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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0:1-4 여호와여 어찌하여 : 칼빈
먼저 다윗은 자신과 모든 경건한 자들의 이름으로 사기, 착취, 잔인, 폭력 그리고 모든 종류의 비행이 이 세상 도처에서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다음으로 다윗이 이런 사실들을 내세우는 이유는 불경건한 자들과 악인들이 자신들의 만사형통에 도취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그들이 무엇이든 벌받지 않고 해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그 다음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 주시고 이와 같은 절망적인 재난을 치유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끝으로 다윗은 마땅한 때에 구원받는다는 소망으로 자신과 신실한 자들을 위로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광범위하게 타락하고 무질서하게 된 이 사회상을 마치 거울처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의가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것을 볼 때 그런 생소한 시험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을 동요시키거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이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들이 오늘날 당하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가 옛적에 체험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다윗과 그 밖의 다른 거룩한 족장들을 단련시킨 바로 그 동일한 시련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슬픔을 달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실한 자들은 일이 혼란한 상태에 접어들 때 하나님께 호소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자기들을 도와주고 그런 상황에 치료하는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횡설수설하며 불평하고 절규해 봤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은 "(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이고
1절에 대한 칼빈의 번역은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꼭 환난에 처해 있을 때에 눈을 감으시나이까" 입니다.
시편 10 편
1. 1절은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가 분명히 지나간 과거의 소망이었던 자신의 재앙에 대한 구제를 간구하면서 처음부터 직접 하나님께 말하는 모습을 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과 슬픔에 처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안위와 위로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갈등, 번민, 수심에 빠질 때 비참하고 억눌린 자에게 위로를 베푸시는 일이 하나님의 특수한 임무인 사실을 전적으로 확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마치 멀리 서 계시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본래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 감정에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끼리 말하는 식으로 자신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허용하시는 만큼 이러한 표현에 모순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표현이 글자 그대로의 엄밀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지각이 사건의 현재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것만 판단함에 따라서 비유적으로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경우에서만 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자기 목전에서 가난한 자가 해를 입는 것을 보아도 힘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제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무적의 힘으로 무장되신 하나님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치 주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멀리 철수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숨다'는 뜻을 가진 (타엘림)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혹자는 이것을 다윗이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사를 염려하는 것이 체면 손상이라는 듯이 스스로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점을 들어 하소연하는 것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눈을 감는다' 는 의미로 보는데 이 견해가 더 간단합니다.
주목할 점은 다윗이 여기서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점을 들어 하소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 사실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해 봤자 공연한 노릇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의문문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취지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또한 의로 규제하시는 것이 주의 능력으로 그것을 유지하는 것처럼 모두 주의 특권이온데 왜 저 악한 자들의 오만과 믿기 어려운 교만에 대항해서 주의 백성의 옹호자로 속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까' 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평을 털어놓는 뜻에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용기를 내려는 뜻에서입니다.
시편 10 편
자신의 연약한 느낌에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오랫동안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동시에 자기는 하나님께서 받아 마땅한 존귀를 빠뜨리지 않고 돌려드리고 있으며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큰 짐을 하나님 품에 맡기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환난 때에"라는 표현 역시 동일한 주제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마다 복수하려고 그의 손을 내뻗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박하고 무고한 사람이 압박을 받는 것을 보시는 때가 곧 하나님이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시는 시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일에 착수하는 적합한 시간을 신실한 자들이 고통에 처해 있는 때라고 간략하게 정의합니다.
이러한 형식의 표현에 대해서는 앞장 10절에 언급됐습니다.
2. 본문 2절은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입니다.
악인들을 저주하는 기도를 발하기 전에 시편기자는 압제 당하는 자들을 잔인하게 괴롭히는 악인들의 악한 의도를 간략하게 제시합니다.
그 이유는 부풀어 있는 교만 때문에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또 악인들의 잔인성은 모든 인정을 망각하고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며 그들을 조롱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말해서 조금도 과장이 없습니다.
사실 잔인성은 언제나 교만합니다.
그 이전에 교만은 모든 악의 모체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만 때문에 우리 이웃을 상대로 뻐기지 않고 자신에 대한 우쭐대는 자만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지 않는다면 가장 보편적인 인정을 통해서 각자 어떤 겸손과 공의로 행동해야 옳은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그가 고소하고 있는 악인들이 비참하고 궁핍한 자들을 상대로 잔인성을 발휘하면서도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 악한 자들의 정신적 교만과 오만이라고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들과 의롭고 흠잡힐 데 없이 살려는 사람은 남을 못마땅하게 대우하는 것에 열중하거나 그것을 낙으로 삼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의와 거룩으로 살려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교만이라는 질병 제거를 힘써야 합니다.
