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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9(주일) 예레미야 10:17~25 ‘징계를 통해 깨달아야 할 것’
한국 사회에서 체벌은 오랜 시간 동안 교육과 가정 내 훈육의 한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법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로 인해 학교와 가정에서 체벌이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훈육하는 방법 중 하나로 체벌이 흔하게 사용되었지만, 2011년 서울시교육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학교 내 체벌이 금지되었습니다. 이후 2021년에는 민법 개정을 통해 부모의 '징계권'이 삭제되면서 가정 내 체벌도 법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 학교 내 체벌 금지 (2011년~):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도입되었고 * 부모의 징계권 삭제 (2021년): 가정 내 체벌 금지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이제는 체벌이 아동 학대의 한 형태로 여겨지면서 부정적인 시각이 강해졌습니다. 아이들의 인권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훈육은 대화와 교육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체벌이 금지되면서 긍정적인 요소는 아동 인권이 보호, 강화되었습니다. 즉, 아이들이 불필요한 폭력에서 보호받고, 존중받는 분위기에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벌이 금지되면서 부정적인 요인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구요. 체벌이 사라진 이후에도 적절한 훈육법이 확립되지 않아 일부 부모들은 훈육 방법에 대한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체벌이 사라진 이후 학생들의 기본적인 예절과 규율 의식이 약해졌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체벌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성경에서 체벌(징계, 훈육)은 주로 부모가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언급됩니다. 특히 잠언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서는 체벌(매, 징계)을 강조하며, 올바른 사용이 자녀의 성장을 돕는다고 말합니다.
*잠언 13:24 “초달을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 자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징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는 어리석음이 있지만, 징계를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지옥)에서 구원하리라.”
→ 징계가 아이의 삶과 영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과 시련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그 시련이 인생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주시는 징계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체벌이 사라지고 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체벌인 징계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훈계와 교정의 과정으로 묘사됩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의 표현이며, 궁극적으로는 회복과 성숙을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2:6-7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으면 하나님이 아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이 그들을 아들로 여기시는 증거이며, 징계를 통해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1) 죄와 불순종으로 인한 징계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잠언 3:11)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십니다.
2) 믿음의 연단과 성숙을 위한 징계 “그들은 잠시 자기들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2:1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욱 성숙한 믿음을 갖도록 연단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징계를 받을 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에워싸임의 고난 속에서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17~18절).
첫 번째는 우리가 징계를 받을 때 에워싸임의 고난 속에서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결국 징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고,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흩어지는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징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은 "에워싸임의 고난 속에서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에워싸인 가운데"란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며 자신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여러 번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죄로 인해 예루살렘은 포위당했고, 백성들은 짐을 꾸려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때, 결국 삶이 막히고 사방이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번에는 이 땅의 주민을 내던질 것이라, 또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18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워싸임의 고난 속에서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징계는 사랑의 표현이며, 회개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징계의 목적은 고생이 아닙니다. 교육이 목적입니다. 변화가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아파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고난 속에 그냥 있지 말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발버둥 쳐야 합니다. 소리질러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쳐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구하면 그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구하고, 부르짖는 모습에서 의미를 찾으십니다. 깨닫고 회개하는 우리를 보시고 "한참 나아졌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지금 우리의 삶이 사방이 막힌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그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만 따라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고 있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탕자비유의 탕자를 통하여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탕자는 모든 게 불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일에서 자기를 간섭하는 것이 그는 너무나 싫었습니다. 자기 친구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죄도 짓고 세상도 즐기며 신나게 살아가는데, 자기는 아버지 때문에 자기 친구들이 즐기는 것들을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따분하게 보내야 하는 게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나중에 그 유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만 따라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갔던 이유입니다. 호세아 6장 1절 하반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찢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인도만 따라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때 그들에게 맺혀졌던 결과입니다.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삶이 너무나 곤고하고 힘들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3-14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은 돈이 없어 자기 소유의 거처를 구할 수가 없어서 누군가의 집에서 얹혀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 집 주인은 둘째 아들을 자기 집에서 공짜로 지내게 해주는 대가로 둘째 아들에게 자기가 기르는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의 삶이 참으로 곤고하고 힘들어져도 우리는 거기서 절대로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되며, 반드시 이 말씀을 기억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없었던 일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가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구원 받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완전한 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죄악에 노출되어 있으며, 여전히 죄가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지극히 연약한 상태가 바로 현재 우리의 상태입니다.
그런 우리의 상태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은, 비록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유혹에 넘어가고, 여전히 탕자처럼, 육체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때가 너무 많은 자신에 대하여 바울이 했던 탄식입니다.
