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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梁)· 고(高)두 종문(宗門)의 전쟁 ··· 법 판결로 간다
<초점> 고·양·부 삼성사재단 서열화 논쟁, 두 종문간 합의 '무위'로 결론
재판부, “화합을 위한 미래 논의 바랐다. 아쉽지만 법 판단”
양성철 기자 | j1950@jnuri.net ~ 승인 2013.07.18. 16:55:36
양 진영의 기싸움은 결국 끝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양보는 무위로 끝났다. 법의 최후결론을 얻고자 맞선 상대방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
50여년을 이어온 양씨와 고씨 두 종문간의 신경전이 법의 잣대로 마무리 짓게 됐다. 소송으로 비화된 신경전이 결국 법정의 판결을 통해 결론을 기다리는 셈이 된 것이다.
제주지방법원 제2민사부(재판장 안동범)는 18일 오후 2시 양씨중앙종친회가 제주도와 재단법인 고․양․부 삼성사재단을 상대로 제기한 이사회 결의 무효확인 소송의 결심공판을 진행했다.
이에 앞서 열린 2차 공판에서 재판부는 “굳이 고·양·부 삼성사재단 명칭에서 고·양·부 또는 양·고·부 서열을 표기해야 하냐”며 원고와 피고의 합의를 당부했다. 그러나 이날 공판에 나선 삼성사재단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 사적 134호 삼성혈. 고,양,부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나 탐라를 건국했다는 신화의 무대다. |
문제의 연원은 옛 기록에 근거한 재단명칭에 있다. ‘고․양․부’의 재단 성씨 순서가 전국 50만명의 양씨 중앙종친회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기록한 문헌마다 서로 고,양,부 삼성의 배열을 달리해 이미 문제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삼성사재단의 원래 명칭은 '삼성시조(始祖)제사재단'이었다. 1962년 12월 10일 삼성시조제사재단에서 현재의 '고·양·부 삼성사재단'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삼성사재단은 50년이 지나 지난해 4월 6일 이사회를 열고 변경된 명칭을 추인(과거로 소급해 사실을 인정함)했다.
삼성사재단은 지난해 4월 6일 재단명칭을 추인하는 과정에서 3성의 순서(고.양.부)를 입증하기 위해 '영주지'와 '탐라지'를 근거로 제시했다. '탐라지'와 '영주지'에는 ‘고양부'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삼성사재단은 이를 근거로 현재 재단 명칭이 '고.양.부 삼성사재단'으로 등기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증서에 '양고부'로 표기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입장이다. "한국기록원의 인증서에 양․고․부 순서로 표기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인증 취소도 결의했다.
한국기록원의 삼성혈 인증서에는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의 삼성혈(三姓穴)은 BC2373년에 양·고·부의 삼을나 삼신인(三神人)이 탄생(誕生)한 삼개(三個)의 구멍(穴)’으로 명시돼 있다. 한국기록원이 작성한 인증서의 기초자료인 삼국유사, 동국통감, 고려사, 탐라기년에 따르면 삼성(양.고.부)은 탄생연도와 창성연도가 BC 2373년이라고 명시돼 있다. 탐라 개국 때 양을라, 고을라, 부을라 세 신인이 서로 활을 겨눠 화살이 떨어진 일도, 이도, 삼도 지역을 터전으로 잡았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양씨 종문이 발끈했다. 양씨 중앙종친회는 삼성사재단이 1962년 12월 재단 명칭을 무단으로 변경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난해 4월 이를 추인한 삼성사재단 이사회 결의를 한 것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양씨 중앙종친회는 "삼성사는 '삼성시조제사재단'이라는 명칭을 44만명의 고씨들 가운데 약 4만여명의 제주 고씨들이 주도해 1962년 12월 10일 '재단법인 고.양.부 삼성사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을 묵인했다"고 주장했다.
양씨 종친회는 이에 따라 현재 '고.양.부 삼성사재단'을 원래 명칭인 '재단법인 삼성시조제사재단'으로 원상복구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양씨 중앙종친회는 지난해 8월 제주도와 재단을 상대로 이사회 결의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취지는 ‘고양부 삼성사재단’의 명칭에서 성씨를 빼고 ‘삼성시조제사재단’으로 원상복구하자는 내용이다.
