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아일랜드 기행 27 / 월터 스콧 기념탑
탑의 하단부 공간 내에 집필 중인
월터 스콧 경의 흰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월터 스콧
일어서서는 운명을 꾸짖고
앉아서는 절망을 어루만지며
한 줄 한 줄씩 빛을 불러들였다
새벽에는 낭만주의를 불러들여 시를 쓰고
저녁에는 영웅주의를 불러들여 소설을 쓰고
지금도 바람이 불면
깃털 팬을 가다듬어 전설을 기록하는 중이다
살아서 전설을 입고 살다가
죽어서 영생을 입고 사는 영혼이여
전설과 민요 사이에 앉아
오늘도 이탈리아 카라라 산産 하얀 대리석을 입고
에든버러의 한낮을 집필 중이다
웨이벌리 역에서 기적소리가 울리면
가끔씩 고개를 들어올리고
그것이 영원인지 찰나인지 귀를 기울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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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월터 스콧 기념탑
지나가며 나는 본다
죽은 자가 아직도 시를 쓰는 모습을
돌을 입고 앉아 세상을 적는 손을
이승의 뒤안길에서 고독한 예술가가
후세에 맡긴 세상을 근심하는 눈빛을
지나가는 눈으로 나는 본다
죽은 자는 죽어서도 시를 쓴다
살아서는 산 자를 기록하고
죽어서는 영생을 쓰고 있는 ‘웨이벌리의 작가’
칼튼 힐에서도 이미 내려다보았었고
이제 다시 보는
에든버러 프린세스 스트리트에 있는
1846년에 세워진
‘월터 스콧 기념탑’
높이 육십일 미터의 탑은 장엄하다
에든버러의 한낮인데도 작가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소설을 쓰고 있다
아이반호와 레베카와 로위너 공주 사이에서 방황하며
저들의 후일담을 집필 중이다
어느 사랑을 편들어야 할까
한 몸으로 두 사랑을 입을 수 없어
운명을 입을까
낙원을 입을까
고심하는 중이다
터킬스톤 성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사자왕 리처드를 죽일까 살릴까
노르만의 콧대를 꺾어주려
컴컴한 셔우드 숲속의 로빈 후드를 찾아가
앵글로색슨족의 저항과 기백에
한 번 더 불을 당길까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 쉬게 할까
한창 망설이는 중이다
‘아이반호’
저 구국의 영웅이여
결코 절망에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기사여
그대 조용하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바람 속에서 태어난
저 위대한 절름발이 작가는
오늘도 민요와 전설을 수집하여
새로운 영웅의 이야기를 한 창 빚고 있는 중이시다
우리 운명은 전능한 작가의 손에 달렸으니
웨이벌리 역사에서 들려오는
오래된 기적소리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자
왕실이 수여하는
지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계관시인桂冠詩人의 자리도 사양하고
시의 낙원에서 물러난 후에는
소설의 이름을 빌려
돼지치기 거스를 그려내고
익살스런 바보 피에로 원버를 찾아내고
탁발 사제 터크의 해학을 통해
지상을 떠도는 사람의 애환을 그렸으니
달콤한 사랑담과 용맹스런 무용담이
이름 높은 기사들만의 독점물이 아니요
범부의 생애에도 영웅들이 있어라
월터 스콧 경 -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웨이벌리의 작가’는
그 시초는 시인으로 출발하여
‘최후의 음유시인의 노래’
‘마미온’
‘호수의 여인’의 3대 서사시를 써서 문명을 날리고
생후의 어린 시절에 찾아온
소아마비라는 육신의 시련을 입고 살았어도
앉아서 시를 쓰기보다는
북방의 바람 속을 쏘다니며
민요와 전설들을 수집하면서
‘미들로디안의 하트’를 발표하여
세인의 이목을 한 몸에 입어
스스로 작가의 영웅이 되어
대하소설의 문을 비로소 열었다
익명으로 시작한 생애가
나중에는 에든버러 왕립협회의 총재가 되었으니
웨이벌리의 영웅을 위해
스코틀랜드 정부는 그에게
작위의 칭호를 내리고
에든버러 프린세스 스트리트에 기념탑을 세워
영웅의 위업을 기렸다
월터 스콧 기념탑 -
높이 61미터
검은 빛의 비니석binnie 으로 빚어 올린 탑 안에서
하얀 대리석의 옷을 입은 채 방금도
책상 앞에 앉아 깃털 펜을 가다듬으며
그는 오늘도 오후의 한나절을 집필 중이시다
육십 생애를 절름거리며 살았으되
한 번 붓을 들면 흔들림이 없었다
과로와 노작勞作의 시간들이 엄습한 탓에 건강을 잃어
정부가 배려한 요양생활도 소용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으니
후세의 찬사가 끊이지 않아서
높은 탑을 세워 고혼을 위로했다
외로워라 작가의 생애여
고독하여라 시인의 삶이여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동하며
불꽃처럼 살았으되
낙원은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였기로
쓸쓸하여라 집필의 시간이여
적막하여라 창작의 산실이여
민중의 찬사는 끊이지 않았으되
예술에의 길은 진실로 고단했어라
방금도 그는 집필 중이다
이승의 소음은 아랑곳없이
대서양의 바람소리를 입고 앉아
불멸로 가는 길을 찾고 있는 중이다
일어서서는 운명을 꾸짖고
앉아서는 절망을 어루만지며
한 줄 한 줄씩
지금도 빛을 불러들이는 중이다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