고 소탈한 사람 같기도 했다. 저녁 일찌감치 술에 만취하여 찾아와가지고 늘어지게 한잠 푹 자고 나서 술이 깨어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에 을미가 늦게야 퇴근해 돌아오면, 그는 몹시 거북한 태도로 얼른 일어나 을미를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어마, 어째된 일이세요? 취하지 않은 박 선생님을 대하는 게 이게 얼마만이 에요?”
을미도 진정 반가운 모양이어서 가벼운 농담조로 그런 소릴 하며 문 안에 들어서면,
“사실은 한잠 자구 나서 방금 술이 깬 참입니다. 이거 정말 여러 가지루 면목이 없습니다. 을미 씨에게 그런 말을 들어 마땅합니다!”
진심으로 면목이 없다는 듯이 박치룡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윗방의 소년들도 불려 내려가서 다섯 사람이 같이 화투도 치고, 여러 가지 경험담들도 나누면서 밤이 깊도록 유쾌한 시간을 함께들 즐기는 것이었다. 박치룡은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하면 그칠 새 없이 제법 구수한 이야기로서 소년들의 흥을 돋우어주었다. 그는 오랜 군대 생활을 해오는 동안 치열한 전투에 참가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따라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돌파해온 만큼, 자연 전투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곤 하였다. 그런 때는 소년들도 신이 나서 그의 이야기를 재촉하기도 하고 캐묻기도 하고 그랬다. 한번은 모 고지 탈환전에 참가했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때 한 연대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정신없이 목표의 고지를 향해 진격하다보니, 우리 소대에서도 살아 있는 사람은 겨우 세 사람밖에 없었다. 소대장과 나와 일등병이 한 사람 생존해 있을 뿐이었다. 서로 격려하며 얼마쯤 더 진격해 올라가다가 별안간 소대장이 으음 하고 무거운 신음 소리와 함께 쓰러져버렸다. 그래서 미친 듯이 달려들어 소대장님 소대장님 하고 부둥켜안으려는 찰나, 불시에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더니 그만 나도 깜빡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가 지냈는지 몰지만 복부에 심한 진통을 의식하며 정신을 차려 보니 거기가 바로 후방의 야전 병원이었었다. 살아 있는 게 꼭 거짓말만 같았다.”
박치룡은 호젓하게 웃으며 소년들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제대하고 사회에 나와서 무슨 일에 부닥칠 때마다, 나는 자주 그때의 치열한 전투 광경이 떠오르군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혹 전장터와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무엇을 하나 적과 부닥치게 마련이다. 그들은 나의 진로를 막고, 나의 행복을 빼앗고, 심지어는 나의 목숨까지 노리고 있다. 이미 현대는 생존경쟁의 단계를 지나 약육강식의 시대라는 느낌이다. 경쟁에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꺼꾸러뜨려야만 살 수 있는 시대란 말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너들두 조그만 생활의 전사들이다. 죽지 않고 살려구 좀더 잘살아볼려구, 악착같이 싸우고 있는 인생의 전사들이란 말이다. 어쩌문 너들은 나보다 훨씬 행복하고 훌륭한 전사들이다. 너희들에 비하문 나는 너무나 비겁하고 초라한 전사인지도 모른다. 내게는 너들처럼 아름다운 꿈과 소박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너들이 부럽다!”
그러고 나서 박치룡은 정말 부러운 듯이 소년들을 둘러보았다. 다시없이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소년들은 그러한 박치룡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무섭고 밉기만 하던 그가 달리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치룡은 소년들의 손을 하나하나 쥐어보면서,
“너두 고생들 하는구나'’
한숨 짓듯 하였다.
“앞으루 내가 계획하는 일이 잘만 되문, 을미 누나는 물론 너들에게두 고생을 시키지 않을 테다.”
그런 말도 하였다.
“글쎄 술만 안 자시문, 이렇게 좋은 선생님이 어째서 허구한 날 술에만 취 해 지내셔요?”
알 수 없다는 듯이 을미가 그렇게 꼬집을라치면,
“글쎄요. 술을 마시지 않고는 불안하고 겁이 나서 이 살벌한 전쟁터를 달릴 수 없는 탓이라고나 할까요!”