재판과정서 법원은 양측의 합의를 요구했으나 재단은 “이제 와서 역사적 논쟁을 거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양씨종친회”라고 맞받았다.
고창실 삼성사재단 이사장은 “도민 모두 고·양·부 삼성사 재단으로 알고 있다. 50년간 이어진 역사를 바꾸면 혼란을 야기한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갑자기 문제를 제기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반발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닌 것 같다. 굳이 재단 명칭에 성씨를 붙여야 하는가? 합의점을 찾을 생각이 없냐? 재단 이사 9명 모두 이사장과 같은 생각이냐”고 물었다.
고 이사장은 이에 “양씨 이사 3명이 찬성하더라도 고씨 이사 3명이 반대하고 부씨 이사 3명은 기권을 할 것으로 본다. 이사회에 안건을 올려도 처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맞섰다.
양씨종친회 측 변호사는 여론조사 결과도 증거로 제출했다. 제주도민 120명을 상대로 조사한 여론조사로, 조사 결과에선 상당수 도민들이 삼성사재단 명칭에서 성씨의 서열화 표기를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성사재단 측은 “신뢰할 수 없는 여론조사”라고 일축했다.
▲ 고씨 종문과 양씨 종문이 삼성사재단 명칭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다. 사진은 건시대제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 사진=삼성혈 홈페이지 고씨 종문과 양씨 종문의 신경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
이미 조선조 숙종조인 17세기 시절에 '위패 개환(改換)사건'이란 이름으로 한차례 내전을 치렀다. 삼성사에 모신 제단 위패의 자리 중 고씨의 시조인 고을나의 위패와 양씨의 시조인 양을나의 위패가 서로 맞바뀌는 일이 벌어져 '조정 상소전'으로 비화된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당시 제주목사가 진땀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현대사회인 5공화국 시절에도 사건은 벌어졌다. 양치종 전 제주도교육감 재임시절이던 1982년 <제주교육사>를 펴내면서 탐라개국 시기를 묘사하며 '양,고,부 세 신인'이란 표현으로 서술되자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고청 의원이 국회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고씨 가문이 발끈, 집단반발하는 사태로 비화돼 책은 전량 회수, 폐기되는 수모를 겪었다.
1980년대 말에도 문제가 벌어졌다. 타계한 전직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인 홍순만 전 제주문화원장이 제주시의 의뢰를 받아 편찬한 <탐라순력도> 해설서에서도 '양, 고, 부 삼성'의 순으로 서술돼 한동안 논란이 벌어졌고, 홍 원장이 핍박을 받기도 했다.
재판부는 결심공판을 마무리하며 “합의를 위해 시간을 줬는데 노력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과거만 얘기하는 것 보다 후손의 화합을 위한 미래를 논의하길 바랐다. 합의가 안됐기에 법의 판단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제주지법 재판부의 선고는 다음달 29일 내려진다.
한편 고·양·부 삼성사재단은 제주의 시조신이 땅에서 솟아났다는 신화의 무대인 삼성혈(사적 134호)의 유지·관리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삼성혈을 관리하고 삼성혈 인근에 삼성회관을 건립, 회의실과 삼성의 도종친회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1981년부터 삼성(고·양·부) 후손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벌이고 있다. 매년 3차에 걸쳐 진행되는 제사로는 4월 10일 춘기대제, 10월 10일 추기대제, 12월 10일 건시대제가 있다.
1921년 고·양·부 3성의 대표가 '삼성시조제사재단'이라는 법인체를 만들어, 그해 인가를 받았다. 1927년 특별 연고삼림(산림을 옛날부터 이용한 주민에게 넘겨주기 위해 1926년 제정공포)으로 삼성시조제사재단에서 제주도의 삼성사를 관리하게 됐다.
2000년 초 제주도의 인구통계와 성씨별 인구현황에 따르면 고·양·부 삼성은 제주도내에 각각 4만3천명, 3만6천명, 4천명의 종친을 거느리고 있다.
