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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누가복음 15: 20-24
제목: 어떤 아비
일시: 2018. 5. 13(어버이 주일)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잃은 양 비유, 잃은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 비유이다. “양”과 “드라크마”와 “아들”이 주인공처럼 전면에 나오지만 사실 진짜 주인공은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메고 있는 그것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주인이다. 양한마리 찾아가지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의고 나와 함께 즐기자” 라고 할 때 찾은 양한마리보다 한턱 써야 할 것이 더 많아 보인다. 배보다 배꼽이 떠 크게 느껴진다. 약 30유로에 해당하는 드라크마 역시 그것 찾아놓고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고 하면 그보다 돈이 더 들어갈 것 같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도 그렇다. 잘한 것이 뭐가 있다고 잔치까지 열어주는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우리가 먹고 즐기자” 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돈 계산하고 상황따질 것이 아니라 비유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잃은 아들을 다시 찾은 아비의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무명의 “어떤 사람”이다. 그 어떤 사람이 탕자의 아비이다. 그 아비는 탕자에게 어떤 존재인가?
II. 아비는 가장 피곤하게 하시는 분이다.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주 피곤한 분이다. 아비의 재산은 좋지만 그 재산을 내 마음대로 쓰고 싶을 때 아비가 가장 피곤하게 하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꾸미는 계획의 최대 걸림돌로 생각한다. 뭔 생각과 결단이 있었는지 마침내 이 둘째 아들은 정면승부를 하게 된다. 여전히 두 눈 뻔히 뜨고 살아계시는 아비에게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대단히 도전적이고 당돌한 요청이다. 그렇게 요청했을 때는 뭔가 속에 꿍꿍이 속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러한 요청은 아들로서 싹수없는 발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셔서 자연스럽게 유산으로 자기에게 오게 된 재산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돌아올 재산을 무리하게 지금 달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유업을 빨리 받아서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비가 빨리 안 돌아가셔서 “도무지 내가 못 기다리겠다”라는 의미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 얼마나 급한가?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꺽지 못한 아비는 마지못해 그 분깃을 주었더니 이 둘째 아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라. “며칠이 안 되어...” 재산을 받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벌써 이미 전에 생각하던 것을 다 계획해 놓았던 것이다. 사전 작업 모의는 다 해 놓고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어릴 때 가장 신나는 날은 언제인가? 푸른 5월 어린이 날이 아니다. 가장 신나는 날은 엄마 아빠가 집을 비우고 안 계실 때이다. 우리들의 세상이다. 혹은 집에 손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별로 신경을 쓰실 수 없을 때가 가장 환상적인 시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두 자녀들은 집을 떠나 베를린으로 가는 것이 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베를린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이 부모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젠틀하고 훌륭한 엄마 아빠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부모님은 자녀들의 가장 큰 적과 같다. 왜냐하면 자녀들을 가장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에 가장 비판적이고 가장 많은 지적질을 해 내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은 우리 자녀들을 힘들게 하고 잔소리 따발총으로 사격을 계속한다. 여기있는 모든 지체들은 별로 싸워 본 적인 없는 착한 형제자매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보기에 착하고 우아해도 집에 가서는 “엄마”하고 잘 싸울 것이다. 결국 참다못한 우리 부모는 “왜 엄마한테 야단이냐”라고 하면 “엄마니까 그렇지”라고 한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런가? 낳은 죄가 무겁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은 왜 자녀들과 싸울까? 자녀들을 혼내고 야단칠까? 평가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대충 넘어가도 부모님들은 아주 꼼꼼하게 피곤스럽게 살펴보시고 따진다. 다른 사람들은 커트라인이 10점이라면 부모님은 90점도 넘을 것이다. 결코 관용하지 않으신 피곤한 부모님들이다.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던 5년 전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페북에 올렸다. 페북에 그런 것을 체크하는 곳이 있는가보다. 두 아이들과 나와는 페북친구가 아니다. 그래서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설주가 남자친구가 있네요 축하해요 벌써 이렇게 많이 컸네요...” 그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반응하는가? “축하해” “좋겠다 누구야?” 등등이다. 누구라고 묻는 것은 그냥 궁금할 뿐 제대로 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엄마 아빠도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고 축하한다고 하는가? “어떤 놈이야”라고 하는 생각부터 한다. 이곳에서도 딸과 같이 아들과 같이 여긴다고 하면서 하라 하지마라고 내 의견을 강하게 표출하기도 한다. 안된다고도 몇 케이스는 말한 적이 있다.