그러고 박치룡은 거북하게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3
여름이 갔다. 가을도 갔다.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날 밤이었다. 집안에서는 대판으로 소동이 벌어졌다. 만취해 돌아온 박치룡이가 또다시 을미를 때려눕히고 소년들을 메어꽂고 한 것이다. 그는 방에 들어서는 길로 다짜고짜 을미의 볼에 주먹을 안겼다. 비틀비틀 쓰러질 뻔하다가 벽에 기대어 을미가 간신히 몸을 가누자 재차 덤벼들어 어깨며 등이며 사정없이 후려쳤다. 을미는 머리와 배를 감싸고 비명을 지르며 소년들이 있는 뒷방으로 뛰어 올라왔다. 박치룡이도 이내 뒤쫓아 올라왔다.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겁에 질려 상균의 뒤에 몸을 가리고 섰는 을미를 향해 그의 억센 주먹이 또 날았다. 그러나 상균이가 방해가 되어 마음대로 칠 수가 없었다. 박치룡은 대뜸 상균의 목을 잡아 비틀 듯이 해서 옆에 쓰러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도로 을미에게 달려들어 마구 주먹질이었다. 을미는 방 한구석에 처박혀서 주먹이 떨어질 때마다 헉헉 하고 가쁜 숨을 토하였다. 그냥 두면 맞아 죽을 것만 같았다. 어쩔 줄 몰라 와들와들 떨고 섰던 소년들도 그 이상 보고만 섰을 수가 없어 아저씨 아저씨 하고 울면서 덤벼들어 뜯어말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박치룡은 이쪽으로 고개를 홱 틀며,
“요 놈의 새끼들 너들두 모두 한통속이다'’
소릴 꽥 지르고는 태갑이, 상균이, 기수의 차례로 덮어놓고 메어꽂아버렸다. 그리고는 그 자신도 머리로 사정없이 담벼락을 쾅쾅 들이받으며 울기 시작한 것이다. 을미는 입술이 터지고 눈과 잔등에 멍이 들고 전신이 저리고 쑤셨다. 소년들도 팔굽이 벗겨지고 머리에 혹이 돋고 여기저기가 얼얼했다. 낙중에 알고 보니 모두들 짜 가지고 자기를 따돌린다는 데 대한 화풀이였다.
그날도 저녁 무렵에 박치룡이가 써준 쪽지를 가지고 태감이 녀석이 다방으로 을미를 찾아왔다. 쪽지에는 계획 중인 일 관계로 급히 손님을 대접하게 되었으니, 곧 5천 환만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습관화된 일이었다. 무슨 큰일을 꾸미는 중이라고 하며 날마다 초조히 나돌아다니는 박치룡은 걸핏하면 접대비에 필요하다고 하며 무시로 을미에게 사람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상균이와 기수가 배달부로 있는 모 신문사 역전 영업소를 찾아가서, 두 애 중에 누구든 붙들어 시키든가 만일 그 애들이 수금이나 확장을 나가 없으면 일정한 장소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는 태갑을 찾아가 쪽지를 들려 보내는 것이 예사로 되어있었다.
그날도 태갑이가 가져온 쪽지를 펴보고 나서 을미도 부지중 한숨을 토하고,
“지금 아저씨 어디 계시니?”
물었다.
“손님하구, 내가 구두닦이하는 장소 근처에 있는 음식집에 들어가 기세요.”
돈을 보내주지 않으면 그이는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을미는 생각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교제비를 대주노라고 이미 마담에게서는 가불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했고 동료들에게서는 꿀 수 있는 데까지 꾸어 쓰고 있는 처지였다. 을미는 또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쪽지를 도로 접어서 태갑에게 주며,
“이거 도루 갖다 드리면서 나 없드라구 그래.”
“아저씨가 곧이 안 들을 걸요. 그러다가 탄로나문 어쩔라구요!”
“갠찮어. 내 잠시 숨어 있을게.”
태갑이가 시원찮은 얼굴로 돌아서 내려가는 것을 을미는 이내 도로 불러 올렸다.
“만일 아저씨가 음식값을 못치러 망신하게 되면, 미안하지만 네가 한 번만 더 입체(立替: 뒤에 상환받을 목적으로 금품 둥을 대신 지급함)를 해줄래?”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걸 억지로 하는 을미의 말에,
“그동안 아저씨에게 들어간 내 돈이 모두 7천 환이 넘는 걸요!”
불만스러운 어투였다.
“안됐어 태갑이, 정말 미안허다. 내 무슨 짓을 해서라두 다 갚어줄게…….”
