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친일 민족 반역자와 일제 잔재는 왜 청산되어야 하는가
-
- 얼마전 주요 일간지에 1920년대 상해 임시 정부와 그 밖의 독립 운동 단체들의 활동을 당시 프랑스 영사관이 기록한 박영석 국사편찬 위원장등 한국 관계자들이 27일 낭트에 있는 프랑스 외무부 문서 보관소에서 확인한 기사가 실렸다. 이 문서 확인자들을 흥분시킨 것은 그 문서의 내용에 의하면, "지금 애국자로 추앙받고 있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실제로는 친일파였다"는 것이다.({한겨레 신문} 1990.4.29)
이러한 사실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별로 흥분할 일도 못된다. 친일파 문제는 8.15 해방 초기부터 사회 일각에서 끊임없이 문제 제기해 왔던 일이다. 그것이 사회 문제화되지 못하거나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지 못한 것은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또다시 남한 사회의 주요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의도적으로 "쉬 쉬"하며 회피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8.15가 45년이 지난 지금, '친일파'의 문제는 당사자들의 '잘못된 과거'를 다시 바로잡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코 그런 개인적 일로 끝날 수 없다는 데 오히려 문제의 중요성 더욱 크다. 이 친일파의 문제는 분단과 반민주적 독재 정치와 반민중적인 제반의 사회 정책으로 점철된 해방 45년의 역사 속에서 총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
친일 민족반역자, 그들은 왜 처단되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일을 8.15 해방이 4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어리석게도 다시 민족 앞에 던져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바로 이 물음의 대답이다. 다시 말하자면 '친일 민족 반역자 및 일제 잔재 청산'의 좌절로 8.15 이후 민족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짐으로써 '분단과 독재'를 이 땅에 강요한 원인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려 4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과거의 추악한 역사를 끄집어 내어 누구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잘못 끼워진 역사의 첫 단추를 바로잡아 민족 통일과 민주화로나아가는 민족사의 물고를 터자는데 있다.
-
이런 점에서 8.15 해방 당시 친일 민족반역자의 처단과 일제가 남긴 더러운 식민시대의 찌거기를 청산하는 일이 이후 3천만 우리 민족의 앞길에 어떠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 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쪽발이 왜놈이 총칼을 들이대고 3천만 우리 민족을 마치 개 돼지 취급하며짓발고 착취하던 식민지 조선. 그 땅에서 우리 민족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지내야 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항일투사와 민중들이 민족해방의 성스러운 전선에서 죽어갔고, 차디찬 감옥 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
그 때 친일 민족 반역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 우리 속담에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믿다."는 말이 있듯이 친일 민족 반역자들이란 당시 우리 민족에게 그런 족속에 속하는 무리였다. 제 한몸, 제 일가족만 잘 살고자 침략의 우두머리, "천황폐하 만세 !"를 목청껏 외쳐되며, 동포를 짓밟고 침략자에게 동포를 팔아 먹은 자, 이들이 바로 친일 민족 반역자들이었다.
때문에 친일 민족 반역자들에 대한 민족과 역사의 이름 아래 이루어질 준엄한 심판은, 8.15 해방과 더불어 높은 정치 의식을 가지고 다시는 외세의 간섭과 침략을 받지 않을 튼튼한 민족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에 온 정열을 쏟고 있던 3천만 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이었다. 이 염원의 실현은 새로운 조국 건설을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그러므로 이 염원의 실현은 당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그것은 식민지를 경과하면서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강요했던 민족 내부의 분열을 청산하고, 민족이 하나의 힘으로 통합하는 지름길이었다.
-
둘째, 그것은 민족 내부에 옳고 그름의 엄격한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다. 즉 일제가 뒤틀어 놓은 민족사를 바로 잡아,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고 사회 가치관을 올바르게 하는 일이었다. 그럼으로써 다시는 민족 내부에서 민족을 배반하는 자, 외세에 빌붙는 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귀중한 역사적 교훈을 후손들에게 남기는 것이었다.
-
세째, 8.15 당시, 친일 민족 반역자 처단의 보다 중요한 현실적인 측면은 이들이 일제 시대에 확보한 경제력(매판 자본가, 매판지주), 정치력(친일 군인, 친일 경찰, 친일 관료, 친일 지식인 등과 일제가 남긴 식민지 통치 기구 등) 등을 이용하여, 새조국 건설을 방해하거나 그것을 뒤집어 엎을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일이었다.
-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친일 민족 반역자의 처단과 일제 잔재의청산 문제는 결과적으로 남한을 점령한 미 군정과 민족 보다는 '대권'에 눈먼 '친미주의자' 이승만에 의해 유야무야되고 말았다.아니 처단은 커녕 오히려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극진한' 보호 아래 또다시 '살맛나는 친일파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대한 명확하고도 올바른 비판과 청산 없이는 평화스런 현실도, 밝은 미래도 있을 수 없다. 한 개인의 삶도 그러할진데 그것이 한 국가와 한 민족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결코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청산되지 못하고 덕지덕지 묻어 있는 '친일의 흔적과 때'는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반드시 지워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친일의 역사 - 일제 시대 친일의 논리와 행태, 8.15 이후 이들이 또다시 살아남는 과정 그리고 친일 위에 분칠된 애국의 논리와 '반공 친미'의 실상 - 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
- 2.'민족을 위한다'는 친일파의 궤변
-
- 우리 역사에서 친일의 근원을 따지자면 그 뿌리는 무척 오래된다. 단지 일제 시대만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
1876년 일제가 우리 나라를 총칼로 문호를 개방시킨 후부터 친일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남보다 먼저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인 선각자들로서 주로 정부 관료나 지식인, 어용 단체(이른바 개화파들인 박영효, 박정양, 윤치호, 이완용, 일진회 등)들이었다. 이들은 1905년 일제가 우리 민족의 주권을 박탈한 '을사 조약', 그리고 1910년 8월 29일의 '한알 병합'에 이르기까지 줄곧 '일본식 근대화'를 주장, 즉 일본의 힘을 빌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화는 침략과 식민지화가 아니라, 그야말로 '지상 천국'으로 향하는 '애국의 길'이었다.
이들은 그 자랑스런 애국(?) 때문에 합방 이후 일제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훈작'(자작, 남작 등과 같은 귀족 칭호)을 받고 막대한 양의 '은사금'을 하사받아 '친일 주구'의 선봉이 되었다.
이러한 친일의 문제가 우리 민족 앞에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는 때는 1919년 '3.1 운동' 이후이다. 왜냐하면 앞시기의 친일이 개별적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집단적이고, 이전까지 민족 지도자로 행세를 해오던 부류들이 민족주의의 가면을 써고 일제의 사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친일에 나섰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가증스럽게도 자신들이 민족 독립 운동의 한 분파임을 주장하여 민중을 현혹 기만하기 조차 하였다.