(달락)이라는 단어는 '박해를 참는다'는 의미와 함께 '박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 10 편
혹자는 '가난한 자들이 악인들의 교만 속에서 박해를 받고 있다' 고 번역합니다.
이것을 '가난한 자들이 악인들의 교만 속에서 불타고 있다' 고 번역해도 적당한 것은 이것이 이 단어의 보다더 보편적인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의 교만은 불과 같이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을 집어삼키기 마련입니다.
3. 본문 3절은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입니다.
1)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설명됩니다.
직역하면 '왜냐하면 악인들, 또는 불경건한 자들이 찬양하고 있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단어를 보충할 필요가 있는데 무슨 단어를 집어넣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혹자는 '악하고 포악스러운 사람'을 목적격으로 곧 '그가 악인을 찬양하며 포악스러운 자를 칭송한다' 는 식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칭송한다'는 말 뒤에 그 칭송의 주어나 목적어가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동자와 주어가 동일할 경우에는 그 말을 한번만 표현하는 것이 히브리어에 있어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 의미를 완전케 하기 위해서 반복하듯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해석으로 여겨지는 해석은 악인이 자화자찬하고 자기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칭송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의 소욕"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것입니다.
이것을 행운이 악인에게 미소지으며 자신들의 소원이 성취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만끽하는 동안 그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아첨하고 또 자화자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마치 다윗이 조금 뒤에 첨가하듯이 그 악한 자들이 그들의 환상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나 해보려고 자신들의 번영을 남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나오는 "마음의 소욕"이 정욕과 정열 및 욕구에 대한 무절제한 만족을 칭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 의미는 그들은 자신들의 천박한 욕망을 즐기고 주의 심판을 무시하며 겁 없이 스스로 모든 죄책에서 피하며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고 불신앙을 정당화한 내용입니다.
모세도 신명기 29장 19절에서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고 하는 비슷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2) 다윗은 곧이어 악인들이 자화자찬하며 자신들의 번영을 남용한 점을 덧붙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보다 더 무게 있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시편 10 편
그들이 스스로 칭송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요 그들이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그들의 사악성에 기인한 것이며 그들이 스스로 모든 제약을 팽개쳐버리고 온갖 방면에서 극으로 달리는 원인은 바로 이 어리석은 자만과 만용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자'와 '포악스러운 자'가 물론 그것은 주개념과 종개념이 다르듯이 서로 다르지만 이곳에서는 비슷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칭송하다'(praise) 와 '축복하다'(bless)가 비슷하게 쓰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견해는 바로 이어지는 말, 곧 악인들이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이 동사를 '모독하다' 나 '화를 격발하다' 로 번역은 본문의 의도와는 너무 판이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정욕의 만끽에 몰두하는 원인이 하나님 멸시에 있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재판관이시라는 점을 제대로 숙고하는 자라면 이 생각에 너무 놀라서 자기 양심에 자신이 죄가 있으며 죄의 습관에 젖어 있음을 고소하게 됨으로 감히 자기 영혼을 칭송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4. 본문 4절은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입니다.
1) 혹자는 이것을 '악한 자가 자신의 맹렬한 분노 때문에 또는 자기가 드러내는 교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그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요 한편으로는 다윗이 표현하려는 뜻을 약화시킵니다.
먼저 이 번역을 따른다면 '감찰하다'라는 목적어를 취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사를 그 목적어로 하나님에게 제한하는 것은 부적당합니다.
다윗의 의도는 곧 악인들이 무비판하게 무엇이든 저지르며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정욕이 자신들의 법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법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또 그들은 그들 멋대로 행하는 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상상합니다.
인간 생활에서 선행의 시초는 탐구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해 보지 않고 분별해 보지 않은 채 우리 망상의 지시를 따르거나 육신의 방황하는 성향에 휩쓸리는 데서 자신을 지키려는 때에만 선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구의 행위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이때에야 하나님께 우리의 재판관과 지배자로서 지위를 합당하게 바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주제넘은 행동을 하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10 편
그것은 악인들이 교만에 부풀어 하나님께 재판관의 대권을 조금도 남겨두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예언자의 지적은 아주 적절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얼굴'로 번역한 (아프)는 틀림없이 '화'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그 본래 의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만한 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얼굴로 오만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2) 두 번째로 선지자는 그들의 모든 사악한 생각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선언함으로 그들을 더 매섭게 그들을 비난합니다.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그들이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는 오만을 부리며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에 앉아 계시지 않는 것처럼 모든 신앙과 공의를 뒤엎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점을 믿는다면 다가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의 생각과 말과 생활을 억제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명백하고 솔직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능력을 박탈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무기력한 존재로 만족하여 재판관 직무를 포기해 버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한낱 우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손길이 먼 하늘에서 내리 뻗쳐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는 점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종지부를 찍으려 하는 자입니다.