❶따지자면 肅宗朝(숙종조) 1702년 壬午(임오)년에 三姓廟(삼성묘)를 創建(창건)할때 古籍(고적)과 國史(국사)를 上考(상고)하여 그 順位(순위)를 長(장) 良乙那(량을나) 次(차) 高乙那(고을나) 三(삼) 夫乙那(부을나)의 順位(순위)를 定(정)하고 祭祀(제사)를 올려왔는데, 三聖殿(삼성전) 祭享笏記(제향홀기)와 祝文(축문)에 적지 않은 것과 相聖殿內(삼성전내)의 三聖神位(삼성신위)를 아예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켜 놓지 않는 것을 奇貨(기화)로 마치 獨島(독도)가 자기땅 이라고 틈만 있으면 주장하는 倭人(외인)들과 같이 툭하면 자기들이 首位(수위)라고 主張(주장)하는 그 못된 俗性(속성)을 살펴본다.
❷그 것은 高允奎(고윤규)라는 사람이 三聖祠(삼성사) 文蹟(문적)이 火災(화재)로 불타 버린것을 奇禍(기화)로 삼아서, 자기들의 族譜(족보) 序文(서문)에 三聖祠(삼성사) 三神人의 位牌順序(위패순서)가 1710년 庚寅年(경인년)에 崔牧使(최목사)가 首位(수위)를 바꾸었다고 主張(주장)하여 英祖(영조) 27년 1751년 辛未年(신미년)에 牧使(목사) 尹九淵(윤구연)이 제주도에 사는 高尹奎(고윤규)의 誣告(무고)를 上奏(상주)하여 國史(국사)에 따라 처리하라는 下命(하명)으로 高允奎(고윤규)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❸牧使(목사) 尹九淵(윤구연)이 이해 관계없이 政事(정사)를 바로잡자는 의도에서 임금에게 上疏(상소)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일부 高氏(고씨) 族譜(족보)에 位牌(위패)를 조작하고 高乙那(고을나) 位牌(위패)를 가운데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 가운데가 主賓(주빈)이라고 자기들 族譜(족보)에 조작하여 만들어 둔것을 1980년경에 梁氏門中(양씨문중) 여러 사람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❹그래서 결국 濟州道誌 批判誌(제주도지 비판지)를 梁氏(양씨) 宗親會(종친회)에서 만들어 證據(증거)를 提示(제시)하고, 1980년대에 訴訟(소송)까지 하게 되었다
❺三聖祠(삼성사) 沿革(연혁:history)은 1507년 丁卯年(정묘년)인 中宗(중종) 2년에 三聖祠(삼성사)를 建立(건립)하고 1526년 丙戌年(병술년)인 中宗(중종) 12년에 李壽童(이수동) 濟州(제주) 府使(부사)가 三姓穴壇(삼성혈단) 둘레에 담을 치고 紅煞門(홍살문)을 세우고 床石(상석)을 마련하여 해마다 동짓달 中丁(중정)에 모든 濟州道民(제주도민)들로 하여금 정성껏 祭祀(제사)를 올리도록 한것이 始初(시초)였고, 1698년 戊寅年(무인년)인 肅宗(숙종) 24년에 牧使(목사) 柳 漢明(유한명)이 三姓壇(삼성단) 東便(동편)에 祠宇(사우)를 創建(창건)하고 每年(매년) 春秋大祭(춘추대제)를 올리도록 했다.
❻처음에 肅宗朝(숙종조)에서 1702년 壬午年(임오년)에 三姓廟(삼성묘)를 創建(창건)할때 東國通鑑(동국통감) 耽羅誌(탐라지), 與地勝覽(여지승람), 南槎錄(남사록) 高氏舊譜序(고씨구보서)等(등) 古籍(고적)과 國史(국사)를 相考(상고)하여 그 순위를 良高夫乙那(양고부을나)의 位次(위차)를 定(정)하고 祭祀(제사)를 올려왔는데, 三聖殿祭享笏記(삼성전제향홀기)와 祝文(축문)에 적지 않은것을 奇禍(기화)로 마치 獨島(독도)가 자기내 땅이라고 우기는 日本人(왜놈)의 속셈과도 같다.
