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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음의 빙토(氷土)
“우르르..! 타타타타...!”
수많은 말발굽이 대지를 박차는 진동소리가 천둥처럼 우렁차다.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풍처럼 내달리는 삼백여 기에 달하는 일단(一團)의 군마(軍馬)!
장쾌한 군세와 위엄을 갖추고 오만한 광경을 연출하며 말굽 뒤로 차내는 흙먼지 속에 분노와 살기가 물씬거린다.
엄격한 군율과 큰 세를 갖춘 이 군마는, 언젠가 조선청년 곤과도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될 일대지배자 염공왕의 장자 염독천(廉獨天)휘하 정예병마대다.
무슨 위급으로 초원을 노도처럼 휘몰아 내달리는지 몰라도 주위를 압살하는 상당한 형세임에는 틀림없다.
작금(昨今), 동북아일대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전운(戰雲)에 휘말려 있다. 누구도 섣부르게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침울한 장막이 동북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짙은 화연의 혼란을 예고하며 개인은 물론 동북 모든 부족 부락들이 존립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혼란의 시기다.
우후죽순처럼 돋아난 군벌(軍閥)과 제 삼의 세력들이 서로 탐욕의 눈빛을 번들거리며 노골적으로 대지의 주권을 노리는 이 시점.
만주일대를 강점한 일왕의 충성스런 관동군과, 여기 편성되어 다시 중원복귀를 노리는 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비롯, 일본을 중국대륙에서 몰아내고 천하통일하려는 장개석과 틈을 엿보며 야망을 감추고 있는 모택동 이 모두 같은 통속들이다.
더하여 만주를 되찾기 위해 자나 깨나 역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도 실체의 주역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
동토의 장막 뒤에 숨은 음흉한 북극곰 소련 또한 사실상 동북실권을 노리는 가장 무시무시한 세력이며, 소규모 부족의 생존이란 거미줄에 걸려 퍼덕이는 날벌레처럼 위태한 처지다.
줄달기에 있어 단 한 번 과오라도 저지르면 그것은 곧바로 부족 전체의 멸망과 직결되었고, 수많은 부락들이 본보기처럼 학살과 약탈방화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다.
복잡한 격변의 중심에서 바람 앞의 등불로 발버둥치고 있는 염독천의 경기병대(輕騎兵隊)가 혼신을 다해 질주하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반드시 피로써 갚아야할 증오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염독천에게 의지하여 충성을 맹세한 별동대는 지금 정체 모호한 한 무리 적단(賊團)을 복수의 일념으로 뒤쫓고 있는 중이다.
주체를 드러내지 않은 무자비한 일단의 무리가 염독천의 영향권에 속하는 촌락 하나를 폐허로 만들었다. 살육의 만행을 저지른 후 철저히 약탈하고 방화한 뒤 황토바람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염독천이 달려갔을 땐 마을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옥도의 그것과 흡사했다.
인육에 맛들인 살기어린 유기(遺棄)견들만 날뛰고 있었을 뿐, 그 광란의 폭풍이 휩쓴 생지옥의 참상을 떠올리는 염독천의 얼굴은 격분으로 일그러져 있다.
도대체 누가 그 무슨 원한으로?
이 집단은 지평선 끝까지 쫓아가 기필코 죽임으로써 되갚아 응징하여야할 원수들이다.
염독천이 싸늘한 눈빛으로 절골지통 분을 삭이며 중얼거린다.
“놈들에게 피의 보복에 의한 교훈을 가르치리라. 그리고 처참하게 죽어간 동족의 원도 달래고 말리다.”
일대는 염독천 부족들이 장악하여 실세를 떨치고 있는 구역이었지만, 만주국에 속해 있었기에 현실적으로는 관동군의 영향력과 그 지배하에 있었다.
하지만 폐쇄적지형의 험준한 오지(奧地)라는 혜택으로 아직은 독자적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탁 트인 평원지대를 거쳐 비좁은 협곡을 지나 병풍처럼 둘러쳐진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어와야만 하는 천혜의 요새지기에 중무장한 대규모 부대전술이 쉽사리 통용될 수 없는 곳이다.
