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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묵상글 들 ( 성모 승천 대축일. - 우리도 은총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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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도 은총을
오늘이 성모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기리는 축일이지만
그 오르심이 당신 스스로 오르심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올리시어
오르신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성모님만 하늘로 오르시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오르신 하늘은 우리도 올라야 할 하늘이고
우리도 오르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희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그런데 성모님도 오르고 우리도 오른다면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교리적으로 얘기하면 '부패 없이'와 '부패된 후'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느 인간은 죽은 다음 부패를 겪고 난 뒤에 하늘에 오르겠지만
성모님은 부패할 사이도 없이 바로 하늘로 불려 올라가시는 겁니다.
오늘 감사송은 그래서 또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마리아의 몸에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에서 썩지 않도록 섭리하셨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패 없이'를 육신의 부패가 없는 것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영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곧 죄의 부패가 없기에 곧바로 하늘로 올림을 받는 것 말입니다.
우리 여느 인간은 죄로 인해 곧바로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정화의 시간인 연옥을 거친다는 것이 우리의 교리인데
성모님은 주님의 어머니시기에 죄로 인한 죽음을 겪지 않고
연옥의 정화를 거치지 않도록 특은을 입으신 거지요.
아담의 죄로 인해 우리 인간에게 죽음이 왔는데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아담의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이제 어머니의 부활로 하와의 죽음을 이기게 하신 것이고
그래서 승천의 성모는 뱀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오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죄 없이 잉태되도록 특은을 입으신 성모님은
죄로 인한 죽음 없이 하늘로 오르는 특은도 입으신 것이며
이로써 성모님은 당신 생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무염시태로부터 승천에 이르기까지 특은을 입으신 것이며
무염시태로 시작된 특은이 승천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일을 지내며 이렇게 특은 입으신 성모님께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말로는 아주 쉽습니다.
우리도 은총을 받으면 됩니다.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리아가 했던 그대로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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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망을 주시는 어머니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세주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필요를 전구해 주시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모님의 전구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성모님을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겨레의 평화와 분열과 미움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 더 큰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의 광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가 임신한 엘리자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자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참으로 마리아는 복된 여인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 믿음에서 왔습니다. 루카복음 11장 27절,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리고 결국 구원의 역사는 믿음의 행위로 시작되고 또 열매 맺게 됩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여인이었지만 천사가 전한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처녀인 마리아였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세주를 낳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를 낳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 큰 믿음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원합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겸손과 순명의 삶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큰일을 하신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겸손함을 만나게 됩니다. 그 겸손은 주님의 뜻을 철석같이 믿고 실천하는 순명을 이어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 현장에서 첫 기적을 행하셨는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마리아님의 마음을 헤아려 여섯 개의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워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요한 2,1-12). 성모님은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하시며 몸소 순명의 모범과 함께 다른 이들을 순명의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권고합니다.여러분은 “성모님의 마음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아 잘 활용하십시오.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견주어 여러분의 마음을 성찰하고 그분을 닮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다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가경자 메리 포터).
성모님은 믿음의 어머니, 순명의 어머니,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실 몸이었기에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힘입어” 원죄로부터 보호를 받아 당신 자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특별한 은총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봉헌 하시어 “평생동정”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의 삶의 여정에 함께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히 주님을 뒤따랐던 마리아님을 성자 예수님께서 누리신 영광에 동참할 수 있도록 “몽소승천”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천상영광을 누리고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한 전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성모님의 삶의 여정은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님의 믿음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는 고백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드님과 함께 영욕을 나누었고, 아드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가슴으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끝까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시며 믿음 속에 그 고통과 아픔을 다 감내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바로 이 믿음의 결실입니다. 우리도 승천하신 성모님을 기리며 그분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이는 믿음으로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구지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 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 의탁함으로써 더 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효과적으로 나아갈 수 있고 마침내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어머니의 믿음을 닮은 삶을 통하여 우리도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게 됩니다.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굳게 믿을 때,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을 줄 알 때, 성모님과 같은 영광을 입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 본받아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루어질 것임을 믿어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믿고 맡기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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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기쁨인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1950년 11월 1일, “성모님의 승천”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진 기쁨인 광복을 기념합니다.
이 광복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이 파티마 성모님의 전구로 종결되었듯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역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승천대축일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찬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해방의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북이 분단된 불행한 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올해(2021년)는 해방 77주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단 77주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여전히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로, 아직도 형제적 화해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는 첫 여인인 하와와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납니다.
두 분 다, 맨 먼저 먹는 일, 곧 식사에서 출발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탐욕을 부려 따먹고 자신이 높아지기를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아채고 다른 이들이 마시고 즐거울 수 있도록 도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탐욕을 부리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고. 마리아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땅에 묻혀 한 줌 흙이 되어 사라졌지만, 마리아는 하늘에 올라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이토록, 자신을 배불리고 기쁘고자 한 자와 타인을 배불리고 기쁘게 하도록 한 분의 결과는 참으로 큽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의 승천이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고 여전히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심을 드러내주듯이, 성모님의 승천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돌보시며 함께 하고 계신다는 축복이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요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승천은 하늘에 올라감임과 동시에 우리에게로 되돌아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돌보심을 말해줍니다.
또한,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에 오르심의 영광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하늘에 오를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 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에페 2,6-7).
그렇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바로 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성모님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일 뿐 아니라, 그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찬미노래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님의 자애와 돌보심을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사부 베네딕도께서도 수도승들이 찬미의 생활을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원하셨고(시전례 성무일도), 특별히 <수도규칙> 머리말에서는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머리말 30절)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구원)을 이루시고 계시는 주님과 주님의 자비를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만나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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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성모 승천에 생각하는 성모 찬송
⒈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 승천은 “성모 마리아의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에 부르심을 받았다”(가톨릭교회교리서, 966항)는 뜻입니다.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에서 반포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몸이 하늘의 영광에 부르심을 받았다 함은 그분의 지상적 삶이 온전히 천상적 품위로 인정을 받으셨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혼이 하늘의 영광에 부르심을 받았다함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도 마리아의 지상적 삶을 모범으로 삼아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은총을 전구해 주는 특별한 영적 지위에 오르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시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과 신자들 사이를 전구해 주시는 중재자가 되십니다.
⒉ 성모 마리아의 지상적 삶은 그분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리라는 전갈을 받은 직후에 엘리사벳을 방문한 자리에서 고백한 성모 찬송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엘리사벳으로부터 축하의 인사를 받으시자 마자 기쁜 마음으로 찬송한 이 노래는 이미 아버지 요아킴과 어머니 안나로부터 어려서부터 전해 들은 익숙한 내용이었고, 그 부모 역시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깊은 신심으로 기다리며 암송하여 기도하던 바였습니다. 그들 모두가 메시아를 기다리던 아나빔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드디어 그 메시아께서 오시게 되었고, 더군다나 자신을 통해서 오시게 되었음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메시아를 기다려온 모든 아나빔들이 다 함께 기뻐할 것이고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자신을 축복받았다고 축하해 줄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오심은 아나빔들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전 인류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⒊ 머지않은 미래에 성취될 구원의 확신으로 마리아는 이제 오실 메시아께서 이룩하실 구원 사건을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찬송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셨습니다.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어,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습니다”(루카 1,51-53).
⒋ 성모 찬송의 이 본론은, 메시아께서 이룩하실 구원이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은총이지만, 그렇기 위해서 특별히 그분이 개입하셔서 이룩하실 세 가지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메시지입니다. 창조주이시오 심판주이신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교만한 자들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몸소 내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종교나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역할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할에 관해 알려주는 예언입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하느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보이고 계시는 이른바 최고선의 가치들, 증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에 있어서 최고선에 맞갖은 노력을 기울이며 이 가치들을 가로막는 사회악과 맞서면서 다른 종파들이나 다른 교파들과는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직접 하느님을 믿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을 믿는 증거를 실천하려 노력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⒌ 둘째는 정치적인 메시지입니다. 자유와 정의라는 가치에 해당되는 이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역할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듯이 자유와 정의라는 진리를 위한 십자가를 우리가 짊어질 수 있도록 성모 마리아께서 전구해 주십니다. 셋째는 경제적인 메시지입니다. 평등과 평화라는 가치에 해당되는 이 일 역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역할을 말합니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양극화가 벌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평등의 가치는 점점 더 귀해지고 있으며, 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하면 국제 평화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평등과 평화라는 진리를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성모 마리아께서 전구해 주고 계십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를 천국으로 올라가도록 이끌어주는 사다리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유와 정의, 평등과 평화를 위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천국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⒍ 우리 교회는 박해시절에도 다른 나라 교회들에서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성모 신심을 간직하며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치명의 순간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숨져갈 만큼 성모 신심이 열렬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활에서 예수님을 따르시며 보여주신 믿음과 순명의 덕을 본받아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평소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덕행이었습니다.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며, 굷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하느님께서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기를 성모 마리아와 함께 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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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영혼과 육신으로 천상 영광에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사촌인 엘리사벳이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라는 말을 들은 성모님은 당신의 몸에 이루어지신 은총에 감격하며 주님을 찬미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성모님의 육신과 영혼의 승천은 바로 주님의 은총입니다.
잉태가 생물학적 은총이라면 또 다른 은총은 사랑입니다.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 마리아는 ‘주님께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이루어진 은총이 자신이 가치있거나 공이 많아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마음이 ‘성모의 노래(마니피캇, Magnificat)’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나약함과 비천함으로 너무도 쉽게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인간의 몸인 자신이 원죄로부터 벗어나 일생 동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 구원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은총을 받는 것은 다른 누구의 힘이 아닌 바로 ‘나로부터’입니다.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은총으로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을 갈망하신 그분께서는 이제 영원히 갈망없는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어머님이 올림을 받으셨기에 주님의 자녀인 우리도 올림을 받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경외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위안입니다. 비록 지금 부족한 삶을 살지라도 영원한 세상에서는 풍족함을 누릴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안입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는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모님과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내가 받은 사랑을 표현하고 나눈다면 세상은 좀더 따뜻해질 것입니다.
성모님, 저희가 성모님과 같이 하늘로 오를 수 있도록 성모님의 겸손을 닮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모님의 승천이 왜 우리에게 희망입니까?