적용) 지금 나를 에워싸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이 상황에서 내가 듣고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2. 깨닫지 못하는 백성을 대신해 아파해야 합니다(19~22절).
두 번째는 내 가족이나 주위의 사람들이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을 대신해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말씀에 대한 무관심과 영적 어두움 속에서 사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단순히 경고만 한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을 대신해 아파하며 탄식했습니다.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19절) 예레미야는 자신이 직접 죄를 지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외부인의 시각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심정으로 아파했습니다.
[예화]
교수이며 목사이며, 가정치유 사역자요 상담자이신 정태기 교수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정 목사님은 어린 시절 전라도의 어느 조그마한 섬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친 섬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욕을 밥먹듯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정 목사님도 똑같이, 아니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이 욕을 하면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섬 마을에 예수님을 아주 잘 믿으시는 한 선생님이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사랑으로 잘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당시 아이들이 욕을 너무나 잘 하는 것에 대해서 늘 괴로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욕 표를 한 달에 각각 10장씩 주면서 누구든지 욕을 할 때마다 한 장씩 빼앗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욕표를 제일 많이 빼앗기는 아이에게는 운동장을 돌리며 심한 벌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한 달이 다 되던 어느 날 선생님이 욕표 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욕표 검사결과 정태기 목사님이 이 표를 다 빼앗겨 제일 꼴등을 하였고, 그 반에서 제일 욕을 잘하는 아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보고 화가 난 선생님은 교무실로 오라고 하시더니 종아리를 걷으라고 하시면서 열대를 때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정 목사님이 세 대를 맞을 때에 너무 아파서 이에 반항하며 그만 그 선생님을 가로막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선생님께서 자기를 향하여 "태기야,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하시면서 마구 우시더라 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정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감동된 나머지 자신도 울면서 다시 다리를 걷어붙이고 나머지 일곱 대를 다 맞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교회도 영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성도는 무너진 공동체를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나라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향해 슬퍼하며 중보하는 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성경을 보면 중보기도를 통해 나타난 놀라운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만 소개하면, 마8:5~13에 백부장 하인 치유 사건이 나옵니다. 그의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꼼짝 못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있던 하인의 중풍병이 치유됩니다. 이처럼 중보기도는 내가 기도해도 남이 은혜를 받고, 남이 기도해도 내가 은혜 받을 수 있는 신기한 것입니다.
프로 골퍼 최경주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경기할 때 탱크라는 별명처럼 요동하지 않고 침착하게 합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승 인터뷰를 할 때마다 우승 비결로 꼽는 게 있습니다. 아내의 중보기도입니다. 부인 집사님이 평소에도 기도하지만, 특히 경기가 있을 때는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TV나 전화를 다 끊어 놓고 기도에 전념한다고 합니다. 그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하나님이 도우심을 느낀다는 겁니다.
적용) 공동체나 가족이나 지체의 고난을 마치 내 몸이 중상을 당한 것처럼 아파합니까?
3.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권자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23~25절).
세번째는 우리가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권자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계획과 능력으로 삶을 주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혜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2008.5 ]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살아가지만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 분이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목자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분께 나의 인생을 길을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들이 국가적인 고통에 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고민 처리를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은 고민의 시대입니다. 직장문제, 배우자 문제, 장래 문제 등 문제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그때 누굴 찾아갑니까? 산에 한번 가 보셨습니까. 골방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금식하며 몸부림치며 기도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수단방법 찾아 헤맸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미래 문제, 장래 문제, 운명의 문제, 현실의 모든 문제 등 다 가지고 가야 합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미국 부흥사 윌리엄 퀘일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자 밤새 기도했습니다. 걱정하느라 잠도 자지 못하고 베개를 끌어안고 몸부림 쳤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얼마나 몸부림치며 기도했던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합니다.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일이구나 너는 자라 내가 깨어 있을 테니”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길을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길을 묻고 행할 때 그곳에는 실패도 없고 아픔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서 그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인생의 모든 길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 큰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만 묻고 그분께서 내게 알려 주시는 길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상황 속에서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23절)
예레미야는 그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이 어떤 것인 줄을 깨달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에는 길이란 말이 약 400여회나 나타납니다. 길이란 그저 하나의 도로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한평생의 여정, 인생이 걸어가야 할 도리, 인생의 방법, 진리 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길을 수식하는 형용사로서 생명의 길, 의인의 길, 바른 길, 평강의 길, 겸손한 자의 길, 생명나무의 길 등… 많은 "진리의 길"들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위의 본문을 보면, "인생의 길" 인생이 걸어가야 할 길은 인생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 아래 있다는 깊은 진리를 예레미야는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믿음이 약했을 때는 인생의 길이 자기 손에 있는 줄 알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깨달은 것은 인생의 길이 자기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깨달은 진리는, 결국 참된 구원의 종교는 자율주의(自律主義)가 아니고 타율주의(他律主義)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생의 걸음은 내 스스로, 내 뜻대로, 나의 의지로만 걸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걸음이어야 실패없는 걸음이 될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결국 렘 10장 23절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걸음을 걷는 것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으로 알고, 빛되신 말씀, 등불이 되신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는 인생의 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말한대로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고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있단 말입니까?