이런 요건으로 모택동의 팔로군이 근처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세를 불리고 있었고, 장개석군 또한 영향력행사를 위해 상당한 규모의 전력을 투입하고 있는 특수지역에 속한다.
관동군역시 이 오지에서의 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차츰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지만 지형적 악조건을 극복하지 못해 속 태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금(現今), 위기를 느낀 관동군산하 모든 부대들은 광분하여 날뛰고 있었고, 힘의 균형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동북전역을 본격적 악랄한 수법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일본을 배척하고 적을 이롭게 하면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빼앗는 공포지배의 초토화 작전이다.
어쨌건 화를 당한 염독천에겐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주저할 여지가 있을 리 없다. 힘을 보여주지 않으면 무력함에 대한 혈세를 더 가혹하게 치러야하는 것이다.
밀리게 되면 협상도 없이 어차피 다 빼앗기거나 다 죽어야한다. 그에게 목숨 맡겨 따르는 모든 군정 각각의 얼굴마다 비장함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워어, 워!”
선두를 달리던 염독천이 군마를 정지시킨다.
광막(廣漠)한 평원을 가로질러 반나절을 질주하였기에 인마(人馬) 모두 휴식이 필요한 때다. 마른 빵 조각을 물에 적셔 빈 배를 채우고 말들도 물을 먹여 풀을 뜯게 했다.
“소공왕께서 홀로 떨어져 계시기에 재간은 없어도 잠시 말동무나 되어드릴까 하오.”
외떨어져 생각에 잠겨있는 염독천에게 누군가 뚜벅 걸어와 말을 걸기에 뒤돌아다보며,
“각마풍 지대장이시군. 어서 오시오. 휘하병대를 지켜보니 믿음이 바위처럼 묵직하오. 병마술 조련에 들인 노고를 치하 드립니다.”
“어헛! 칭송을 다 하시다니 그 말씀 이 마적은 비난받는 것보다 더 두렵소이다.”
“아하핫! 설사 어설픈 부분이 있다하여도 내 각마풍대장만은 절대 구박치 못하오.”
“감사하오만 본인처럼 무지한 인간에게는 그저 닦달해 몰아붙이는 것이 최고의 약이지요.”
“그런 말씀 마시오. 지대장휘하 마군들의 사기가 하늘보다 높으니 이제 놈들을 단숨에 따라 잡아 엄징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오.”
“모조리 도륙하여 두 번 오판치 못하도록 혹독한 우리의 질서를 가르칠 것입니다.”
“본인의 생각도 같소이다. 그런데 각마풍대장께서 이 사람에게 무슨 충고라도 있으신 모양 같으오?”
“누군가는 놈들의 다른 쪽 퇴각로를 미리 차단해야 하는데 어느 지대군을 선택할 것인지 소공왕의 의중을 알고자합니다.”
“작전을 논하시려면 다른 지대장들과 같이 오시지 않으시고?”
“무지몽매한 인간들과 의논으로 분분하다간 시기를 잃어 상황만 복잡하게 만들뿐이지요.”
책략은 귀찮다. 가서 죽으라면 가서 죽을 것이다. 염독천은 이런 결의 넘치는 강한 신뢰를 읽었다.
“정히 그러시면 부하들이 휴식을 취할 동안 지대장의 복안을 경청토록 하지요.”
“명령을 내리시면 본인휘하의 지대군 중 미리 편성시켜 놓은 선발대를 이끌고 놈들이 빠져나갈 길목을 미리 차단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소공왕께서 사냥감을 제 쪽으로 몰아다 주시는 수고만 남았지요.”
“아하하! 다른 지대장들을 모두 제쳐두고 혼자만 공을 차지하시겠다니, 각마풍대장은 언제 봐도 욕심이 너무 과하시오. 슬쩍 나타났을 때 짐작하였습니다. 혹 따져들면 이 사람은 무어라 둘러대야 하는 것이오?”