2. 건강하게 오래살고 천국에 가는 것은 모든 인간의 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로 올림을 받기 위해, 주님의 은총을 받기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묵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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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언젠가 어느 형제님 두 분이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딱 들어 보니 정치적인 이야기입니다. 진보와 보수의 다툼처럼 보였는데, 서로가 자신의 말이 맞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다 인터넷 유튜브 영상입니다. 요즘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의 알고리즘은 우리를 비슷한 사람들과 짝지어 주고 우리의 취향 및 의견과 가장 잘 맞는 매체나 뉴스를 연결해주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유튜브에 들어가 있지만, 자신이 보는 것은 상대방과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연결로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촛불혁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두 형제님의 다툼에서 볼 수 있듯이 연결이 오히려 분열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무조건 틀렸다는 생각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다른 것임을 인정하면서 더불어 더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분열이 아닌 일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치의 하느님을 우리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바로 주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에게서 받으신 영광을 찬미하는 날입니다. 이런 성모님이 부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승천하셨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갑곶성지 봉안당을 운영하면서 거의 매일 죽음을 보다 보니, 죽음을 건너뛰고 하늘로 오른다는 것은 정말로 부러워 보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영광은 단 한 번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엄청난 고통을 당신의 가슴으로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에 대한 답답한 마음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엘리사벳 성녀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성모의 노래’라는 찬미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죄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던 때였습니다. 이런 어려운 순간을 주시는 하느님 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아시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우리 모두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어떠한가요? 하느님과 철저하게 일치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찬미의 노래를 힘차게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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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한 번도 열어 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세계는 한 칸씩 넓어진다. 새로운 문이 열리면 세게의 모양도 크기도 달라진다(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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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휴가를 가겠습니다.
신부가 되고서 사실 휴가라고 해서 쉬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분명 교구 규정집에는 1년에 20일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일반 사람들도 휴가를 잘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차마 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휴가를 전부 찾아 쓰는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20% 더 만족하고, 전반적인 행복감이 56% 더 높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용한 휴가 일수는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감소해왔다.”
처음에는 열정이 넘쳐서 휴가를 가지 않았지만, 이것이 몸에 배서 쉬면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쉬지 않으면 그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올해는 진짜 휴가를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리고 행복감을 느끼고 이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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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깊은 사랑과 공경을 드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한 믿을 교리 3가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천주(天主)의 모친이 되었다는 교리입니다. 교회는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에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입니다. 12월 8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갔다는 교리입니다. 오늘 8월 15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의 전구를 기원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은총에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은 먼 길을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신앙인이 가야 할 삶의 기준을 노래하였습니다. 저는 성모님에 대한 믿을 교리도 중요하지만 ‘마리아의 노래’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을 지내면서 각자의 노래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브리엘의 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저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보내셨습니다. 제게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가톨릭평화신문을 맡겨주셨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며 좋은 지면을 만들고, 가톨릭평화신문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열려라)’라고 하시면서 귀가 먼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에파타’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보물을 찾아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쿰(일어나라)’이라고 하시면서 죽은 소녀를 깨우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탈리타쿰’하겠습니다. 근심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탈리타쿰’하겠습니다.”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에 가톨릭평화신문을 홍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김문수 안드레아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교우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로 1년 8개월 만에 처음 홍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의 구독 신청은 저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에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이미 신문을 구독하시는 분께서는 후원금을 주셔도 됩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저도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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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천의 여정
- 승리의 삶, 희망의 삶, 기쁨의 삶 -
입추가 지난 후로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줄기차게 맹렬히 울어대던 매미들 찬미 소리도 주춤해지고 과일도 점차 익어 꼴을 갖춰 갑니다. 어제는 서늘한 오후 풍경이 흡사 어머니 자연 품처럼 푸근 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며칠전 강원도에 있는 수녀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어머니 흙같은 어머니 품에서 잘자란 듯한 참 크고 잘 생긴 감자 형제들을 보면서 언뜻 하늘 아버지에 흙 어머니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래저래 자연 어머니를 통해 우리 어머니들이 많이 생각나는 기도와 수확의 계절 가을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어머니들중의 어머니인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참 좋은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요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님이십니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11월 1일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님의 승천을 믿을 교리로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오늘은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35년 동안 식민통치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이기도 하니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성모님과 우리나라의 깊은 인연에 또 감격하게 됩니다. 가톨릭 교리서의 성모님 승천에 대한 요약된 가르침이 은혜롭습니다.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 거룩한 동정녀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하신 것이다.”(교리966).
어제 성무일도시 성모 승천 대축일 제1저녁기도시 성모님이 하늘에 올리셨음에 대한 승리의 기쁨을 한껏 노래한 가사들과 찬미가도 참 은혜로웠습니다.
“기뻐하라, 오늘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도다.”
“동정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거기에 왕중의 왕께서 별빛 찬란한 옥좌에 앉아 계시는도다.”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으니 천사들이 기뻐하며 주를 찬미하는도다.”
참 아름답고 기쁨 가득 선사하는 후렴들도 좋고 다음 찬미가 역시 좋습니다. 두절만 소개합니다.
“세상의 기쁨이여 하늘의 샛별, 창조주 어머니신 동정 마리아
손길을 펼치시어, 버려진 이와 빗근길 가는이들 도움주소서.
하느님 지어내신 사다리시며, 이세상 지존께서 내린 사다리
우리를 당신통해 올려주시어, 천상의 귀한선물 얻게 하소서.”
오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평생 헌신의 사랑을 쏟으며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 성모님과 함께 승천하신 우리 어머니들 천상 생신날이라 저는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이 되면 오늘 영명축일을 지냈던 이미 16년 전 작고하신 저의 모친이 생각납니다. ‘어머니를 그리며’ 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썼던 자작 고백시 후반부를 나눕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종교였고 스승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 거니 ‘그립다’ 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았던 우리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올 때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만하게 되었는데 늦은 나이 서른 넷에 또 고생길에 접어드냐'고
참 안타까우셨을 어머니
그러다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얘,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이불 둘러쓰고 온종일 누워있던 자식이 참 딱했을 것이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 지셔서 온 종일 방에 누워 계신 내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깊고 고요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해도 마냥 좋은 어머니
‘신 마리아!’
오래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 철이 들었나 보다”-2005.3
가을 문턱에 들어선 자연 어머니같은 분위기에 맞이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 참 평화와 위로를 줍니다. 영적 승천의 여정중인 우리들에게 영적 승리의 삶을 살도록, 또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북돋웁니다.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이자 성모 승천 대축일에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이자 깨달음입니다.
첫째, 승리의 삶입니다.
날마다 영적 승리의 삶중에 날로 영적 승천의 여정중에 날로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자꾸 자기속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지옥의 길이요 영적 패퇴의 길입니다. 반대로 날로 하느님을 향해 자아초월의 삶을, 영적 승천의,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이요 우리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천하무적, 백전백승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를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할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최종 죽음에 대한 승리의 열쇠는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아드님의 승천에 참여하신 성모님도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십니다. 승천하심으로 언제 어디서에나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고 계신 성모 마리아님이십니다. 우리의 영적 전의를 북 돋우시는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
둘째, 희망의 삶입니다.
희망의 반대는 절망입니다. 희망없는 절망의 곳이 지옥입니다. 정말 대죄는 자포자기의 절망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말이 절망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성모 마리아님은 우리 궁극의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백절불굴의 인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희망보다 더 좋은 영약도 없고 주님의 전사들에게 우선적 갖춰야 할 자질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희망이 없음에도 희망하는 것이 진짜 희망입니다.
돌아 갈 곳이, 본향집이 있다는 희망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요즘 몇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영성의 정상에 도달한 대가의 경지에 이른 분들인데 소스라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아, 이들은 돌아갈 집이 없구나! 문패가 없구나!” 승천하신 성모님을 통해 하늘이 상징하는 바 우리 궁극의 희망인 본향집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주 예전에 읽은 일화가 생각납니다. 곱게 차려 입힌 수의를 입은 친구의 시신을 보며 탄식처럼 외쳤다는 어느 분의 고백입니다. “옷은 잘 차려입었는데 갈 곳이 없구나. 어디로 가나?” 아마 영원한 목표의 지향없이 살아 오다 불의의 죽음을 맞이했던 분인가 봅니다. 희망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은 오늘 하느님의 위업을 통해 희망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도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희망을 고무시킵니다. 새삼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 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 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승천하신 성모님 역시 영원한 희망의 표징이 되는 바,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 바로 희망의 표징인 성모 마리아님을, 순례 여정중인 우리의 교회를 보여 줍니다. 화답송 후렴 역시 희망의 표징인 성모님을 노래합니다.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셋째, 기쁨의 삶입니다.
영적 승리의 기쁨이요 희망의 기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물론 오늘 승천하신 성모 마리아님 역시 기쁨의 샘입니다. 기쁨과 감사, 찬미는 진정 영적 삶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찬미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님 말 그대로 기쁨의 어머니, 감사의 어머니, 찬미의 어머니입니다.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성모 마리아님과 함께 오늘 복음의 찬미와 감사의 마니피캇을 저녁 성무일도때 마다 노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참 영원한 참 기쁨은 찬미의 기쁨, 감사의 기쁨뿐입니다. 이런 기쁨은 하느님의 힘이자 우리의 힘이 됩니다. 잘 먹어서 힘나는 것이 아니라 찬미와 감사의 기쁨이 참 힘의 원천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일컬으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이런 찬미의 기쁨보다 영육의 치유에 좋은 명약도 없습니다. 성모님의 영적 도반인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역시 기쁨의 여인이었음을 봅니다.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의 기쁨, 만남의 축복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영적 승천의 여정중에 날로 하늘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평생, 승리의 삶, 희망의 삶, 기쁨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참 좋은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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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모 승천 대축일 함께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십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묵시 12,1)
묵시록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에는 영광의 광채가 가득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셔서 세상을 비추게 하신 빛 물체들과 함께, 곧 해를 입고 달을 밟고 찬란히 빛나는 별들로 머리를 꾸민 자태는 하느님 특은으로 충만한 성모님의 위상이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그 잉태부터 승천까지 하느님의 총애를 입은 분이시라고 교회는 고백하지요.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묵시 12,2)
그런데 여인에게 찬란한 영광만 머무르는 건 아닙니다. 크고 붉은 용이 상징하는 악이 그녀를 노리며 구세주의 도래를 저지하려 하지요. 출산 후 광야로 달아나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로 몸을 피하는 그 여인은 영혼이 날카로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감내하신 고통의 어머니, 성모님을 보여 줍니다.
