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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4-17
요단 강을 앞에 두고 / 김흥규 목사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은 너무나 먼 곳이었습니다. 멀다는 말은 지리적으로 멀다는 말이 아닙니다. 며칠, 아니 몇 달만 걸어도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곧바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장장 40년 동안 광야 사막 위에서 유리방황해야만 했습니다. 너무도 가혹한 고생을 견디다 못해 숱한 반란과 불평불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의 탁월한 영도력에 힘입어 광야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멀리 가나안 땅이 보이는 요단 강 코앞에까지 왔습니다. 이제 이 강만 건너면 가나안의 첫 번째 도성인 여리고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간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광야에서의 떠돌이 유목민 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 농지에서의 정착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identity)을 결정지었던 두 개의 사건은 모두 도하(渡河)였습니다. 하나는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넜다는 말은 그냥 자연의 바다를 하나 건넜다는 말이 아니라 노예 백성이었다가 자유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또 하나, 요단 강을 건넜다는 말은 떠돌이 유목민에서 농경지의 정착 민족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요단 강 도하작전을 어떻게 완수했을까요?
1. 요단 강을 앞에 두고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앞에 요단 강이 딱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지 순례를 해보니까 지금은 요단 강이 폭도 좁고 깊이도 얕은 개울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꽤 깊고 넓은 강이었다고 합니다. 본문 15절에도 보면 때 마침 추수 기간이라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 차올랐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곡식 거두는 시기', 곧 추수기는 우리나라처럼 가을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추수기는 건조기가 끝나는 9-10월, 즉 가을철이 아니라 우기가 끝나는 3-4월, 즉 봄철입니다. 바로 이 때 요단 강은 최고 수위로 범람하게 됩니다. 따뜻한 봄이 와서 이스라엘의 북쪽 레바논 산과 이스라엘의 최북단 헐몬 산의 눈이 녹아내리며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해서 여리고 성 근처까지 흘러내려오는 동안 엄청난 강수량을 동반하기 때문에 배라도 있어야 건너지 그냥은 건널 수 없었지요. 더욱이 '빨리 흐르는 시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 시사 하듯이 요단 강은 낙차가 커서 물살이 굉장히 급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무서운 강을 건너야지만 그토록 숙망했던 가나안 땅에 진입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입니다.
2008년도의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2009년도의 약속의 땅에 진입하려는 우리에게도 각종 요단 강이 버티고 있습니다. 금년에도 힘들었지만 내년에도 힘들 것입니다.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경제 불황이 지구촌 곳곳의 경기를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 내년에도 더욱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것입니다. 직장마다 감원을 하고 구조 조정을 한다는 소식입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안정된 직장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강들을 건너야지만 풍요의 땅,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역시 건너야 할 요단 강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 불경기에 교회 건축이라는 요단 강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시공업자도 신뢰할만한 업체로 선정해야 하겠고 아무래도 공사비 문제가 제일 큰 걱정이지요. 막상 터파기를 하고 공사가 시작될 때 적지 않은 민원도 발생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진입하려면 이런 강들을 반드시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넌 비결은 무엇일까요?
2. 요단 강 도하작전의 성공비결은?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넌 것은 출애굽 당시 홍해를 건넌 것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이스라엘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애굽을 탈출한 순간부터 광야 40년의 여정도 철두철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진행됐습니다. 모세가 죽은 뒤 여호수아를 새로운 지도자로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 강 도하는 이스라엘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어떤 깊은 강도 건널 수 있습니다.
요단 강이라는 장애물을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반드시 승리하고야 만다는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도하할 때에도 그냥 하나의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강을 건너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룩한 의식(ritual)이요 정결(purification) 예배라는 것이지요.
요단 강을 건너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언약궤를 뒤 따라 가십시오
요단 강을 건너가는 작업은 아주 세심하고 치밀한 작전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강을 건너기 전, 진을 치고 있었을 때 제일 먼저 지휘관들이 백성들을 독려합니다.
2절 보세요.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돌아다니며."
흥미롭게도 오늘 우리에게도 사흘 후면 2008년도는 과거 속으로 흘러가고 2009년도가 찾아옵니다. 사흘 후에 지휘관들이 진중 곳곳을 다니며 한 말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세요.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어떻게 보면 요단 강 도하의 처음과 마지막은 모두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6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인 여호수아 역시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백성보다 앞서 요단 강을 건너라고 명령합니다.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 속에도 언약궤에 대한 당부가 빠지지 않습니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이와 같이 제사장이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요단 강을 먼저 건너게 한 후 이스라엘이 그 뒤를 쫓으라는 말씀이 본문의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휘관들이 백성들에게 한 명령'(2-4절)→'여호수아가 백성에게 한 명령'(5-6절)→'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한 명령'(7-8절)→'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준 명령'(9-13절) 등의 순서에 모두 중심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1-13절은 제사장이 멘 언약궤를 뒤따라 요단 강에 들어서라는 명령이고 14-17절은 그 명령에 대한 순종 행위입니다. 또한 1-13절은 언약궤를 뒤따라 갈 때 일어나게 될 기적과 축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라면 14-17절은 그 약속이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언약궤는 무엇을 말합니까?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는 다른 말로 '증거궤'(ark of the testimony, 수 4: 16; 출 25: 22), 혹은 '하나님의 궤'(삼상 3: 3)로 불렸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언약궤 속에는 십계명을 새긴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본래 언약궤는 아무나 운반할 수 없었고 고핫 사람들만이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제사장도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 강에 들어가면 이스라엘이 그대로 뒤를 따라 가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오늘 봉독한 14-17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지휘관들과 여호수아와 하나님이 지시한 그대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을 밟자 흐르던 물이 멈췄습니다. 위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둑, 즉 댐이 생겨 위쪽으로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단 강은 본래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물줄기가 완전히 끊겨 바닥이 훤히 드러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온 백성들이 마른 땅을 밝고 강을 건널 때 까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 한 가운데의 마른 땅위에서 요지부동, 중심을 딱 잡고 버티고 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제사장들이 미리 나왔더라면 그쳤던 물은 다시 흐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주의 종들, 즉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히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한 사람도 낙오하는 이가 없게 하려면 목사들이 요단 강 한 가운데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요단 강은 어떻게 건너야 합니까?