“각마풍이 잠시 들소풍 나갔다고 잘 타일러 주십시오.”
“하핫! 아무도 곧이듣지 않을 것이오. 실망들만 클 것이외다.”
“그 말씀은 명령이 하달된 것으로 받들어 즉시 출발토록 하겠습니다.”
“고맙소이다. 이번에도 각마풍두목에게 수고를 끼치는군요. 하지만 저들이 과연 각마풍대장이 매복한 쪽으로 나타날지는 본인도 장담치 못하오.”
“그땐 잔병을 추적하여 한 놈 남김없이 주살할 것입니다.”
염독천이 쉬고 있는 부하들을 묵묵히 지켜본다. 곁으로는 평온한 얼굴들이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전투에 임한 살벌한 모습은 비쳐 보이지 않는다.
각마풍이 기력 쟁쟁한 소수병마를 차출하여 즉시 말에 오르고,
“조심하여야하오.”
“나중에 다시 뵙겠소이다.”
역시 언젠가 조선청년 곤과도 자웅을 겨룰 각마풍이 등자에 발을 걸치며,
“따르라. 각마풍이 앞장선다. 선두-우 출발!”
부하들에게 즉각 출정을 지시하니 시위 벗어난 살처럼 순식간에 염독천의 눈앞에서 횅하니 사라져버린다.
만행을 저지른 악랄한 살육자들은 염독천의 손아귀를 벗어날 방도가 없다. 잠시 지체한 본대의 휴식도 끝났다.
“용사들이여, 승마. 보행속도 이동.”
기마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말들의 근육이 팽팽해지자,
“전 부대 추격속도로 전진.”
말들이 속도를 높여 치달린다.
초원을 박차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온 천지에 쩌렁쩌렁 울리고, 한참을 내치고 달려 인마가 파김치처럼 지치기 시작할 무렵 목적한 지점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각 지대장 지시 하에 병마를 숨기고 요소마다 저격병을 질서 있게 배치시키시오.”
지대장이하 모든 전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매복이 끝났다. 이제 묵묵히 저들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얼마나 많은 인명을 살상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자신 또한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고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음산한 침묵 속에 시간이 적적(寂寂)하게 흐른다.
행동이 정지된 매복자들은 갑자기 몰려드는 추위에 오한(惡寒)을 느꼈을 것이다. 산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계곡 아래로 융단처럼 뒤덮여 천천히 깔려 내린다.
시간은 정지된 것 같고 세상 모든 것이 커다란 항아리 속에 봉해져, 산새들조차도 피비린내 풍길 참상을 알아챈 듯 상공을 비켜 날아간다.
지루하다는 생각은 누구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살육을 예기하는 긴장이 잡념과 모든 망상을 일시에 걷어내 버린다.
“앗! 놈들이다.”
어느 순간, 염독천과 매복자들의 눈이 차갑게 빛나기 시작한다.
일진(一陣) 돌개바람이 희뿌연 흙먼지를 하늘높이 휘감아 올리고, 그 흙바람 속에 기다리던 자들이 모습을 보인다.
먹이를 발견한 파충류처럼 날카로운 눈과 눈들이 냉혹하게 살의로 번뜩이는 가운데, 지척에 죽음의 덫이 기다리고 있는 줄 까마득 모르는 살육의 집단이 의기양양 계곡입구로 대열지어 들어섰다.
바위처럼 묵묵 눌러앉은 주시 속에 행렬이 점점 가까워지고 저들 뭐라 떠드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데 마보병으로 혼합된 일본군이다.
때를 같이하여 계곡에 깔려 있던 안개도 걷히고 하늘빛마저 더없이 푸르러 양옆으로 솟은 봉우리가 구불한 산자락을 완전히 드러내놓는다.
“선두 대열 일시 행보를 중지한다.”
마상의 지휘자가 갑자기 행렬의 전진을 중지시키는 것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음일 것임이다.