성자를 이 세상에 오게 하신 구원의 탁월한 도구, 마리아는 성자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받아들이신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겪으셨고, 마리아의 믿음과 인내와 순종의 온전한 봉헌을 기꺼이 받으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하늘에 올려 주셨습니다.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와 사촌 엘리사벳과의 만남의 장면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마리아는 당신의 처지를 겸손히 인식합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하느님 모상인 까닭에 어떤 피조물보다 고귀하면서도,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는 비천한 종에 불과하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비천함을 은총으로 바꾸어 주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처한 실존적 고통과 결핍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연민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마리아는 그런 하느님의 자비를 참으로 야무지게 꿰뜷고 있던 지혜로운 여성이었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경륜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주어진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1코린 15,22-23)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역시 부활을 꿈꿉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께서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일으키시고 변모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저 나약하고 부족하며 비천한 존재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른 믿음 덕에 그분의 영광을 나누어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승천 역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모든 피조물을 앞서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신 것이니까요. 우리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믿음과 인내, 순종의 덕으로 영혼을 가꾸며 언젠가 누리게 될 부활의 은총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여기 지상 순례 여정 안에서 겪는 내외적 어려움과 고통에 무너지지 않고, 또 자신의 죄악과 부족함에 발목 잡히지 않으면서, 꿋꿋이 믿음을 견지하며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영광의 어머니이시면서 고통의 어머니신 분, 누구보다 우리 눈물과 두려움을 잘 아시는 마리아께서 천상에서 늘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며 길을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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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오늘은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으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예!', 곧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라는 결정적인 순종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신 '하느님의 어머니',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 어머니와 사랑하는 요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 곧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6.27) 라는 말씀으로 성모님은 또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평생 동정을 간직하신 성모님은 한생을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끝까지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영광인 하늘로 들어 올려 지심으로써, 우리 '신앙의 결정적인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족함이 많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연결시켜주시는 '전구자'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 엄마를 공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 엄마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 엄마의 손을 잡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성모 승천'은 '위로와 희망의 표지'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입니다.
친척 엘리사벳의 칭송처럼 성모님은 가장 복되신 분, 가장 행복하신 분입니다.
우리도 지금부터 행복한 사람이 되고, 마침내는 영원히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성모 엄마 손 꼭 잡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을 기쁘게 걸어갑시다!
그래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늘로 들어 올려져,
성모님과 영원히 함께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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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하늘로 들어올려진 것을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이 ‘올림을 받음’(assumptio)이기에 예수님 승천과 구별 하기 위하여 ‘몽소 숭천(夢召 昇天)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교회의 모상인 마리아가 하늘에 을림을 받은 신비를 기념하면서 교회는 마리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의 업적을 보고 회망을 갖습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마리아 성탄 축일(9월 8일)과 함께 구원의 열매로서의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원죄 없는 잉태가 구원의 첫 열매인 성모 마리아 신비의 출발점이라면 하늘에 올림을 받음은 성모 마리아 신비의 종착점입니다. 그래서 이 두 축일은 성모 마리아 안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구원 시업을 이루는 두 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우리가 듣는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자신올 도구로 하여 이룬 하느님의 위업 및 인류 구원 역사에 감사하며 부른 찬미가입니다. '마니피캇'이라고도 하는 이 기도문은 구세주 예수님을 낳으리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를 받은 마리아가 예수룰 잉태한 몸으로 엘리사뱃을 방문하였올 때, 엘리사벳의 축복의 말에 응답하면서 부른 찬미 기도입니다.
이 감사의 찬가를 읽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누구나 성모 마리아와 함께 기뻐 용약하도록 초대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넘의 위엄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마리아와 같이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믿는 이들은 성모님이 부르셨던 마니피캇을 언제라도 힘차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이 찬양하는 하느님은 한마디로 구원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무관하게 결코 저 멀리 떨어져 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그분의 이름을 알 뿐 아니라 그분이 어떤 존재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은 무력한 분이 아니라 힘과 권능으로 가득찬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수많은 이들을 집단적으로 대충 바라보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굽어살피는 사랑이 충만하신 인격적인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창조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무엇이든 흘려 버리지 않고 우리 인간을 구체적으로 관심있게 바라보는 주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하신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시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들어올리고 풍요롭게 해주십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비천한 존재요 종이며, 그분을 두려위해야 할 존재이며, 비천한 이들이며
구원을 필요로하며 모든 면에서 궁핍한 이들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즉 한없이 낮고 작은 모습을 깨닫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입니다. 겸손은 가장 소중한 덕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과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 그리고 비천한 이와 굶주린 이를 돌보고 그들을 들어올리기 때문입니니다. 마니피캇은 인간이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라는 의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자만이 하느님의 충만함에 회망을 걸고 그분이 이루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반면 교만한 자와 권세 부리는 자 그리고 부요한 자들은 아쉬움을 모르기에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마니피캇에서 찬미하는 하느님은 사랑 가득한 주님으로 그분의 모든 구원업적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니옵니다. 따라서 그분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세계를, 각자의 마음과 영혼을 보고 헤아립니다. 하느님의 위업을 깊이 생각하거나 그 큰 의미를 헤아려 불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인간은 자연스럽게 경탄의 찬미가를 부르게 됩니다. 그는 단순히 입술로만이 아니라 “그분이 바로 이러한 하느님이셨구나”라고 환호 하면서 자신의 실존 전체를 그분께 내맡기게 됩니다. 마니피캇에는 마치 하느님이 내게 행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도, 모든 세대에 걸쳐서도 그렇게 행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바로 성모님의 마니피캇이 우리 각자의 마니피캇이 되어 우리 또한 생애 마지막날에 성모님처럼 하늘에 들어 올려질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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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몽소 승천’(蒙召昇天)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승천(Ascensio, 상승, 올라감)은 능동적으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오르신 것이고, 성모 마리아의 승천(Assumptio, 올림을 받음)은 수동성, 곧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1950년 11월 1일, 교황령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을 통하여 성모님의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치신 다음 영혼과 육신으로 천상 영광에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신경 편람 3902항). “하느님의 고귀하신 어머니께서는 …… 마침내 당신 특전의 최상의 화관으로, 무덤의 부패로부터 더렵혀지지 않은 채 보존되셨으며, 또한 당신의 아들처럼 죽음을 완전히 이기시고서 육신과 영혼으로, 천상의 지고한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시고, 거기서 세세 대대 불사불멸의 왕이신 당신 아들의 오른편에서 여왕으로 빛나실 것입니다”(3903항).
성모 마리아 승천의 의미는 먼저, 하느님께서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하늘로 부르시어 그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심으로써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하신 것’(『가톨릭 교회 교리서』, 966항 참조)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모님의 승천이 언젠가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예수님의 천상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희망의 표지요 위안의 보증인 것입니다. 이 세상 순례의 여정에 있는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실제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이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교회 헌장 62항)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계시기에, 우리가 매 순간 그분께 도움을 청할 때, 그분께서 언제나 자애로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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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8월 15일은 광복절이며 성모승천 대축일이다. 성모승천에 대한 것이 성서에 나타난 근거는 없지만, 초대교회에서부터 이에 대한 신앙을 간직해 왔고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Muniticentissimus Deus)이라는 칙서를 통해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다. 교회는 2000년간을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했으나 정식으로 신앙 교리로 선포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교회는 오늘 하느님의 모친,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의 가장 큰 축일을 지내고 있다.
복음: 루카 1,39-56: 마리아의 노래
주님의 천사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전갈을 마리아에게 전한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리고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즉 남자가 없는 처녀가, 그리고 아기를 낳을 수 없던 엘리사벳, 노인 즈카르야의 아내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과 마리아도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보증해 주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즉 하느님께 충실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즉 하느님의 말씀대로(38절).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즉시 집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도와주기 위해 서두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엘리사벳에게 인사한다.”(aspázomài).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이제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35절). 그리고 엘리사벳이 당신 친척의 “인사”(aspamós)(36절)를 들었을 때, 먼저 당신의 태중의 아기가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하였다. 마리아의 방문과 인사는 엘리사벳에게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주었다(41절).
이렇듯 마리아는 첫 번째로 성령을 받은 분이셨으며, 엘리사벳은 두 번째 성령을 받으신 분이시다. 이분들은 바로 성령을 전달해 주는 분들이다. 이 두 여인은 함께 태어날 아기들에게 있어 주님의 공동체, 구원의 공동체, 위대한 왕의 거룩한 나라의(참조: 시편 47,3; 마태 5,35), 성령으로 준비된 성전의 처음의 중심인물이 된다.
마리아 승천 축일의 의미
오늘 축일은 마리아의 신앙과 삶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구원역사의 완성에 희망을 준다. 성모승천은 예수님 부활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언젠가 성실한 신앙인 모두에게 주어질 부활의 영광을 마리아를 통하여 미리 앞당겨 이루신 사건이다. 즉 성모승천은 예수님 부활의 재확인이며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는 스스로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하느님께 당신의 육체를 내어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 완전한 인간인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원이시다. 우리도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생활하면 우리도 그 말씀을 세상에 다시 낳아주는 마리아가 된다. 마리아를 닮는 삶으로 우리가 모두 같은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마리아는 믿음의 여인
이렇게 마리아를 보면 모든 것이 믿음에서 출발하여 완성에 이르는 모습이다. 즉 천사의 알림에서 십자가 사건 그리고 성령강림까지 믿음으로 가득한 분이시다. 아브라함보다 더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긴 믿음으로 아드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하신 분이시며, 하와의 불순종의 매듭을 당신의 순종으로 풀어주시고 세상에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한 새로운 하와이시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르쳐 준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역사를 인정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게 해준다.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신 그 혈연관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신앙의 여인이었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생애에 언제나 칭송과 영광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은 어머니로서 또한 많은 고통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께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 신앙인의 모델인 성모님께서 인간으로서 당신이 하늘의 영광에 첫 번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마리아와 같은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준다.
우리의 생활이 마리아의 삶을 따를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아줄 수 있다. 마리아로서 살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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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
성모님의
승천(昇天)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대축일이다.
우리 삶에는
승천이 있다.
영혼은
하느님을
노래한다.
자아에서
빠져나와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신다.
승천은
우리모두의
소명이다.
사람이
가야 할
사람의
길이다.
오를수록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다.
사람은
하느님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삶은 신비의
영역이다.
말씀으로
시작된 삶이
사랑으로
승천하신다.
성모님은
우리 인생을
뜨겁게
일깨워주신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사랑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가장 먼 길이
가장 가까운
하늘이 된다.
우리모두는
하느님에게서
왔다.
그래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하느님 사랑이
승천이다.
말씀이
시작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승천은
하느님께
바쳐지는
삶이다.
말씀이
길이 되고
말씀의 삶이
오늘
승천하신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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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모 승천>
성모님의 ‘믿음’과 ‘신앙생활’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인도해 주는 ‘빛’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승천’은 신앙생활의 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희망의 등대’와 같습니다.
‘승천’은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희망입니다.
<전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종말론자들이 말했던 ‘휴거’는 ‘승천’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휴거’ 같은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 ‘들려 올라가’ 라는 말이 있긴 합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6-17).”