머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냉담하고 감동 없는 지식을 담아둔 것으로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경하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은 오직 참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확신 뿐 입니다.
시편 10 편
시10:5-6 저의 길은
본문 5절 말씀은 악인들이 그 마음의 악한 소욕을 주장하며 실행에서 굳게 서서 변동하거나 회개하지 아니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이렇게 선한 일에는 약하고 악한 일에는 담대하며 굳셉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방식은 알기 어려운 오묘한 섭리로 되거나 혹은 영적이어서 악인들은 그 심판을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악인의 이 생각은 성도의 사상과 판이합니다(6절).
악인은 죄로 인하여 허망하여 저 구름 위에 집을 지을 듯이 덤빕니다.
악인은 자기의 허무함을 살 깊이 느낄 줄 모르고 자력(自力)을 믿고 요동치 않을 듯이 생각합니다(사28:14, 15).
그러나 악인이 실제에서는 나무 잎 떨어지는 소리에도 놀랍니다.
성도는 자기 생명이 실오라기에 달린 듯이 위험을 느끼면서도 주만 믿고 안심합니다.
본문 5-6절은 "(5)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 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 다" 입니다.
1. 본 구절의 첫부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칠십인역자들은 미래 시제인 (야힐루)의 어근을 (할랄)로 보고 '그의 길이 더럽혀져 있다'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것의 어근은 (홀)이라는 것이 유대 주석가들 사이에 공통된 견해입니다.
하지만 그 주석가들 가운데는 이것을 능동태로 '누구를 두렵게 하다' 또는 '누구를 괴롭히다'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저자가 마치 악한 자들의 길은 선한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하며 그들을 괴롭힌다 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입니다.
혹자는 이 말을 하나님께 적용해서 '그분의 길은 언제나 이루어집니다' 곧 '언제나 번창합니다' 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판단에 이것은 너무 억지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형통하다'로 쓰인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학자들 간에 이 구절에 대한 이견이 많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시편 10 편
더욱이 곧 이어지는 구절에서 선지자는 그가 악인들의 형통한 상태와 그들을 도취시키는 계속적인 쾌락의 연속을 두고 언급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선지자는 그들의 번영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용해서 더욱 자신을 강퍅케 하여 그들의 악을 즐기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의 죄책을 더욱 지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곧 '그들은 자기들이 계속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예속되어 있거나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서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혹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반대한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즉각 물리치거나 코방귀나 훅하는 입김으로 박살낼 수 있는 것으로 자신만만해 한다' 는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선지자의 단순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데 곧 악인들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서 힘을 얻어 그를 모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 천박한 독재자인 디오니시우스가 프로서피나(Proserpine) 성전을 약탈한 후 항해를 무사히 마쳤다 해서 하나님께서 신성모독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신 것으로 허풍을 떤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2. 혹자는 "주의 심판은 높아서"라는 표현을 마치 선지자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무 관용을 베푸시며 아껴주십니다' 라고 말한 것으로 봅니다.
선지자는 다른 곳에서 그들이 일반 생의 괴로움에서 면제되어 있음을 불평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들에게 높이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주제넘게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아주 멀리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평생동안 죽음과의 휴전을 스스로에게 다짐할 뿐 아니라 그것과의 영원한 계약을 다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은 악한 날을 멀리 연장하면서 얼마나 자기들 마음을 강퍅케 하고 더욱더 고집을 부려가며 악한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갇혀 있으며 마치 그들은 그분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다짐하는 나머지 자신들이 벌을 받지 않고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더욱 스스로 힘을 내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것처럼(사22:13) 그들이 선지자들의 경고를 비웃으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라고 말하는데서 알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시편 10 편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공포의 감정을 불어넣는 뜻에서 곧 그들에게 부과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재앙을 선언했는데도 이 악인들은 그것이 모두 우스개요 하찮은 이야기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혹하게 치신 것은 자신이 백성들에게 통회하고 재를 뒤집어쓰며 누더기 옷을 걸칠 것을 요구하셨는데도 이 악한 조롱자들은 용기를 내어 노래하며 잔치를 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내 삶을 두고 맹세하지만 이 죄악은 너희들이 죽기까지 결코 깨끗하게 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신실한 자들은 자신들의 눈을 하늘로 들어 하나님의 심판을 볼 때 그것이 당장 자기들 머리 위로 떨어질 것처럼 그것을 무서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인들은 그것을 무시합니다. 그 악인들은 그 심판의 공포나 염려로 괴로워하거나 갈등을 받지 않으려고 그것을 하늘 멀리 추방해 버리려고 합니다.