지휘관이 본능적으로 계곡 주위에 깔려있는 음산한 기운과 살기를 깨닫고 훈련된 감각으로 조금씩 긴장하며,
“이곳 지형이 매우 특이하다. 첨병(尖兵)을 풀어 주변을 수색확인 후에 이동한다.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즉각적인 방어진지 구축도 모색하라.”
그 찰나다.
“탕!”
개전을 알리는 염독천의 단발 총성을 신호로 전방과 계곡 좌우에서 일제사격이 동시에 가해졌다.
“타타타 탕! 드륵 탕타탕!”
계곡을 뒤흔드는 총성과 무수한 탄환이 일본군들에게 퍼부어지고 울리는 총성파가 고막을 찢는다.
유연화약을 사용하는 구식총기에서 화연이 뿌옇게 피어오르고, 숨겨진 총구에 의해 선두의 동료들이 순식간에 픽픽 쓰러지자 일본군은 갇힌 고기떼처럼 당황하기 시작했다.
“앗, 기습이다.”
급작스런 혼동에 휩싸여 갈팡질팡 허둥거리지만 모질게 훈련받은 일본군이다. 오합지졸만 모아놓은 호락호락한 군대는 아니기에 난무하는 총탄 속에서 일부 대열이 전열을 갖추자 대응사격을 시작한다.
“동요하지 마라. 놈들은 잡병에 불과하다. 즉각 중화기를 설치하고 노무라소대는 허술한 좌측 격파를 시도한다.”
하지만 포위된 상황에서 대치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교전이 시작된 지 십 수분 만에 일본군은 전력의 상당수를 손실 당했다.
초전 전투력약화로 일본군사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저하되었고 차례차례 쓰러져 사상자들이 속출하자 부대로써 전술을 실행할 수 없는 지경까지 도괴되어갔다.
“정신들 차렷. 산등선 적지휘부를 집중사격하고 기총대를 엄호하라.”
급급한 가운데 하사관급 지휘관들이 무어라 고함치며 사병들 사이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방어축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자 대열사수에 필사적이다.
희생을 치러가며 설치된 두 문의 경기관총 화구가 열리자 즉각 굉장한 화세의 탄환이 매복병들에게 쏟아졌다.
“타타타탕 타타탕!”
꽤 가공할 위력이다.
화력의 우세로 일본군의 전투열세가 일시 회복되고 두 문 경기총의 작열에 염독천군의 군세가 잠시 흐트러지는듯하다.
그러나 복수의 일념에 불타는 전사들이다. 벌레처럼 바위틈에 붙어 조준된 일발필사의 방아쇠를 당긴다.
지휘관이 우려한대로 엄폐물이 마땅치 않은 기총수들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저격당하자 기관총이 덜컹 총구를 숙인다. 천지를 뒤흔들며 탄환을 뱉어내던 총열을 닫고만 것이다.
“어떤 희생이 생겨도 기총을 지켜 잡아라. 아니면 우린 끝이다.”
박격포탄은 표적을 비켜나 먼 곳에 떨어지고, 몇몇 일본군이 침묵하는 기관총을 다시 붙들고 반격의 맥을 이어보려고 사력을 다하지만 집념을 가지고 퍼붓는 매복군의 표점사격에 금시 격퇴 당한다.
상당한 조직력으로 저항하던 일본군들도 이때부터 확연한 동요를 나타냈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방어선이 조금씩 무너지더니 드디어 결집력을 잃고 개별적으로 흩어진다.
소년병 하찌로오도 자신의 귀를 찢는 아수라의 비명과 처참한 시신들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내동댕이쳐진 어느 고참병의 시신 옆에 바짝 엎드려 몸을 숨겼다. 상관의 고함소리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다.
동갑내기 싱이찌로오가 곁에 붙어있기에 그나마 위안을 찾아,
“하찌로오! 우리는 아무래도 여기서 죽고 말거야.”
