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 소나타 / 유진
달빛에 이끌린 연두가 일어선다
연두의 요람은 습하고 따듯해
열 손가락 끝에서
싸락싸락 척추를 일으키는 연두
공중으로 밀어올리는 힘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힘 사이에서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낯선 세상과 낯익은 이정표를 배회하던
나는 연두였지
사소한 바람에도 상처가 났고
달빛 아래선 길눈이 어두웠졌지
그래, 어린 것들은 모두 연두인 거야
비바람 견디고 일제히 일어서는 연두
무성한 반란의 여름이 끈적해
물결 잔잔한 루체른 호반의
출렁한 달빛을 산책하던
당신
당신의 고뇌를 완벽하게 해독할 때까지
희고 검은 시간들을 곱씹으면 충분히
느리고
무겁게
-『척』, 시와시학, 2020.
■ 감 상 :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의 원제는 피아노 소나타 14번(부제: 환상곡 풍의 소나타)이다. 자신의 피아노 제자였고 백작의 딸이었던 줄리에타에게 헌정했던 곡이다. 줄리에타는 베토벤이 좋아했던 귀족 여성이 그러했듯 평민 출신인 베토벤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첼로와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한 시인은 ‘월광 소나타’를 듣기도 하고, 직접 연주하기도 하면서 아름다움의 정점에 이른 곡과 그걸 가능하게 했던 베토벤의 고뇌를 생각한다. 루체른 호반을 산책하는 베토벤에 대해선 사실과 다르다는 애기도 있다. 베토벤 사후, 음악 평론가인 렐스타프가 피아노 소나타 14번 1악장을 두고, 마치 달빛 받은 루체른 호수 위를 배가 떠가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월광 소나타로 명명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베토벤이 루체른에 들른 기록 자체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체른과 베토벤의 연결고리가 아예 사라졌다거나 달빛과 피아노 소나타 14번이 무관하다고 단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베토벤과 그의 예술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의 한 마디가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의 무게와 같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루체른에 7년 가까이 거주했던 음악가로 바그너가 있다. 바그너는 베토벤의 대한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썼을 만큼, 베토벤과 그의 음악을 좋아했던 인물이다. 베토벤이 한때 좋아했던 괴테도 1797년 루체른을 여행했고, 괴테가 묵었던 호텔은 지금도 그걸 자랑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위 시에서 시인은 피아노 앞의 자신을 연두에 견준다. 베토벤의 음악은 연두를 지켜보다가 비바람으로 연두를 단련시키기도 한다. 그런 중에도 시인은 루체른이든 동네 골목이든 다른 어디든 자기 고뇌에 빠져 하염없이 걷고 있는 예술가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곡 옆에 써둔 베토벤의 메모인 느리고, 무겁게를 어떻게든 실현해 보려고 열 손가락의 속도와 무게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또 좌절하는 날들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이런 시간을 견디며 연두는 꽃 한 송이로 벌어지는 것일 테다.
시를 쓰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피아노 연주자가 원작자의 고뇌를 깊이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희고 검은 건반 위를 오가는 속도와 누르는 힘을 자기화해야 하는 사람이듯이 시인에게도 오리지널은 없다. 있다면, 자기 개성으로 밀고나가서 한 편 남기는 지상과제가 있을 뿐이다.
ㅡ이동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