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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설교본문 : 사무엘상 3:10, 이사야 6:8, 사도행전 9:10, 마태복음 5:1~16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5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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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2025년 교회 표어 설명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사무엘상 3:10, 이사야 6:8, 사도행전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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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사무엘상 3:10)
8. 그때 내가 주께서 말씀하시는 목소리를(음성을)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10. 그때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가운데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사도행전 9:10)
•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
주님의 뜻과 의도에 대한 기도입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있는 이 시대와 이 땅에 대한 기도입니다.
1) 이 시대를 바르게 진단하고 분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과 지혜로 내가 서 있는
이 시대와 이 땅을 바르게 진단하고 분별하게 하옵소서.
2) 그 역사의 현장에 내가 있사오니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때에 이곳으로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바르게 알게 하옵소서.
3) 나의 영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죄를 치유하여 순결한 영을 가진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4)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주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제 1 부 : 교회 표어의 성경구절 해설
1. 이사야를 부르시는 하나님
이사야가 하나님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던 때는
이스라엘이 점점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해 가던 때였습니다.
그나마 제사장과 선지자들이라도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있다면
소수의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그들마저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 술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과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도 한탄하실 지경이 되었습니다.
절기의 예배까지 모든 예배가 규정대로 잘 드려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예배와 신앙의 행위들이 하나님께 짐이 될 뿐이니
그들의 기도와 예배를 듣지도 않고 돌아보지도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이사야 1:1~15, 28:1~9 참조).
1)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보는 이사야(1~4절)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이라고 하는 천사들이 모시고 서 있었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노래하며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였고,
성전에는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사야는 그의 사촌형이기도 한 유다 왕 웃시야가 죽자
큰 충격을 받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있는 스랍 천사들을 봅니다.
2)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8절)
8. 그때 내가 주께서 말씀하시는 목소리를(음성을)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이사야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3) 이사야에게 맡겨진 말씀
➀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9~10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는 이사야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눈과 귀를 닫게 하는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➁ 하나님의 경고 : 너희가 듣기 싫어하는 방식대로 말씀을 전하리라(사 28:13)
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이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도다.
(설명 : 뻔한 말을 반복해서 하실 수밖에 없다는 뜻)
그래서 그들이 그 간단하고 단순한 말씀에 걸려 넘어지고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하니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친절하게 말하지도 않겠고, 그들을 설득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듣기 싫으면 그만 두라는 하나님의 최후 통첩의 말씀입니다.
3) 네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이것이 바른길이라 할 것이며(사 30:21)
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할 것이며,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할 것입니다.
그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이 함께하셔서
그들에게 바른길을 알려주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귀가 닫히겠지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거쳐 그 마음에 하나님의 신령한 것이 채워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귀가 열려서 잘못된 길을 갈 때마다
그 마음에 “이 길은 잘못된 길이다”하고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2.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
1) 대제사장 엘리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던 때(삼상 3:1)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계시를 보여주시는 일이 드물었더라).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마치 귀한 보석을 보기가 힘든 것처럼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얼마나 희귀한지, 대제사장인 엘리조차도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2:27~36)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3) 아이 사무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10~14절)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엘리도 제사장이고 그의 두 아들도 제사장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그들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것도 사무엘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사무엘에게 오셔서 그 곁에 서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10절).
➠ 이제 사무엘상 3장에서부터 성경의 주인공은 엘리에서 어린 사무엘로 바뀝니다.
단순히 주인공의 인물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이끄는 시대의 일꾼이 바뀐 것입니다.
나라로 보면 대권이 바뀐 것입니다.
출애굽을 이끈 하나님의 일꾼이 모세이듯,
그 시대에 이스라엘을 이끌 민족의 지도자가 바로 이 어린 사무엘이 된 것입니다.
● 묵상 :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 나이나
성별이나 학벌이나 재산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사무엘처럼 어린아이를 쓰시기도 하고 모세처럼 노인을 쓰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가 누구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3. 사울의 변화를 돕는 협력자 아나니아
바울이 주님을 믿기 전 사울로 불리던 때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던 사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사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1)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명하심(행 9:10~12)
10. 그때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가운데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고 부르는 거리로 가서
그곳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지금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으니라” 하시거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난 후 눈이 보이지 않아
사람의 손에 이끌려 주께서 명하신 대로
다메섹의 ‘직가’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갈 때입니다.