❼그것은 高允奎(고윤규)가 三姓祠(삼성사) 文籍(문적)이 화제로 불탄 기회를 노려 자기들의 族譜(족보) 序文(서문)에 三姓祠(삼성사), 三神人(삼신인)의 位牌(위패) 순서가 當初(당초)에 高乙那(고을나)가 首位(수위)인데 바꾸었다고 주장하였으나, 1751년 英祖 辛未年(영조신미년)에 牧使(목사) 尹九淵(윤구연)이 濟州島(제주도)에 사는 高允奎(고윤규)의 誣告(무고: false charge : 없는일을 꾸며내어 고소 하는일.)를 上奏(상주 : report to the Throne : 임금에게 말씀을 아뢰는 일.)했는데 國史(국사)에 따라 처리하라는 임금의 下命(하명)이 있어 高允奎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❽그런데, 近來(근래)에 와서 高氏族譜(고시족보)에 高乙那(고을나)가 首位(수위)라고 조작하고 있다.
三聖殿(삼성전)의 奉安位牌(봉안위패)를 品字形(품자형)으로, 만들어 몰래 사진을 찍어 풀이 하기를, 中央(중앙)이 主壁(주벽)이라고 하여 일부 高氏(고씨) 族譜(족보)에 실어 말썽이다.
濟州道 三聖祠의 位牌는 좌로 부터 ①良乙那(량을나) ②高乙那(고을나) ③夫乙那(부을나) 로 序列(서열)대로 모신것은 高氏宗門에서 바꾸지 못하고, 品字 형태로 사진을 찍어서 造作하여 高氏門中의 族譜에 올린것이 말썽의 발단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文武百官의 序列순위는 임금, 다음 영의정, 다음 좌의정, 다음 우의정으로 左를 右보다 優位(우위)로 보기 때문에 삼성사의 위패를 梁氏를 左, 高氏를 중앙에 夫氏를 우측에 모셨던 역사를 상고해야 하기 때문에, 고씨들이 그것은 손댈수가 없기 때문에 사진을 조작하여, 고씨가 중앙이니, 서열이 앞선다고, 1962년 부터 우기다가 양문 몰래 양고부의 서열을 [가나다순]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로 주장하는 실정이다.
여필종부(女必從夫)란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따르고 좇아야 함을 이르는 말로, 先山(선산)에 가 보면 반드시 左側(좌측)은 祖父(조부)님 右側(우측)은 祖母(조모)님을 모신 理由(이유)는 우리나라 民俗(민속)은 男左(남좌) 女右(여우) 이기 때문이다. 남좌여우(男左女右)란 1. [민속] 음양설(陰陽說)에서, 왼쪽은 양(陽)이고 오른쪽은 음(陰)이라 하여,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을 중하게 여긴다는 말. 2. 이런 뜻에서 맥, 손금, 자리 같은 것도 남자는 왼쪽을, 여자는 오른쪽을 취한다.
史蹟管理(사적관리)등을 위해 각 종친회는 1921년 ‘三姓始祖祭祀財團(삼성시조제사재단)’을 構成(구성)하고, 1962년 名稱(명칭)을 ‘高梁夫(고양부) 三姓祠財團(삼성사재단)으로 變更(변경)하고 1965년 名稱(명칭)을 登記(등기)할때에 梁氏門中(양씨문중)에서는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꼴이다.
❾當初(당초: beginning) 位牌(위패)가 우리나라의 風俗(풍속)의 慣例(관례)에 따라 정해 놓았는데 그것을 造作(조작) 하고 있다. 우리나라 風俗(풍속)과 慣例(관례)는 議政府(의정부)의 最高官職(최고관직)으로 領議政(영의정) 다음 左議政(좌의정) 아래에 右議政(우의정)을 두고 文武百官(문무백관)을 통솔하고, 일반 政事(정사)와 外交(외교)등을 처리하는 官吏(관리)의 品階(품계)에 緣由(연유)하여 左(좌)를 右(우)보다 높혀 왔던 前例(전례)에 따라 良乙那(양을나)를 左(좌)로 모셨고, 다음은 高乙那(고을나)를 中央(중앙)에 夫乙那(부을나)를 오른쪽에 位牌(위패)를 各各(각각) 모셨는데 梁氏門中(양씨문중)의 與論(여론)이 두려운 나머지 이제는 品字(품자)형으로 造作(조작)하고 일부 高氏族譜(고씨족보)를 만들어 合理化(합리화)시키고 있다.