이로 인해 민족 해방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민족의 단결이 저지되고 독립을 포기하게 하는 폐배주의 의식이 유포되어 민족 해방 운동은 심각한 손상을 당하였다.
-
3.1 운동으로 총칼만을 앞세운 무단 통치가 한계에 부딪히자 일제는 1920년대부터 '한 손에 당근, 한 손에 채찍'이라는 기만적인 '개량 정책'(이른바 '문화 통치')을 우리 민족에게 사용하였다. 이 정책의 본질은 당시 조선 총독부 경무 국장(오늘의 치안 본부장) '마루야마 쓰루기찌'가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
"... 조선의 독립은 아무래도 실력을 충분히 양성하고 문화를 충분히 발달 향상시킨 뒤가 아니면 독립 문제는 가망없다는 것을, 조선의 유식층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지금은 참으로 내선 융합하여 조선 민족의 문화 발전을 위하여 다른 생각없이 분투 노력하는 가장 좋은 방책이다. 여러분이 만약 꼭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면 그 이루어야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이것밖에 없다. ... 만약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 가능성은 조선을 여러가지로 돌봐주었더니 이제는 혼자서도 해갈 정도가 되었으니 한번 시켜보자. ... 이렇게 되어 승인을 하고 원조를 주게 되는 경우 이외에는 없다고 본다. 일본에 반대하여 일본과 싸워서 독립하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는 일이다.
-
... 지금 당장 독립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의 대에 이루어질 지, 손자 대에 이루어질 지 아뭏든 목표를 거기에 두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상당한 실력이 생길 것이다. 실력이 생기면 그 실력에 의하여 독립을 꾀하는 것이 독립 운동의 정당하며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대체로 조선 사람의 머리가 달라지게 되었다. ..."
-
이 정책의 기본 내용은 조선은 당장에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항일 투쟁을 포기하고 일제의 보호 아래 먼저 정치, 경제, 문화적 실력을 쌓은 후에 독립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조차도 일제가 '이제는 독립을 해도 되겠구나'하고 인정할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는 조선의 실력이 부족한 이유는 '힘센 외국에 빌붙기 좋아하는 사대주의 근성', '단결하지 못하는 당파성', '근본적으로 못나고 게으른 민족성'과 '따라지 엽전 근성' 등 때문이라며 우리 민족 내부에 더러운 '식민 사상'을 광범위하게 퍼뜨렸다.
-
이러한 일제의 개량 정책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첫째, 3.1 운동 이후 굳게 단결된 민족 내부에 분열을 조장하여 우리 민족의 단결을 저지하고 둘째,우리 민족에게 패배주의 및 허무주의를 주입시켜 민족 말살을 도모하며 세째, 일부 조선인 재산가와 지식인에게 재산을 축적하고 식민 통치의 말단 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 줌으로써(이를 친일파들은 '민족 자치'니 '실력 양성'으로 가장) 친일파를 대량으로 양성하려는 데 있었다.
-
이때부터 우리 민족 내부에는 이러한 일제의 기만적인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여 '민족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사실상 민족 독립을 포기한 집단이 민족주의 내부에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1920, 30년대 실력 양성을 을 위한 준비를 뇌까리던 '자치론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대개 1910년대 민족주의를 자처해 온 대지주 출신들과 지식인들이었고,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여 떼돈을 벌거나 입신 출세한 매판 자본가와 친일 식민 관료들이었다.
-
- 특히 친일파의 집단적 근거가 된 것은 호남 지방의 대지주에서 매판 자본가로 변신한 {동아 일보}계의 김성수 일가였다. 여기에 기회주의적인 지식인들인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이 친일의 이론적 대표자로 나섰다. 한 때 이들은 우리 나라 근대 문학의 개척자로 또는 3.1 운동의 민족 지도자로 추앙받던 자들이기도 하였다.
-
당시 동아 일보계의 김성수 등은 친일파들을 끌어모아 [연정회](1923)라는 단체를 만들어 민족 해방 운동을 좀먹는가 하면 최남선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명분으로 삼았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조선과 일본 민족의 조상은 한 뿌리라는 주장)을 설파하며 일제의 조선 침략을 지지하였다.
-
특히 이광수는 민족 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인 최린이 경영하던 {개벽}지와 김성수의 동아 일보에 [민족 개조론]({개벽} 1921)과 [민족적경륜]({동아 일보} 1924.1.2 - 6)을 발표하여 친일의 논리를 체계화하였다.
-
이광수는 [민족 개조론]에서 '한민족의 식민지화는 민족성(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태, 무신(無信), 사회성의 결핍 등)때문'이라고 하여 식민지화의 원인을 일제의 침략이 아니라 '타락된 민족성'의 탓으로 돌려 일제의 침략을 합리화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일제의 침탈에 온 민족이 단결하여 저항한 3.1 운동을 '무지 몽매한 야만 인종이 지각없이 추이하여 가는 변화와 같은 변화'였다고 혹평하였다.
-
그리하여 그는 [민족적 경륜]에서 그 대책으로서 일제에의 부질없는 저항을 포기하고 일제의 식민지를 인정하는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타락된 민족성'을 개조하는 '인격 수양'에 노력하는 한편, 실력 양성을 위한 교육과 산업 발전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
이광수의 이러한 주장은 '20년대 김성수계를 중심한 매판 자본가와 지주들이 주장하는 '실력 양성에 의한 민족 자치의 실현'이라는 '자치론'을 뒷받침한 이론적 지침이 되었다. 이는 3.1 운동에 놀란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서 한 손에 내민 '당근의 논리'와 하등 다를바없는 '친일의 궤변'일 뿐이다. 따라서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이 어떤 사탕 발림의 변명을 늘어 놓드라도 그것은 사실상 민족 독립을 스스로 포기한 친일의 논리이다. 더구나 이러한 친일의 궤변이 일제의 사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제가 내민 당근(재산 축적의 기회와 신분 보장 및 식민 통치에의 참여)에 자발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이것이 이후 민족 내부는 물론, 민족 해방 운동의 전진에 끼친 해독은 이루말 할 수 없었다.
-
그러나 이러한 친일파의 가면은 1930년대 이후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고 조선을 침략을 위한 '후방 전진 기지' 즉 조선에 '병참 기지화 정책'을 실현하면서 낱낱이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
대륙 침략의 발톱을 더욱 날카롭게 드세운 일제는 조선에 대해서 더 이상의 '민족 자치'니 '실력 양성'이니 하는 사탕발림이 필요없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식민지 조선 전체를 침략 전쟁에 총동원하는 것뿐이었다. 일제 스스로가 '내선 일체'를 주장하며 극악한 민족 말살 정책을 단행하는 상황에서 그 동안 민족 운운 하며, 먼저 실력을 양성하고 일제로부터 민족 자치를 얻어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민족 독립을 얻자는 친일파의 주장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었다. 이제 이들이 가야할 길은 너무도 뻔한 것이었다.