“쉿!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싱이찌로오 너 지금 제 정신이 아 니구나. 조장이 들었다면 영락없이 맞아 죽은 목숨이야.”
“이 아수라장에 군조니 조장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어. 아마 저들 도 여기서 살아나기는 틀렸을 걸.”
“제발 조용히 하래도. 목소리가 너무 커.”
“이제 우린 다 틀렸어. 살고 싶다면 여기를 벗어나 도망쳐야해. 어서 나를 따라 와.”
“제발 조심해. 싱이찌로오! 너 머리가 너무 높아.”
“앗! 저기를 좀 봐. 사사끼오장이 버티는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어. 여기 이대로 있다간 영락없이 당하고 말거야.”
“안 돼. 섣불리 움직이다간 더 위험해.”
소년병 싱이찌로오도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자 이미 정신이 훌훌 빠져나 있어, 동료병 하찌로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육의 도가니를 빨리 탈거(脫去)하고픔에 무심코 몸을 일으켜 세운다.
“악!”
그때를 노려 어김없이 날라든 총탄에 싱이찌로오가 절명하고 만다.
하찌로오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쓰러진 동료의 죽음을 멀건이 바라보며 뒤이을 자신의 운명을 여지없이 실감하였다.
대열이 무너진 일본군의 전투형태는 개별방어 수준으로 약화되었고 승부는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
때를 잡아 염독천이 우뚝 일어서서 분연히 전투를 독려한다.
“전면대열 2개 지대군은 즉각 육탄전을 전개하시오.”
승기를 잡은 염독천군이 때를 살려 창검을 꺼내들고 싸움개처럼 사나운 돌격전을 감행하자 이제 전투양상은 처절한 근접전으로 바뀌었다.
염독천군의 과감한 백병전으로 인해 그나마 버티고 있던 일본군의 진영이 걷잡을 수 없이 주저앉아버린다.
“맡은 자리를 사수하라. 이놈들 이탈하면 안 돼.”
그 누구의 비장한 외침에도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는 일본군이 속출하고 전투는 막바지에 다다른다.
절차의 수순에 의한 사냥감으로 사살되는 운명만 남았을 뿐 일본군의 목숨들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떨어진다.
“으아악! 내 팔, 어머니!”
사방에서 들리는 단말마 비명들은 바로 죽음의 소리다.
이 절규의 고통은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상상치 못할 처참한 장면들이다.
흥분하여 이성이 마비된 일부 염독천군은 이미 숨이 끊어진 일본군사체에 수도 없이 군도를 내리친다.
“이놈들, 모조리 동강내 죽여주마.”
시신에서 튀어 오른 살점과 피를 덮어선 모습은 야수가 따로 없다. 용케 포위된 살육장을 빠져나가는 소수의 일본군도 있었다.
염독천 옆에서 이러한 전투장면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한 소년이 쓰러진 어느 군정의 총을 재빨리 집어 들고 도주하는 일본군을 향해 겨냥하자 염독천이 소년을 질책한다.
“소기야, 너는 사람을 죽이기엔 아직 어리다. 총을 놓아두고 설쳐대는 말들이나 돌보도록 하여라.”
“네. 알겠습니다.”
“피잉!”
소년이 말들을 매어놓은 곳으로 기어가고 지켜보는 염독천 귓전으로 어느 일본군이 의도적 목표로 발사한 탄환 한발이 휘잉 스친다.
떨어진 곳에 탄약을 운반하는 부하가 또 총탄에 쓰러지는 것이 그의 눈에 띈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썩은 나무둥치처럼 나동그라지며 죽어가고, 총성과 비명, 신음, 이 세상 온갖 통초의 소리란 모두 토해낸다.
한 젊은 일본군이 전장의 주위를 경계하며 어떻게든 한목숨 살아보고자 죽음의 도가니를 빠져나가려 생존의 틈새를 찾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자신을 겨누고 있는 죽음의 총구를 피하지 못했다.
“탕!”
“아악!”