가장 강력한 노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이다. 그래서 “딸과 같이 생각해서” “아들과 같이 생각해서...”라고 말을 한다.
피곤하게 했던 아비의 걱정이 13절에 현실화된 것을 본다. 짧은 한 구절 안에 그 둘째 아들의 계획과 과정과 결말이 다 압축되어 있다.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둘째 아들의 아비는 이 결말을 예상하기에 피곤한 부모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를 좀 하고 싶은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시면 좋겠구만 우리를 끝까지 피곤하게 만드시는 분들이다. 부모님은 마지막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까다롭다. 우리의 계획을 펼치는데 가장 잔소리가 많고 바른 소리를 하시는 분들이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잠언 23:13)
진정한 아비는 자녀를 피곤하게 만들 것이다. 진정한 자녀는 부모님이 가장 피곤한 존재임을 알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목회를 하는 것이 제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권목사는 선생으로 있기보다 아비로서 있기를 원한다. 교회 지체들에게 권목사가 까다롭고 피곤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내가 좀 힘들게 해도 아비의 동기로 하는 줄 알고 순수하게 받아들여라. 워낙 스타일이 큰 소리를 못내는 사람이니 살살 이야기해도 아주 크게 들어주라. ”집사님 그건 아니지요“라고 말을 하면 권목사가 무척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지르고 있다고 여겨라.
III. 아비는 가장 편안하게 하시는 분이다.
아비는 우리에게 매를 주시지만 약을 발라주신다. 감싸주는 분들이다. 눈을 부릅뜨고 살피시는 분들이지만 애처롭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계신 곳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 집이다. 집은 내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는 곳이다. 여행을 하면서 오성급 호텔에 머물러도 나그네와 같은 여행객은 힘든 것이다. 긴 여정 끝에 집에 오면 “집이 그래도 좋다”라고 하면서 집의 편안함을 느낀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밖에서 사서 먹는 것은 일상적인 집밥을 이길 수는 없다. 집밥이 가장 건강식이고 오래 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병원에 있으면서 가장 소망하는 것이 집에 가는 것이다. 퇴원이다. 좋은 간호사들이 때 되면 밥도 갖다 주고 청소도 해주고 벨을 누르면 언제든지 달려오고 해도 말이다.
이 탕자를 보라. 피곤한 아버지를 떠나서 평안할 줄 알았지만 쾌락만 있었을 뿐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 단지 재물이 있을 때 뿐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때 누가 그를 반기는가? 사람들은 탕자의 재물에 관심과 애착이 있었지 그 탕자는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아비는 탕자인 아들을 볼 뿐이지 재물을 보지 않는다. 그가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를 맞이할 사람은 오직 그 아비밖에 없었다. 아비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환영하는 사람이다.