주께서 다멕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부르십니다.
“아나니아야”
아나니야가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사울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70명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그 역시 스데반 집사가 순교 당할 때 예루살렘 교회에 임했던 핍박을 피하여
이곳 다메섹까지 피신하여 온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할 때 아나니아는 예루살렘에 있었으므로
사울이 어떻게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박해했는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울을 두려워하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사람 사울에게 찾아가라고 말씀에 순종하여
직가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있는 사울을 찾아갑니다.
● 묵상 :
이사야, 사무엘, 아나니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제 2 부 :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왕의 명령)
그러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오늘 마태복음 5장의 왕의 명령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 천국의 대헌장, 산상수훈
하늘과 땅의 왕께서 그의 백성에게 선포하시는 말씀(마 5: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태복음 5장은 예수께서 왕의 자격으로 세상 만민에게 선포하시는 왕의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산에서 하셨다고 하여 ‘산상수훈’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장차 우리를 심판하실 왕의 자격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조건, 심판의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2) 복이 있나니(3절)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
복이 있나니의 히브리어 ‘아쉐레’는 “이런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의 뜻으로,
시편 1편의 ‘복 있는 자’와 같이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의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땅에서부터 이미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장차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니 복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니 또한 복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팔복 중 처음 네 복
산상수훈 중에서도 3~12절에 있는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입니다.
이런 사람이 천국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왕께서 선언하시는 심판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1) 제 1 복 :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3절)
(3절 성경구절 위에)
➀ 하나님 나라의 첫 관문 : 심령이 가난한 자
그런데 그 첫 출발은 놀랍게도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합니다.
도덕적이지도 않고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만한 것이 나에게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한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첫 출발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나 아주 작은 계명도 지킬 힘이 없는
심각한 연약함에 큰 고통을 느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➂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렇게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줄 것을 간구하는 자,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천국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 제 2 복 : 애통하는 자 ➟ 위로를 받는다(4절)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으로 번역된 ‘펜데오’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슬픔에 빠진 상태를 뜻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나태함과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에게 임하지 않을 것 같은 것에 대한 슬픔을 뜻합니다.
➀ 자기 죄에 대한 애통함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니”하며 애끓는 심정으로 주께 통회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상태를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➁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함
내 안에,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영적인 현실을 보고 답답해하고 애통해합니다.
➂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그냥 어깨나 두드리는 위로가 아닙니다.
‘위로를 받는다’의 헬라어의 뜻은 ‘곁으로 부른다’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극심한 슬픔에 빠진 자를
하나님께서 그의 곁으로 부르십니다.
곁으로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강을 주시면서
그의 눈에 눈물을 씻어주시는 능력의 위로인 것입니다.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약속의 위로입니다.
3) 제 3 복 : 온유한 자 ➟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5절)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➀ 온유한 자 :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하는 자의 마음의 상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을 깨달았으니 겸손한 자가 됩니다.
온유하다는 뜻의 헬라어 ‘프라우스’는 본래는 잘 길들여진 가축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말로 점잖고 겸손함을 뜻하는 말입니다만,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장 낮은 자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기의 죄를 슬퍼하며 애통할 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을 때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굴 평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을 깨닫고 나니 자연스럽게 겸손한 자가 됩니다.
➁ 이 온유함은 위의 두 복을 가진 자에게서 나타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기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괴로움과 슬픔을 겪다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을 때 이 온유함이 나타납니다.
또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소망을 가진 자에게서 온유함이 나옵니다.
➂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 땅에서부터 이미 주께서 주시는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강을 받아 누리고 있으니
그 은혜 속에서 나오는 겸손함과 부드러움입니다.
주님을 확실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들만이 이런 온유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종종 주님과 닮은 이런 온유함을
구원받음의 증거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을 확실히 믿었으므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이 지구의 땅이 아니라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땅입니다.
4) 제 4 복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배부름을 얻는다(6절)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➀ 우리가 목말라해야 할 의란 무엇인가?