을미의 눈이 섬뻑거리자, 태갑은 자기도 울먹울먹하며 얼른 돌아서 뛰어 내려가버렸다. 을미는 돌아 들어오는 길로 마담에게 사정을 말하고, 퇴근할 때까지 주방 일을 거들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좀 있으려니까 박치룡이 잔뜩 볼이 부어가지고 나타나 마담에게 을미가 어디 있는가를 묻고, 멀리 심부름 갔는데 늦으면 곧장 집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말을 듣더니 입맛을 다시며 빈자리에 잠깐 앉았다가 이내 일어서 나가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주 돌아간 것이 아니라, 다방 문간에 자리잡구 담배 파는 아이를 시켜 을미가 주방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아내고야 만 것이다. 험상궂은 얼굴로 변하여 박치룡이가 도로 뛰어 올라와 마담과 시비를 걸며 주방문을 열어젖히려는 순간, 을미는 재빨리 뒷구석의 비상구를 따고 빠져나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을미는 도저히 박치룡의 교제비를 당해내는 도리가 없었다. 다방에서 삼시 먹고 만여 환밖에 안 되는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도 처음 얼마 동안은 그가 필요하다는 비용읕 자진해서 얼마씩 장만해주었다. 이번에는 미군 부대에서 불하 나오는 큰 ‘구치’(‘몫’ 이라는 뜻의 일어)를 뚫어놓았는데, 물론 자본이 없으니 직접 떠맡을 수도 없지만 소개만 해주어도 몇 십 만 환의 커미션은 문제없이 들어온다고 하며. 그러나 최소한도의 접대비는 있어야 할 덴데…… 하고 초조한 빛으로
푸푸 한숨만 쉬고 앉았는 그가 보기 딱해서 을미는 만 환 가까이나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그게 시초가 되어 을미는 그 뒤에두 여러 차례 무리를 해가며 자진해서 최소한도의 교제비란 걸 메워주기에 힘써왔다. 그러는 동안에 한번은 성사가 되었다고 하며 수개비로 받은 10만 환 뭉치를 안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당자인 박치룡의 기세는 말할 것도 없고 을미도 정말 눈이 번쩍 틔어서, 이러다가 그의 말대로 갑부는 못될망정 과연 생활 걱정은 면케 되려나보다 싶어 벅차도록 희망이 끓어올랐고, 소년들도 돈 뭉치를 둘러싸고 야, 야, 감탄성을 연발하며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이다. 박치룡은 그 달음으로 식구들을 끌고 나가, 을미에게는 고급 옷감을 떠주고 소년들에게는 멋진 농구화를 한 켤레씩 사준 다음 배가 불러야 싸움을 계속할 수 있다고 하며 우선 쌀 한 가마에 갈비를 한짝 들여다가, 며칠 동안은 마치 잔칫집처럼 풍청거렸다. 좋아하는 약주에 알맞게 취기가 돈 박치룡은, 식구들을 둘러보며 밑천 없는 게 한이라고 했다.
“내게 돈이 있어서 통째로 떠맡으면, 비용 일체를 빼고도 문제 없이 배는 남는 건데 겨우 소개비나 뜯어먹고 떨어지자니 억울하기 짝이 없단 말야. 만일 백만 환의 자금만 있으면 나는 1년 내에 거부가 될 자신이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너들에게 요 모양대루 신문 배달이나 구두닦이를 시킬 줄 아냐! 대번에 학교에들 보내줄 테다…… 그렇지, 우리 귀여운 아가씨, 아니 우리 여왕님께 다방의 레지를 시키다니, 온 말이 되나! 물론 집안에 가만 모셔놓고 단판 호강
을 시 켜드려야지…….”
그러고는 다짜고짜 을미를 북 끌어안고 소년들이 보건 말건 버둥거리는 을미의 입과 뺨에다 마구 키스를 펴붓는 것이었다. 그때만은 소년들도 안심하고 히들히들 웃었고, 을미도 그렇게는 심하게 남자를 탄하지 않았다.