이는 마치 에피큐리안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건방지게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국한되어 있어서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며 할 일없이 소일하고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얼빠진 상태에서 다윗이 말하는 대로 자기들에게 원수가 되는 모든 사람들을 코방퀴로 혹은 훅하고 내쉬는 숨으로 파멸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그런 뻔뻔스런 만용이 나옵니다.
(푸아흐)에는 '함정에 빠뜨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코방귀를 뀌다' 또는 '불어서 끄다'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3. 시편 기자는 다음구절에서 이 점을 확고히 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그가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모든 변화의 위기를 벗어난 것으로 마음 속에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악인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라는 교만한 말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취급하는 것은 다만 그들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는 비열한 교만은 숨겨진 병폐로서 결국 다윗은 그들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그들 스스로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있는 것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많은 곳에서 여러 번 자신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윗의 경우 주의 보호를 신뢰하며 용기 있게 모든 위험을 이겨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안전에 효율적인 대비책을 간구하면서 온 세상이 수백 번 파멸을 당하더라도 자신들은 요동치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옳습니다.
시편 10 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곧 신실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스스로에게 안전을 다짐할 뿐이요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들이 모든 시련의 폭풍에 내맡겨져 있다는 점을 알고도 그것을 묵묵히 참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은 오늘의 번영을 만끽하는 나머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상태를 망각하고 병적인 공상의 날개를 펴서 구름 위에 자신의 보금자리나 펴며 자신이 언제까지나 안락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다짐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이 실오라기에 달려 있으며 수많은 죽음의 포위를 받고 있다는 점과 언젠가는 자기에게 닥쳐올 온갖 고통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으며 이 세상의 삶이 험난하고 위험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참을성 있게 견디며 자신의 역경 속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신뢰하며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나는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것은 자기에게 닥쳐올 모든 공격을 스스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자는 '내가 동요를 받고 심지어 더없이 깊은 죽음에까지 떨어지고 빠져 들어간들 무슨 상관인가? 나의 떨어짐이 치명적일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내 발 밑에 놓아 나를 붙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위험에 대한 염려가 선인과 악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설명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무서워 떨며 낙담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 그들은 황급히 하나님의 은혜의 성소로 달려갑니다.
그런가 하면 악인들은 낙엽지는 소리만 들어도 기겁하며 항상 불안한 가운데 살며 우매하게도 그들 스스로를 강퍅케 하며 정신이 나가 있기에 재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광적인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만사가 잘되는 악인이 자기에게 아무런 변동이 오지 않을 것으로 다짐하여 확신하는 이유는 '그가 역경에 처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악인들이 자신들이 과거의 생활에 있어서 재앙과 불운을 면제받았다 해서 장래에도 평화스럽고 유쾌한 상태가 오리라고 소망하는 것으로 보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기만적인 상상에 이끌려 그들 스스로를 인간들의 공통적인 상태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그들이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사28:15)라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시편 10 편
시10:7-10 그 입에는
본문에는 악인들이 그들의 악을 내뿜는 방식이 잔학한 사실을 표현합니다.
1. 본문 7절은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종들을 도우시려면 지금이 바로 적절한 시기인데 그 이유는 악한 자들의 불법이 극에 달할 정도로 터져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은 그들의 혀가 위증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해악을 숨기고 있어서 그들과 무슨 일을 하든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서 하소연합니다.
(알라)를 '저주하기'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남에게 내던지는 저주의 말이 아니라 자기 머리에 퍼붓는 저주의 말을 의미합니다.
남을 속일 수만 있다면 자신에 대해서도 가장 지독한 저주를 불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것을 '위증'으로 잘못 번역했습니다.
이는 이 말이 뒤에 나오는 '기만과 악의'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악인들이 남을 속이고 해를 끼치는 그들의 목적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저주하며 거짓으로 맹세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해악과 불공평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순진한 사람들이 기만, 위증, 악의로 엮어진 덫을 피하려면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본문 8절은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입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미래시제 동사를 다른 시제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동사들에 계속적인 행동의 의미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이 히브리적 관용어가 다른 언어에까지 그대로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인들의 상습적인 행동이 무엇인가를 여기서 묘사해 줍니다.
먼저 다윗은 그들을 길목의 좁은 곳에 기다리고 있으면서 무방비 상태인 여행자들을 덮치려고 숨을 곳을 찾는 노상 강도들과 비교합니다.
다윗은 또한 '그들의 눈이 비스듬하거나 또는 곁눈질하는'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적을 정확히 맞추려고 눈을 반쯤 감고 비스듬하게 그들의 목표를 주시하는 투창 선수들에게서 빌려온 비유입니다.
시편 10 편
다윗은 여기서 숲속에 흔한 노상 강도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 허세, 광채라는 명목하에 자신들의 사악성을 숨기는 큰 도적들에게 화살을 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을(향촌)'로 번역하는 (하츠림)을 '궁중'으로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마치 '그들이 왕궁을 도둑질하는 장소로 바꿔서 불쌍한 희생자들의 목을 자르려 하고 있다'라고 다윗이 말한 것처럼 됩니다.