‘의’는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순결함’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 ‘의’를 완전하게 확실히 이루어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데
우리는 연약하여 단 1%의
의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뿐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➁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듯 처절하게 구하고 사모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심령이 가난하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발전된 성품입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끝없는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 자가 물을 구하듯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구하는 자를 뜻합니다.
➂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내 힘으로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니 주께 의를 달라고
마치 목숨을 구하듯 그렇게 구하는 자는 주님의 의를 배부르게 얻게 됩니다.
주님의 의를 차고 넘치도록 충만하게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정도의 의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 묵상 :
처음 네 복은 결국 무엇을 찾고 있느냐, 무엇에 갈급하고,
어떤 일에 슬퍼하고, 어떤 일에 고통을 받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가 찾고 갈급해하고 슬퍼하는 것이 세상에 대한 것이면
그는 여전히 주께서 주시는 복과는 상관없는 세상에 속한 자이고,
그가 찾고 갈급하고 슬퍼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이면
그는 주께서 주시는 복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3. 팔복 중 두 번째 네 복
위의 네 복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다음 네 복은 밖으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위의 네 복이 이루어지면 다음 네 복이 우리 안에서 그 열매를 맺게 됩니다.
1) 제 5 복 :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7절)
7. 긍휼히 여기는 자(남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➀ 긍휼과 자비 : 하나님과 닮은 마음을 가진 자
긍휼과 자비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아니라
애끓는(내장이 끊어지는 것 같은) 심정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이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자녀를 돌보고 인도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가 겪는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것,
이런 긍휼과 자비는 주께서 가지신 마음이니
오직 주님의 의가 충만하게 들어간 자에게서만 나타납니다.
주께서 주님의 의를 넘치도록 충만하게 부어주시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과 자비인 것입니다.
➁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불쌍히 여기는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대로 믿음 없이 살다가 인생을 마치면
영원히 멸망을 당하는 자가 되고 말 텐데,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믿지 않는 자의 영혼을 애끓는 심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자
이런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➂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것은 4절의 ‘애통하는 자’와 연결되는 마음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안타까워하면서 애통하는 자,
이들은 그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겼으니
그가 연약하여 넘어졌을 때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후일 심판을 받을 때 혹시 자기들에게 죄가 있을지라도
주께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구원받는 자들이 됩니다.
2) 제 6 복 : 마음이 청결한 자 ➠ 하나님을 본다(8절)
8. 마음이 청결한(깨끗한. 순전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마음이 순전한 자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복잡하지 않고 순전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그득한 상태가 ‘마음이 순결한자,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천국에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어디에서 봅니까? 천국에서 뵈옵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제목은
우리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해 달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➁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보는 자가 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아주 나이 많은 노인들이었음에도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한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 수가성 우물가의 그 문제 많은 여자,
심지어 이방인의 점성술가였던 동방의 박사들까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달달 외우고 있었으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앞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줄 알아보았고,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외우고 있더라도
그 안에 탐욕이 가득했으므로 예수님을 몰라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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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래야 당신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3) 제 7 복 : 화평케 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얻는다(9절)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➀ 화평케 하는 자 :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전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샬롬으로,
이것은 단순히 싸움과 갈등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주는 것에서 지나서,
죄의 문제가 해결된 자에게 주시는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강이
그 사람에게 채워지도록 돕는 자를 말합니다.
➁ 다른 사람에게 평강을 주기 위해 자신의 평강을 포기하는 자
이렇게 주님의 평화, 주님의 샬롬이
사람들에게 채워지도록 돕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평강이 채워지게 하려고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복을 포기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➂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38~48에 나오는 말씀은
이웃에게 주님의 평강을 채워주기 위해
내 권리를 포기하는 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는 나를 적대하는 행위를 했으나
나는 도리어 그에게 주님의 평강이 채워지게 하려고 그를 사랑으로 대하였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친히 자신의 아들로 여기십니다.
4) 제 8 복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10~12절)
10. 의를 위하여(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너희가 나로 인하여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박해하고,
거짓으로(터무니없는 말로) 너희를 거슬러 온갖 악한 말로 비난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보다 먼저 살았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위의 ‘제 4복’에서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 하는 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 핍박을 받는 자들,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일 때문에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과 모욕을 당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그들이 모욕과 조롱을 당했음에도
주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았으니
그들은 이 땅에서 이미 천국 백성으로 인정을 받은 자들입니다.
