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촌의 시작
- 1276년 원제국 수산평 목마장 운영시부터
- 1914년 정의면 수산리 1,2구
- 1933년 성산면으로 개칭 수산리 1,2구
- 1946년 8월 도제 실시로 남제주군 성산면 수산리 1,2구로
- 1980년 상산면 읍승격(12. 1)으로 상산읍 수산리 1,2리로
수산리 주변 마을 : 고성리, 시흥리, 성읍리, 종달리
수산1리 : 물뫼 일주도로 변이고 고성리와 인접한 마을로 내팟동네,
송대왓동네, 큰동네, 섯동네 등으로 260여 호가가 있다.
수산2리 : 고잡9곶앞으로 변음 추정)이라고 부른다.
1리와 2km 이상 떨어진 마을로 60호정도다.
2리는 1948년 11월 제주 4.3의 발발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수산리 4·3
1948. 5. 10 무장대 향사당 습격(5.10선거반대). 향사당 불타고 주민 3명 희생.
향사가 불타면서 선거는 무효다. 11월 21일 소개령이 내렸고 1, 2구
주민들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1리 : 집을 비우고 급히 해안마을로 몸만 바져 나갔다.
2리 : 고잡 마을은 순식간에 집이 불타면서 해안마을로 도피하다시피 떠났다.
청년들은 해안으로 가도 불안하고 산으로 가면 도피 가족이라 찍힌다고 해서 갈팡질팡 서로 엇갈린 마음이었다. 그러다 다수 청년이 야산으로 올라갔다가 토벌 작전 때 무장대라 하여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고잡마을 사람들이 해안마을(고성, 신양, 오조, 성산 등)로 먼저 가서 정착하고 12월 1일 1리 사람들도 합류하였다. 38년생 오무춘씨 증언에 따르면 “전복껍데기 구멍을 막고 멜젓을 지지는데 아홉 번 지져야 13명 식사를 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해안으로 소개하였다고 해도 일부 가족은 도피 가족이라 하여 학살당했다. 2리 일부 사람들도 갈팡질팡하다 무장대가 들이닥쳐 산으로 가도록 강요하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입산할 수밖에 없었고 후일 희생자가 된다.
1948년 11월 17일 터진목길 사건
60대 김경학 부부와 며느리, 두 살 난 손자 등 일가족 13명이 무참하게 총살당하고 12월에는 수난 시기였다. 1리는 12월 초 바로 마을 복구하라고 하여 올라가 성을 쌓고 보초를 섰는데 12월 19일 또 무장대가 들이닥쳐 보초 서던 민보 단원 16명을 살해해버렸다. 성은 3m 높이로 쌓았고 마을에 있는 나무들도 작전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잘라냈다. 성 밖에는 외성을 1.5m 높이로 쌓고 가시덤불을 넣고 외성을 가렸다. 성문은 3곳이고 밖으로 나갈 때는 통행증을 발부했다.
성 출입문 위치(6곳)
호남동산. 사농매동산(성읍가는 길목). 동치못. 노루못. 진빌레. 탈왓.(고성리 가는 길 연이네 올래)며 그 중 동치못과 탈왓에는 홈을 크게 파서 다리를 놓아 다녔고 밤에는 다리를 치우고 보초를 섰다. 성의 밑굽은 2.5m 정도였고 높이 3m 성은 밭담경계로 이용하여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성 아래는 해자를 파서 위장시킨다.
충남부대 도착
1949년 초 성읍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경찰응원부대인 충남부대 1개소대가 주둔하게 되었다.(소대장 최융양) 본부는 향사당 옆이었다. 이 소대는 10개월가량 마을경비를 하면서 주민들을 보호하였다. 서청중대하고는 전혀 다른 행동에 마을주민들은 안심하게 되었고 후일 `淸德碑`를 세워 그 공을 기렸다. 대원들은 2명씩 개인 집으로 배치하였고 그러다 보니 집주인 딸과 결혼하는 일도 벌어졌다. 응원부대는 남로당성산면당 위원장 오광형을 잡아 오기도 하였다. 청덕비는 당초 수산성 서쪽에 건립했다가 지금은 수산리 입구 충혼비 옆으로 옮겼다.(청덕비 위치 : 수산서로 남로 17/수산리 703-1 (간부 5명 대원 42명 명단이 새겨짐)
비문 내용 : 前面 忠南中隊 第一小隊長 警衛 崔隆陽 淸德碑 小隊長 警査 李東根 柳生祐 尹基贊 明濟宗 愛國濟生 損資周急 警民至公 拍手感泣
애국하여 생명을 구제하고 / 재산을 털어 급한자 도와주고 백성들 공익으로 가르치니 / 박수치며 감읍(슬퍼하였네)했네
赫乎功積 用勇討伐 接人以德 功此(0)石=刻, 竪, 立, 造, 彫 중 한 글자임. 혁혁한 공 쌓인 까닭은 / 용기 내어 토벌한 일이기에 마을 사람 그 공덕 이렇게 비로 세웠도다.
우측면 : 檀紀 四二八二年 五月 水山里
후면 : 隊員 警察官 성함이 기록되어 있음(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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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평에 풍력단지를 바라보면서
가랑비가 오다 그친 좁은 농로를 따라
박원철 질토 이사랑 이야기 나누며
한참(500m 쯤)을 걸어간다.
바로 풍차 아래서니 자동차가 지나가는 기분이다.
수이익 수이익 승용차 소리와 비슷하였다.
그러는데 승용차가 지나간다.
농로는 걸을만 했고
멀리 백약이오름이 보이면서
유채꽃이 막 피기 시작이다.
잡풀로 우거진 아래 보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다.
이틀전 사전답사(문영택 이사장, 전광희, 박원철 이사)를 하면서 잡풀과
가시덤불을 겉어내니 700여년 전 돌담장 잣성이 나타났다.
1276년 수산평 몽고말 입식 후 잣성 아래 지역이 농사짓는 밭이라
이를 막기 위하여 쌓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위 자료에 길이가 나타났으며 길게 남아 있는 이 성담을 어떤식으로 관리
하고 보존해야 할 것인지까지 세미나를 통하여 결론을 내려야 한다.
수산리, 제주도, 서귀포시, 돌담연구자들, 질토래비까지 총괄하여 대토론을
여러번 거쳐야 한다.
그 감동의 순간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700년 전 원나라 때 제주목장으로
돌아간 것이다. 대단하다는 말로 밖에 응대할 말이 없어졌다.
과거에 쌓는 방식이나 지금에 헛튼식 쌓기나 별 다른 것은 없지만
700년이란 시간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다행인가.
잣성을 뒤로 하고 갔던 길을 돌아오면서
용눈이오름이 보이고
물이 고이는 농로지만 무슨 상관이랴!
이 보다 더 험한 가시덤불도 치우고 정리했는데
수리대(족대)가 제주시 아라동 죽성마을 처럼 500m 정도 길게 만아 있고
과거 700년 전 원나라 사람들이 정주지가 아니었나.
세월이 흐르면서 원나라 젊은이들은 제주여성과 혼인관계도 맺고 결국
제주 토착민이 되기도 했다. 원제국은 100년 이란 세월을 지배하고 있었다,.
대나무는 생활도구를 만드는데 절대 필요한 재료가 아니었나.
본토와 거리가 멀어 물품조달이 어려워 자체해결하는 방법이 대나무로 만든 도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