그러나 설령 이 말에 이런 의미가 암시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원칙적으로 강도들의 습관과 관련된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전체 구절을 통해서 여실히 알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마을의 출구에 기다리고 있는 강도들처럼 이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지 자기들의 덫을 놓는다'라고 설명합니다.
3. 본문 9절은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다윗은 다른 비유를 통해서 좀 가볍지만 더 격한 어조로 그들의 잔인성을 제시합니다.
곧 그 악한들이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먹이에 굶주린 것으로 묘사합니다.
강도들을 그들의 태도에 따라 부수는 것보다 그들을 잔인한 들짐승과 같이 취급하는 것은 그 사악한 면에 있어서 한 단계 높인 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점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하는 점을 더 절실하게 묘사하는 뜻에서 다윗이 항상 기만과 덫을 강포와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희생물을 잡는데 있어서 잔인성이 얼마나 교활하게 뒤섞이고 있는가 하는 점을 더욱 더 분명하게 묘사하는 뜻에서 또 다른 비유가 사용됩니다.
곧 "자기 그물을 글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은 그들이 공공연하게 폭력적으로 덤빌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속이려고 그들의 그물을 펼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4. 본문 10절은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을 10절에서 반복하면서 악인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림을 보듯이 우리 눈앞에 제시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자신들의 잔인성 때문에 자신들의 희생 제물이 놀라서 멀리 달아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라고 묘사합니다.
시편 10 편
그들은 가까이 가지 않고 해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덫으로 잡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 두 관계를 함께 연결시키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올가미를 묘사하고, 다음에 먹이가 그들 손에 들어오는 순간 시작되는 갑작스런 포악을 묘사합니다.
둘째 구절의 의미는 순전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손아귀에 들어올 때는 언제나 마치 사자가 웅쿠리고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먹이를 갈기갈기 찢듯이 짐승같이 맹렬하게 기습적으로 그들에게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본 시편 기자의 명백한 의미는 악인들이란 그들이 집어 삼키려는 자들이 자기들 그물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기까지는 내내 자기들의 잔인성을 은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각 방면으로 염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헬카임; 군대)이 들어있는 문장을 우리는 '무수한 피압박자들'(an army of afflicted)로 번역하는데 혹자는 이 단어를 네 글자로 된 단어로 봅니다.
하지만 이것을 복합어로 보고 두 단어와 같이 여기는 사람들의 견해가 더 적합합니다.
그러므로 통상 (나팔)은 단수로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선지자는 이 사자들 하나하나에 의해서 쓰러지는 백성들의 수가 많다는 점을 나타내는 뜻에서 (헬 카임)을 집합적으로 사용합니다.
우리가 (아추밈)을 '그의 힘들'로 번역해서 문법상 실사로 취급한 것은 선지자가 틀림없이 이 용어를 통해서 사자의 힘이 주로 몰려 있는 발톱과 이빨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강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의 복수형으로서 거기에 일치하는 실사가 없는 만큼 우리는 선지자가 사자의 발톱과 이빨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강력한 군대를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곧 이 악인들이 억지로 겸손하고 교활하게 정중한 척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숨기지만 해를 끼칠 기회가 그들에게 오는 즉시 그들은 무장된 졸병, 곧 발톱과 이빨을 사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시편 10 편
시10:11-13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본문에서는 악인들의 악의 근간이 하나님을 부인하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악인들 가운데 성도들이 기적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애원합니다.
1. 본문 11절은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 악인들의 오만이 발생하는 근원을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악한 행위에 주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에 재판하실 때 그 악인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고 흉측한 모독을 공공연하게 자기들 입으로 내뱉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말처럼(사29:15) 그들 마음의 가장 후미진 곳에 그들의 생각을 감추는 만큼 시편 기자는 그가 앞에서 사용했을 뿐 아니라 조금 후에도 사용하여 세 번이나 반복하는 동일한 표현을 합니다. 그것은 악인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사에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스스로의 마음 속에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악인들이란 모든 일이 자기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경우에 그것들의 번영을 보고 하나님께서 어떤 면에서 자기들에게 매여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곧 그러한 의무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으로 스스로 다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항상 안일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오랜 동안에 걸쳐 인내심을 발휘하신 다음에는 그들이 엄숙한 재판을 거쳐야 하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그들에 대한 정죄가 더 무섭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2절은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입니다.
육신에 따라 판단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행사하지 않을 때는 그가 할 일없이 앉아 계시거나 소일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 인간들을 일반적으로 괴롭히는 질병입니다.
