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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궁인(나인) 장씨 장옥정은 숙종의 아들을 낳아 총애의 희빈이 되었다.그녀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한 서인과 노론의 領首였으며,당대를 호령하던 山林의 송시열은 숙종의 미움을 사 저세상으로 떠났
다.또한 이후 희빈 장씨도 서인들의 복수로 죽임을 당했고,결국 그녀는 왕인 경종의 친모 였음에도 왕후의 추
증 시호를 받지 못했다.이유는 이후의 세상이 모두 서인(노론)들 세상이었기 때문이었다.숙종(1674~1720)은
나이가 30살이 되도록 후사가 없었다.첫째 부인인 仁敬王后(서인 김만기의 딸)가 왕자를 낳지 못한체 죽었고,
이어 계비로 西人의 민유중 딸을 인현왕후로 맞아 들였다.그러나 인현왕후로 부터도 5년이 넘도록 후사를 볼
수 없었다.정비들로 부터 후사가 없던 숙종은 왕위 계승의 초조함을 드러냈다.
이에 급해진 서인들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의정 김수향의 조카인 김창국의 딸을 후궁으로 발탁 하는등
갖은 노력을 다했다.그러나 그때는 이미 숙종이 다른 궁녀(나인)인 장씨에게 마음을 뺏겨 김창국의 딸을 가까
히 하지 않을 때였다.장씨가 숙종의 마음을 끌게된 시기는 인경왕후가 사망한 1680년(숙종 6) 이후가 된다.
그러나 숙종과 장씨와의 관계를 눈치챈 대비인 명성왕후(김우명의 딸,현종의 부인)는 남인들의 청탁으로 궁
에 들어온 장씨와 숙종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하려 했으나,잘되지 않아 결국 장씨는 서인의 앞잡이 명성왕후
인 대비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2, 그럼에도 숙종의 성격을 잘아는 서인들은 상소를 올리는 등,숙종이 장씨와 가까워 지는 걸 방해 했다.이유
는 장씨를 통해 남인들의 등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여기서의 남인들은 이조시대 서인들이 관제야당으로 연립
조정을 꾸렸던 세력들과 그들의 후예다.만약 숙종이 장씨를 총애하게 되면 경신환국(1680)시 역관 張炫과 함께
피해를 당한 南人들이 서서히 조정에 등용될 것이고,그들이 등용되면 그때의 가해자들(서인)인 서인에게 보복
이 가해질 우려를 했기 때문이다.후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장희빈을 추방하는 길 뿐이었다.
이에 서인의 명성왕후인 대비까지 나섰으나,당시 장씨를 비방하고 상소를 올렸던 서인의 부교리 李徵命은 파직
으로 귀결 되었다.그러나 권력이 날아갈 것을 걱정한 서인의 영의정 김수향,예조판서 呂聖齊를 위시해 승정원과
대간들이 비방하는 간쟁을 멈추지를 않았다.권력을 잃기 싫은 서인들은 왕인 숙종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왕의
장씨를 향한 총애를 도리가 아니라 했다.그러자 마침내 숙종은 분개하여 '나는 본래 배우지 못해서 아는게 없다'
고 빈정되면서 '너희들의 방자함이 이와 같기에 '君弱臣强(임금의 권력은 약하고 신하 권력은 강하다)이란 말이
떠돈다' 고 하며 노기를 멈추지 않았다.
3, 서인들과 노론들의 반발에 숙종은 궁인 장씨를 내명부 종 4품인 淑媛에 봉하도록 명했다.더불어 노비 100구
를 하사하는 등 장씨에 대한 대우를 더욱 융숭하게 했다.이후도 여러 서인들의 반론은 거셌으나 비판의 선봉에
섰던 朴世菜가 벼슬에서 강제로 물러나고,그를 변호하던 영의정 남구만과 우의정 여성제는 위리안치 되었다.
또 이들을 구하려던 수많은 서인들이 파직되는 불상사가 속출했다.이 모든 것이 마치 장씨의 일을 핑게로 오래
전 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서인들을 향한 숙종의 분노 표출로 보였다.그런데 장씨가 숙종14년(1688) 10월 27일
왕자 '均(후에 경종)' 을 낳았다.숙종이 왕위에 오른지 15년 만이었다.이일로 장씨의 친정 어머니는 산후조리를
위해 당상관의 부인이나 子婦가 아니면 탈수없는 屋轎(옥교,덮개가 있는 가마)를 타고 궁중을 드나들수 있었다.
