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조선열전 해석
<사기(史記)> 권(卷) 제115 - 열전(列傳) 제55 - 조선열전(朝鮮列傳)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직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부속시켰다.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1000여 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동)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옛 연, 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때는 마침 효제, 혜제, 고후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의 군장이 (중국에)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에게 입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 2년(B.C. 109)에 한나라는 사신 섭하를 보내어 우거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한나라) 천자의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드디어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라고 보고했다. 천자가 그 공을 기려 꾸짖지 않고 (섭)하에게 요동동부도위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습 공격해 (섭)하를 죽이니, 천자는 죄인을 모집해 조선을 치게 하였다.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으로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좌장군의 졸정인 다가 요동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니,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참형을 당하였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 7000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왕검)에 이르렀는데,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성을 나와 누선(군)을 치니 누선군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 양복은 그의 군사를 잃고 10여 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좌장군도 조선의 패수서군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천자는 양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양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하고,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000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미를 내주었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버리라고 명하시오."라고 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돌아와 천자께 보고하니 천자는 (위)산을 주살하였다.
좌장군이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왕검))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군)도 또한 가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 본시 시중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다가 연과 대지방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는데,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 번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를 잃었으며,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곤욕을 치른 패잔한 군사들이라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장군은 부끄럽게 여겨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좌장군이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조선 대신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누선(장군)에게 항복을 약속했으나, 말만 오고 갈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은 여러 차례 누선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은 (조선과의) 약속을 급히 이루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사람을 보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탐문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양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누선은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 데다가 지금은 조선과 사사로이 잘 지내고 있으며, (조선) 또한 항복하지 않으니 반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으나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였다.
천자는, "장수들이 (일을) 이룰 수 없으므로 전에 위산으로 하여금 우거를 달래 항복하도록 하여 우거가 태자까지 보냈는데도 (위)산이 이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서로 계교가 틀려 마침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양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도 역시 (의견이) 어긋나고 달라서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말했다. "조선이 항복할 형편에 이른지 오래되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누선이 여러 차례 싸우러 나오지 않은 것과 평소의 뜻하는 바를 (공손)수에게, 낱낱이 고하였다. 이어 "지금 이와 같으니 (누선장군을) 체포하지 않으면 크게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 혼자만이 아니고 조선과 함께 우리 군사를 멸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손)수도 이를 옳게 여기고 부절로 일을 의논하자고 누선을 불러 좌장군 진영에 오게 하고는, 좌장군 휘하에 명하여 곧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친 뒤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공손)수를 죽였다.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상 노인과 상 한음과 니계상 참, 장군 왕겹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장졸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 데도 왕은 항복하지 않는다."하고 (한)음,(왕)겹, 노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 3년(B.C. 108) 여름, 니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험(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기가 또 (한에) 반하여 다시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과 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기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
삼을 봉하여 획청후로,(한)음은적저후로,(왕)겹은평주후, 장은 기후로 삼았으며, 최는 아버지가 죽은 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온양후로 삼았다. 좌장군을 불러들여 (그가) 오자,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기시하였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를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을 받고 서인으로 삼았다.
태사공은 말한다. "우거는 험고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섭하는 공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서 난을 당하고 죄에 걸렸으며, (앞서) 번우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결국 양군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된 사람이 없었다."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王之, 都王険. 會孝恵、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即約満為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満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真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真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使禦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即渡, 馳入塞, 遂帰報天子曰「殺朝鮮將」.
上為其名美, 即不詰, 拝何為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発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撃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従斉浮渤海;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 右渠発兵距険.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縦,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斉兵七千人先至王険.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即出城撃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収散卒, 複聚. 左將軍撃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為両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 恐両將詐殺臣;今見信節, 請服降.」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為変,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複引帰.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囲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左將軍素侍中,幸, 將燕代卒, 悍, 乗勝, 軍多驕. 樓船將斉卒, 入海, 固已多敗亡;其先與右渠戦, 因辱亡卒, 卒皆恐, 將心慚, 其囲右渠, 常持和節. 左將軍急撃之, 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 往來言, 尚未肯決. 左將軍數與樓船期戦, 樓船欲急就其約, 不會;左將軍亦使人求閒郤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以故両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 疑其有反計,未敢発. 天子曰將率不能, 前(及)[乃]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子, 山使不能剸決, 與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両將囲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済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 有便宜得以従事. 遂至, 左將軍曰:「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言樓船數期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今如此不取, 恐為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遂亦以為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営計事, 即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並其軍, 以報天子. 天子誅遂. 左將軍已並両軍, 即急撃朝鮮. 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相與謀曰:「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並將, 戦益急, 恐不能與, (戦)王又不肯降.」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険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複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為四郡. 封參為澅清侯, 陰為荻苴侯, 唊為平州侯, 長[降]為幾侯. 最以父死頗有功,為溫陽侯. 左將軍徴至, 坐爭功相嫉, 乖計, 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先縦, 失亡多, 當誅, 贖為庶人. 太史公曰:右渠負固, 國以絶祀. 渉何誣功, 為兵発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失番禺, 乃反見疑. 荀彘爭勞, 與遂皆誅. 両軍倶辱, 將率莫侯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