이 말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에 구원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상징적인 단어들로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서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라는 말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말한
‘휴거’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의 승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1)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만났을 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라고 말하면서 성모님의 믿음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행복하십니다.’ 라는 말은 원래는 ‘복되십니다.’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말에는
“믿음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성모님의 ‘믿음’은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은(루카 1,31-33),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 본 적도 없는 일, 확인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는
일에 관한 예언이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성모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그 예언을 믿었습니다.
<원래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믿음에 대해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0,29).
성모님은 바로 그 믿음,
즉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2) 성모님의 ‘믿음’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고, 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시게 될
일을 말하자, 성모님은 그 ‘말씀’을 믿긴 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루카 1,34).
이 말은 “저는 동정녀인데, 메시아 강생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 라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루카 1,35),
엘리사벳이 임신한 일도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알려주었고(루카 1,36),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37).
성모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학만능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서는
바로 그런 믿음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3)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서는
‘주님의 자비’에 대한 성모님의 믿음이 특별하게 보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말한 것은(요한 2,3),
예수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4).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거절’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곧바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거절’은 아니고,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부탁하시니
무엇이든 해 보겠습니다. 무엇을 할까요?”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 대해서, ‘주님의 자비’에 대한 성모님의 믿음은
예수님의 계획을 앞당기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우리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가지고 계신 바로 그 ‘믿음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2)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을 찾아왔을 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인사했습니다(루카 1,28).
이 인사말에는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보증해 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계신다는 말은,
성모님 쪽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응답도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잘 나타냅니다.
(이 말씀을,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겠습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의 응답은 ‘말로만’ 해서 될 응답이 아니고,
인생 전부를 걸고 ‘온 삶으로’ 실행해야 할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머니께 당신의 교회를 맡기기 위해서
하신 말씀도(요한 19,26)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보증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신앙생활을 믿으셨기 때문에
안심하고 당신의 교회를 맡기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신앙생활’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모님을 당신의 나라로 모시고 가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모든 신앙인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가신 일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이기도 하고,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뒤를 따라가는 자녀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서 무슨 길인지도 모르는 길을 걷는
어둠 속의 방랑이 아니라,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상태에서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서 걸어가는 ‘희망과 기쁨의 여행’입니다.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면,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계신 그곳에 도착할 것이고,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맞이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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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인간의 존엄을 찾아 하느님께로 가는 길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이 날을 기념하며 우리 앞에 놓은 수많은 민족사적 과제들을 직시하며 제 2의 광복을 이루도록 해야겠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진정한 해방의 길을 찾아 나가야겠지요. 모두 함께 뜻을 모아 올바른 역사와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도덕성을 회복하며, 평등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쇄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교회는 예수님처럼 성모 마리아도 승천하셨음을 기념합니다. 성모승천이란 성모님이 기적처럼 공중부양되어 하늘로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생애 마지막에 육신의 부패를 벗어나 하느님께로 가셨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죽음을 이기시고 천상 영광을 얻으셨음을 회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성모님은 예수님의 구원 여정에 동참하였기에 하느님과 영원히 일치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탄생 예고를 들은 마리아는 서둘러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도 그 방문에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그렇게 주님과 주님의 길을 준비할 선구자는 태중에서 만납니다. 그 구원의 만남은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찬가는 성모 마리아의 하느님을 향한 태도와 삶의 방향을 잘 표현해줍니다. 이 찬가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기쁨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들어 높이려 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의 도구로 뽑아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1,51)을 펼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깁니다. 성모님은 인간의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 그리고 배고픈 사람을 들어 높이시고,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 부요한 자를 내치셨음을 찬미하면서 자신의 가난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가난하고 억압받고 불쌍한 자신과 이웃의 처지를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비천하고 굶주린 모든 이들을 위로해주십니다.
성모님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비움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참 자아와 존엄성을 발견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주님 앞에서의 겸손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철저한 의탁을 발판 삼아 하느님을 향한 순례를 계속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가난과 겸손,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 의탁의 자세로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였습니다. 그 길은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가는 동행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또한 성모님은 사랑의 침묵 가운데 예수님을 동행하며, 죽기까지 인간의 존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구원의 여정, 곧 인간성 회복을 위한 투신에 적극 동참해야겠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변두리로 밀려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불의한 정치구조와 불평등에 맞서며,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자세를 본받아야겠지요.
오늘도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확고한 믿음 안에서, 자신을 낮추어 모든 이와 함께 하고 이웃에게 능동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늘로 들어 높여짐을 체험하는 ‘거룩한 상승’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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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여호수아는 스켐에 모여든 백성에게 어느 신을 섬길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 강너편의 신들, 아모리족 신들을 섬기던 주님을 섬기든 하나만을 섬기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말합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여호 24.16-17)
백성들은 여호수아 앞에서 결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24,24)
그날 여호수아는 스켐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웁니다.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모두 하느님의 율법서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그곳 주님의 성소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세우고 백성들을 저마다 송속 재산으로 받은 땅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의 나이는 백열 살에 죽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나누다보면 바로 ‘약자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과 함께 계실 때에 아이의 부모들이 와서 자식들을 축복해 달라고 청합니다.
제자들은 스승님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을 그들에게 내비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1)
왜 아이들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자격이 있은 것일까요?
여기에서 어린이의 특징을 꼽아보면 부모의 보호 없이는 살 수가 없고, 그래서 약한 존재이지요.
그리고 어떤 욕심의 죄에서 물들지 않은 그야말로 티 없이 맑은 상태, ‘순진무구(純眞無垢)’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래저래 부모의 사랑과 가족들의 관심 속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항상 이쁜 것만은 아니지요.
그래서 ‘미운정 고운정’이라는 말이 가정에서도 나옵니다. 아이들은 약하면서도 순진합나다.
세상의 이해관계에서, 세상의 명예에서, 그리고 세상의 재물에서 자유롭습니다.
주님께서 순진무구한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십니다.
어린 아이는 한 없이 약하면서도 가정에서 늘 주인공이 됩니다.
부모가 젊었을 때에는 사는 데에 바빠서 아이들을 기르면서도 여유가 없었기에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어서 ‘아이들이 그냥 컸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이래저래 부모의 사랑과 가족들의 관심속에서 자랍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을 꼽으라면 부모님에게 대한 신뢰일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어린이처럼 세상의 것들에서 떨어진 순수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매일 어린이처럼 부족한 사람으로 배우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교만한 어른들은 남을 가르치려 하지만 겸손한 신앙인은 배움을 통하여 새로움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자신을 낮출 줄 알고 이웃을 존중해주는 것이 바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바탕이 되는 것인데.
겸손과 반대되는 것은 교만은 사랑과 정의를 가로 막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결속력이 없는 백성 위에 군림하며 대중을 무식사람으로 얕보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들이 있으면서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회개도 남에 대한 배려도 없는 그야말로 율법의 차가움 문자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님께 시비를 붙고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부모들까지도 가르치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어린아이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순진한 어린 아이는 부모가 전부 이듯 참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이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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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 나라(헤 바실레아 톤 우라논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는 ‘이런 이들의 것(토이우톤 τοιούτων’)이다.’
다름 아닌 ‘아이들(타 파이디아 τὰ παιδία)을 가리킨다. 마르코는 ’어린 아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16)라고 했고, 루카는 마르코와 같은 내용으로 전한다(루카 18,16-17)
제자들은 이 아이들이 스승에게 불편함을 줄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부모들의 뜻대로 아이들을 가까이 오게 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신다. 여기서 어린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겸손과 가난함의 특징이 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권위적인 교만과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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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아침미사를 마치고 잠깐 마당으로 나섰는데,
잠시나마 참으로 특별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떠돌다가 저희 집에 정착한 슬기라는 고양이 녀석이 까치 한 마리에게 슬슬 쫓겨나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몸무게나 공격성이나 여러 면에서 게임이 안 되는 까치인데,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서 ‘깍깍’ 있는 힘을 다해 외치며 고양이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결사적인 까치의 공격 앞에 고양이는 슬슬 뒤꽁무니를 빼더군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잠시 뒤에 해답을 찾았습니다.
슬기라는 녀석이 까치집을 습격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들어있던 부화 중이던 까치 알을 슬쩍해서 홀랑 까먹어버린 것입니다.
한 발 늦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너무나 황당했던 어미 까치는 그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슬기를 뒤 쫒아갔던 것입니다.
어미 새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끔씩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정말 극진한 모성입니다.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하고 나면 그 뒤로는 완전히 자신을 잊습니다.
하루 온 종일 목숨까지 걸어가며 새끼 새들을 먹여 살립니다.
혹시라도 침입자가 새끼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 역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이후의 삶,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마음은 다른 어머니들보다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더 조심스러웠고, 더 노심초사했고, 더욱 많은 신경을 쓰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날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순간 순간 지켜보신 성모님, 혹시라도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유년시절, 시절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헤로데의 유아 박해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로 피난까지 갔습니다.
잠잠해지니 또 다른 터전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이사’하면 깝깝한 생각이 먼저 드는데, 그때 당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 여러 번 터전을 옮겨야 했던 성모님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늘 묵묵히 아기 예수님을 위해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에 늘 계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응했습니다.
잠시도 떨어져있지 않고 예수님 주변만을 맴돌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연구하고, 예수님만을 관상했던 예수님의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성모님의 삶이 힘들기만 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내 팔에 앉았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 직접 젖을 먹였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내 손으로 키웠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내 도움에 힘입어 무럭무럭 성장해나갔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십자가 아래 서계시는 참혹함과 돌아가신 예수님을 당신 팔로 앉는 괴로움도 겪으셨지만,
고통보다는 기쁨이, 시련보다는 축복이 훨씬 많았던 성모님의 생애였습니다.
오늘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정말 큽니다.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지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어머님으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숱한 성인성녀들과 함께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를 보거라.
그저 예라고 대답하고, 그저 묵묵히 견뎌내며, 늘 예수님 주변을 떠나지 않고, 그분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 얼굴을 관상하며, 그렇게 살아온 내 얼굴을 바라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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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늘나라에도 경쟁이 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 육신을 지니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당신 아드님과 함께 사십니다. 이것을 기분 나쁘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모님을 너무 신격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육신을 지니고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무엇이 신격화라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성모님은 원죄가 없으셨습니다. 원죄란 아담과 하와가 지어 인류에게 미친 죄입니다. 자아, 곧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인데 자아는 그것과 반대되는 욕구로 자기 먼저 살라고 합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원죄에 물드셨다면 그 인성을 그대로 받는 예수님도 원죄에 물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되어 인류를 구원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상태로 준비되셔서 예수님께 죄에 물들지 않은 인성을 물려주셔야 했습니다. 인간의 몸이 죄 때문에 죽음을 보게 되고 썩게 되었다면, 죄 없는 성모님은 그 육신으로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로 에덴동산에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모님이 이러한 상을 받지 않으셨다면 어떨까요? 우리 인간 중에 누구도 더 거룩해지기 위해 경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신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모님처럼 더 거룩하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됩니다.