가슴에 총탄이 박혀 풀숲 위로 털썩 쓰러짐은 젊고 아까운 또 한 생명과 그 인생이 마감된 것이다.
계곡이 터져 나가도록 진동하던 총성이 언제부터인가 약세를 보이며 산발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잔병들을 뒤쫓던 염독천의 군정(軍丁)들은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화약연기 가린 저편에서 어디론지 황급히 뛰어 가는 몇 명 일본군이 있지만 잔병처리에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겼다. 만세, 우리가 이겼다.”
염독천군이 승전의 총성을 쏘아 올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두 서너 시간에 불과하다. 이 짧은 시간에 벌어진 참극이란, 전쟁의 명목 하에 저질러진 살상행위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다.
곳곳에 시신들이 즐비하고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역겹게 풍긴다.
“두령님! 한 놈을 살려 생포하였습니다.”
전장을 살아 빠져나가려던 한 젊은 일본군이 붙잡혀왔다.
한눈에도 앳되어 보이는 소년병이다.
염독천이 꿇어앉아 벌벌 떨고 있는 일본군소년병에게,
“나는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는다. 묻는 말에 순히 답한다면 고통 없이 죽을 것이나, 간교한 말로 나를 기만하면 너는 너희의 신에게 빨리 죽기를 애걸해야한다.”
소년병의 표정은 곧 질식할 듯하다.
“하이.”
“원한다면 유품을 너희병단에 넘겨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배려해 주겠다.”
무표정한 염독천의 표정이 젊은 일본병사에게 더 많은 공포를 가져다주는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어린 소년임에 틀림없다. 이제 겨우 열예닐곱 정도.
곧 닥칠 죽음의 공포로 소년병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눈에 보이는 주검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다 같이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다. 한 일본군 사체는 군도의 일격으로 머리가 갈라져 허연 뇌수가 쏟아져 나와 있다.
또 다른 시신은 한쪽 발이 정강이뼈에서 쪼개져 껍질만 붙어있고 이 모두 멀고 먼 전장에 불려나와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이었다.
소년병의 이름은 니노미야하찌로오다.
“흑흑!”
하찌로오는 왈칵 설움이 북받쳤다.
처절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저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왜 자신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삶의 경험에 있어 햇병아리에 불과한 하찌로오에겐 모든 것이 풀리지 않는 어지러운 세상의 수수께끼일 뿐이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고기잡이를 천직으로 여겨 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충성스런 천황군대의 일원이 되어 온갖 구호를 외치고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원하지 않던 집단에 시달리다 고향을 떠나게 되더니 멀고 먼 남의 나라에서 마음에 없는 노략질과 살인을 일삼게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다. 인생을 깨닫고자 애써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으흐흑!”
하찌로오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상의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한 권과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았음직한 오래된 회중시계 하나를 꺼냈다.
“제가 가진 소지품이라고는 부친이 저에게 주신 이 낡은 회중시계와 수첩 한 권이 전부입니다. 저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오니 부디 저의 고향집으로 보내지도록 배려하여 주십시오. 수첩에 적힌 글은 부친의 약값을 마련키 위해 스스로 몸을 팔아버린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것입니다.”
소년병 말처럼 이 시기 일본의 가난한 집에서는 알게 모르게 국가나 개인에게 딸을 내다 파는 것이 공공연한 행위로 되어있었다.
염독천이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떡인다.
“부친이 병중에 계신데 동쪽을 향해 절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면 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승낙을 받은 하찌로오는 생존한 부친이 와병 중인 동쪽 방향으로 세 번 절하였다.
주위에 둘러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장정들도 숙연한 얼굴이다.
사람을 도륙하던 비이성적 감정에서 깨어났는지 가슴 한편을 치는 뜨거움을 감추려고 누군가 몇 얼굴을 슬며시 돌린다.
염독천 앞에 무릎 꿇어앉힌 하찌로오의 모습을 소년 소기도 둘러 선 장정들 한쪽 구석에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너는 누구이며 나이는 몇인가?”