천국이 바로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모욕과 핍박을 당한다면 기뻐하십시오.
그 자체로 이미 주께로부터 천국 백성임을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다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 위의 8복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맛과 향기가 납니다.(13~15절)
13.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소금을 다시 짜게 하리요?
후에는(그런 것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짓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마을이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드러나게 마련이요)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됫박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경(등잔대)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참 믿음을 가진 자는 믿음의 향기, 믿음의 맛, 믿음의 빛이 납니다.
이 맛과 향기와 빛으로
우리가 주님의 백성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 묵상 :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채우기를 원하고 갈급해하며
그것이 채워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면,
주께서 주님의 의를 충만하여 넘치도록 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주님의 의가 채워지면
이런 긍휼과 자비와 화평케 하는 일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자가 바로 주님의 백성입니다.
제 3 부 :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평안을 포기하는 바울
(이 부분은 요약만 합니다.
반드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니
사도행전 20~21장 성경과 큐티방을 참조해주십시오.)
1) 어려운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
바울은 막대한 헌금(부조금)을 가지고 온갖 어려움을 이기며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가져온 헌금만 받고
바울을 고통의 자리로 홀로 들어가게 합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유대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율법도 아니고 복음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바울이 가져온 부조금만 받고 바울을 고통의 자리로 홀로 보낸 후
그 후의 일은 나 몰라라 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바울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 답답한 고난의 자리로 묵묵히 걸어갑니다.
2) 복음 증거를 위해 답답한 시간을 자처한 바울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 아무 문제 없이 그냥 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 권력의 핵심층인 헤롯왕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로마의 총독 등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공식 재판을 신청하고 재판을 받습니다.
그 재판의 과정에 바울은 자기의 무죄를 입증하려 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직 주의 복음만 증거합니다.
3) 나의 안일보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을 택한 바울
예루살렘에서 로마에까지 이어지는 바울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명하신 일은 3차 전도여행까지입니다.
그 일로 이방 지역에 이미 많은 교회들이 생겨났으므로
바울은 자기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잘 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
바울에게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면 큰 고난이 닥쳐올 것이라는 경고를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족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간절함,
내 동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는 애끓는 심정이
그를 멈추지 않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실상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네 사명은 다 끝이 났고, 또 이번 예루살렘 여행은 아주 고통스러운 여행이 될 텐데,
그래도 나는 네가 그 일을 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마음을 품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동포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자원하여 답답한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5년 가까운 답답한 시간을 보냅니다.
결 론 :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비록 허물과 죄가 있어 그동안 하나님을 속상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왔을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나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때로는 말씀을 통해서, 때로는 마음의 강렬한 울림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나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1)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너희가 스승을 볼 것이요(사 30:20)
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을(너희 선생들을)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너희가 두 눈으로 너희의 스승들을 볼 것이며,
그러나 내 안에 있는 허물과 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잘 알아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심지어 제사장과 선지자들조차 술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말씀조차 잊어버리고 있는 지경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남은 자들일지라도
그들 역시 그 시대의 죄의 습관에 물든 자들이므로
출애굽 후에 광야 40년의 고통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처럼,
그들도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어야만 합니다.
그들도 70년간 바벨론 포로의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시는 스승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스승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스승이 주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는 말씀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네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이것이 바른길이라 할 것이며(21절)
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할 것이며,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의 상태가 되면,
그때에는 그들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할 것입니다.
그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이 함께하셔서
그들에게 바른길을 알려주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귀가 닫히겠지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거쳐 그 마음에 하나님의 신령한 것이 채워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귀가 열려서 잘못된 길을 갈 때마다
그 마음에 “이 길은 잘못된 길이다”하고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나 주의 음성 듣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이 오지 않습니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려고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간절히 주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주께서 기뻐하시며 그 뜻을 밝혀주십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시대를 바르게 진단하고 분별하게 하옵소서.
그 역사의 현장에 내가 있사오니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죄을 치유하여
순결한 영을 가진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