경쟁은 나쁜 것일까요? 물론 이 세상에서의 경쟁은 지옥을 만듭니다. 인도의 물소 달리기경기가 마을마다 축제였던 때가 있었는데 여기에 상금을 거니 자신의 경쟁자를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경쟁은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경쟁은 좋습니다. 왜냐하면, 노력한 만큼 상을 받아야 정의로운 것입니다. 저도 어떤 피정에 가서 열심히 하면 1등을 할 수 있고 그러면 본당의 영광이 된다고 해서 열심히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1등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영광을 받았습니다.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보상을 받지 못하자 다음번 피정에는 대충하자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만 성격이 못되어서 그럴까요?
등수를 주지 않으면, 혹은 낙제가 없다면 인간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원죄의 힘이 그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면 어떨까요? 다 대충 살 것입니다. 천국에서 서열이 없다면 어떨까요? 간신히 주일만 지키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각자가 더 많이 받기 위해 더 노력하다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아가 커지는, 그러니까 돈과 쾌락과 교만이 성장하게 하는 방향으로 경쟁을 시키기 때문에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과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한 경쟁이 있습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보다 작다고 했고, 이 세상에서 작은 계명을 어기도록 가르치면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 나라에도 분명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와 같은 대접을 해 달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표정이 어떨까요? 한 만큼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포크포크’라는 유튜브 채널에 ‘엄마 임신 소식 들은 5살 아들의 예상 못 한 반응’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엄마가 임신을 했다고 하자, 5살 먹은 트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엄마는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하며 엄마를 나무랍니다. 지금 있는 동생을 낳아서 자신의 사랑이 빼앗기고 있는데 또 낳으면 점점 자기 입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쟁자라고 여겼던 동생이 태어나자 아이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동생 둘을 아주 잘 보살핍니다. 그 이유는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부모가 사랑해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사랑받는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부모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모가 자신의 뜻을 더 따라주는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경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1등을 한 누군가를 모델로 세우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나도 그 1등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얼마 전 일주일에 하루씩 와서 5년 넘게 저에게 따듯한 밥을 해 주시던 자매님이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좋은 곳에 갔다는 표징이 아주 많았습니다.
많은 분의 꿈에 나타나고, 화장한 유골을 봉안당에 모실 때가 정확히 금요일 오후 3시이기도 했으며(그분은 자비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태양이 비추고 바람이 솔솔 불어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새 한 마리와 나비 하나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례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영성관에 와서 아마 처음으로 무지개를 본 것 같은데) 무지개가 영성관에서 시작하여 하늘을 뚫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표징들은 저에게도 힘을 주었지만 남은 두 분에게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노력한 것에 대한 보답을 이렇게 받아야지 남은 두 분도 힘이 날 것입니다.
만약 열심히 봉사해도 안 좋은 일만 생긴다고 여기게 되면 남은 분들이 힘이 나겠습니까? 분명히 노력한 만큼 주님께서 은총을 주신다고 믿을 때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도 열심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르면 그만한 보상을 받으니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모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자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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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희망이 있을 때
우리는 하루하루를 버티어낼 수 있습니다.
지금 고생이 미래에 보상을 받는다면,
또 지금 흘리는 땀과 피가
내가 바라는 가치를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된다면,
우리는 오늘의 힘듦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희망은 강력한 삶의 원동력이자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삶의 이정표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대한 희망
바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참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세상에서 주는 즐거움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합니다.
또 언젠가 없어질 것들에 마음이 매이게 됩니다.
그래서 변질되는 슬픔, 상실의 슬픔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됩니다.
때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통해 주어지는 행복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충만한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우리 삶 안에 담긴 참된 의미를 살아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이 드러나는 기쁨이 함께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오늘을 찬미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희망을 잘 보여주는 분이
오늘 기억하는 성모 마리아이며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희망의 성취를 드러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참된 행복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며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할 때
희망은 오늘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 안에서 행복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응답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계획에 대한 응답은 마리아를 변화시켰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가진 나약한 존재이지만
주님과 함께 하기에 충만한 존재가 되며
인간이 가진 비천함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하느님을 구원자라 고백하며
마음과 영혼으로 주님을 찬송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마리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비천한 이를 들어 높이실 뿐만 아니라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을 거두어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닥쳐올 환난과 시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당신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시어
함께 해주신다는 강력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기도합니다.
세상의 위협은 우리의 겉모습을 흔들 뿐입니다.
우리 내면에 담긴 하느님의 모습을 잘 간직하며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는 희망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주님 안에서 성모님과 성인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준비하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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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파트모스 섬에 있던 묵시록의 저자(요한)에게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그 안에 있던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다고 합니다(묵시 11,19ㄱ; 12,1-6ㄱ.10ㄱㄴㄷ).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계약 궤(히브 9,4)는 광야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의 생명을 부지하게 했던 만나가 담긴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이 적혀 있는 계약의 돌 판이 들어있다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드러내신 하느님의 업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때(B.C. 587년), 성전은 불타고, 거대한 불길 속에서 계약 궤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유다인들은 계약 궤가 없어졌음을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신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무척 비통해했습니다. 한편, 이때부터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계약 궤를 따로 들어내어 하늘에서 당신 곁에 잘 보존하고 계시며, 언젠가 하늘이 열리면 계약 궤가 보이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은 새 계약의 구세주를 태중에 모시고 계신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서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주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루카 1,39-56). 태중에 주님을 모신 마리아야말로 “하느님의 계약 궤”라는 뜻입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을 통하여 태어날 아기가 이 세상과 다시 사랑의 계약을 맺으실 것인데, 여기서 여인이란 동정녀 마리아(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여인은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신부, 시온의 딸(동정녀 마리아),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여인은 “새벽빛처럼 솟아오르고 달처럼 아름다우며 해처럼 빛나고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아가 6,10) 분으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을 차지하도록 하느님께서 택하신 여인이며, 황금 궁전이고, 새로운 계약 궤입니다. 이제 소아시아(터키) 교회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 대신에 새 계약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있다는데,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마리아께서” 찬란한 빛을 발산하면서 대낮을 지배하는 태양과 밤을 지배하는 달까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은 마치 야곱의 꿈에서 해와 달, 그리고 열한 개의 별들이 야곱에게 큰절을 했던 것처럼(창세 37,9) 하느님의 백성에게서 하느님의 보살핌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부가 된 교회이고, 구세주를 낳아주실 이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의 교회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으로 다시 우뚝 서기 위해 박해를 견뎌내면서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신앙을 간직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말합니다. 박해자들의 폭력은 허공을 가르는 바람에 불과하여 이 땅에 펼쳐지는 구원의 역사(役事)를 거스르지 못합니다(이사 26,17-18).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뽑힌 새 계약의 백성은 여인(성모 마리아와 소아시아의 교회)으로부터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실 구세주를 탄생시킴으로써 이 땅에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며, 선구자로서 자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박해의 고통을 견디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여인에게서 태어난 구세주께서는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이들을 흩으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실 것이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릴 것입니다.
이 여인은 단순히 예수님을 낳아주신 동정녀 마리아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과 교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주 일찍부터 묵시록(제1독서)의 내용을 동정녀 마리아와 교회 공동체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새로운 하와이고, 죽음도 감히 지배할 수 없고, 피조물들의 맏이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주시기 위해 높으신 분의 힘으로 잉태하신 어머니이시고, 하느님께 충실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분이십니다. 이 여인이 낳을 아이(예수님)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칠 것”이고,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실” 것입니다. 비록 하느님의 백성이 겪어왔던 아픔을 겪게 될 것이지만, 그분께서는 혼돈과 파괴를 뜻하는 붉은 용을 상대하실 것입니다. 작은 관을 쓰고 있는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 개나 달려있는(다니 7,2.20) 붉은 용이란 창세기에 나타난 뱀(창세 3,4), 사탄과 악마, 그리고 “유혹자”(마태 4,3)를 상징합니다. 붉은 용이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갖지만, 단지 인간의 능력을 지닌 것 그 이상이 아니기에(묵시 17,3.7.12.16) 절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임마누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다.”는 것은 자기 부하들을 내던지면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과 벌어질 전투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이 전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영적 투쟁으로서 악과 게으름과 불의와의 싸움을 암시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인 선이기 때문에 괴물인 붉은 용이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기만 하지 여인을 위협하거나 공격하지 못합니다. 단지 아이를 삼켜버리려고 그의 탄생을 기다릴 뿐입니다. 만일 여기에서 어린아이가 죽게 된다면(마태 2,16-18) 예수님의 탄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옛 계약도 새롭게 갱신할 수 없으며,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뱀의 교활한 속임수로 시작된 악의 승리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5,2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고”, 그 사내아이는 씩씩하며 기운이 넘치기 때문에(이사 66,7) 쇠 지팡이(임금을 상징)로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 괴물을 제압하면서(시편 2,9)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기다렸던 메시아가 태어났고, 예수님께서 임금으로서 십자가로 세상의 악을 이겨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1코린 15,24)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의해서 그분의 옥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1,27).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바탕으로 초기교회는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성대하게 기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다.”(묵시 12,6)는데, 새로운 이스라엘인 하느님의 백성, 곧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하느님의 백성이 광야에서 지냈듯이, 박해를 받는 소아시아 공동체가 잠시 박해를 피해 광야로 나아가 하느님의 다정한 속삭임을 들으면서(호세 2,16) 시련의 시간을 지낼 것입니다. 광야는 결코 고통과 시련의 장소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친히 당신 백성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보호해주실 장소로 마련하신 곳입니다(에제 34,25).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짝이라 부르실 것입니다(호세 2,18). 박해를 피해 잠시 광야에 머물던 여인(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은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그리고 진실로써 영원한 사랑의 짝으로 만들어주시는(호세 2,21-22) 하느님과 혼인계약을 맺으러 “몰약과 유향, 이국의 온갖 향료로 향기를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광야에서 올라올”(아가 3,5) 것입니다. 그래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인 죽음까지도 굴복시키신(1코린 15,26) 하느님께 백성들은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온 세상의 어머니로 들어 높여지셨고,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는 것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기 위해 미리 준비하신 시작의 순간이며, 주님께서 마리아의 몸이 무덤에서 썩지 않도록 섭리하셨다는 “성모 승천”은 구원 업적의 마침표이고,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4가지 이유로 동정녀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모 마리아께서 공경을 받으심으로써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옳게 이해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사업에서 드러난 마리아의 역할에서 볼 수 있듯이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인(교회)의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 다음으로 가장 높이 오르셨으며,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대축일이 광복절에 겹쳐졌음도 우연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가 최초의 선교사들에 의해 성모님께 봉헌된 나라이기 때문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오늘, 특별히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도록 노력하신 선조들을 기억하는 마음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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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성모님 축일에 성모님을 기리며....