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제기한 질문을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요14: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구약의 진리와 신약의 진리는 하나입니다. 인생의 길이 인생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고 그리스도께 있다는 진리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우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우리의 생각대로 길을 갑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이 9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계획을 잘 세웠더라도 그 길로 가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계획을 잘못 세웠더라도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때로는 우리가 잘못된 계획에 따라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한 때 내버려두시더라도 먼 길을 돌아 결국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만드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결과와 그 결과로의 인도하심을 그에게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우리 삶의 걸음을 그 방향에 있어서나 그 속도에 있어서나 그 보폭에 있어서나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늘 평안하고 감사하며 기쁜 삶이 됩니다. 우리 삶의 발걸음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삶은 늘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며 원망하고 절망하며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매우 깊고도 실제적인 관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볼 때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여름밤 하늘에 볼 수 있는 은하수는 마치 한조각 구름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수 천만 개의 별들의 집합체인 것을 여러분 잘 아시지요?
그리고 우리 눈에 축구공만 하게 보이는 태양은, 그 부피가 자그마치 지구의 130만 배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들 중에는 그 태양보다 몇 백배나 되는 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또 별들의 수효는 얼마나 될까요? 어떤 과학자는 별들의 수효를 2억 5천만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별들의 수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별에서 이 지구를 관찰한다면, 아무리 성능이 좋은 천체 망원경으로 관측을 해도, 지구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주의 크기는 우리가 상상도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이번에는 한 줌의 흙을 파서 전자 현미경으로 관찰해 본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흙 속에서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수백만 마리의 미생물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여호와 하나님은 그 크기와 수효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별들로부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까지,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정말 깜짝 놀랄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마어마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사 자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목자가 양을 돌보아 주는 것처럼, 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처럼,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나, 의로운 것은 없고, 있다고 하면 다만 죄와 불의만 가득한 내가, 그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총애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감동과 감격을 불러 일으켜 주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할 말씀은, 무엇보다 공급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성격을 가장 아름답게 상징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며,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를 위태한 곳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의 일생을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다가, 필경은 나의 영혼을 여호와의 전,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에 넘치는 믿음을 시편 23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목자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 그 분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권자이심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기도하며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징계 속에서도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징계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적용) 징계 중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니까?
결 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한가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예화를 제시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ㅣ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다시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반드시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존재와 정체성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행위로 사람을 심판하는 자들에게 십자가 형벌로 죽임을 당했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행위로 자신을 비추어 자신을 죄 없다 하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나 신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 신앙이 형성한 가치관이 자신을 죄 없다 하지 못하는 신앙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곤고하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내세(천국)만 꿈꾸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다 이기고 나면 천국에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은 ‘고난’이라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 징계의 연속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이 세상은 곤고한 삶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에덴동산(만족의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은 삶인데 그것이 구원 받은 진정한 성도의 삶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면 바로 성도들을 잘못된 신앙에서 돌아오게 하시려는 징계가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해가 지도록 놀고 있는 아이 입장에서 보면 저녁 먹으러 억지로 끌고 가는 엄마의 손은 징계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예수님을 보내시면서까지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 하나님의 징계속에 담긴 속마음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구속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라는 사랑의 채찍질입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드려낼 아들로 지음 받았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아들로 예비되고 준비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 구속의 역사 안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요, 채찍질입니다.
출처: https://www.elphis.or.kr/1949 [Bible become My Story:티스토리]
그렇습니다. 징계는 자녀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자녀를 향해서 사랑의 채찍과 매를 듭니다. 그처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징계가 올 때, 그것이 해석되고 징계로 확신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괴로움과 고통과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심이며, 심한 고난을 받아 상처를 입을찌라도 참아내어야 함을 보여주며, 고난의 때에 그 고난을 주시는 히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고난 가운데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잘 버티고 견디어 하나님의 징계라는 시험(test)을 통과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댜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에워싸인 징계의 환경 속에서 불평하지 말고 겸손히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권자이심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오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