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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포역에서 만난 김석봉 씨.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
ⓒ 변상철 | 관련사진보기 |
김석봉씨는 1971년 8월 납북되었다가 1972년 9월 7일 귀환한 탁성호의 유일한 생존선원이다. 여수 남면이 고향인 김씨는 15살 때부터 배를 탔다. 처음에는 노 젓는 소위 '전마선'을 시작으로 뱃일을 시작해 200톤가량의 동력선까지 승선했던 경험 많은 선원이었다. 주로 상어잡이 배를 탔던 김씨는 고된 조업에 뱃일을 잠시 쉬기 위해 여수 고향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마침 마을에서 알던 분이 오징어 배 선장을 하게 되었다면서 배를 같이 타자고 하는 거예요. 사실 오징어는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어서 어디로 가서 어떻게 잡는지도 몰랐어요. 그렇지만 선장이 하도 부탁하고, 또 마을 사람들도 여럿이 같이 간다고 하니 그럼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에 오징어 값도 좋아서 돈벌이도 꽤 된다고 해서 결국 따라나섰죠.
그렇게 여수 안도 주민 5명이 함께 탁성호에 승선해 출발했다. 그리고 여수에 들러 나머지 20여 명의 선원들을 추가로 모집해 31명의 인원으로 강원도를 향해 출발했다. 강원도 묵호에 들러 조업 신고를 하고, 어구 등을 장만해 바다로 나갔다. 당시에는 오징어를 잡자마자 내장 손질을 해 소금간으로 저장하는 방식으로 조업했다. 그런 작업은 며칠간 이어졌다.
밤새 작업을 하고 오전에 선실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누가 나를 깨워요. 그때가 아침 10시 정도 된 것 같았어요. 일어나서 밖을 나가보니 웬 경비정이 우리 배 옆에 붙어 있더라고요. 처음에 그 배가 북한 배라고는 생각 못하고 한국 경비정인 줄 알았어요. 그 배가 우리 배 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북한 인공기가 보이더라고요. 그걸 보니 죽었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젠 죽었구나 하면서 울기만 했었어요.
해군에 도움 요청했지만
북한 경비정은 탁성호를 위협해 북쪽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몇 시간을 끌려가던 중 기관장이 고의로 기계를 꺼버리고 엔진 고장이라며 배를 세웠다. 북한 경비정은 줄을 던져 주며 배를 묶으라고 했고, 그 사이 남한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던 선장은 무전을 치며 한국 경찰 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북한 경비정은 따라오지 않으면 포를 쏘겠다며 위협했고, 뒤늦게 나타난 한국 경비정은 그저 납치되는 탁성호를 바라만 보았다고 한다.
일반 선원이었던 김씨는 납북된 정확한 지점을 알지 못했지만, 조업했던 곳이 남쪽 지역은 확실하다고 했다.
고성이나 거진에서 작업했던 것이므로 북한 경비정에 몇 시간 동안 끌려간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렇게 탁성호 선원은 북한 경비정에 끌려 전원 북한에 납북되었다. 김씨는 북한에서의 생활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만 오랫동안 억류 생활한 곳에 대해서는 약간의 기억이 남아있다고 했다.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때 선박별로 건물에 수용되었는데, 억류된 장소 앞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대청도 근처에서 잡혀 온 상고선(상선, 장삿배) 선원들과 탑승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상고선에는 나이 든 여성 한 명과 젊은 여성 한 명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속초에서 잡혀 온 선원들이 있었는데 그 배에는 어린 선원들이 다수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 중학생이었던 그들은 방학을 이용해 용돈을 벌기 위해 오징어잡이를 나왔다가 잡혀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년 넘게 억류된 동안 큰 어려움이나 고통은 없었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교육이나 지령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 귀환한 뒤 김씨 등을 괴롭힌 것은 바로 북한에서 받지도 않은 교육과 지령이었다.
1972년 9월 7일 원산에서 출발한 탁성호는 북한 경비정 호위를 받으며 남한으로 내려와 한국 경비정에 인계되었다. 인계된 탁성호는 경비정을 따라 속초항으로 들어왔고 선원들은 그곳에서 곧바로 속초 시청으로 이동해 구금되었다고 한다.
속초시청에 있는 동안 여관에 가서 조사받았어요. 한 며칠 조사받았던 것 같아요. 거기서 조사받은 내용은 이북에 있는 동안 간첩 활동한 것이 있느냐, 지령받은 것 있느냐, 이런 조사였어요. 다른 선원들은 고춧가루 물 고문, 전기 고문 받고 했나 봐요. 그런데 나는 구타만 그렇게 당했어요. 특히 얼굴을 많이 맞았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오른쪽 귀 고막이 터져서 지금도 오른쪽 귀는 들리지 않아요.
성인 두 사람이 누울 정도의 여인숙에는 조사관 한 명이 배치되어 조사를 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시작된 조사는 밤이 되어야 끝났다고 한다. 조사를 받는 동안 옆 방에서 들리는 동료 선원들의 비명이 굉장히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렇게 하루의 조사가 끝나고 더 이상의 고문이 없을 줄 알았으나 또 다른 고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속초나 고성의 납북귀환 어부들과 달리 탁성호의 선적지는 속초가 아니었으므로, 속초에서의 1차 조사가 끝난 뒤 선박 등록지인 여수로 내려가 2차 조사를 받아야 했다. 여수경찰서 수사관 몇 명이 속초로 올라와 인수인계 절차를 밟은 뒤 선원들과 함께 탁성호를 이용해 2~3일 만에 여수로 내려왔다. 여수에 도착한 탁성호 선원 전원은 여수 신항 근처 여인숙에 또다시 며칠간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여수에서도 똑같이 고문당하면서 조사를 받았어요. 1층 건물에서 조사 받았는데, 방 크기는 속초 여인숙과 비슷했어요. 경찰서는 한 번도 가지 않고 그곳에서만 조사를 받았어요. 식사도 화장실도 전부 그 여인숙에서 해결했어요. 그곳에서도 저는 손발로 구타를 당했어요. 속초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간첩지령 받은 것을 말하라는 것이었어요.