오늘은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하셔야 할 이 지상에서의 과업을 다 이루시고 하늘로 승천하심을 기리며 축일을 지내는 날입니다. 세상에는 여자의 일생이라는 대중가요도 있습니다. 성모님의 일생은 예수님만큼이나 참으로 가슴 아픈 한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 이전에 한 여인으로서 한번 성모님의 생애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여리고 여린 열 몇 살남짓 된 나이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후에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 속에서도 하느님의 비천한 여종으로 생각하시고 예수님을 당신 태중에 모셨습니다. 보통의 믿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이 작용했을 겁니다. 두려운 나머지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신 것도 겸손하셨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이 세상 누구든지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 생명은 귀중하고 다 축복을 받아야 할 아름다운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어머니의 태중에서 자라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미 모태에서부터 우리는 어머니의 은혜로 자랍니다. 그 매개체가 바로 탯줄입니다. 탯줄을 통해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제공되는 영양분으로 우리는 성장하게 됩니다.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태중에만 있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태중에서는 어머니와 탯줄로 이어져 있어서 마치 하나의 몸과도 같았을 겁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는 날이 오면 어머니는 한바탕 해산의 수고를 하십니다. 이때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 고통을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런 고통을 겪게 하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예전에 이어령 교수님의 어떤 책에서 이런 내용을 언급한 내용을 봤습니다. 동물도 새끼를 출산할 때 고통 없이 인위적으로 무통 분만을 했을 땐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새끼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물도 이러할진대 사람은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래서 생명의 탄생은 경이로운지 모릅니다. 바로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에게 고통을 안겨드리는 존재입니다. 아버지의 은혜도 은혜지만 어머니의 은혜는 하해 같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몸은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우리의 영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도 우리를 이렇게 세상에 내놓으셨을 겁니다. 육신의 어머니 못지않게 우리는 성모님의 은혜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육신의 어머니, 아버지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아니지만 원죄를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도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사슬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실 하느님의 아들을 당신의 태중에서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성모님이 안 계셨더라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을 겁니다. 영원한 죽음만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성모님의 몸을 하느님께서는 빌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구세주가 되실 메시야를 모신 몸이십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셨을 때 고통스러운 산고만 산고가 아닐 것입니다. 또 다른 산고가 또 성모님의 길 앞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영세를 받고 이것에 대해 한번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당신의 사명을 다 완수하신 날에 찾아온 고통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를 흘리시며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는 아들을 바라보시는 단장의 고통입니다. 이 고통도 모자라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이 박히셔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고통을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통도 육신의 산고만큼이나 산고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고통을 또 하나의 새로운 산고라고 묵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흘 후에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부활하신 몸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통도 영적으로 새로운 산고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성모님께서 이 세상에서 겪으신 고통인 것입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성모님께서는 이런 고통을 받으실 하등의 이유도 없지만 그 원인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저희를 죽음의 사슬에서 끊어버리기 위해 당신께서 감당하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 축일에 우리는 성모님의 무엇을 기려야 할까요? 무엇을 기리면 성모님께서 기뻐하실까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오늘만큼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게 성모님께서 아마 가장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모님의 고통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고통도 같이 생각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고통을 당신 친히 몸소 안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고통을 저희가 생각하고 묵상하는 걸 더 좋아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게 어머니의 마음일 것입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신의 고통보다도 자식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러할진대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그보다 더 하실 겁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한 번 더 지을 죄도 다시 한 번 더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게 성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될 것이고 성모님을 사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말은 언제나 쉽게 할 수 있지만 쉬운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애는 써봐야 하지 않을까요.
성모님은 우리의 영혼을 낳아주신 어머니이십니다. 육신의 어머니만큼이나 우리는 성모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모님을 사랑하는 길인지는 굳이 말이 필요 없을 겁니다. 당신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거울삼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길이 가장 성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늘 성모님을 사랑해야겠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정말 성모님의 축일을 지낼 때 단순히 축일로써만 그칠 게 아니라 성모님께서 이 세상에서 저희를 위해서 감내하신 그 고통의 은혜를 묵상하며 그 은혜를 가슴에 온전히 품어보면 어떨까요? 아마 성모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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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매일미사ㅣ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집전
https://youtu.be/EBt0CYZSF1g 54:36
2021.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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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매일미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원주교구장)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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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모 승천 대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성모 승천 대축일 제1독서 (요한 묵시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올려졌습니다.' (5)
5,6절에서는 민족을 다스릴 아이의 출생과 여인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붉은 용의 위해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들을 낳았다. 본문에서 여인이 아이를 해산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 ;Incarnatio)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본절의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라는 것은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는 시편 2장 9절의 노래와 같다. 동일한 표현이 티아티라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약속인 묵시록 2장 27절에서도 언급되고,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강력한 면모는 묵시록 19장 15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한편, 본문에서 '들어 올려졌습니다' 로 번역된 '헤르파스테'(herpasthe)는 '이끌려 가다', '끌어 올리다' 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그런데 본문은 누가 그 아이를 하느님 대전과 그분의 어좌로 올려 갔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께와 그분의 어좌로' 승천하신 사건을 가리킨다면, 성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주도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본절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이 누락된 채, 강생과 그의 승천 사실만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용이 여인을 경계한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 라는 사실, 곧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패배시키기는 커녕,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어좌 앞으로 유유히 올라 가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확증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8월 15일 토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묵시 11,19ㄱ; 12,1-6)
11,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 ‘계약 궤’- 속죄판(대속의 예수) 때문에~ 천사가 심판을 할 수가 없어 죄인들이 용서를 받는 그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그 계약의 궤이다. 그것이 하느님나라의 원리이고 그 하느님의 계약이 나타난 것이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 여인, 여자(테무트)는 그릇을 뜻한다. 곧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인 사람으로 열두개의 별을 받은 열두지파인 아들들, 사도교회를 뜻한다.
(시편89,36-38) 36 나의 거룩함을 걸고 이 하나를 맹세하였노라. 나는 결코 다윗을 속이지 않으리라. 37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의 왕좌는 태양같이 내 앞에 있으리라. 38 구름 사이에 자리 잡은 충실한 증인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달과 같으리라.”
= 태양과 달은 빛이신 예수님을 뜻한다.
그리고 요셉의 꿈 (창세37,9) 9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
= 요셉 또한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의 머리로 열두 아들 사도인 교회의 큰절을 받는, 곧 교회는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다시 그 예수님을 머리로 교회가 깨달음으로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 깨달음은 아기를 낳는 그 진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죽음을 듣고 애통애하는, 근심하는 제자(12)들에게~
(요한16,21-22)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열두제자, 교회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으라, 낳아라 하신다. 그러면 애통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하신다.
그런데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 붉은 용, 옛 뱀으로 악마, 사탄이다(9절) 곧 에덴의 선이 악을 품어 생명(구원)을 주는 나무를 선악의 법의 나무로 거짓되게 했던 그 뱀으로, 하느님의 계명, 말씀을 인간의 계명으로, 그 거짓 가르침으로 구원을 방해한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 뱀의 거짓, 그 거짓 가르침으로 올바른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낳지 못하게 거짓 예언자(무법자)를 통해 호시탐탐 노린다.
(2테살2,9-12) 9 그 무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으로, 그는 온갖 힘을 가지고 거짓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며, 10 멸망할 자들을 상대로 온갖 불의한 속임수를 쓸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여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을 속이는 힘을 보내시어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 자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기적, 신비에 빠진 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자꾸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기적과 신비적인 일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5ㄱ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 쇠지팡이로 다스릴 분은 예수님 이십니다.
(시편2,7-12) 7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8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9 너는 그들을 쇠 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 10 자, 이제 임금들아,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11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의 발에 입 맞추어라. 12 그러지 않으면 그분께서 노하시어 너희가 도중에 멸망하리니 자칫하면 그분의 진노가 타오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5ㄴ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 졌습니다’.-예수님의 승천이다. 예수님의 승천 후 교회는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에서 양육을 받는다. 그 보살핌의 처소란 우리 삶의 현장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듯 교회인 여자, 우리 또한 육의 뜻을 만족 시켜주는 그 사탄의 유혹을 삶 속에서 이겨내야, 살아내야 하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ㅏ는 그 유혹에 늘 넘어진다는 것을, 내 뜻을 위해 하느님의 듯에 불순종하는 그 우리의 나약함을 경험하고,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로마11,32)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그때,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러 오셨다는 말씀에 감사하며 그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내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승리를 전가시켜 주신, 그 승리의 주님께 피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이끌어 가신다.
(1코린15,57-58)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요한6,29)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속죄판으로 오신, 곧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믿는 것, 깨닫는 것, 낳는 것이다. 아멘.
오늘 우리들이 ‘여인, 여자’를 성모님으로만 묵상한다면 하느님,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기 되는 것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51절은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 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와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52절은 이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는 '주권자','통치자'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는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좋은 것'과 '빈손','배불리시고'와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 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과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는 '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은 '채우다','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는 '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는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렌'(eksapesteilen; he has sent)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ek)와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1854년 교황 비오9세에 의해 원죄없는 잉태 교리가 반포되었으며,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 교리를 정식으로 정의하고 선포하였다
"원죄 없으신 천주의 모친 평생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을 갖고서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교리임을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 하는 바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도 "예수의 모친은 천상에서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신다"(교회헌장 68항) 고 하면서 마리아께서 받으신 특권과 각별한 은총을 재확인 하였다.