하지만 이면에 있어서 신자들과 악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 10 편
후자는 육신의 사악성에 따라 거짓된 견해를 품고 있으며 그들의 악을 얼버무리느라고 계속 졸며 그들의 양심을 무디게 만들다가 마침내 그들의 악한 고집 때문에 끝내 하나님을 흉측하게 멸시하는 단계에까지 빠져들고 맙니다.
그러나 전자는 당장 자신들의 마음에서 거짓된 상상을 털어버리고 스스로를 채찍하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이 문제에서 진리인 것을 제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한 훌륭한 본보기가 우리를 위해 제시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인간의 방식대로 말하면서 그가 방금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해 정죄한 동일한 오류가 점차적으로 자신의 마음에까지 잠입했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당장 그것을 교정하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하나님의 의와 영광에 손상이 되는 방향으로 형성되어지는 마음을 억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길과 심판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자연히 빠져들기 쉬운 유혹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자들은 악인들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경건한 자는 신앙으로 육신의 생각을 제지하지만, 악인들은 그들의 뻔뻔스런 상상을 계속 즐깁니다.
다윗이 '일어나옵소서' 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체험한 것 이상의 도우심을 바라기 위해 자신을 열심히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유용한 가르침이 있는데 곧 악인들이 자신들의 나태한 무지로 자신들을 강퍅케 하고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간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계시며 앞으로도 자신들이 범하는 사악을 처벌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 반대로 생각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불경건을 대할 때 우리는 그들이 묵인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끊임없이 지어내는 의심을 물리쳐야 한다는 자극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본문 13절은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입니다.
우리의 요구사항을 들어달라고 하나님을 설복하려는 뜻에서 논증을 제기한다는 것은 물론 터무니없는 짓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마치 자신이 아버지에게 친근하게 말하는 식으로 기도를 통해서 이런 이론을 사용하여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여기서 항상 주목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의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 편
우리가 기도로 아뢰지 않을 경우 그 일들이 하나님에게 숨겨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털어 놓을 때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염려가 크게 가벼워지며 우리의 요구를 채움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만큼 증대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본 구절에서 악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결산하라고 부르시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이겠는가 하는 점을 스스로에게 제시하는 가운데 자신의 재난으로부터의 구출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멸시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그가 앞에서 사용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것을 '격발하다'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고 도 '모독하다'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취하는 의미가 문맥과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심판의 능력과 직무를 빼앗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의 왕좌에서 일개 평범한 인간의 자리로 이끌어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윗은 조금 전에 악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항상 잠들어 있어서 인류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으로 상상한다고 불평했듯이 이번에는 같은 취지에서 그들이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고 말한다는 점을 들어 불평합니다.
시편 10 편
시10:14-15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표하면서 확신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1. 본문 14절은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입니다.
1) 여기서 다윗은 갑자기 거룩한 열성으로 불이 붙어 전투에 돌입합니다.
또 다윗은 신앙의 방패로 무장하여 용맹스럽게 이 지긋지긋한 견해들을 격퇴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인간들에게 제아무리 자신의 견해를 밝혀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므로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말씀드립니다.
악인들이 제지받지 않고 모든 악을 실컷 범하려고 최대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며 사악한 마음의 명령을 따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상상합니다.
신실한 자들은 이 세상에 팽배한 모든 야만인 견해에서 자신들을 지켜 보호해야 하며 마음을 위로 향하여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심같이 그분께 말해야 합니다.
다윗 자신이 인간들의 모독적인 발언에 압도되는 일이 없도록 그들에게서 자신의 관심을 돌려 버리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입니다.
2) 본 구절 첫 문장을 확증하는 뜻에서 한가지 이유가 덧붙여집니다.
그것은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입니다.
모든 해악을 일일이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의 특수한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인들이 종잡을 수 없이 제멋대로 그들의 격분을 발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눈을 감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이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추론해 나가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말로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사를 돌보신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으나 이 가르침을 일상 생활에서 여러 면으로 적용하기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능력과 의에 대해서 말하는 모든 내용은 우리가 이 말씀을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며 시시한 사색의 자료에 불과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본을 통해서 추론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시편 10 편
곧 착하고 소박한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모든 해악과 상처를 살피는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설령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못 본 체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때라도 이 모든 것을 심사숙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기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유유자적한 방관자로 인간들의 행위를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점을 덧붙여 말씀합니다.
3)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라는 말씀은 그것을 재판관의 입장에서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심사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복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팔을 펴서 우리를 도우시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4) 곧 이어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라는 말이 덧붙여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이 말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시간을 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경건한 자들은 물론 그들이 고통을 받을 때 자신 있게 그들의 염려를 하나님 품에 맡기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보호에 일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소원이 성급하게 성취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괴롭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개입할 적합한 시간이 왔다고 분명히 밝혀주실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합니다.
