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이 '햇살 할매'였다. 한손엔 빗자루, 한손엔 걸레를 들고 도자기 인형처럼 오뚝오뚝 걸어 다니는 여인을 젊은 직원들은 줄여 '햇할'로 불렀다. '해탈'로도 들리는 애칭은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관세음보살의 미소가 언제고 만면에 흘렀다. 근엄한 표정의 임원들에게도 "안녕하세요?", 햇병아리 수습사원들에게도 먼저 "안녕하세요?" 여인의 손길이 닿은 계단과 화장실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바닥에 물 한 방울, 휴지 한 장 떨어져 있는 법 없었다.
"시원할 때 얼른 드슈." 밀린 업무로 점심을 걸렀다는 말에 그가 간식으로 챙겨둔 두유를 내밀었다. 10년 전 박아 넣은 인공관절로 책상다리를 할 수 없는 여인이 휴게실 장판 마루에 두 다리를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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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면 일어나야쥬. 네 시에 첫차를 타야 다섯 시쯤 도착해 청소를 시작헝께. 등허리에 땀 흥건하도록 두세 시간 바짝 쓸고 닦아야 직원들 출근하기 전에 끝내지유. 우렁각시가 따로 없다니께, 호호!
농땡이가 다 뭐여. 내 사전에 '대충'이란 없슈. 게으름 피워봤자 다음 날 고스란히 내 몫. 닦을 건 닦고, 털 건 털고, 밀 건 미는 게 청소의 정석이지. 책이랑 신문 더미 옮기고 버릴 땐 허리랑 무릎이 아우성치지만 어쩌겄슈. 대충은 안 되는걸.
나이는 왜 물어유? 49년생 소띠, 만으로 칠십인디 그리 안 보이쥬? 남들은 미화원을 어찌 보는지 몰러두, 이게 나름 전문직이유. 고생은 무신 고생. 새벽에 버스 타면 죄다 배낭 메고 운동화 신고 일 나가는 내 또래 여자들. 자식한테 손 안 벌리고, 운동도 되구유. 누가 그럽디다. 노동이 운동이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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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배 속부터 가난을 이고 나온 소띠라 일은 원 없이 했쥬. 술 좋아하던 낭군님 서른여섯에 저세상으로 떠나니 황망하대유. 자식들 굶길 수 없응게 닥치는 대로 시작한 일이 지금꺼정이유. 당장 잠잘 데 없어 금호동서 옷장사 하는 남동생 집에 얹혀살며 온갖 식당을 전전했지유. 고생? 추억이지 추억, 호호호!
누구는 화장실 청소가 젤로 고달프지 않으냐고 묻는디, 먹고 싸고 숨 쉬는 게 도(道) 닦는 거라 안 합디여. 사람이 어떻게 꽃향기만 맡고 살간디? 눈살이 찌푸려질 때도 있지유. 대학까지 나온 최고의 지성인들이 남기고 간 뒷자리가 아름답지 않을 때,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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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걱정되지유. 일자무식이라 정치는 몰러두, 우리 문통은 잘할 줄 알았슈. 눈매가 선하잖어유? 근디 요새 보니 독불장군이대. 처음처럼 소통도 안 허구유. 귀 꼭 막고 말 안 듣는기 꼭 우리 서방님 같어유. 약주(藥酒) 아니고 독주(毒酒)라고 그리 애원해도, '이번 딱 한 번만' 하며 꼬드기는 건달들 좇아 허구한 날 술방을 드나들더니 한방에 갔슈. 나 같은 서민들 잘살게 해준다더니 집 몇 채씩 갖고 노는 사람들이랑 더 친한 거 보고 마음 접었쥬. 이런 말 하면 잽혀갈랑가?
한 청년이 대통령 앞에서 우는데 딱해서 같이 울었슈. 그래도 코만 빠뜨리고 살 수 있나유. 몸만 성하면 못 할 일 뭐 있다고. 일에 귀천을 두지 않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기회가 벼락처럼 찾아오는 법. 공짜 돈 퍼주지 말고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쓴다고, 눈 가리고 아웅은 죄악이라고, 그래야 우리 애들 살릴 수 있다고 신문에다 크~게 써주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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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놀이유? 일하는 버릇 뼛속까지 맺혀 그런가, 난 새벽 버스 타고 출근하는 기 젤로 좋아유. 녹슨 고철로 스러질 나이에 돈 벌 수 있으니 축복. 구내식당 밥이 좀 맛있나유? 남이 차려주는 따뜻한 밥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젊은이들은 모를 거유. 해외여행은 무슨. 친구들이 몇 만원씩 모아 제주에 가본 적 있는디 테레비로 보는 것만 못 합디다. 칠순 잔치유? 자식들이 여행 가라고 용돈 주길래 금반지, 금목걸이 맞췄지유. 여행 가면 수십만원이 눈 깜짝할 시 달아나지만 금덩이는 나중 자식들헌티 물려줄 수 있응께.
다시 태어난다면? 글씨유. 장관은 무신 눔의 장관. 그저 우리 애들 엄마로 태어나고 싶어유. 목욕시킨 물도 아까워 못 버릴 만큼 귀했던 자식들을 대학 못 보내고 기술만 가르친 게 사무쳐서…. 다음 생엔 부자로 태어나 뻑적지근하게 뒷바라지해줄라구유. 우리 아들들도 여기 회사원들처럼 에어컨, 스팀 빵빵하게 나오는 데서 새하얀 와이셔츠 입고 폼 나게 일하는 모습 보고 싶어유. 그럼 소원이 없겄슈.
근디, 이런 씨잘데기없는 질문들은 왜 자꾸 하능규? 이 눈부신 봄날! < 조선일보(2019.04.09.) ‘김윤덕(문화부장)의 新줌마병법’에서 옮겨 적음. (2019.04.11. 화룡이) >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8/2019040803098.html
첫댓글 누구는 화장실 청소가 젤로 고달프지 않으냐고 묻는디, 먹고 싸고 숨 쉬는 게 도(道) 닦는 거라 안 합디여. 사람이 어떻게 꽃향기만 맡고 살간디? 눈살이 찌푸려질 때도 있지유. 대학까지 나온 최고의 지성인들이 남기고 간 뒷자리가 아름답지 않을 때, 호호!
이 분의 글쓰기는 늘 동화와 같아서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 옵니다. 오늘도 한 편의 할매 이야기에 또 감동받고 갑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김지영 여사의 모습이 옆집 할매 같은 친밀감으로 다가옵니다.
충청도 사투리 가락의 어눌한 말법을 취하면서도,
하고 싶은 얘기 콕콕 집어 풀어놓는 문장력이 가관인 데다가
그 바닥에 깔린 통찰력과 진정성 또한 압권으로 다가옵니다.
칠순 지난 이웃집 할매의 눈을 통해
저보다도 한참은 아래일 듯한 김윤덕 작가로부터
또 한 수 단단히 배우고 갑니다.
빛마당 선생님!
늘 포스팅 되는 글들을 하나하나 다 읽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정곡을 되짚어 깨우쳐 주시니 저희 후배들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도 복된 날이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회장님의 정성도 지극하십니다. 짧게 단 포스팅을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