잃어버린 아들 스토리에서 14절에 아주 흥미로운 단어가 하나 나온다. “비로소”라는 단어이다. 아비를 피곤하게 생각했던 아들이 알고 보니 아비가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임을 깨닫는 반전의 순간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냉정한 사회에서 힘들게 돈을 벌어봐야 비로소 “아버지가 어떻게 돈을 벌어서 우리를 양육하셨을까”를 알게 되는 것이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어봐야 비로소 집에서 부모님이 해 주시는 음식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 가득 찬 음식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좋을 때는 알랑거리던 친구들이 형편이 나빠지고 어려워지자 180도 돌아서 배반하고 떠나봐야 비로소 나에게 진정한 충고를 하시고 싫은 말도 하시는 부모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부모님을 안다고 한다. 알기는 알지만 다는 아니다. 알아도 얄팍하게 알 뿐이다. 우리가 “아빠, 엄마 나도 다 알아요”라고 말을 해도 부모님들은 그저 답답해하실 것이다. 알기는 뭐를 아는가! 그래서 종종 우리의 부모님들은 “너도 시집가서 꼭 니 같은 자식 하나 놔 봐라”고 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도 고생해 봐라가 아니라, “이 철없는 것아 어찌 부모의 마음을 그리 모르느냐! 너도 내 입장이 되어 보면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이다. 그분의 입장에 서서 그분의 시야를 갖고 그분의 자리에서 온몸으로 체감해야 비로소 부모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둘째를 보라. 모든 사람이 그를 무시하고 버려도 오직 돌아갈 곳은 아비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계획대로 아비를 떠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던 이 둘째 아들이 이제 가장 현명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가서 회개하는 것이었다. 이제 싹수 없던 아들이 이제 싹수가 있게 된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돌아갔을 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그러한 아들을 위해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라고 한다. 매를 맞아도 시원치 않을 아들을 아비는 감싸고 있다. 종들이 얼마나 수군거릴 수 있겠는가? 아비는 아예 처음부터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고 아들의 치부를 가리워 주고 있는 것이다.
한 어린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편지 하나를 받았다. 아이는 선생님이 편지를 주었다고 하면서 엄마에게 전했다. 그 편지를 받아든 엄마는 잠시 훑어본 후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이며 좋은 선생님도 없습니다. 당신이 이 아이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엄마는 선생님의 편지대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가르쳤다. 마지막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엄마가 떠난 지 수년이 지나 아들은 유능한 발명가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그곳에서 어릴 때 선생님이 엄마에게 보낸 그 오래된 편지를 발견했다. 그는 그 편지를 펼쳐 다시 읽어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우리 학교는 문제만 일으키고 교육이 안 되는 이 아이를 더 이상 받아 줄 수 없습니다. 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마십시오.” 그는 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토마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변화시켰다.”
부모는 아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은 포기해도 부모는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부족한 것이 보일 때 무시한다. 하지만 부모는 부족한 것이 보일 때 채워준다. 다른 사람은 내게 약점이 보일 때 더욱 들추어 내고 공격할 좋은 타겟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는 우리에게 약점이 보일 때 어떻게든지 그것을 감추어 주려고 한다. 어디서 인정받지 못하고 혼이 나도 뉘집 아들치고 그 집에서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아도 부모는 내 자식이라고 예뻐한다. 부모는 우리에게 화가 나실 때에도 저주하지 않으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고치시려 하신다. 저의 어머님은 이 “망할 녀석”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흥할 녀석아”라고 혼내셨다.
IV. 아비는 피곤한 아비요 동시에 편안한 아비이다. 사랑의 표현이 다를 뿐이지 같은 것이다. 매를 가해도 내 아비의 사랑이다. 그 상처에 약을 발라 주시는 분이다. 우리에게 가장 까다로운 것 같아도 가장 관용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가장 실망하시면서도 가장 기대를 걸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는 아비의 본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아비가 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가장 까다로운 분들이다. 우리를 가장 피곤하게 하는 분들이다. 하지만 마지막 갈 곳이 아비집이요 가장 편안하게 하는 것도 부모이다. 또한 우리는 “어떤” 아비가 될 것이다. 자녀들에게 피곤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안식처가 될 것이다. 무한책임을 맡은 자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위로를 준비하고 있었고 사랑을 준비하고 있었고 입힐 옷과 끼울 가락지와 신길 신발과 먹일 살진 송아지를 준비하고 계셨다.
어버이 주일을 맞으면서 각 가정마다 우리 부모님들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라. 또한 하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