❿筆者(필자)가 한가지만 예를 들자면 長興高氏(장흥고씨) 高鳳智(고봉지)의 아들, 高得宗(고득종)은 1450년 庚午年(경오년)인 世宗(세종) 32년에 長興高氏(장흥고씨) 族譜(족보)를 編纂(편찬)할때에 분명히 長曰 良乙那(장왈 량을나)요, 次曰 高乙那(차왈 고을나)로 序列(서열)을 바르게 기록하고, 景泰元年(경태원년) 庚午(경오) 正月 元日(정월 원일) 崇祿大夫 行 吏部尙書 漢城 判尹 高得宗 謹誌(숭록대부 행 이부상서 한성 판윤 고 득종 근지)라고 밝히고 있다.
漢城判尹(한성판윤)은 漢城府(한성부)의 으뜸 벼슬(정 2품관)로 오늘날의 서울 시장과 같은 높은 벼슬을 한 어른인데 어찌 조상의 上下(상하)를 모르고 記錄(기록) 할 理由(이유)가 있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가 正直(정직)하지 못한다면 後代(후대)에 누가? 그를 바로 볼것인가를 알고, 族譜(족보)를 바르게 만든 先祖(선조)들의 양심을 高氏(고씨) 後孫(후손)들은 바로 보고 알아들어야 할것이다. 景泰元年(경태원년)은 西紀(서기) 1450년 世宗(세종) 32년이다.
⑪그러나 전두환이 제 5공화국이 탄생되고, 하늘을 찌르던 권력앞에 당시 국회 부의장을 지내던 "고청"은 모든 역사 학자들의 주장을 엎어 버리고, 숨도 못쉬게 모라 부치면서, 사실을 왜곡했다.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던 역사가 있다. 당시 5공화국 시절에, 양치종 전 제주도교육감 재임시절이던 1982년 <제주교육사>를 펴내면서 탐라개국 시기를 묘사하며 '양,고,부 세 신인'이란 표현으로 서술되자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고청 의원이 국회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고씨 가문이 발끈, 집단반발하는 사태로 비화돼 책은 전량 회수, 폐기되는 수모를 겪었다.
⑫1980년대 말에도 문제가 벌어졌다. 타계한 전직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인 홍순만 전 제주문화원장이 제주시의 의뢰를 받아 편찬한 <탐라순력도> 해설서에서도 '양, 고, 부 삼성'의 순으로 서술돼 한동안 논란이 벌어졌고, 홍 원장이 핍박을 받기도 했다.
⑬결론은 조선시대의 절대 권력자인 임금앞에서는 序列 변경을 할려고, 수차 노력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따지고 보면 梁門보다 高門쪽이 法曹界에 더 많이 進出했고, 權力도 勢力도 앞서고 있어, 結局 왜놈이 수백년 동안 朝鮮을 침략 할려고 虎視眈眈 노리다가 1910년 한일 합방을 이루어 36년간의 收奪政策에 우리 민족의 수모는 글로서 형언 할수가 없는 고통을 당했듯이, 1962년 12월 10일 정기총회 결의란 명목으로 종전의 재단법인 "삼성시조제사재단(財團法人 三姓始祖祭祀財團)인, 양(梁)· 고(髙)·부(夫) 삼성사재단"을 "재단법인 고(髙)·양(梁)·부(夫) 삼성사재단"으로 명칭을 감쪽같이 변경해서 등기한 후로, 55년간 법정 투쟁을 벌렸으나, 그 결과 달라진게 없다.
⑭따지고 보면, 역사를 상고한 근거는 따지지도 못하고, 고창실 삼성사재단 이사장은 “도민 모두 고·양·부 삼성사 재단으로 알고 있다는 억지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梁門은 우리나라 성씨 순위별로는 25번째이며, 가구수는 120,534이며, 인구수는 389,152명인데 비해, 高門은 우리나라 성씨 순위별로는 22번째고, 가구수는 135,488 이며, 인구수는 435,839명,으로 梁門 보다 46,687명이 더 많다.
다음 비교표 검색→대한민국의 인구순 성씨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 잘 나타나고 있다.