여기서도 서인들의 방해와 전횡이 계속되자 숙종은 분노했고,왕권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았
다.왕자 均이 출생한지 3달도 되지 않아 왕자의 명호(명칭과 호)에 관해 구했다.비록 후궁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일단 명호를 정하면 元子(왕의 맏아들,곧 세자가 된다)가 된다.따라서 이후에 설사 정비가 왕자를 낳더라도 그
와 상관없이 이미 명호를 정했던 후궁 소생의 왕자가 세자가 된다.
4, 숙종실록 권20 15년 1월 무인일 조를 보면 '지금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서의 명호를 정하려 한다.만약 선뜻
결단하지 않고 머뭇 거리며 관망만 하고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바치고 물러가라' 고 했다.
뜻밖의 지시에 영의정 김수향을 비롯한 서인 대신들은 '중궁(서인의 인현왕후)께서 아직 춘추가 한창이시고
다른 날의 일은 알수가 없으니 갑자기 이런 일을 논의하는 것은 너무 급하지지 않습니까? 다른 날에 중궁께서
生男(아들을 낳음)의 경사가 없으면,국본은(왕계의 승통)자연히 정해 질 것입니다.몇년을 기다렸다가 다시 논
의 하시 옵소서' 라고 저항했다.그러나 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 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묵살했다.논의가 나온지 하룻만에 숙종의 자의로 대계가 정해졌다.강력하게 반대한 남용익
을 중죄로 다스렸고,모든 일이 5일후 원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는 것으로 일단락 됐다.결국 30이 되서야
왕자를 얻은 숙종의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을 것이다.태어난지 3개월 뿐이 안된 왕자를 원자로 정한다는 것
은,결국 숙종의 왕권 안정와 동시에 신권이자 서인의 정치생명에 적신호가 왔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5, 왕자의 명호문제가 일단락 되고 남인들의 집권이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는 1689년 2월 1일 서인의 영수
이자 老論山林의 종장인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이미 끝난 일을 향해 '왕자의 명호를 정한것은 너무 성급한 조
치였다' 고 죽음을 자초하는 주장을 했다.그는 북송의 철종(1086~1100)과 신종(1068~1085)의 예를 들면서
왕자의 위호를 정한것은 너무 이른 처사' 라고 주장(숙종실록 권20 15년<1689>2월 기해일 조)했다.송시열의
상소를 본 숙종은 노론과 소론등 서인들이 판을 치는 조정에서 왕권을 강화하기란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이징명이후 남인을 등용하는 등 숙종이 차츰 정국의 변동을 도모하고 하고 있던 차에 송시열의 반대 상소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이에 숙종은 송시열을 삭탈 관작하고 성문밖으로 내치라고 했고,대신으로 대우하지 말라
고 했다.즉 남인에 의한 것이 아닌 숙종에 의해 기사환국(1689)이 단행되었다.송시열의 상소문을 기화로 거의
1년 동안 서인들의 전현직 관료,재야 유림등 100명 이상의 西人들이 처벌 받았다.서인 김수향,김수홍을 비롯
해 경신환국(1680)과 임술년 고변(1682)등을 통해 남인을 제거하고자 했던 세력들이 모두 처벌 받았다.서인
들이 물러난 자리는 남인들이 차지했고,남인들의 어른인 '윤휴' 등도 신원이 회복되었다.
6, 1689년 3월 18일 서인에 대한 가장 가혹한 응징 조치로서 이이와 성혼이 文廟에서 출향(퇴출)이 단행 되었
다.이로서 서인들의 정통성이자 존립의미 자체가 부정되어 버렸다.여기서 더하여 기사환국이 시작되고 4개월
만인 서인의 仁顯王后 민씨가 폐출되었다.숙종은 희빈을 총애하는 것보다 민씨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그의 형
인 민정중이 서인의 거물이란 사실이 분노를 가중시켰다.장씨와 관계없이 왕권의 숙종은 민비(인현왕후)의 생
일날을 기해 폐출했다.여기서 서인과 남인들 모두가 반기를 들었다.그러나 숙종은 막무가내였다.신하들이 반대
를 못하도록 상소를 올린 朴泰輔 등을 국문을 통해 죽이기 까지 했다.드디어 숙종의 독선이 시작되었다.
바로 이때 송시열이 원자정호 반대 상소를 올렸으니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전주곡이 됐다.그는 1689년 2월
8일 제주를 향해 유배길을 떠났다.유배 행렬은 2월 11일 연산에 이르러 잠시 멈추었다.연산(충남 연기나 논산,
온양이 아님)은 바로 스승인 김장생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3월 6일 제주에 위리 안치된 송시열은 주자 저술의
책읽기에 열중하고 있을때 조정에서는 송시열을 극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마침내 숙종은 ' 송시열을
사사하되 都事가 사약을 가지고 가다가 그를 만나는 대로 사사하라(숙종실록 권 21,15년 6월 무진일 조)' 는 처
분을 내렸다.
