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 작품. 도레는 그림 상부에는 기독교를, 하부엔 제우스 등의
신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진 모습을 그렸다. 이 구도는 질서와 무질서, 빛과 어둠, 선악의 대립을 상징한다. 위키피디아 제공
다신(多神) 숭배가 일상이던 로마 제국에서 초기 기독교인은 무신론자로 통했다. 2세기 시리아 문학가 루키아노스는 저서 ‘페레그리노스의 죽음’에서 기독교인을 “그리스의 신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달린 철학자를 숭배하는 자”로 묘사한다. 그리스 철학자 켈수스는 “(기독교인은) 이교의 신들을 예배치 않는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특징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리스 신부터 피정복민의 신, 더 나가 ‘이름 모를 신’까지 만신전(萬神殿)에 모신 이들의 눈에 기독교인은 사상이 편협할 뿐 아니라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반동분자로 비쳤다. ‘여러 신을 숭배하면 이들의 보호로 제국이 더 강해지고 평화로워진다’는 논리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다. 하지만 20명 남짓으로 출발한 기독교인이 기원후 100년엔 1만여명, 200년쯤엔 17만명으로 빠르게 증가하자 여론은 급속히 바뀐다.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엔 제국 인구의 절반인 3000여만명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
다신교 체계에 익숙했던 로마인이 왜 단일신교이자 압제 받던 종교를 택했을까. 이상환 미국 미드웨스턴신학교 성경해석학 교수는 이에 답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헌과 유물 등에 드러난 다신론을 집중 분석했다. 종교성이 짙던 이들에게 예수가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파악하려면 다신론 문화를 제대로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는 이유다. 다만 기독교의 부흥 원인을 탁월한 도덕성이나 수평적 문화, 상부상조 전통과 내세 소망에서 찾는 기존 견해와는 거리를 둔다. 이들 요소는 타 종교와 기존 철학 체계에서도 발견돼서다.
치료용 부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새긴 동전. 도서출판 학영 제공
저자는 축귀·치료·소생(부활)으로 대표되는 예수의 사역이 다신교를 압도한 데서 그 이유를 찾는다. 이 세 사역이 고대인에게 새롭거나 이질적인 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엔 전쟁의 신 아레스의 빙의로 용맹한 모습을 보이는 전사가 등장한다. 반면 흉신이 빙의하면 질병에 걸린다고 믿었다. 당시 흉신을 쫓는 질병 치유용 부적이 유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희귀 재료로 만든 부적에는 ‘아브라카다브라’ 등 각종 주문과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초상과 상징이 새겨졌다. 이나마도 금전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했다.
몇 마디 말과 접촉만으로 조건 없이 즉시 기적을 베푼 예수는 대가가 있어야 치유를 꿈꿀 수 있던 이들에게 이내 ‘가장 강력한 신’으로 떠올랐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21~43)과 썩은 시신으로 무덤에 있던 나사로(요 11:1~45)를 말로 소생한 일 역시 주문과 약물을 사용하는 이교의 소생 전통과는 확연히 달랐다. 스스로 부활해 자신을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부활을 약속한 점(요 11:25~26)도 이교 신들과 달랐다.
무엇보다 고대인은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한 희생적 신인(神人)의 출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인류를 향해 이토록 충만한 사랑을 표현한 신은 여태껏 없었다. 이에 감화된 이들은 제우스나 아폴론 등 이전 신앙에서 강력했던 신의 총합이나 이들 신을 능가하는 존재로 예수를 표현했다. 이러한 이들의 이해는 이탈리아 로마 곳곳에 남겨진 초대교회 벽화 속 예수의 모습에 반영됐다.
고대인뿐 아니라 현대 한국인 역시 ‘신들의 세상’에서 산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무속신앙에 근거해 ‘손 없는 날’을 찾아 이사하고 결혼 전 궁합은 필수며 차량·건물을 사면 고사를 지내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기독교인 역시 이에 자유롭지 못한 편이다. 교회에서도 신앙과 물질적 축복을 동일시하고 목회자를 신격화하는 등 무속적 속성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저자는 “다신교 사회인 로마 제국서 승리한 예수 운동이 우리 땅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남기며 이야기를 맺는다.
책은 ‘예수 운동’으로 불리던 초대교회가 제국을 바꾼 과정을 이교도의 시각으로 풀어낸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 문화에 관한 상세한 해설은 복음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480쪽 분량으로 논문처럼 각 장에 주석이 길게 달렸지만 친절하고 재치 있는 어투 덕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