⑮제주도의 三聖祠 序列을 두고,● [1962 12. 10 정기 총회 결의에 의하여 종전의 재단법인 삼성시조제사재단(財團法人 三姓始祖祭祀財團)을 재단법인 고(髙)·양(梁)·부(夫) 삼성사재단으로 명칭을 변경 등기하고, 이사(理事) 정원을 15 인으로 증원하여 대표권제(理事長制)를 채택.(1966년 이사정원 9인으로 변경)]●역사에도 없는 位次를 변경하고, 序列에서 敗北해서 수모를 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정변(五一六軍事政變)또는 5·16 군사 쿠데타(五一六軍事 coup d’État)를 일으킨 박정희의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던 시절 梁問은 잠자고 있었단 말인가? 수백년 동안, 문헌을 고쳐서라도 서열을 바꾸겠다고 꿈꾸던 高門의 승리로 돌아 갔다. 권력 앞에는 역사도 문헌도 휴지 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斯界의 權威者들이 文獻대로 양고부의 序列을 執筆하자 전두환 5공 시절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고청 의원이 權力으로 廢棄 시켰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第五共和國)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 시절. 타계한 전직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인 홍순만 전 제주문화원장이 제주시의 의뢰를 받아 편찬한 <탐라순력도> 해설서에서도 '양, 고, 부 삼성'의 순으로 서술돼 한동안 논란이 벌어졌고, 홍 원장이 핍박을 받기도 했다.
★이 문제를 두고, 梁門에서는 계속 그 우위권을 상실하지 말고 子子孫孫 代代로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결론이다. 歷史書를 위조하는 高門의 비열한 처사는 응분의 댓가를 꼭 치루어야 한다. 정말 憤하고 안타깝다. 모르면 약인데, 역사를 알고는 잠을 이룰수가 없는 형편이다. 이 사건의 전말은 세상이 다 알지만 默默負擔이다. 힘이 부족하다. 전두환 정권때 [强者存]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삼성 재단 연혁
http://www.samsunghyeol.or.kr/sub/?p=4_history
지금부터 약 4300여년전 삼성시조(탐라국시조) 삼성혈에서 용출(탄강)하시다.
그 이후 삼성후손들이 제향을 올리다.
西紀 2013년 1월. 15일.
화각(弘化閣) 현판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지정
西紀 2012년 10월.
재난방재(CCTV 12개소, 불꽃감지기 5개소, 옥외소화전 9개소, 기존소화전 철거 등) 구축사업 완료.
西紀 2011년 5월. 9일.
김정(金 亻政) 목사가 세웠던 ‘三射石碑’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5호 지정
西紀 2010년 8월.
삼성사 상표등록 신청
西紀 2009년 10월. 22일.
혼인지 사당(착공 4월 3일, 팔작지붕, 면적 52.48㎡) 준공
西紀 2007년 12월. 10일.
삼성하나로아파트(28평형 11세대, 25평형 1세대) 준공
西紀 2001년 2월. 23일.
전시관 77.26평 건립 (전시실 57평, 영상실 20.26평) 12. 10 전시관 개관
西紀 2000년 9월. 27일.
전사청 중건(2000년 6월 13일 착공 동년 9월 16일 준공, 팔작지붕으로 21.56평)
西紀 1998년 7월. 27일.
삼사석에 표석 건립.(三射石址)(삼성혈 관련유적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
西紀 1997년 9월. 25일.
삼사석비(서기 1735년 英祖 11년 牧使 金 이 세움) 발굴.
西紀 1995년 1월. 1일.
탐라문화상 제정(문화,예술,효행 3개 부문).
西紀 1997년
문화예술상과 효행상으로 변경 6. 9 총무청(摠務廳) [지하24.6평, 1층 31.85평]을 건립.
西紀 1992년 3월. 20일.
혼인지 표석 및 삼공주 추원비 건립.(삼성혈 관련유적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7호) 3. 29 연혼포 표석 건립.(삼성혈 관련유적)
西紀 1982년 9월. 20일.
봉시청(奉侍廳) 건립.
西紀 1981년 7월. 1일.
장학사업 발족.
西紀 1977년 10월. 10일.
고정효(髙禎孝), 삼성사 입구에 홍살문(紅箭門) 건립 헌납.
西紀 1971년 8월. 10일.