-
친일파들은 일제가 사주하여 만들은 온갖 친일 단체([임전 보국대] [국민 정신 총동원 연맹] [조선 방공 협회] [녹기 연맹] [조선 문인 보국회] [대의단] 등)에 참여하여, '황국(일제)의 신민'(일본 천황의 적자)임을 앞다투어 자랑하며 '반미국 반영국 항전'의 침략 전쟁에 앞장설 것을 제동포에게 침을 튀기며 글로, 연설로 주장하였다.
-
친일 매판 자본가들은 침략 전쟁에 필요한 군수 공장을 건설하고(박흥식의 '조선 비행기 주식 회사', 김연수의 '조선 항공 공업 회사' 등) 돈있는 자는 비행기와 총포를 헌납하는가 하면(백낙승, 방의석의 '애국기' 헌납, 손창윤의 기관총 50정 등), 언론인이나 문인 등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젊은 아들, 딸들에게 '영광스런 조국(일본)의 성전(일제의 침략 전쟁)'에 총알받이(강제 징병)로, 위안부(여자 정신대)로, 일꾼(강제 징용)으로 자랑스럽게 나설 것을 촉구하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
해방 이후 우리 문단의 주요한 인사 가운데 한사람인 모윤숙의 1940년대의 모습을 보자. 개성 호수돈 여고와 이화 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모윤숙은 1940년, 일제의 발악적인 탄압과 침략 전쟁이 한참이던 무렵, 당시 친일 문인들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이때 친일 문인들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킨 논리는, "대동아 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4백년 침략의 마수에서 동아시아 10억을 구출하고 동아시아인을 위한 대동아를 건설하자는 성전이다. 그러므로 총무장하고 내핍 극기하고 이 위대한 성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이 철저한 '반미주의자' 모윤숙은 1942년 1월, 일제가 조선인을 침략 전쟁에 총동원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 중의 하나인 '조선 임전 보국단' 산하 기관인 조선 임전 보국단 부인대의 간사로 참여하면서, 온갖 친일 문필 활동은 물론 조선인 부인 계몽을 위한 전국 순회 연설에 연사로 적극 활동하였다. 그때 그녀가 한 '여성도 전사다'라는 연설을 보면,
-
"이번에 영.미국의 죄상을 듣고 알고 보니까 참으로 황인종으로서는 견디지 못할 쾌심하고 분한 일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이 사탄의 정체에 같이 춤추는 여자가 한분 동양에 있읍니다.그 분은 바로 저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입니다. 이 여자는 어떻게 된 셈인지 동양 여성이면서 미국 발바닥을 핥아야 행복감을 느끼는 변태 여성입니다. ... 이런 여성이 동양에 있어 사태를 어지른다는 것은 같은 동양 여성으로서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가슴에 대화혼의 무형한 총검을 가져야겠읍니다. ... 가문에서 쫓겨나더라도 나라(일본 - 필자)에서 쫓겨나지 않는 아내.며느리가 됩시다. ..."({대동아} 1942.5) 라고 역설하였다.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을 '미국의 발바닥을 핥아야 행복감을 느끼는 변태 여성'이라고 '추악한 욕설'을 퍼부었던 모윤숙, 그 스스로 '자신의 조국' 일본이 망한 8.15 이후 절절한 미국 예찬론자로 변신하였으니 자신은 '변태의 변태의 여성'인가 ?
얼마전 우리 나라 일간 신문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가 '민족지'임을 자랑하는 창립 70주년을 맞이하여 요란스런 행사를 벌였다. 그리고 '88년 5공화국의 언론 말살 정책을 다룬 '국회 청문회'에서 당시 한 국회 의원이 일제 말기 조선 일보의 친일 행각을 지적하자, 청문회에 출두한 조선 일보 사장 방우영은 그것은 '민족사에 대한 모독'이라며 핏대를 올린 적이 있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
1920년에 창간된 조선 일보를 현재의 방씨 가문이 장악한 것은 1933년 1월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온양 정씨 방응모가, 1924년 금광업에 손을 대 일약 떼부자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조선 일보에 50만원을 투자하여 경영권을 장악하였다. 이미 자본가로 변신한 방응모는 "... 저녁이면 사교 관계로 영월관, 식도원으로 돌아다니며 재벌과 대관집을 찾기도 하고 ... 천도(川島)군사령관의 초대를 받고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는 등({삼천리} 1934.4) 친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
-
그는 조선 일보를 인수한 이후 그 동안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항일의 기사를 써왔던 '애국 기자'들을 모두 거리로 내몰고, 지금의 조선일보 사시인 '정의옹호' '문화건설' '산업발전' '불편부당'의 4대 사시를 내걸고 '영광스런 친일 신문'으로 탈바꿈하였다. 예컨대 당시 조선 일보가 내건 '정의옹호' 그것은 무엇을 위한 '정의'인가 ? 그것은 민족 해방을 위한 조선 민족의 정의가 아니라, 조선을 식민지하고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본 침략의 '정의'였다. 이러한 사정은 신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일보에 실린 당시 사설에서 분명해 진다. 1938년 1월 1일자 조선 일보의 논설을 보면,
"남(南)총독의 새표어로 제창된 것이 내선 일체이다. 일선동화도 내선융화도 옛말로 돌린 내선일여에서 내선 일체로 바꾸고 ... 이는 내선 양족의 동족 친화감을 깁게 함에 잇섯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야 동아 신질서 건설의 보무는 일만지(日滿支 - 일본, 만주 ,중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곧 일본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권'이다.- 필자)의 삼국에서 활발히 전개될 이때를 당하여 조선에서도 건설 운동은 ... 개시 ...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의 활동이 곧 그것이 될 것이다."
라고 하여, 과연 '일본 민족지' 다운 면모와 '정의 옹호'의 본색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구나 '민족지' 임을 자랑하는 조선 일보는 1940년 8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는 데 그때 조선 일보는
- "조선 일보는 신문 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 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지나 사변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報道保國)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엿고 더욱이 동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저 ...신체제가 건설되려고 하는 이 때에 신문 통제가 국책으로 수행되는 이상 우리는 이에 순응하는 이외에 다른 사정을 운위할 수 바가 아니다..."
라고 폐간의 심정을 밝히었다.
