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동반 네 가족이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
제6회 새조개 축제장을 찾아나섰다
네비의 안내로 추천도로는 공주 - 청양- 광천 - 남당항
1) 남당항 새조개 시식 2) 만해 한용운 생가 3) 김좌진 장군 생가
4) 용봉산 용봉사 5) 보덕사
그렇게 5코스를 하루 일정으로 잡았다
청주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이화수산을 찾았다
새조개를 끄내어 새모양을 보여주었다
새조개 1Kg(사실은 600g) 드시는데 35,000원 가지고가면 30,000원
그렇게 표시한 헌수막이 곳곳에 바다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두사람이 1Kg는 먹어야된다는 그래서 새조개값이 140,000원 거금이 지출
아래사진 새조개는 반 이상 먹은다음에사 찍은 사진이다
보덕사 석등(문화재 자료 제 183호)
가야사지(伽倻寺址)에 있던 것을 1950년 이 곳으로 옮겨왔다.
8角火舍石만 남아 있는데 火舍石의 4면에는 火窓이 뚫려 있고
창가에는 문을 닫기 위한 소공(小孔)이 10개 있고,
창내 바닥에는 등화구(燈火具)를 놓기 위하여
한단 높여 대상(臺狀)으로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화창(火窓)이 없는 다른 4면(面)에는 4천왕상을 부조(浮彫)하였는데
모두 악귀생영좌(惡鬼生靈座)에 두 발을 버티고
높이 87cm, 지름 76cm의 화강암재를 이용하여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3층석탑(문화재 자료 제 175호)
원래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지에 있던 것을 1914년에
일본인이 몰래 내가려다가 보덕사 주지의 항의로 다시 회수하여
군청 내에 보관하게 되었다.지대석(地臺石)
은
4매의 판석으로 조성하였으며, 한 변의 길이가 210cm 이다.
기단면석이나 탑신에는 우주, 탱주 등이 조각되어 있지 않으며
상대갑석에는 탑신 괴임이 만들어져 있다.
탑신과 지붕돌은 각각 별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5층석탑이었던 것이 현재 3층만 남아 있어
1층과 2, 3층은 급격하게 작아지고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3단의 받침을 하고 있으며,
처마는 비교적 날렵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다.
상층부는 복발과 노반만이 남아있다
보덕사 극락전
보덕사는 본래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를 승계하여
1871년(고종 8년)에 창건하였다.
보덕사가 가야사를 승계하게 된 연유는 가야사 터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에 의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1840년(헌종 6)에 가야사를 불사르고 아버지인 남연군(南廷君) 이구(李球)의 묘를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고,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워 버린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새로 법당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 후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자
그 보은의 뜻으로 현 위치에 절을 짓고 보덕사(報德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보덕사는 남연군 묘로 가기 전 약 2Km 지점의 오른편 산에 위치하고 있다.
보덕사는 6.25때 소실되었으나 1951년 2월에는 비구니 수옥(守玉)이 중창하였고,
1962년에는 비구니 종현(宗顯)이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입니다. 좋은 사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