건시문(乾時門) 및 혈단문(穴壇門)등을 복원함.
西紀 1969년 4월. 10일.
고여규(髙女奎), 모성각(慕聖閣) 헌납(獻納).
西紀 1964년 6월. 10일.
국가지정문화재(國家指定文化財) 사적(史蹟) 제 134호로 지정.
西紀 1962년 12월. 10일.
정기 총회 결의에 의하여 종전의 재단법인 삼성시조제사재단(財團法人 三姓始祖祭祀財團)을 재단법인 고(髙)·양(梁)·부(夫) 삼성사재단으로 명칭을 변경 등기하고, 이사(理事) 정원을 15인으로 증원하여 대표권제(理事長制)를 채택.(1966년 이사정원 9인으로 변경)
西紀 1927년 1월 17일.
특별 연고삼림(緣故森林)의 양여원(讓與願)을 제출하여 동년 1월 29일부로 제주삼성사(濟州三姓祠)로 받음.
西紀 1921년 11월. 10일.
종(宗) 87호로 삼성시조제사재단 법인설립 인가를 대표 고명우(髙命瑀), 양상룡(梁翔龍), 부지환(夫智渙), 재산명의 관리인 부성찬(夫聖贊)으로 받음. 12. 2 초대 삼성대표 이사에 고석종(髙碩鐘), 양상룡(梁翔龍), 부성찬(夫聖贊)
西紀 1785년 正祖 9年
양경천(梁擎天)의 주청(奏請)이 가납되어 조정에서 액호(額號)를 삼성사(三姓祠)라 선액(宣額)하고 예관(禮官)으로 교리(校理) 고택겸(髙宅謙)을 보내어 봉제(奉祭).
西紀 1772년 英祖 48年
목사 양세현(梁世絢), 외장(外墻)을 축조하고 소나무를 식재함.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향청(鄕廳)으로 하여금 매년 동지(冬至)후 상정(上丁)에 혈단향(穴壇享)을 모시되 모우(牡牛) 삼두(三頭)를 희생(犧牲)하여 제수.
西紀 1771년 英祖 47年
방어사 양세현(梁世絢), 전사청(典祀廳) 건립(建立)
西紀 1740년 英祖 16年
목사 안경운(安慶運), 삼성의 후손중에서 유식자(有識者) 각10명씩 30여명을 뽑아 삼성묘재생(三姓廟齋生)으로 삼음.
西紀 1526년 中宗 21年
목사 이수동(李壽童),모흥단(毛興壇)을 두른 280여척의 담장(牆垣)을 쌓고 홍전문(紅箭門)과 혈비(穴碑)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짐.
첫댓글 내용이 엄청기네요!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네요!단순한 서열논쟁이 아니군요?
탐라국 최초의 왕조는 탐라양씨 왕조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탐라고씨와 탐라부씨 왕조의 연맹체가 되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처음에는 고구려에 신속하였다가
백제에 조공하였습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탐라고씨 왕조에서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먼저 조공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그래서 통일신라와 고려는
탐라고씨왕조에게 첫번째 작위인 성주를 책록하였고
탐라양씨왕조에게는 두번째 작위인 왕자에 책록하였습니다.
무신정권 시대를 거치면서 고려의 힘이 미력했을 때는
탐라양씨왕조에서 첫번째 교섭권을 확보하고
원나라와 협력하기도 하였습니다.
원나라가 무너지고 난 다음
탐라고씨 왕조는 대륙의 문씨세력과 혼인동맹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탐라양씨 왕조를 몰아낸 후
탐라에서 제 1의 위상을 확보한 후
탐라국의 작위 마저도 조선왕조에게 바치고
탐라국은 완전히 소멸하였습니다.
탐라고씨 왕조는 통일신라와 교려에 협력하였고
그래서 탐라양씨 왕조보다
우선적인 교섭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탐라양씨왕조가 처음에 건국되었지만
후대에는 탐라고씨왕조가 탐라국의 우선적인 교섭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탐라국 최초의 건국자라고 말하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나쁜 고씨들...역사를 훔쳐가려 하다니!...다시 되찾을 방법을 모색해야겠군요...
아쉽지만 이 건은 2014년 4월에 재판부가 소송을 각하하여 고양부~ 명칭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