그 뒤부터는 비용이 필요하면 박치룡은 으레 을미 앞에 손을 내밀게 되었다. 물론 을미도 자기의 수단껏 팔 게 있으면 팔고 꿀 수 있으면 꾸어서라도 애써 응해주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좀체 일은 성사가 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헛되어 교제비만 흘려나갈 뿐이었다. 나중에는 을미도 지쳐버려서 남자의 요구에 일일이 응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제부터 박치룡은 취기를 빌어 을미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협조적이니, 자기를 믿지 않느니, 자기에게 대한 애정이 없는 탓이니, 하고 뚜들겨 패는 것이다. 구래도 을미에게서는 돈이 잘 나오지 않으니까, 그는 마침내 소년들에게서까지 긁어내는 것이었다. 꼬마 화가인 기수나, 서장을 꿈꾸는 상균은 그달 그달의 식비에도 쪼들리는 판이라 피해가 적었지만, 구두쇠인 태갑은 저축도 있을 뿐 아니라 매일매일 수입이 오르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해도 놓기지 않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치룡은 종시 태갑이가 상당한 저축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대번에 팔자를 고칠 만큼 무섭게 큰 ‘구치’ 를 하나 뚫어놓았는데 마침 잘되었다고 하며 박치룡은 태갑이더러 교제비를 대라고 살살 졸라댔다. 성사만 되면 빌려준 돈의 2배를 준다거니 3배를 준다거니 하고 달래도 보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태갑은 더욱 단단히 도사릴 뿐 귀담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치룡은 그예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태갑에게 달려들어 완력으로 꼼짝 못하게 하고 내의 속에 두르고 있는 돈 보자기를 끌러내고야 만 것이다. 박치룡은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돈을 세어보았다. 1천 환권과 500환권으로 4만 환 가까이 있었다.
“한 달 이내에 책임지고 이 돈의 배액을 갚아줄 테다! 고맙다.”
그러고는 울상이 되어 붙드는 을미도 뿌리치고 나가버린 것이다. 태갑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달달달 몸을 떨 뿐, 말 한 마디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금방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4
한 달이 지나도 박치룡은 태갑의 돈을 갚아주지 못했다. 일이 제대로 되어가기는 하지만, 원체 ‘오구치’(‘큰 몫’ 이라는뜻의 일어)여서 이놈을 삶아놓으면 저놈이 말썽이고, 저놈을 삶아놓으면 또 딴 놈이 들고일어나는 통에 질질 시일을 끌기는 하지만 불원간 성사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냥 소개비만 먹고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나도 악착같이 한몫 끼기로 했다. 물론 무자본이니까 내 몫이 제일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2백만 환은 틀림없다. 알지 2백만 환이다. 그만하문 꽤 큰 돈이다. 그 돈만 들어오면 너들에게 진 빚두 두 배 세 배 해서 갚아줄 테다!”
그러더니 을미를 돌아보며 ,
“여보, 그리되면 당신에게 1년 생활비루 아예 절반을 뚝 떼 밑기리다. 그러니까 그때는 그놈의 직장두 집어치구 집에 들어앉아 애기나 낳아서 잘 키워요. 다시는 당신에게 고생을 시키지 않을 테요.”
그러고는 알고 보면 표가 나게 불러오른 을미의 배를 건너다보며 흐뭇하게 웃는 것이었다.
나날이 배는 자꾸 불러와서 더 계속해 직장에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어앉으면 당장 호구가 문제여서 을미는 혼자 고민해오던 차라, 남자의 말이 어느 정도 확실성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에도 한 번은 성사가 된 일이 있었고 해서 행여나 하는 마음에,
“참말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꿈 같은 생각에 취해보며 가만히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냐, 틀림없어. 이번엔 정말 틀림없다니까. 두구 보기만 해요.”
남자는 자신 있게 장담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박치룡은 매일같이 부평으로 인천으로 분주히 쫓아다녔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군자금이 모자라서 탈이라고 한탄했다. 이놈 저놈 돌아가며 모조리 입을 틀어막아놓으면 제꺽 될 일인데, 비용이 없기 때문에 계획대로 잘 추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이번에도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불하 물자를 도리(‘독차지’ 라는 뜻의 일어)로 떠맡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인제는 아무리 들볶아도 을미나 소년들에게서는 피천(아주 적은 돈) 한푼이 나오지 않을 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교통비마저 떨어져도 말을 못하고 푸후 한숨만 짓고 앉았는 박치룡이가 보기에 몹시 딱했다. 그러고 보니 이 몇 달 동안에 얼굴도 바짝 말라서 꺼츨해 보였다. 그가 그처럼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 자체
도 아주 가망이 없는 것 같지 않아서 을미는 마지막으로 남은 외출복마저 잡히고 돈을 얻어다 주었다. 소년들도 여느 때 없이 보기에 민망했던지,
“아저씨, 어서 그 일만 성사시키세요.”
노상 그러면서 몇 백 환씩이나마 주머니를 털어서 내놓았다.