어떻게 항일의 선봉, 민족 조선 일보가 일제의 부당한 폐간 조치에 '찍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그 조치에 '순응' '협력'할 수 있는 가. 이러한 친일의 행각은 그 경쟁 관계에 있던 {동아 일보}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구린내나는 친일의 과거 때문에 양대 신문은 1920년대 발행된 자사의 신문은 자랑하면서도, 1930년대 중반에서 폐간까지 발행된 신문을 결코 공개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일제 시대 양신문이 그 나마 항일의 역활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1920년대 일제의 탄압과 경영주의 '해고'에도 굴하지 않고 펜을 꺽지 않았던 기자들 때문이었지, 결코 일제와 타협하거나 굴종했던 사업주 즉 자본가의 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기자를 거리에 내쫓고 '친일'에 앞장섰을 뿐이었다.
-
역사의 진실이 이러할진 데 오늘날 양 신문의 경영주들이 자유 언론을 지키려는 민주 기자들을 거리에 내몰면서 '민족지' 운운하는 것은 일제 시대 숱한 고난을 겪으며 항일을 해 온 애국 기자들의 '공'을 한입에 가로채려는 '날강도 짓'에 다름아니다.
이처럼 여기에 언급된 조국과 동포를 저버리고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해 온 일제의 주구, 친일파의 친일 행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8.15 이후 역사에서 볼 때 더욱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조선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조선인 식민지 관료, 항일 운동가를 때려 잡거나 염탐하던 악질적인 조선인 고등 경찰과 밀정, 항일 운동가를 다스리던 조선인 판사, 검사 그리고 만주나 중국에서 항일 독립군을 때려잡던 조선인 일본군(만주군) 등 식민지 사회의 전부분에서 친일파들이 날뛰고 있었다.
- 1956년 현재 주요 전투 부대 지휘관과 일제시 경력
직위 |
계급 |
이름(나이) |
일제시 경력 |
육군참모총장 |
대장 |
정일권(37) |
만주군 장교 |
제1군 사령관 |
대장 |
백선엽(35) |
만주군 장교 |
1군 단장 |
중장 |
최덕신(42) |
중국군 장교 |
2군 단장 |
중장 |
함병선(36) |
일본군 중사 |
3군 단장 |
중장 |
송요찬(37) |
일본군 중사 |
5군 단장 |
중장 |
최영희(34) |
일본군 장교 |
6군 단장 |
중장 |
이한림(34) |
만주군 장교 |
제2군 사령관 |
중장 |
강문봉(34) |
만주군 장교 |
- 이들은 민족의 독립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일본 제국주의의 번영이 영구화되어 '영광스런 천황의 적자'로 살아 남을 것을 믿고 또 믿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그들의 영원한 보호자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그러나 역사의 정의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고 그들의 뜻대로 되지도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마침내 '해방'을 맞게 되었고 일제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던 친일파들의 꿈과 희망은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 이제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조국과 동포를 배신한 그들의 '죄'를 단죄할 역사의 심판뿐이었다. 아 ! 그런데, 그런데 ...
-
- 3.우리는 '반공 민주 투사'
-
- 앞서 밝힌대로 8.15 해방 직후 '친일 민족 반역자의 처단'과 '일제 잔재의 청산'은 구시대를 마감하고 해방된 신사회를 건설하는 데 무엇보다도 우선해야할 일이었다. 때문에 해방 초기 친일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보호자가 역사의 패배자로 사라진 상태에서 온 몸을 움추리며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36년을 치떨리며 왜놈의 지배를 받아 온 이땅의 주인인 민중은 물론, 국내의 감옥을 오가며 또는 이국 땅 만주와 중국에서 민족 해방을 위해 싸워온 항일 운동가들은 즉각적인 친일 민족 반역자의 처단을 주장하였다. 이일은 어떠한 이유로도 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온 민족의 한결같은 희망은 1945년 9월 8일, 이 땅에 미군이 들어오면서부터 하나하나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여 다스린 군정 3년은 새로운 자주적 민족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 진영과 이를 저지하고 이승만과 친일파를 앞세워 남한에 '친미 반공 국가'를 세우려는 미 군정과의 대립 갈등의 연속이었다.
-
일제라는 보호자를 졸지에 잃어버리고 고아가 된 친일 민족 반역자들에게 9월 8일, 미군이 남한을 점령한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희소식'이 아닐 수없었다. 일제 시대의 매판 자본가와 지주들은 '미군 환영'을 명분으로 동아 일보계의 김성수를 중심으로 모여든 후 [한국 민주당]을 결성했다.
아니나 다를까 9월 8일 인천을 통해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남힌에 미 군정 실시를 선포하고, 한민당 인사를 대거 군정 고문으로 고용하는 한편, 일제의 식민 통치에 이바지했던 친일 식민 관료의 원상 복귀를 명령하였다. 더구나 미군은 그 해 10월 2일, 이미 폐지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법률과 조선 총독부가 발표하여 법률적 효과를 갖는 규칙, 법령, 고시, 그밖의 모든 것은 1945년 8월 9일 현재 실시하고 있는 것을 미 군정청이 특별법으로 폐지할 때까지 그대로 사용한다."라고 하여,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일제가 만든 모든 식민 통치 기구와 온갖 악법을 '해방된 땅'에 그대로 되살려 놓고 말았다.
-
미군의 이러한 조치는, 우리 민족이 8.15 이후 기대했던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하루아침에 뒤업고 말았다. 미 군정은 이로써 친일 민족 반역자의 새로운 보호자로 등장하였고, 새롱운 보호자를 갖게된 친일 민족 반역자들은 '아 ! 옛날이여'하던 시절의 지위를 갖게 되어 다시 거리를 힘차게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다 해외 동포 가운데 '약삭빠르게' 남한에 먼저 들어온 '협잡꾼' 이승만(이에 대해서는 본 회보 2호 참조)은 '과거 청산'을 위한 '친일파의 우선 처리'를 '민족 분열'이라고 비판하면서 무조건 단결을 주장하며, 자신의 주위에 친일파들을 결집시켜 나갔다. 친일파들에게 있어 이승만은 미국에 이은 또 한사람의 구세주가 아닐 수 없었다. 예컨대 모윤숙 같은 '반미주의자'를 비롯하여 친일 식민 관료들이 속속 이승만의 그늘밑으로 숨어들어 갔다. 해방된 이 땅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미군은 무슨 '억하 심정'으로 이 땅의 한결같은 염원을 저버리고 친일파를 재등용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한반도에 미국에 우호적이며 소련에 적대적인 '친미 반공 국가'를 세우려고 했던 미국의 정책과 그들의이익 우선 때문이었다. 여기에 조선 민중의 염원이 스며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런 점에서 남한에 들어온 미군의 눈에 비친 실제 상황은 그들의 구미에 근본적으로 맞지를 않았다.