5) 그러므로 '주를 의지하는'자는 하나님의 보호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된 것을 지켜주신다는 그 신실성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시기가 제대로 나타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혹자는 이 동사를 '가난한 자들이 당신에게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라고 수동형태로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 독법이 더 정확하며 문법에도 일치합니다.
다만 가난한 자들이 맡기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완전한 표현 형식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함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흔히 있는 것이며 여기에는 경건한 자들이 자신들의 염려를 기도로서 하나님께 위탁할 때 그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가난한 자들이 당신에게 맡길 것입니다'하는 문장과 '당신께서는 아버지 없는 자들을 돕는 자가 될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다윗은 앞에서도 고아를 비유법으로 가난한 자라는 용어를 써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시제로 되어 있는 이 동사는 계속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시편 10 편
2. 본문 15절은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입니다.
이 표현형식은 곧 악인들의 능력을 타파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기도만이 아니라 하나의 예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의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마치 그것이 결코 억제될 수 없는 것인 양, 우리의 용기를 빼앗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신앙을 든든히 하고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공포로 인해 신앙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기쁘게 악인들의 능력을 타파하실 때는 언제나 그들 자신과 그들의 모든 술책을 무산시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 의미를 더 분명히 하는 뜻에서 우리는 이 문장을 '주님께서는 악인의 팔을 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실 때는 언제나 순식간에 그를 파괴하실 것이요, 해악을 끼치려는 그의 강력하고 포악스런 노력을 무산시키고 마실 것입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속히 자신을 도와주시고 복수해 주시길 간청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잠시 보류되는 동안 내내 다윗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한 악한 자들이 폭력과 해악을 휘두를 수 없다는 위로로 자신을 지탱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대에 오르시는 날 한번의 눈길만으로도 그들을 파멸시키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솟아오르는 태양이 그 열기로 구름과 안개를 분산시키고 말며, 어두운 대기를 환하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재판관의 직무를 행사하시려고 손길을 뻗치는 날이면 안정과 질서를 되찾으시며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혼란을 바로 잡으시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가 언급하고 있는 사람을 '사악한 자'로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악한 자의 악"(사악하고 악한사람-칼빈)으로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 자신이 묘사하는 인물의 사악성이 지독하다는 점을 밝힐 목적에서입니다.
다윗의 말씀 사악한 사람들이 그들의 악의와 불신앙에 미쳐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때면 즉시 효율적으로 이 악을 처단해 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0 편
시10:16-18 여호와께서는
본문에서 다윗은 최상의 신앙을 고백하고 공표 한 후에 차분한 신뢰로 돌아갑니다.
1. 본문 16절은 "여호와께서는 영원 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이제 마치 자신의 마음의 소원을 달성한 것처럼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윗은 거룩하게 기뻐하며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영원하고 영원한 왕'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부른 것은 자신의 확신과 희락에 대한 표시입니다.
다윗은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변호합니다.
또 다윗은 여호와를 '영원무궁토록' 왕이신 분으로 묘사함으로서 하나님을 비좁은 시간의 한계 속에 봉쇄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일인가 하는 점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생명의 길이는 짧고 아무리 광대한 제국을 상대로 통치권을 휘두르는 자들일망정 유한한 인간에 지나지 않기에 자기 신하들의 기대를 번번히 실망시키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시편 146편 3,4절에서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종종 그들은 남에게 도움을 베풀 힘이 부족하기도 하고 돕기를 지체하는 동안 기회가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하늘 왕에 보다더 고귀하고 존귀한 관념을 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당장에는 자신의 심판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하고 완전한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자신만을 위해서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히 통치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결국 주께서 통치하는 기간은 영원이므로 자기 백성이 죽었거나 아니면 감각과 이성의 눈에 절망적인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 처해 있는 때에도 하나님은 적절한 때에 손길을 뻗쳐 도움을 베푸는 일을 방해받을 만큼 오래 지체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라는 말씀은 그 거룩한 땅에서 그 땅을 더럽힌 오염과 불결이 마침내 일소되었다는 뜻입니다.
시편 10 편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어진 땅이요, 하나님을 순수히 경배하는 자들만을 위해 할당된 그 땅이 불경건하고 사악한 거주민들을 양육했다는 것은 무서운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열방'(이방인-칼빈)이란 외국인을 의미하거나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것처럼 거짓으로 자랑하는 위선자들을 뜻합니다.
오늘날도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면서 교회의 품안에 자리를 차지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선지자들이 자기 조상들의 덕과 거룩한 생활에서 이탈한 배도자들을 가리켜 '열방'이라는 창피한 명칭으로 부르며 그들을 무할례자들 뿐 아니라 모든 열방들 가운데 가장 타락한 가나안 족속들과 비교하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는 말씀도 그런 뜻입니다(겔16:3).