같이 천국에 가셨지만 주님의 경우는 승천이라고 하고 성모의 경우는 ’피승천’ 즉 ’몽소 승천’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자력으로 승천하셨고, 성모님은 역시 사람이므로 자력으로 못하시고 주님의 힘으로 승천하셨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18 나는 이 책(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 20 이 일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21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묵시22;18-21)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올려졌습니다.' (5)
5,6절에서는 민족을 다스릴 아이의 출생과 여인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붉은 용의 위해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들을 낳았다. 본문에서 여인이 아이를 해산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 ;Incarnatio)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본절의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라는 것은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는 시편 2장 9절의 노래와 같다. 동일한 표현이 티아티라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약속인 묵시록 2장 27절에서도 언급되고,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강력한 면모는 묵시록 19장 15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한편, 본문에서 '들어 올려졌습니다' 로 번역된 '헤르파스테'(herpasthe)는 '이끌려 가다', '끌어 올리다' 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그런데 본문은 누가 그 아이를 하느님 대전과 그분의 어좌로 올려 갔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께와 그분의 어좌로' 승천하신 사건을 가리킨다면, 성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주도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본절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이 누락된 채, 강생과 그의 승천 사실만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용이 여인을 경계한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 라는 사실, 곧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패배시키기는 커녕,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어좌 앞으로 유유히 올라 가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확증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8월 15일 토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묵시 11,19ㄱ; 12,1-6)
11,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 ‘계약 궤’- 속죄판(대속의 예수) 때문에~ 천사가 심판을 할 수가 없어 죄인들이 용서를 받는 그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그 계약의 궤이다. 그것이 하느님나라의 원리이고 그 하느님의 계약이 나타난 것이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 여인, 여자(테무트)는 그릇을 뜻한다. 곧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인 사람으로 열두개의 별을 받은 열두지파인 아들들, 사도교회를 뜻한다.
(시편89,36-38) 36 나의 거룩함을 걸고 이 하나를 맹세하였노라. 나는 결코 다윗을 속이지 않으리라. 37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의 왕좌는 태양같이 내 앞에 있으리라. 38 구름 사이에 자리 잡은 충실한 증인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달과 같으리라.”
= 태양과 달은 빛이신 예수님을 뜻한다.
그리고 요셉의 꿈 (창세37,9) 9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
= 요셉 또한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의 머리로 열두 아들 사도인 교회의 큰절을 받는, 곧 교회는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다시 그 예수님을 머리로 교회가 깨달음으로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 깨달음은 아기를 낳는 그 진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죽음을 듣고 애통애하는, 근심하는 제자(12)들에게~
(요한16,21-22)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열두제자, 교회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으라, 낳아라 하신다. 그러면 애통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하신다.
그런데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 붉은 용, 옛 뱀으로 악마, 사탄이다(9절) 곧 에덴의 선이 악을 품어 생명(구원)을 주는 나무를 선악의 법의 나무로 거짓되게 했던 그 뱀으로, 하느님의 계명, 말씀을 인간의 계명으로, 그 거짓 가르침으로 구원을 방해한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 뱀의 거짓, 그 거짓 가르침으로 올바른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낳지 못하게 거짓 예언자(무법자)를 통해 호시탐탐 노린다.
(2테살2,9-12) 9 그 무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으로, 그는 온갖 힘을 가지고 거짓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며, 10 멸망할 자들을 상대로 온갖 불의한 속임수를 쓸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여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을 속이는 힘을 보내시어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 자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기적, 신비에 빠진 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자꾸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기적과 신비적인 일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5ㄱ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 쇠지팡이로 다스릴 분은 예수님 이십니다.
(시편2,7-12) 7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8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9 너는 그들을 쇠 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 10 자, 이제 임금들아,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11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의 발에 입 맞추어라. 12 그러지 않으면 그분께서 노하시어 너희가 도중에 멸망하리니 자칫하면 그분의 진노가 타오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5ㄴ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 졌습니다’.-예수님의 승천이다. 예수님의 승천 후 교회는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에서 양육을 받는다. 그 보살핌의 처소란 우리 삶의 현장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듯 교회인 여자, 우리 또한 육의 뜻을 만족 시켜주는 그 사탄의 유혹을 삶 속에서 이겨내야, 살아내야 하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ㅏ는 그 유혹에 늘 넘어진다는 것을, 내 뜻을 위해 하느님의 듯에 불순종하는 그 우리의 나약함을 경험하고,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로마11,32)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그때,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러 오셨다는 말씀에 감사하며 그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내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승리를 전가시켜 주신, 그 승리의 주님께 피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이끌어 가신다.
(1코린15,57-58)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요한6,29)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속죄판으로 오신, 곧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믿는 것, 깨닫는 것, 낳는 것이다. 아멘.
오늘 우리들이 ‘여인, 여자’를 성모님으로만 묵상한다면 하느님,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기 되는 것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51절은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 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와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52절은 이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는 '주권자','통치자'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는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좋은 것'과 '빈손','배불리시고'와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 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과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는 '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은 '채우다','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는 '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는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렌'(eksapesteilen; he has sent)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ek)와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1854년 교황 비오9세에 의해 원죄없는 잉태 교리가 반포되었으며,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 교리를 정식으로 정의하고 선포하였다
"원죄 없으신 천주의 모친 평생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을 갖고서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교리임을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 하는 바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도 "예수의 모친은 천상에서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신다"(교회헌장 68항) 고 하면서 마리아께서 받으신 특권과 각별한 은총을 재확인 하였다.
같이 천국에 가셨지만 주님의 경우는 승천이라고 하고 성모의 경우는 ’피승천’ 즉 ’몽소 승천’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자력으로 승천하셨고, 성모님은 역시 사람이므로 자력으로 못하시고 주님의 힘으로 승천하셨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18 나는 이 책(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 20 이 일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21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묵시22;18-21)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올려졌습니다.' (5)
5,6절에서는 민족을 다스릴 아이의 출생과 여인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붉은 용의 위해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들을 낳았다. 본문에서 여인이 아이를 해산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 ;Incarnatio)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본절의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라는 것은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는 시편 2장 9절의 노래와 같다. 동일한 표현이 티아티라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약속인 묵시록 2장 27절에서도 언급되고,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강력한 면모는 묵시록 19장 15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한편, 본문에서 '들어 올려졌습니다' 로 번역된 '헤르파스테'(herpasthe)는 '이끌려 가다', '끌어 올리다' 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그런데 본문은 누가 그 아이를 하느님 대전과 그분의 어좌로 올려 갔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께와 그분의 어좌로' 승천하신 사건을 가리킨다면, 성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주도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본절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이 누락된 채, 강생과 그의 승천 사실만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용이 여인을 경계한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 라는 사실, 곧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패배시키기는 커녕,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어좌 앞으로 유유히 올라 가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확증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8월 15일 토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묵시 11,19ㄱ; 12,1-6)
11,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 ‘계약 궤’- 속죄판(대속의 예수) 때문에~ 천사가 심판을 할 수가 없어 죄인들이 용서를 받는 그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그 계약의 궤이다. 그것이 하느님나라의 원리이고 그 하느님의 계약이 나타난 것이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 여인, 여자(테무트)는 그릇을 뜻한다. 곧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인 사람으로 열두개의 별을 받은 열두지파인 아들들, 사도교회를 뜻한다.
(시편89,36-38) 36 나의 거룩함을 걸고 이 하나를 맹세하였노라. 나는 결코 다윗을 속이지 않으리라. 37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의 왕좌는 태양같이 내 앞에 있으리라. 38 구름 사이에 자리 잡은 충실한 증인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달과 같으리라.”
= 태양과 달은 빛이신 예수님을 뜻한다.
그리고 요셉의 꿈 (창세37,9) 9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
= 요셉 또한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의 머리로 열두 아들 사도인 교회의 큰절을 받는, 곧 교회는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다시 그 예수님을 머리로 교회가 깨달음으로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 깨달음은 아기를 낳는 그 진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죽음을 듣고 애통애하는, 근심하는 제자(12)들에게~
(요한16,21-22)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열두제자, 교회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으라, 낳아라 하신다. 그러면 애통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하신다.
그런데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 붉은 용, 옛 뱀으로 악마, 사탄이다(9절) 곧 에덴의 선이 악을 품어 생명(구원)을 주는 나무를 선악의 법의 나무로 거짓되게 했던 그 뱀으로, 하느님의 계명, 말씀을 인간의 계명으로, 그 거짓 가르침으로 구원을 방해한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 뱀의 거짓, 그 거짓 가르침으로 올바른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낳지 못하게 거짓 예언자(무법자)를 통해 호시탐탐 노린다.
(2테살2,9-12) 9 그 무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으로, 그는 온갖 힘을 가지고 거짓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며, 10 멸망할 자들을 상대로 온갖 불의한 속임수를 쓸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여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을 속이는 힘을 보내시어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 자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기적, 신비에 빠진 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자꾸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기적과 신비적인 일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5ㄱ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 쇠지팡이로 다스릴 분은 예수님 이십니다.
(시편2,7-12) 7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8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9 너는 그들을 쇠 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 10 자, 이제 임금들아,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11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의 발에 입 맞추어라. 12 그러지 않으면 그분께서 노하시어 너희가 도중에 멸망하리니 자칫하면 그분의 진노가 타오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5ㄴ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 졌습니다’.-예수님의 승천이다. 예수님의 승천 후 교회는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에서 양육을 받는다. 그 보살핌의 처소란 우리 삶의 현장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듯 교회인 여자, 우리 또한 육의 뜻을 만족 시켜주는 그 사탄의 유혹을 삶 속에서 이겨내야, 살아내야 하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ㅏ는 그 유혹에 늘 넘어진다는 것을, 내 뜻을 위해 하느님의 듯에 불순종하는 그 우리의 나약함을 경험하고,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로마11,32)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그때,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러 오셨다는 말씀에 감사하며 그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내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승리를 전가시켜 주신, 그 승리의 주님께 피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이끌어 가신다.
(1코린15,57-58)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요한6,29)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속죄판으로 오신, 곧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믿는 것, 깨닫는 것, 낳는 것이다. 아멘.
오늘 우리들이 ‘여인, 여자’를 성모님으로만 묵상한다면 하느님,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기 되는 것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51절은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 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와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52절은 이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는 '주권자','통치자'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는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좋은 것'과 '빈손','배불리시고'와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 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과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는 '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은 '채우다','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는 '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는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렌'(eksapesteilen; he has sent)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ek)와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1854년 교황 비오9세에 의해 원죄없는 잉태 교리가 반포되었으며,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 교리를 정식으로 정의하고 선포하였다
"원죄 없으신 천주의 모친 평생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을 갖고서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교리임을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 하는 바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도 "예수의 모친은 천상에서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신다"(교회헌장 68항) 고 하면서 마리아께서 받으신 특권과 각별한 은총을 재확인 하였다.
