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11.
비가 내려도 너무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어졌는지, 무너졌는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물에
인간세상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지금도 무너져간다.
400mm가 넘는 폭우 속에 차들은 배가 되어 둥둥 떠다니고,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들이 몇 초 사이에 맨홀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고,
반지하에 살던 어느 가족은 순식간에 물이 들어차버리는 바람에 문을
열지 못해 3명이나 익사를 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반지하 주택은 6~9가구로 지어지는 다세대 주택의 일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40여 년 세월이 흘렀다.
1984년 주택은행 성내동 지점으로 부임하고 얼마 후 국민주택기금에서
지원하는 다세대 주택자금이 엄청 인기를 끌었다.
세대당 약 800만 원 정도 지원을 했는데 당시 그 돈이라면 건축비의
상당 부분을 감당할 수 있어 소규모 주택건설업자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물론 정부에서 관장해도 주택은행이 채권을 발행하여 마련한 국민주택기금
재원은 한정이 되어있어 건별로 본점 주택기금 운용 부서의 승인을 받아
융자처리를 하였는데 각 지점 간 경쟁도 치열하였다.
지금 며칠간 강남, 서초지역이 물난리를 겪듯이
1984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태풍과 집중폭우로 저지대였던 성내동
일대가 물에 잠기는 홍수피해를 당했다.
물난리를 심하게 겪은 후 북한에서 보내준 '입쌀'과 '포플린'이라는 옷감을
지원받기도 했는데,
조금 진정이 되자 주택 건축 붐이 일었고 때마침 지원책이 나와
건설업자와 입주자들로 성내동 지점은 매우 혼잡했다.
내가 담당으로 약 1,000세대 가까이 지원한 걸로 기억이 나는데, 의정부
지점과 건수가 비슷하지만 건수와 총금액으로는 전국 1위라고 했다.
비결은 간단하다.
지점 간 경쟁이 치열하기에 최고한도로 신청을 하지 않고,
금액을 약간 줄이고 감정가를 최고가로 산정하여 성공률을 높인 거다.
부족한 금액은 일반자금 대출로 처리하여 건설업자에게 매우 인기를
끌었고, 이때 알게 된 상당수의 건설업자가 내가 정년퇴직할 때까지
거래와 유대관계가 지속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 본부의 주택기금 배정 책임자였던
신현동 과장은 수단과 방법을 적절히 써가며 성공률을 높였다며 나를
'여우'라고 했는데, 불행히도 그 선배는 은퇴 후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번 사고가 난 지역은 내가 지원했던 지역은 아니다.
그래도 괜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당시 다세대 주택의 건축허가서를 검토하며
방에 해가 들지 않아 일조권이 일방적으로 무시된 정책인데 왜 반지하로
승인을 할까.
성내동은 저지대인데 지난번 홍수처럼 물이 밀려들면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의 피해가 클 텐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면서도 실적에만
매달렸다.
반지하 집이라, 한참동안 잊고 살았다.
군사 무기 중 '화이어 앤 포겟(fire and forget)' 개념이 도입된 미사일과
어뢰가 있다.
대부분의 미사일과 어뢰는 일정 거리를 날아갈 때까지 유선이나 무선으로
유도를 하여 목표물에 명중시키는데,
화이어 앤 포겟은 발사 후 일임 방식으로 유무선의 유도를 받지 않고
스스로 목표를 찾아가는 무기라 공격자는 일단 발사를 한 후 망각(forget)을
해도 된다.
내가 fire and forget이 되었는지
다세대주택, 반지하라는 단어를 내 머릿속에서 아예 망각을 했던 거다.
이번 물난리를 겪으면서 나온 통계를 보니 2020년 기준 전국 32만 가구가
지하나 반지하에 살며 그중 90%가 수도권에 몰려있고 서울 가구 중에
6%가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반지하의 곰팡이 핀 벽지,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고, 도로의 매연, 소음, 노상방뇨로 인한
악취 등으로 생활여건이 최악인데도 그동안 꾸준하게 건축허가를 내주고
집을 지었던 모양이다.
외신에선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naeronambul)이라는 표현에 이어,
우리나라의 이번 물난리를 보도하며 반지하(banjiha)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들어온다.
앞으로 반지하 주택의 허가를 내주지 않고, 기존 반지하 주택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하는 정부를 믿을 수밖에 없지만,
비록 수십년 전 업무상의 일이었다 하더라도 내가 반지하 주택의 지원에
앞장서서 행동하였으니 마음에 부담이 많이 간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런 비극이
더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어느 여름날의 오후,
소강상태였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진다.
2022. 8. 11.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