-
당시 남한에는 이념과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족'과 '반민족'의 대립이 주요한 문제였고, 민족 내부에 존재하던 이념과 사상의 차이는 자주적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 단결, 즉 민족 통일 전선으로 해결하려는 자주적 노력이 추구되고 있었다. 또한 혹독한 이민족의 침탈과 지배를 경험한 우리 민족은 어떠한 외세의 간섭도 용납
- 하지 않으려는 강렬한 자주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이념'(반공)과 '간섭'이 필요한 미군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동맹자로 확보할 수 있는 자로는 남한에서는 친일파들뿐이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기회주의에 단련되어 있었고 자신이 사는 길이면 민족도 조국도 아랑곳하지 않는 충성스런 인자들이었다. 해방된 조국의 '대권'을 꿈꾸고 일착으로 귀국한 이승만 역시, 국내에서 부족한 자신의 대중적 정치적 기반과 심복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들이 절대 필요하였다.
한편 미국은 훗날, 미 군정 당시 남한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친일파를 재등용한 것에 대해서 남한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러했다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그들이 남긴 기록({g-to 보고서} 1945.10.21 -28)에 의하면 새빨간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의 친일파 고용은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 군정 선포 이후 한민당의 대표로 조병옥, 윤보선 등이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를 만났을 때, 그들은 여운형 등 항일 운동가를 '잘 알려진 부일 협력자'라느니 '공산주의자'라느니 하면서 비난 모략하였다. 이 점레 대해서 그 기록은 오히려 한민당의 주요 인사들이 부일 협력자 이자 철저한 '반미주의자'들 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그 내용을 일부 요약하면, 장덕수:'미국은 흡혈귀' 1941.12.11, 양주삼(당시 군정 고문): '미국은 인류의 적이다' 1944.8.6, 김성수:'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대의에 죽을 때 황민의 책무는 크다.' 1943.6.8 등)
이런 과정을 거쳐 친일파들은 또다시 제 세상을 만났고 '친일'에서 '친미'로 노선을 바꾸어 미 군정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 군정은 일제의 폭력 기구인 식민 경찰 조직을 신속히 복구하여 민중과 항일 세력을 탄압하는 데 앞세웠다.
그러자 해방된 이 땅에서 일제 시대 항일 세력을 때려잡던 악명높던 '친일 고등 경찰' 출신들이 이제는 군정 경찰이 되어 민중과 항일 세력을 탄압하는 또한번의 기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렇게 미군정에 다시 등용된 친일파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서도 민중과 항일 세력을 탄압하는 데'솔선 수범'하였다.
-
이는 1946년 10월, 남한 전국을 뒤흔들었던 '민중 항쟁' 과정에서 민중의 첫째 공격 대상이 군정 경찰서와 관공서 그리고 친일파들 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10월 항쟁 이후 친일 경찰의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고 그 대책 마련을 위해서 열린 '한미회담'에서, 당시 군정 경찰의 미군 책임자 w.맥글린이 한 보고에서 잘 나타난다. 1946년 현재 군정 경찰에 재직 중인 친일 경찰의 분포
-
직위 |
1946년 총수 |
식민 경찰 출신 |
비율(%) |
치안감 |
1 |
1 |
100 |
청장 |
8 |
5 |
63 |
국장 |
10 |
8 |
80 |
총경 |
30 |
25 |
83 |
경감 |
139 |
104 |
75 |
경위 |
969 |
806 |
83 |
- (전체 경찰 간부의 80% 이상이 친일 경찰 출신)
- 이 회의에서 당시 경무국 수사 과장 최능진(평안 남도 건국 준비 위원회 치안대 출신)은 "(군정 경찰은) 북한에서 축출된 부패한 식민 경찰관을 포함해서 일본의 훈련을 받은 경찰과 반역자의 피난처"이며, "경무국은 부패했으며 민중의 적이다."라고 지적하며 친일 경찰의 숙청을 요구하였다가, 당시 경무 국장 조병옥에 의해서 쫓겨나고 말았다. 물론 그 시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이러한 사정은 군정 경찰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군군의 전신이자 당시 경찰의 보조 기구로 출발한 '국방 경비대', 각 지방의 군정 기관에 등용된 관리 등도 마찬가지 사정이었다. 그러나 이들 친일파들이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 이념적 집단으로서 '반공 민주 투사'로 자신을 탈바꿈하게 되는 계기는 이른바 '신탁 통치 파동'이었다. 즉 친일파들은 미국과 동아 일보가 조작한 '반탁 운동'의 열기를 이용하여 '반공 민주 투사'로 변신하였던 것이다. 미.소.영의 삼국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만나 결정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안'(1945.12.16 - 27)은 전후 한반도 문제의 처리 방침을 합의한 것이었다. 이 무렵 남한 사회의 주된 관심사는 민족 내부의 '반미족 진영'(친일파)을 제외하고 남북한에 통일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민족 모두가 지닌 새조국 건설을 위한 중요한 사회적 가치관은 이념과 사상 보다는 '친일파냐 아니냐'였다.
이런 국내의 상태에서 그 해 12월 28일 동아 일보는, 삼상 회의의 과정이나 결정안에 대한 올바른 설명은 하나도 없, 제1면에 '워싱턴발' 기사로 "미국은 즉시 독립을, 소련은 신탁 통치를" 주장했다는 소식과 함께 향후 최소한 5년간의 신탁 통치가 한반도에 실시된다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전하였다.
이 기사는 우리 민족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즉시 독립'만을 오매불망 희망하고 있는 데, 신탁 통치라니 그것도 5년간의. 신탁 통치 그것은 곧바로 '한반도의 재식민지'로 받아들여졌고 남한에는 벌집 쑤신듯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또한 반탁 운동의 과정에서 민중은 신탁 통치를 주장한 소련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올랐다.
-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여유도 없이 민중은 반탁 운동을 거세게 전개하였고 모스크바안을 지지하는 세력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조선을 재식민지하려는 자'로 단죄되었다. 즉 반탁 운동은 자연스럽게 '반소 반공'의 정치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또한 이 돌변한 사건으로 나라안의 관심은 '친일파 문제' 보다는 '신탁 통치 문제'로 이동하였다.
-
그런데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온 소련 대표들은,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팽배한 '반소 반공'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그 원인을 알게된 소련 대표가 모스크바 회의 과정 및 결과에 대한 '진실'을 밝힘으로써 이 파동은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고, 나라안의 관심도 '반탁'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과에 집중되어 갔다.