그 밖의 많은 유사 구절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열방'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아브라함의 잘못된 사생아들에게 적용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런 타락한 계층을 교회에서 추방시켜 주신 점을 들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실예를 통해서 우리는 설령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속되고 비신앙적인 사람들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보더라도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서 빨리 자신의 집을 청소하시며 자신의 거룩한 성전이 돼지와 개들의 오물로 범벅이 되어 마치 쓰레기통처럼 내버려두지 말아주실 것을 간청해야 합니다.
2. 본문 17절은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입니다.
이 말씀에서 선지자는 방금 우리가 이야기한 것 곧 위선자들이 교회 안에 횡행하며 위선자들이 신실한 자들을 숫자적으로 능가한다고 할 경우에 우리는 부단하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근절해 주실 것을 간청해야만 한다고 확고히 말씀합니다.
그런 혼란과 수치스런 상태는 하나님의 모든 참된 종들에게 깊은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또한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옛적에 조상들에게 그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허락하셨던 것을 오늘날도 우리들이 교회의 구원에 대해서 그들과 똑같이 간절한 마음을 가지기만 한다면 우리들이 받게 될 것을 보장합니다.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라는 구절은 주석가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혹자는 이것이 '주는 그들의 소원에 성취를 주실 것입니다' 라는 뜻으로 봅니다.
시편 10 편
또 달리 '주는 당신의 은혜로 그들의 마음을 짜맞추어 성화시켜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옳은 것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로 봅니다.
이것은 마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라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엿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두 해석은 어쩌면 너무 억지입니다. 다윗은 이 구절에서 의미를 확대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고통과 불행 속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부축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그들이 낙담에 빠지지 않게 하고 그들에게 용기와 인내를 제공하며 선한 소망을 불어넣어 주며 또한 그들을 일으켜 기도하도록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킨)이라는 동사의 의미로 '방향을 지시하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세우다'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시험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드사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거나 혹은 후원과 구원을 청하려고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복입니다.
곧 이어지는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을 지배하시며 그 마음으로 하여금 자신의 명령을 좇아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과 인내로서 자신에게 부르짖도록 인도하는 일이 헛된 것이 아님은 바로 하나님의 귀가 그들의 탄식을 들을 수 없게 막혀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신앙적인 단련에 대한 상호간의 조화가 여기서 추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의 신앙이 약해지거나 무너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기도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소망이 헛것이 아니었으며 무익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실제로 드러날 때까지 신앙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 곁에 가까이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당신께서 그들의 말을 들을 때가지 그들의 마음을 굳건하게 해주실 것입니다'라고 번역해도 부적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3. 본문 18절 상반은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입니다.
여기서 시편 저자는 앞 구절의 마지막 문장을 특별한 목적에 적용합니다.
그것은 신실한 자들로 그들이 부당하게 압박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마침내 원수들을 보복하시며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는 목적입니다.
이 말씀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이 극도로 약해질 때까지 자신의 도움을 보류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우리에게 부과되는 십자가와 고통을 꿋꿋하고 끈기 있게 감당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시편 10 편
우리 모두는 고용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기를 갈망하며 만약에 하나님께서 재빨리 도우러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만하거나 무능력한 것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아주 실천하기 힘든 임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 받기를 정말 초조하게 바란다면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고 성급함을 억제하며 우리의 슬픔이 도를 넘지 않도록 하여 고통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동정을 베푸실 것을 요구하고 하나님을 자극하여 은혜를 베푸사 도우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4. 본문 18절 하반은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악한 자들을 파괴함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칭송합니다.
다윗이 이것을 칭송하는 것은 우리가 악한 자들의 폭동적인 공격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그들의 모든 시도를 무산시켜 버릴 수 있다는 이 원리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두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우리가 '위협하다'로 번역하는 (아로츠)를 중성으로 보면서 이 문장을 '유한한 인생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못하게'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번역대로 타동사로 보아야 본문의 의도와 더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비록 악인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번창하고 그들의 고개를 구름 위까지 올려놓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유한한, 곧 여러 재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로 묘사하는 데는 많은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의 의도는 그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망각하고서 마치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자신들의 맹렬한 격분을 진압하기란 하나님의 능력 밖인 것처럼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위협을 내뿜고 있는 그들의 얼빠진 오만을 간접적으로 정죄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이라는 단어에는 이 세상의 비천한 거처와 하늘의 높음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려고 나서는 출발지점은 어디인가?
의심할 것 없이 그 지점은 땅입니다.
이는 마치 많은 벌레들이 여기저기 땅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기어 나오듯이 이같이 함으로서 그들은 하늘에서 자신의 종들에게 도움을 약속하고 있는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