같이 천국에 가셨지만 주님의 경우는 승천이라고 하고 성모의 경우는 ’피승천’ 즉 ’몽소 승천’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자력으로 승천하셨고, 성모님은 역시 사람이므로 자력으로 못하시고 주님의 힘으로 승천하셨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18 나는 이 책(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 20 이 일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21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묵시22;18-21)
5,6절에서는 민족을 다스릴 아이의 출생과 여인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붉은 용의 위해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들을 낳았다. 본문에서 여인이 아이를 해산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 ;Incarnatio)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본절의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라는 것은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는 시편 2장 9절의 노래와 같다. 동일한 표현이 티아티라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약속인 묵시록 2장 27절에서도 언급되고,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강력한 면모는 묵시록 19장 15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한편, 본문에서 '들어 올려졌습니다' 로 번역된 '헤르파스테'(herpasthe)는 '이끌려 가다', '끌어 올리다' 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그런데 본문은 누가 그 아이를 하느님 대전과 그분의 어좌로 올려 갔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께와 그분의 어좌로' 승천하신 사건을 가리킨다면, 성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주도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본절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이 누락된 채, 강생과 그의 승천 사실만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용이 여인을 경계한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 라는 사실, 곧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패배시키기는 커녕,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어좌 앞으로 유유히 올라 가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확증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8월 15일 토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묵시 11,19ㄱ; 12,1-6)
11,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 ‘계약 궤’- 속죄판(대속의 예수) 때문에~ 천사가 심판을 할 수가 없어 죄인들이 용서를 받는 그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그 계약의 궤이다. 그것이 하느님나라의 원리이고 그 하느님의 계약이 나타난 것이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 여인, 여자(테무트)는 그릇을 뜻한다. 곧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인 사람으로 열두개의 별을 받은 열두지파인 아들들, 사도교회를 뜻한다.
(시편89,36-38) 36 나의 거룩함을 걸고 이 하나를 맹세하였노라. 나는 결코 다윗을 속이지 않으리라. 37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의 왕좌는 태양같이 내 앞에 있으리라. 38 구름 사이에 자리 잡은 충실한 증인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달과 같으리라.”
= 태양과 달은 빛이신 예수님을 뜻한다.
그리고 요셉의 꿈 (창세37,9) 9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
= 요셉 또한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의 머리로 열두 아들 사도인 교회의 큰절을 받는, 곧 교회는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다시 그 예수님을 머리로 교회가 깨달음으로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 깨달음은 아기를 낳는 그 진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죽음을 듣고 애통애하는, 근심하는 제자(12)들에게~
(요한16,21-22)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열두제자, 교회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으라, 낳아라 하신다. 그러면 애통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하신다.
그런데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 붉은 용, 옛 뱀으로 악마, 사탄이다(9절) 곧 에덴의 선이 악을 품어 생명(구원)을 주는 나무를 선악의 법의 나무로 거짓되게 했던 그 뱀으로, 하느님의 계명, 말씀을 인간의 계명으로, 그 거짓 가르침으로 구원을 방해한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 뱀의 거짓, 그 거짓 가르침으로 올바른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낳지 못하게 거짓 예언자(무법자)를 통해 호시탐탐 노린다.
(2테살2,9-12) 9 그 무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으로, 그는 온갖 힘을 가지고 거짓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며, 10 멸망할 자들을 상대로 온갖 불의한 속임수를 쓸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여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을 속이는 힘을 보내시어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 자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기적, 신비에 빠진 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자꾸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기적과 신비적인 일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5ㄱ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 쇠지팡이로 다스릴 분은 예수님 이십니다.
(시편2,7-12) 7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8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9 너는 그들을 쇠 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 10 자, 이제 임금들아,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11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의 발에 입 맞추어라. 12 그러지 않으면 그분께서 노하시어 너희가 도중에 멸망하리니 자칫하면 그분의 진노가 타오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5ㄴ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 졌습니다’.-예수님의 승천이다. 예수님의 승천 후 교회는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에서 양육을 받는다. 그 보살핌의 처소란 우리 삶의 현장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듯 교회인 여자, 우리 또한 육의 뜻을 만족 시켜주는 그 사탄의 유혹을 삶 속에서 이겨내야, 살아내야 하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ㅏ는 그 유혹에 늘 넘어진다는 것을, 내 뜻을 위해 하느님의 듯에 불순종하는 그 우리의 나약함을 경험하고,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로마11,32)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그때,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러 오셨다는 말씀에 감사하며 그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내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승리를 전가시켜 주신, 그 승리의 주님께 피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이끌어 가신다.
(1코린15,57-58)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요한6,29)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속죄판으로 오신, 곧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믿는 것, 깨닫는 것, 낳는 것이다. 아멘.
오늘 우리들이 ‘여인, 여자’를 성모님으로만 묵상한다면 하느님,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기 되는 것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51절은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 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와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52절은 이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는 '주권자','통치자'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는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좋은 것'과 '빈손','배불리시고'와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 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과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는 '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은 '채우다','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는 '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는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렌'(eksapesteilen; he has sent)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ek)와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1854년 교황 비오9세에 의해 원죄없는 잉태 교리가 반포되었으며,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 교리를 정식으로 정의하고 선포하였다
"원죄 없으신 천주의 모친 평생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을 갖고서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교리임을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 하는 바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도 "예수의 모친은 천상에서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신다"(교회헌장 68항) 고 하면서 마리아께서 받으신 특권과 각별한 은총을 재확인 하였다.
같이 천국에 가셨지만 주님의 경우는 승천이라고 하고 성모의 경우는 ’피승천’ 즉 ’몽소 승천’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자력으로 승천하셨고, 성모님은 역시 사람이므로 자력으로 못하시고 주님의 힘으로 승천하셨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18 나는 이 책(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 20 이 일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21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묵시22;18-21)5,6절에서는 민족을 다스릴 아이의 출생과 여인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붉은 용의 위해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들을 낳았다. 본문에서 여인이 아이를 해산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 ;Incarnatio)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본절의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라는 것은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는 시편 2장 9절의 노래와 같다. 동일한 표현이 티아티라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약속인 묵시록 2장 27절에서도 언급되고,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강력한 면모는 묵시록 19장 15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한편, 본문에서 '들어 올려졌습니다' 로 번역된 '헤르파스테'(herpasthe)는 '이끌려 가다', '끌어 올리다' 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그런데 본문은 누가 그 아이를 하느님 대전과 그분의 어좌로 올려 갔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께와 그분의 어좌로' 승천하신 사건을 가리킨다면, 성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주도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본절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이 누락된 채, 강생과 그의 승천 사실만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용이 여인을 경계한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 라는 사실, 곧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패배시키기는 커녕,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어좌 앞으로 유유히 올라 가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확증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8월 15일 토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묵시 11,19ㄱ; 12,1-6)
11,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 ‘계약 궤’- 속죄판(대속의 예수) 때문에~ 천사가 심판을 할 수가 없어 죄인들이 용서를 받는 그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그 계약의 궤이다. 그것이 하느님나라의 원리이고 그 하느님의 계약이 나타난 것이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 여인, 여자(테무트)는 그릇을 뜻한다. 곧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인 사람으로 열두개의 별을 받은 열두지파인 아들들, 사도교회를 뜻한다.
(시편89,36-38) 36 나의 거룩함을 걸고 이 하나를 맹세하였노라. 나는 결코 다윗을 속이지 않으리라. 37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의 왕좌는 태양같이 내 앞에 있으리라. 38 구름 사이에 자리 잡은 충실한 증인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달과 같으리라.”
= 태양과 달은 빛이신 예수님을 뜻한다.
그리고 요셉의 꿈 (창세37,9) 9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
= 요셉 또한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의 머리로 열두 아들 사도인 교회의 큰절을 받는, 곧 교회는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다시 그 예수님을 머리로 교회가 깨달음으로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 깨달음은 아기를 낳는 그 진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죽음을 듣고 애통애하는, 근심하는 제자(12)들에게~
(요한16,21-22)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열두제자, 교회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으라, 낳아라 하신다. 그러면 애통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하신다.
그런데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 붉은 용, 옛 뱀으로 악마, 사탄이다(9절) 곧 에덴의 선이 악을 품어 생명(구원)을 주는 나무를 선악의 법의 나무로 거짓되게 했던 그 뱀으로, 하느님의 계명, 말씀을 인간의 계명으로, 그 거짓 가르침으로 구원을 방해한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 뱀의 거짓, 그 거짓 가르침으로 올바른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낳지 못하게 거짓 예언자(무법자)를 통해 호시탐탐 노린다.
(2테살2,9-12) 9 그 무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으로, 그는 온갖 힘을 가지고 거짓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며, 10 멸망할 자들을 상대로 온갖 불의한 속임수를 쓸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여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을 속이는 힘을 보내시어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 자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기적, 신비에 빠진 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자꾸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기적과 신비적인 일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5ㄱ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 쇠지팡이로 다스릴 분은 예수님 이십니다.
(시편2,7-12) 7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8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9 너는 그들을 쇠 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 10 자, 이제 임금들아,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11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의 발에 입 맞추어라. 12 그러지 않으면 그분께서 노하시어 너희가 도중에 멸망하리니 자칫하면 그분의 진노가 타오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5ㄴ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 졌습니다’.-예수님의 승천이다. 예수님의 승천 후 교회는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에서 양육을 받는다. 그 보살핌의 처소란 우리 삶의 현장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듯 교회인 여자, 우리 또한 육의 뜻을 만족 시켜주는 그 사탄의 유혹을 삶 속에서 이겨내야, 살아내야 하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ㅏ는 그 유혹에 늘 넘어진다는 것을, 내 뜻을 위해 하느님의 듯에 불순종하는 그 우리의 나약함을 경험하고,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로마11,32)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그때,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러 오셨다는 말씀에 감사하며 그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내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승리를 전가시켜 주신, 그 승리의 주님께 피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이끌어 가신다.
(1코린15,57-58)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요한6,29)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속죄판으로 오신, 곧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믿는 것, 깨닫는 것, 낳는 것이다. 아멘.
오늘 우리들이 ‘여인, 여자’를 성모님으로만 묵상한다면 하느님,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기 되는 것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51절은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 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와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52절은 이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는 '주권자','통치자'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는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좋은 것'과 '빈손','배불리시고'와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 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과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는 '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은 '채우다','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는 '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는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렌'(eksapesteilen; he has sent)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ek)와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1854년 교황 비오9세에 의해 원죄없는 잉태 교리가 반포되었으며,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 교리를 정식으로 정의하고 선포하였다
"원죄 없으신 천주의 모친 평생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을 갖고서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교리임을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 하는 바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도 "예수의 모친은 천상에서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신다"(교회헌장 68항) 고 하면서 마리아께서 받으신 특권과 각별한 은총을 재확인 하였다.
같이 천국에 가셨지만 주님의 경우는 승천이라고 하고 성모의 경우는 ’피승천’ 즉 ’몽소 승천’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자력으로 승천하셨고, 성모님은 역시 사람이므로 자력으로 못하시고 주님의 힘으로 승천하셨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18 나는 이 책(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 20 이 일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21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묵시22;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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