-
소련이 밝힌 '진실'이 무엇이길래 그 뜨꺼던 반탁 운동이 누그러졌는가 ? 그것은 한마디로 '애초에 신탁 통치를 주장한 나라는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은 1943년부터 한반도의 처리 방침으로서 30 - 50년에 걸치는 신탁 통치를 주장해 왔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돌아오는 의문은 사실을 보도해야할 신문이 왜, 이런 정반대의 잘못된 기사를 전하였고, 이를 이미 알고 있던 미국이나 군정 당국은 무슨 이유로 소련의 항의와 발표가 있을 때까지 사실에 대한 정정 노력없이 '반탁'을 '조장' 내지 '묵인'했는가이다.
그 대답은 이후 한반도 역사의 결과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대다수 국민은 '미국이 신탁 통치를 제안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그럴리 없다며 "턱도없는 소리 마라"({말} 1989.3)하며 잘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만큼 이 사건이 우리 민족 내부에 남긴 상처의 골은 깊다.
이 신탁 파동으로 친일 문제가 여론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새롭게 부상하는 한편, '반소 반공'의 여론이 남한 사회 내부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 관계에서 미국이 조장한 이른바 '냉전 이데올로기'(반공 이데올로기)가 남한 사회에 터를 잡게된 것이다.
이때 이로인해 '덕'을 본 자 누구인가 ? 그것은 친일파와 미국뿐이었다. 친일파들은 친미와 더불어 '반공'을 앞세워 '민주 투사'로, '애국자'로 탈바꿈하는 한편, 자신들의 친일 행각을 비판하는 세력을 '반공'으로 탄압하였다.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남한 내에 '반소 반공'의 새기운이 나타남으로써 남한에 소련에 적대적인 친미 반공 국가를 세우려던 자신의 목적을 손쉽게 달성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한반도는 이러한 구도 아래 친미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의 중심으로 하는 친일파와 한민당 그리고 미군정의 의도대로 남한에 '남한 단독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반면에 이 땅의 민중과 항일 세력은 자신의 염원이었던 남북한 통일된 민족 독립 국가의 꿈이 좌절된 속에서 '반공'의 칼날 아래 신음해야만 했다.
결국 미 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에 이르는 기간 동안 친일파들은 자신의 보호자를 일본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신탁 통치 파동을 거치면서 '반공'을 앞세운 '민주 애국 세력'으로 변모하여 해방된 반쪽 땅 남한의 새로운 '권력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
- 4.'반민 특위'마저 좌절되고
-
- 분단 국가이지만 대한 민국이 수립되면서 우리 민족은 친일 민족 반역자들을 처단할 수 있는 또한번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48년 5.10 선거로 구성된 제헌 국회는 헌법 제101조 "8.15 이전의 악질적인 민족 반역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 는 조목을 설치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그해 9월 7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하 반민법)을 제정하였다. 새정부의 대통령인 이승만은 이 법 자체가 못마땅하였지만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새 정부로서 친일파 문제를 어떤 형식으로든지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공포했다.
해방 3년이라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 시기적으로 늦었지만 그래도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관심은 지대하였고 기대 또한 대단하였다.
반민 특위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1949년 2월 무렵 한 신문은 "민족 정기가 살아 있느냐 ! 죽었느냐를 의심했으나 과연 민족 정기는 죽지 않았다. 보라 ! 눈부신 특위의 활동을 ! ... 반민자의 처단은 결코 보복적인 사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대한 민국을 살리고 사리사욕 때문에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생겨나지 않도록하는 교훈적 의의가 크다고 본다 ..."({서울 신문} 1949.2.2)
-
라고 하며, 특위의 활동을 성원하였다. 또한 {반민자의 죄상기}라는 책에서는 "...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비분에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들 매국 도배들의 난무에 유린당하며 또한 조소를 받아오며 오늘이 올 것을 기다리며 참아왔던가 ! 이땅의 모든 산천초목이 또는 말없이 흐르는 구름 마저 이들에 대한 원한으로 불타고 있었으나 비록 군정 3년간의 후덕(厚德)으로 이들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들이 뼈를 깎는 듯한 참회 대신 간교한 변명을 일삼고 대로를 활보하는 양을 주먹을 처가며 보아 왔으나 오늘 모든 요운(妖雲)이 걷혀버린 푸른 하늘 아래 우리 등에 채찍을 내리고 주검의 터전으로 우리를 몰아내든 이들 매국 도배를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서 우리 손으로 심판 처단하는 날이 돌아 왔다."({반민자의 죄상기}, 고원섭 편, 백엽출판사, 1949, 1쪽)
-
라고 하며, 친일파 처단을 바라보는 감회를 절절한 심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온 국민의 기대와 지지와 성원에도 불구하고 이 법의 제정 과정부터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다. 친일파의 '대부' 이승만을 비롯하여 정부 수립 과정에서 정부 각 기관은 물론 사회 경제의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친일파들의 방해 공장이 없을리 없었다. 그들의 방해 공작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
친일파들은 자신들은 '반공'하는 애국자이므로 자신들을 처벌하려는 반미법을 제정하려는 국회 의원은 '공산당'이라고 몰아치는가 하면, 자신들이 소유한 신문과 같은 언론 매체를 통하여 반민법 제정을 '민족 분열을 조장하는 공산당의 짓과 다를 바 없다'는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법제정을 반대 비난하는 데 혈안이었다.
심지어 8월 27일에는 법란을 심의하고 있던 국회 본회의장에 '대한 청년 당원'을 자처하는 괴한 2명이 난입하여,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자는 '빨갱이'이다며 난동을 부렸다. 그 때 이들이 뿌린 전단을 보면,
1.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 순응하라. 1.민족을 분열하는 반민법을 철회하라. 1.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 1.인민은 여기에 속지말고 가면 의원을 타도하라. 1.민의를 이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지금에 뭉쳐야 한다. 라는 '반공'을 앞세운 '협박장'이었다.
한편 이승만도 그 해 9월 3일, "지금 국회에서 친일파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 데 이전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 처리가 안되고 나라에 손해에 될 뿐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여, 친일파를 두둔하고 반민법의 제정을 반대한 입장을 '점잖게' 표명하였다. 심지어 이법이 공포된 직후인 1948년 10월 하순, 악질 친일파의 온상이었던 경찰에서는, 서울 시경 수사 과장 최난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전임 수사 과장 노덕술 등이 반민법 제정에 앞장서 온 국회 의원을 암살하려던 음모를 진행하다가 들통이 나기까지 하였다. 그만큼 친일파들의 방해 공장은 다방면서 이루어졌고 그 방법도 폭력적이었다.