그곳에서 조사 받고 순천교도소로 넘어갔어요. 검찰 조사 때 검사한테 억울하다고 했는데 소용이 없더라고요. 경찰 조사에서 때리면서 월선을 인정하라고 하니까 월선했다고 한 것이지 우리가 월선한 사실이 없어요. 우리가 조업할 때 북한하고 거리가 먼 곳에 있었는데 우리가 북방한계선을 넘어서 조업했을 리가 없어요.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수를 떠나 부산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여수에서 생활할 때는 물론이고 부산에 와서도 김씨는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여행하거나 조업을 위해 배를 탈 때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내가 부산에서 여수로 가는 배를 탄다고 하면, 부산 경찰에 신고를 해요. 언제 여수로 가는 배를 탄다고. 그고 나서 여수에 가면 벌써 경찰이 나와 있어요. 경찰이 나만 조사하면 되는데 선주 찾지, 선장 찾지 나 하나 때문에 선주, 선장 다 불편을 겪어야 하니 얼마나 눈치를 보겠어요. 선원 일을 하려 해도 참 불편했어요. 그리고 경찰이 수시로 집으로 찾아와요.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어본다지만 감시하러 온 걸 내가 왜 모르겠어요. 그런 감시가 몇 년까지 계속 되었어요.
손 놓은 해군
탁성호는 다른 납북귀환 어부 사건보다 좀 더 명확한 국가 폭력의 특징을 띠고 있다.
먼저, 다른 납북선박에 비해 명확한 납치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탁성호가 납치되었다는 점은 묵호어협무선국이 탁성호가 납치될 당시 탁성호와 해군이 실시간으로 나눈 교신 내용을 기록한 국가기록원 보관 문서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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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성호가 묵호어협무선국에 납북사실을 알린 교신 내용. 교신 당시 위치가 거진 북방 어로저지선 근해로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 즉 대한민국 영해이다. |
ⓒ 국가기록원, 탁성호 선원 유족 제공 | 관련사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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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북 직전 상황을 그린 대치도. 북한 경비정에 의해 1시간 가량 끌려간 탁성호가 북방 한계선 부근에서 북한 경비정과 대한민국 경비정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끌려가던 1시간 동안 적극적이고 신속한 우리 군의 조치가 있었다면 탁성호는 납북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 국가기록원, 탁성호 선원 유족 제공 | 관련사진보기 |
교신 내용에 따르면 1971년 8월 29일 오전 8시 41분경 탁성호의 선장은 무전으로 '북한 선박에 납치되어 1시간가량 끌려가고 있다'고 해군에 통보하였다. 탁성호의 위치를 묻는 해군의 교신에 '거진 앞바다'라고 했다. 이는 분명 대한민국 수역이며 어로저지선 이남 지역이다.
탁성호가 잠시 멈췄으나 이내 9시 16분경 북한 경비정의 지시로 북쪽으로 항해하였다. 9시 40분경 탁성호가 남하를 시도하였으나 북한 경비정에서 포사격을 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북방 한계선 부근에서 정지한 탁성호를 두고 북한 경비정과 한국 해군 경비정이 서로 대치한다. 그러나 5시간의 대치 끝에 결국 오후 2시 40분경 북한 경비정에 의해 탁성호는 납치되고 만다.
탁성호의 납북은 분명 막을 수 있었던 골든타임이 있었다. 최초 납북신고 시점이었던 오전 8시 41분경 1시간가량 북쪽으로 끌려갈 당시 해군, 해경 등이 신속히 출동하여 탁성호를 구조할 시간이 있었다.
자국의 해역에 침입한 북한의 경비정이 1시간 넘게 영해를 휘저으며 자국민의 선박을 납치하는 동안 한국의 해경과 해군은 무엇을 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한국의 해경과 해군은 1시간 이상 끌려가 북한의 영해로 넘어가는 탁성호를 그저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한에 납치되는 자국 선박을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못하고 그저 대치하다가 빼앗겼다. 그러나 이 일로 해경, 해군의 책임자가 문책을 당했거나 책임을 졌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납북 사건의 최대 피해자였던 탁성호 선원들은 1년 뒤인 1972년 9월 7일 귀환한 직후 '고의 월선'하여 북한 영토로 탈출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처벌받았다. '납북' 피해자를 '월북' 범법자로 만든 것이다. 결국 이들은 납북 피해자인데도 '월북' 전과자가 되어 국가의 사과를 받기는커녕 월북자로 사회적 차별과 멸시를 견뎌야 했다.
김씨는 인터뷰 내내 왼쪽 귀에 손을 갖다 대야 했다. 속초에서 경찰 조사를 받을 때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청력을 잃었는데도 김씨는 어디에도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경찰에서 작성한 각서 때문이었다고 한다. 경찰에서 조사받은 내용을 외부에 발설하면 다시 끌려와 처벌 받을 수 있다는 그 각서 한 장으로 인해 김 씨는 평생 입 밖으로 억울함을 내뱉지 못했다고 한다.
자식을 비롯해 누구에게도 이 억울함을 이야기 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세월을 다 보내버리고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렸어요. 저로 인해 피해 받은 가족과 자식들에게 항상 미안하죠. 이제라도 이 억울함을 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