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제 사흘 후면 2009년도에 진입하게 되는데 수심은 깊고 폭은 넓고 물살은 급한 요단 강이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인간적인 수단을 부리려고 할 수 있습니다. 배를 만들고 뗏목을 만들고 별 생각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해법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보십시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요단 강을 개울 건너듯 쉽게 건너게 될 것입니다.
수 1: 8절은 말씀합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면 됩니다. 어떤 무서운 강도 건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면 됩니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고 순종하면 됩니다. 선포된 말씀인 설교를 듣고 은혜받고 순종하면 됩니다. 2009년도에 어떤 강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을지 모르지만 언약궤, 즉 하나님의 말씀만 청종하면 건널 수 있습니다!
② 스스로 성결케 하십시오
5절을 보세요.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당부합니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내일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은 요단 강을 육지 같이 건넌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전제 조건이 좀 불합리합니다. 수심과 강폭을 재보고 뗏목이나 배를 만들든지, 다리를 건설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스스로 성결케 하라니요.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으로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너무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수단을 부리기 전에 자기를 쳐서 경건해지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요단 강을 건너기 전 갖가지 인간적인 잔꾀를 부리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어디 빽이 없나 하고 혈육을 의지합니다. 돈의 흐림이 어디에 있나 하고 기웃거립니다. 뇌물에 마음이 동합니다. 부정이나 편법이라고 할지라도 당장 급한 강을 건널 수만 있다면 다 괜찮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다릅니다.
먼저 거룩해지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쳐서 절제하고 경건하라는 것이지요. 성욕과 식욕을 자제하고 옷을 세탁하고 해서 먼저 깨끗한 그릇이 되라는 것입니다. 심령과 인격 속에 하나님의 영이 깃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이 거룩하시듯 우리도 거룩해지라는 것이지요. 쾌락과 방탕 등 세상적인 삶의 방법으로 요단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아니, 혹 처음에는 아주 쉽고 편안하게 잘 건너가는 듯이 보이겠지요.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물에 빠집니다. 무서운 풍파가 불어 닥쳐 침몰 당하고 맙니다.
여러분, 요단 강을 건너기 원하십니까?
스스로 성결케 되십시오.
너무 수심이 깊고 폭은 넓고 물살은 빨라서 도저히 건너기 어렵습니까?
그 때 납작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성결해져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강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그릇도 작은 그릇도, 금그릇도 은그릇도 나무 그릇도 질그릇도 다 쓰십니다. 그러나 더러운 그릇은 쓰시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쓰시려면 거룩해져야 합니다. 새해에는 좀 더 깨끗한 그릇이 되도록 힘써 보십시오. 그리하면 어떤 강도 건널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③ 요단 강에 발을 내 미십시오
여기 요단 강을 건너는 것은 홍해를 건넌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으로 팔을 내밀자 바다가 말라서 바닥이 드러났습니다(출 14: 21). 이스라엘이 이 광경을 보면서 바다 한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습니다. 이미 갈라진 홍해를 바라보면서 건너갔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요단 강의 경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넘실거리는 강물에 발을 내밀자 물이 멈추었습니다.
홍해 신앙은 여러 가지 신비한 기적이나 이사를 직접 눈으로 본 뒤 믿는 신앙이지요. 반면에 요단 강 신앙은 먼저 자신의 발을 요단 강물에 닿게 한 뒤 믿는 신앙입니다. 제사장들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깨에 메고 직접 참여할 때 요단 강을 건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새해에 우리의 신앙은 홍해 신앙에서 요단 강 신앙으로 한층 더 성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소극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신앙에서 직접 참여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과 온 마음과 몸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십시오. 요단 강물에 발을 담근 만큼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살아 계시며 온 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원주민의 안내를 받으며 한 선교사가 밀림을 헤쳐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길 같지 않은 길을 가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한 마디 했습니다.
"도대체 이 밀림 속에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곧 길입니다."
밀림 속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밀림을 제일 잘 아는 원주민 그 자신이 길이지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도 친히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요 14: 6). 길을 잃어버렸을 때 주님께 돌아오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밀림 속에서 헤맬 때에나, 무엇보다도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나거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요단 강을 육지처럼 쉽게 건널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10절 전반부를 보세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또 11절도 보세요.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온 땅의 주권을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홍해와 요단 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2009년도에도 건너야 할 강들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온 땅의 주권자이신 주님께서 도우십니다. 깊고 넓고 물살 빠른 강들을 건너실 때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청종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성결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과감히 앞발을 내밀어 요단 강을 밟으며 헌신과 봉사를 아끼지 마십시오. 그리하면 그 어떤 강도 건널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 43: 2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