“저의 이름은 니노미야하찌로오이며 나이는 18세입니다.”
염독천이 혀를 끌끌 차며,
“너같은 소년들을 거두어 소모시켜야 하는 현 실정이 소위 국가명예와 국민을 존중한다는 일본제국이 처한 너희 황국군대의 현실이다. 처량하게도 장차 국가의 미래를 이어 나갈 자국의 젊은 초석들을 무차별 거두어들여 소진시키고 있구나.”
염독천은 조용한 어조로 다시 질문을 던진다.
“부대원들 모두 일본군임이 분명한데 왜 일부는 만주군의 복장으로 위장하였는가?”
“모든 것은 상부의 지시로 시행되었기에 하급병인 저로써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고참병들의 말에 의하면, 만주 여러 인종 간에 불신을 조장시켜 일본에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얼핏 들었습니다.”
염독천이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사체를 일부러 훼손시킨 잔인한 칼질은 의도적으로 행하여진 것인가?
“그런 행위 대부분은 언제부터인가 본토에서 건너와 저의 부대에 합류하게 된 대륙낭인들에 의해 자행된 것입니다.”
염독천이 눈을 지그시 감고 무엇인가 떠올리다 지우며,
“부대구성과 정확한 인원은?”
“여덟 명의 낭인을 포함해서 부대구성원은 전부 116명입니다. 그러나 한명이 도중에 병사하였으므로 저까지 모두 115명입니다.”
확인된 일본군의 사체가 92구이므로, 니노미야하찌로오를 제외하면 23명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간 것이다.
염독천 측의 피해는 사망 16명, 중상 2명, 그 외에 다수의 경상자가 있었다.
염독천이 옆에 선 부하에게 고개를 끄떡이자 즉시 장정 두 명이 소년병의 양팔을 구속하여 숲으로 끌고 간다. 소년병의 하반신은 스스로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마비되어 있었다.
“탕!”
잠시 후 숨을 끊기 위한 한 발 총성이 울리고, 천황의 충성스런 어린 목숨 또 하나가 참으로 허무하게 이 숲에 떨어져 사라졌다.
무심코 소년병이 손에 넘겨주고 간 낡은 회중시계를 열어 보니 팔려갔다는 어린 계집아이의 낡은 사진 한 장이 쓸쓸하게 염독천을 향해 웃고 있다.
우울한 심경을 감추기라도 하듯 염독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부하들에게 승리를 치하한다.
“염독천의 용맹한 전사들이여! 승리의 영광을 나의 용사들에게 바친다. 군마와 전리품 또한 모두 그대들의 것이다.”
“염독천 만세! 소공왕 만만세!”
어느 죽임 때문일까 아니면 기우는 저녁빛의 반사일까 염독천의 눈에 무엇인가 반짝임이 어렸다 사라진다.
심심풀이가 되었기를 바라면서 풍걸
첫댓글
단숨에 읽고
저미는 아린 여운
풍걸님 감사
잠시라도 여유를 가지셨다면 그저 감사감사.
풍걸님 !! 태풍으로 부산집회가 취소되었습니다 오늘을 많이 기다렸는데
아쉬움 가득입니다 ㅠ
그러나 곧 일정을 다시 잡을것입니다
곧 뵙기를 소원하면서...
수중전 할라꼬 사논 레인페션복 방수바지 장구들 보따리에 싸면서 다음 기회를...수중전 기회가 아마도 없을 것 같으네요. 바쁘다면서 심심풀이에 일부러 댓글 달려고 애쓰지 마삼.
(오늘 새벽 서면 이면도로에 냉장고도 구불러 다니고 낮에도 길가에 사람이 거의 없음. 간판 날라올까바 벌벌 떨면서 다님.)
정성들여 써주신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여운이 많이 남네요..
호쾌한 대하소설의 요소를 고루 갖춘 명작입니다
편히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일송정님의 멋진 금혼기념여행 회고첩 잘 보면서 부러워하였습니다.
오래토록 창천하시고 행복하십시오.
@풍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