7, 송시열은 죽기전 수제자 權尙夏에게 한편의 글로 송별을 고했다.이른바 朱子의 전통을 계승하고 명의 신종
(만력제)과 의종(숭정제) 두황제를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인 '萬東廟' 건립을 특별히 부탁했다.송자대전의 저자
라고 알려진 역사 조선의 서인,노론,산림의 상징이었던 송시열은,명나라 사람들과 신하들도 안하던 일을 조선
의 제자들에게 부탁하는 걸 보면,그는 명나라 사람보다 더 명나라 사람같은 사대 상징의 조선인이 된다.또 이때
는 청나라와 조선은 君臣의 주종관계로 있을 때였다.즉 청나라 지배하에 있었다.또 명나라는 청나라에 패하여
없어진 나라였고,송시열은 명나라의 만력제와 숭정제를 알지도 못했다.그런데 그들의 은혜도 알지 못할 때였는
데,그들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허망한 말을 했던 것이다.패망한 명나라 후손이 아니면 할수없는 이상한
행동이었다.
이러한 송시열의 편향은 나라의 종묘사직을 위한 일도 아니였고,도도한 유학의 전승가치를 말해주는 것도 아니
였다.그냥 명나라에 대한 맹종이었다.특히 청나라 천하에서 명의 황제들을 제사지내고 섬기자는 시대의 지진아
였다.청나라의 침공으로 조선의 임금이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고,조공을 바치고 있던 시대에 명나라 임금들을
제사지내며 섬기는 萬東廟를 신축하라는 것은 그의 제자들을 두번 죽이는 일이 였다.노론의 영수이자 산림의 훈
수가 이쯤에서 과연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역사의 기사를 보면 1689년 6월 7일에 송시열은 井邑에 이르러 사사
의 명을 받았다.그는 여기서도 수제자 권상하에게 김종직,이율곡,김장생의 학문이 아닌,주자의 학문을 계승할
것을 다시 부탁했다.역시 주자의 신봉자 다웠다.그리고 절명했다.
8, 영민하고 과단성 있으며 기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유림의 宗師로 이율곡을 존경한다고 자임했던 송시열 이었으
나,예송논쟁 이후로는 愛憎으로 자잘함을 논쟁으로 삼는 적이 많아 졌다.그의 말 한마디가 懷德(반도 대전의 대덕
이나 괴산,보은이 아님)에서 나오면 사람들은 어기지 못했다.그가 죽게 된 이유중 하나는 바로 서인에서 갈라져 나
온 소론들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한 결과이기도 했다.그가 죽은후 소론들의 혹평은 아주 가혹했다.그들은 송시열을
향해 '仁義와 대도를 빙자해 覇道를 일삼은 자이고,昌狂하여 常道을 잃어 도덕이 있는 사람같지 않았다' 고 했다.
소론의 나양좌는 그의 명촌잡록에 쓰기를 ' 송은 잡혀오는 도중 정읍에 이르러 사약을 받았다.송시열 앞에서 都事
가 약먹기를 재촉했으나 끝내 마시지 않자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려 약을 부었는데 한그릇 반이 지나지 못
해 죽었다' 고 쓰고 있다.
결국 그는 희빈 장씨가 숙종의 대를 잇는 왕자를 생산함으로서 서인들과 노론의 권력상실 육감적으로 느꼈다.따라
서 노론의 권력 보호를 위해 黨의 영수이자 대표로 왕의 뜻을 거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저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결국 王權과 臣權의 충돌에서 신권이 패한 것이다.희빈 장씨로 부터 왕자인 '균(후에 경종)' 이 태여나자 왕은 이를
기화로 서인의 노론들을 쳤으니 장희빈과 아들인 均(후에 경종)에 의해 서인의 노론들은 서리를 맞은 것이다.그들
상당수는 고집불통의 명나라 추종자들과 주자학 맹신자들 이었으며 노론(서인)들로 마침내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송시열이 더 일찍 죽었더라면 조선이 더 안정스러웠을 것 같네요.
우리 역사에서 주자학을 받아들여서 잘 된 사례는 거의 없는 듯 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송시열은 주자의 말이나 글은 글자 한자도 바꿔서는 안된다는 교조주의자 였지요.그는 조선인이기 보다 오히려 명나라 후손에 가깝습니다.특히 그는 주자학을 세상(인민들의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닌,권력쟁탈과 유지에 써먹었던 당대의 부자였습니다.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수족들(편)을 거느리는 데는 재물이 풍부해야 겠지요.이후 송시열의 노론 후손들은 소론과 인연을 맺고있던 영조시대의 사도세자(장조)도 제거하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