-
이러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10월 23일, [반민족 행위자 특별 조사 위원회](이하 반민 특위)가 결성되었고, 반민자 대상 7천여 명에 대한 사전 조사를 거친 후 이듬해 1월부터 반민족 행위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이들에 대한 재판도 3월 28일부터 진행되었다. 반민 특위는 반민자 1호로서 매판 자본가 박흥식(50, 60년대 화신 재벌의 총수)의 체포를 시발로 46명의 거물급 반민자를 검거하였다. 그 가운데는 희대의 '고문의 명수'이며 악질 고등 경찰 출신인 노덕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문 치사 사건'으로 수배 중이었던 노덕술은, 무장 경찰 4명의 호위를 받으며 당시 동화 백화점 사장 이두철의 집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었다. 특히 노덕술이 체포되고 반민 특위의 활동이 시간이 갈수록 맹위를 떨치자 이승만은 노골적으로 특위 활동을 방해하고 친일파의 보호에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
이승만은 노덕술이 체포된 이튿날인 1월 26일, 6명의 특위 위원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불러 노덕술은 경찰 공로자라 하여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특위가 이를 거부하자 이승만은 2월 2일,
"치안에 관계되는 일을 중대히 보지않을 수 없으므로 ... 만일 지난 일을 먼저 경계하기 위하여 목전의 난국을 만든다면 민중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경찰의 기술자들을 포용하느 것이 필요하며 ... 정부의 위신 상으로 보나 인심 수습책으로 보나 조사 위원들은 신중히 조처해 주기 바란다."
-
는 담화를 발표하여, 친일 경찰을 노골적으로 비호하였다. 특위가 이승만의 반 공갈적인 담화를 무시하고 활동을 계속해 나가자, 이승만은 국회에 또다시 담화를 보내어 반민 특위의 활동을 정면으로 비난하였다. 그리고 곧이어자신이 공포한 반민법을 그는 "반민법은 그 집행을 정지해야 한다. 반민법은 즉시 개정되야 한다."고 하며, 2월 22일 반민법을 대폭 완화시킨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이 개정안 2월 24일, 국회에서 '민족 정기는 드디어 승리하다'는 국회 의원들의 박수와 환성 속에서 폐기 처분되었다.)
-
반민자의 처리에 앞장서야할 대통령이 친일파를 노골적으로 두둔하고 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자 2월 17일, 특위는 [반민법을 방해하는 대통령 담화를 박함]이라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하여 반민의 의지를 드높였다.
-
"대통령은 항상 반민법 운영과 치안의 책임을 특위에 전가시키려는 듯하나 국민은 속지 않는다. ... 2.3인이 자의로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 운운 하나 이야말로 언어도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자비심이 많아서 이같은 발표로 덕망을 얻고자 하는 가 ... 민족의 분을 볼때는 과거 스십년에 걸쳐 독립군을 죽이고 애국자를 악형으로 고문하여 허위의 문서로 투옥시켰던 악질 반역 죄인을 약간 고문하였다 한들 이것이 또한 무엇이 큰 실수이며, 대통령은 무엇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뼈가 저릴까
-
살인 고문 치사 사건의 장본인 노덕술을 체포하도록 발령하지 않았는가. 특위에서 체포한 즉 요로 당국에서 노덕술의 석방을 간청하지 않았는가. 이러함에도 고문 운운을 언급할 수 있을까.
- 매일 같이 수십명이 특위를 방문하여 내아버지 내어머니 내형 내동생 내자식 내민족의 원수를 최고형으로 단죄하여 달라는 피눈물 섞인 호소를 대통령은 듣고 있는가 ..."
아 ! 그러나 반민자 처벌에 대한 '피눈물 섞인' 국민의 호소는 결국, 이승만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
1949년 5월 '국회 프락치'사건을 일으켜 반민법 시행에 강경한 국회 의원을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돌연 구속하는 한편, 6월 5일 새벽에는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서 중부 경찰 서장 윤기병이 인솔하는 일단의 무장경찰대가 특위 본부를 습격하여 대원과 직원 등 35명을 체포해 버려 사실상 반민 특위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
- 이때의 주모자는 내무 차관 장경근(일제시 판사 출신), 치인 국장 이호(일제시 검사 출신), 시경 국장 김태선(일제시 경찰)이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법개정과 특위 위원의 교체를 통해서 그 해 9월 5일로 모든 업무를 사실상 마감해 버렸다. 그 결과 채 1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반민 특위가 취급한 조사 건수는 682건, 영장 발부 408건에 검거 305건, 특별 검찰부송치 570건으로서 이 가운데 기소된 것은 280건에 지나지 않았다.그리고 재판이 종결된 40건 가운데 실형이 언도된 것은 불과 12건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무죄, 자격 정지 등으로 풀려났다.
실형을 선고 받은 자 가운데 독립군 체포 학살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은 '김덕기', 강의규 의사를 체포 학살죄로 무기형을 선고받은 김태석도 재심에서 감형되었다가 뒤에 모두 풀려나고 말았다.
일제 36년 동안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수많은 친일파와 그들이 저지른 이루말할 수 없는 반역죄가 있건만 이를 책임지는 자 한명 없고 처벌받는 자 한명도 없으니 해방된 조국의 앞날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 아닐 수 없었다.
-
친일파들은 다시 한번 이승만의 극진한 보호 속에서 '반민 특위'의 아슬한 고비를 '빨갱이 소동'으로 넘기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승만은 왜, 친일파를 그렇게 보호했을까 ?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자신의 독재 권력을 지탱해 주고 보장해줄 영원한 정치적 동반자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획책한 '3.15 부정 선거'의 추진자 즉 당시 정부 내각의 면모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 1960년 3월 15일 현재 내각 명단 및 일제시 경력
-
직위 |
이름 |
일제시 경력 |
내무부 장관 |
최인규 |
경성 고등 상고, 조선 생명 보험 회사 |
재무부 장관 |
송인상 |
경성 상고, 식산 은행 |
법무부 장관 |
송진기 |
경성 제대 법과, 고등 문관 시험 사법과, 경지지법 |
농림부 장관 |
이근직 |
일본 홍릉대 법과, 평창. 원주 군수 |
체신부 장관 |
곽의영 |
경성 법전, 괴산.청원 군수 |
부흥부 장관 |
신현확 |
경성제대 법과,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일본상무성.군수성 |
국방부 장관 |
김정렬 |
일본 육사, 일본군 공군 대위 |
치안 본부장 |
이강학 |
일본군 소위 |
-
- 반민 특위의 좌절은 결코 단순한 사건일 수 없다. 마땅히 처단되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고 조국과 동포를 배반한 자에 대한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릴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우리 현대사는 반민주적이며 반민중적인 길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이는 쪽발이의 앞잡이가 국가의 주요 권력은 물론 사회 경제 문화 등 각부문에서 지배적인 힘을 가지고 행사하게 됨으로써 이들은 민족 통일과 사회 민주화로 나아가는 민족사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
- 5.'친일파', 그들은 지금 어디에 ?