그러고 나서 을미나 소년들이 아무리 눈이 빠지도록 기다려도, 그리고 박치룡이 자신 반미치광이처럼 몸이 달아 쫓아다녀도 일은 될 듯 될 듯 하면서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가도 결말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력저럭 겨울도 갔다. 양지쪽에는 풀 움이 군데군데 대가리를 치솟구는 계절이 되었다. 해산일이 임박해서 집에 누워 지내고 있던 을미는 기수가 남겨가지고 돌아온 신문을 뒤적이고 있다가 소스라쳐 놀랐다. 며칠째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던 박치룡의 사진이 신문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5∼6명의 낯모를 사람들의 사진 속에 끼어 있었다. 을미는 눈앞이 아찔해서 신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소년들을 불러서 누구돈 읽어보라고 했다. 기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모 미군 부대에서 민간에 불하 처분하는 물자 속에 막대한 비불하품이 섞 여 반출되었다는 바, 그것은 민간 상인들이 수명의 미군 및 한국인 종업원들과 교묘히 결탁하여 저지른 범행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 범인 가운데 박치룡이 이름과 사진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기사를 기수가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을미는 기운 없이 벽에 기대앉은 채 고개를 젖히고 퀭한 눈으로 천장만 지켜보았다. 핏기 없는 입술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소년들도 어이가 없고 민망도 해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언제나 떵떵 흰소리 잘 치는 상균이만이,
“뭐 대단한 일은 없을 거야. 요점 세상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다구!”
그렇게 한마디 아는 척했지만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은 상균이 자신 쓰디쓰게 쩝쩝 입맛만 다시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을미는 해산을 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아랫목에 누위 있던 을미는 별안간 신음 소리와 함께 허리를 꼬고 돌아가며 땀을 철철 흘렸다. 내버려두면 당장에 죽을 것만 같았다. 소년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맸다. 마침내 을미의 요청으로 소년들은 상당히 떨어져 있는 이웃집으로 달려가서 그 집 아주머니를 데려왔다. 그 아주머니의 구호를 받아가며 을미는 밤이 꽤 깊어서 계집아이를 낳은
것이다. 그날 밤 소년들은 공연히 흥분해서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꼬박 새우다시피했다.
기수는 등잔불 밑에 바싹 다가앉아, 을미를 모델로 가지가지 포즈의 여인상을 그려두었던 자기 화첩을 떠들어보다가는 소녀 모양 감상적인 표정을 지으며 무슨 생각에 깊이 잠기곤 하였다. 돈에는 사족을 못 쓰는 태갑이 녀석은 자기의 조그만 수첩을 끄집어내놓고, 박치룡에게 빌려준 돈의 액수를 다시 한번 따져보는 것이었다.
“임마, 인젠 그 돈 받기는 다 틀렸어! 아예 생각두 말어.”
상균이가 보다 못해 내뱉듯 하자,
“왜? 이 돈이 얼만 줄 알어! 전부 5만 환이나 돼, 5만 환이야. 이 많은 돈을 그래 몽땅 잘린단 말야.”
어림도 없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며 입술을 뚜하고 내미는 것이었다.
“흥, 갚아줄 사람이 징역살일 가두 받을 테야?”
“그러문 나온 댐에 받지!”
태갑의 말두 어쩌문 아주 가망이 없는 바는 아니었다. 경찰을 거처 송청 된 이래 3개윌 가까이나 질질 끌어오다가 드디어 2년 언도를 받은 박치룡이 기결감으로 들어가던 날, 면회를 간 소년들에게 간곡히 이런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동안 을미 누나를 친누나처럼 생각하구 잘 돌봐다구. 형기를 마치고 나오면 무슨 일이 있드래두 너들 은혜만은 꼭 갚을 테다.”
그때 소년들은,
“문제없어요. 누나 일은 걱정 마세요!”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같이 갔던 을미는 등에 업은 어린애를 남자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박치룡은 잠시 아기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다가,
“미안하우, 미안해요.”
그러고 벌겋게 낯을 붉혔다.
을미를 앞세우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들은 서운하면서도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으면서도 반가운 것 같기도 한 야릇한 심정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을미는 누나요 친구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미 애인일 리는 없고, 더더구나 여왕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박치룡과 비슷한 부탁을 남기고 돌아간 을미 모친의 말을 생각해보며, 이렇게 된 이상 을미 누나를 끝까지 봐주지 않을 수 없다고 소년들은 각기 속으로 다짐하며 걷는 것이었다.
-끝-
2016년 10월 2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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