-
- 친일 민족 반역자의 처단 좌절의 결과는 결코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미 군정 이후 '친미 반공'을 내세우며 사회 각 부문에 뻗힌 뿌리와 가지는 너무도 튼튼하고 무성하였다.
4월 민족 민주 혁명을 총칼로 짓밟은 '5.16 군부 세력', 이승만 정권 당시 친미 반공의 보루였던 친일 경찰의 힘이 붕괴되자 다시 이를 대신한 군부, 그들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 5.16 군사 쿠데타의 공약으로 '친미 반공'을 천명한 박정희, 그는 1942년 일제의 괴로 정권 만주국의 만주 군관 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면서 "만주국의 낙도를 지키고 대동아 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일제의 대동아 침략 전쟁 - 필자)에서 사꾸라같이 훌륭하게 죽겠읍니다"라고 맹세한 일본군 출신이었고, 1945년 8월 15일 해방 그때까지 일본군 중위로서 만주에서 항일 세력을 무찌르던 용맹스런 침략군의 전사가 아니었던가.
이들이 성립시킨 제3,4,5,6공화국, 반민주적인 군사 독재의 행진이었고 비자주적인 친미주의자와 함께 '신판 친일파'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다.
특히 박정권이 자신의 탈법적인 정권 탈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려고 민족의 자존심 마저 옛날의 상전에게 몇 푼의 돈에 팔아넘기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김종필이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하며 일본과의 비밀 회담을 통해 성사시킨 '한일 회담'(1965), 그 굴욕의 아픈 상처는 지금도 치유되지 못한 채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현재 한일 양국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 문제, 일제 시대 강제 징용된 사활린 교포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강제 징용 및 징병자 보상 문제 등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다. 이는 바로 친일 민족 반역자 처단의 좌절이 가져 온 결과이며, 그들이 옛상전을 상대로 벌인 굴욕적인 한일 회담의 후유증이다.
- 그러나 우리가 8.15가 지난지 무려 45년이 지난 지금, 어쩌면 해묵은 과거사라고 할 수도 있는 친일의 문제를 꺼집어 내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현재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신판 친일파'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민족 내부에 굳게 도사린 '반일 감정'이 결코 단순한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한일 회담 성사 이후 일본은 경제 협력을 빙자하여 남한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시작한 지 오래이고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일본의 찌거기 산업인 '공해 산업'으로 지금 온 국토가 황폐화되고 있으며 경제 자체의 의존율, 막대한 무역 적자로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다 근래에는 '한일 군사 협력' 운운하며 군사적 침략까지 넘보고 있다.
-
이러한 일본의 신군국주의 움직임(나카소네 전 수상의 신사 참배, 군사비의 증가 등)과 재침략을 우려하던 1989년 5월 무렵, 이 친일의 후예들은 다시 한번 '자신의 조국'을 그리워하며 '반일'하는 제동포를 '외국에의 부당한 내정 간섭'이라고 싸잡아 공격한다. 1989년 5월, 일본 육사 3기생이며, 이승만 정권시에는 국군 중장을, 박정권시에는 주일 대사를 지낸 '최경록'은 {산케이 신문}(1989.5.11)에,
-
"나는 일본 육사를 졸업했으며 동기생 3명이 일본 국회 의원이다... 한국의 중심 세대 중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재침략을 경계하는 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에의 내정 간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양국의 신뢰 관계가 다시 구축된다면 바다건너 이웃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우방이 존재하게 돼 한국의 안전 보장에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아시아의 강국 일본이 자위대를 '일본 국군'으로 개칭, 당당히 군사력을 강화하여 아시아의 방파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해 12월 정기 국회에서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심상한 발언이 있었다. 항 야당 국회의원이 대정부 질문을 하는 가운데 군부에 존재하는 친일 일본군의 잔재 문제를 지적하자, 그 답변에 나선 현 국무총리 강영훈은 "일본군 출신들은 광복군에 가담, 조국 독립에 기여했다"고 발끈하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가, 조선의 독립을 돕기 위해서 일본군 최정예 간부를 양성하는 육군 사관 학교에서 '독립군'을 키워냈단 말인가 ? 우리가 지금 친일 문제를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때문이다. 일본의 군사 강대국화가 우리의 안보에 도움이 된다든가, 일본군 출신이 독립에 기여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도움으로 조선을 부국 강병화해야 한다'던 일제 시대 친일파의 주장과 크게 다른바 없는 것이다. 이러나 친일의 인맥과 함께, 또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일제가 남긴 온갖 찌거기'이다. 이는 관료 집단, 문화, 교육 등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깊게 박혀 있다.
- 일본 식민지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
정부 |
학교 |
군대 |
기업 |
가정 |
기타 |
무응답 |
22.7 |
17.7 |
17.0 |
16.7 |
9.8 |
14.8 |
1.5 |
- (일제 잔재에 관한 여론 조사,{중앙 일보} 1989.8.15)
- 이들 잔재 가운데 다음의 사실(해방 당시 미 군정청 출입 기자 미국인 '마크 케인'의 증언)은 현재 '공권력'의 가장 비인도적이며 비인간적인 모습으로서 끊임없는 법정 시비를 일으키고 있는 '고문'의 뿌리를 보게 한다.
"나는 경찰이 각이 날카로운 나무몽둥이로 사람들의 정갱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읍니다. 경찰들은 사람 손톱 밑에 뾰족한 나무조각을 쑤셔 넣기도 했지요. 또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물고문을 받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의 입에다 고무튜브로 계속 물을 퍼부어 거의 질식할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경찰들이 쇠몽둥이로 한 사람의 어깨를 갈기고 쇠고리에 매달아놓는 것도 보았어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친일'과 '일제 잔재'의 문제는 결코 시간이 지났다고 또는 과거의 일이라고 없던 것으로 하고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과거의 잘못된 일을 다루어 그것을 바로 잡는 일이 결코 민족을 분열시키고 현재의 발전을 저지하는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분열이 아닌 '민족 단결'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며, 현재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키는 촉매제이다. 가까이로 유신 잔재의 미청산, 5공 청산의 실패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논리' 등도 모두 바로 이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오늘에 있어 친일과 일제 잔재의 청산은 먼저 그것들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사실의 회복 즉 진상 파악으로 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그런 후에 8.15 이후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과정 즉 친일 위에 덕지덕지 덧칠해진 반민주적 반민중적인 것까지 함께 청산되어야 한다. 결국 이러한 작업은 8.15 해방이 남긴 미청산된 민족사적 과제로서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음 없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럴때만이 우리의 역사는 민족 통일과 온전한 사회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