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과 현감 위공 행장〔玉果縣監魏公行狀〕
공의 휘는 백규(伯珪), 자는 자화(子華)이다. 위씨(魏氏)는 선계가 장흥(長興)에서 나왔다. 고려의 태보(太保) 계정(繼廷)의 후손이며 합문지후(閤門祗侯) 충(种)이 공의 11대 조상이다. 고조 정열(廷烈)은 현감을 지냈고, 증조는 동식(東寔)이다. 조부 세보(世寶)는 시에 능하고 글씨와 그림에도 정통하여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 불렀으며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아버지 문덕(文德)은 진사인데 학문과 품행으로 사우(士友)들에게 존중받았으며 호는 춘곡(春谷)이다. 어머니 평해 오씨(平海吳氏)는 일삼(日三)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모범이 되었으며 숭정 후 두 번째 정미년(1727, 영조3) 5월 15일에 공을 낳았다. 이날 저녁에 부친 진사공이 백룡(白龍)이 뜰에서 내려와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공은 벌써 태어나 있었다.
어려서는 총기가 있고 영민하여 여느 아이와는 달랐다. 태어난 지 겨우 일 년 만에 말귀를 알아들어 어른들이 시험삼아 육십갑자(六十甲子)와 날짜 세는 것으로 시험하자 즉시 이해하여 암송하였으며 3, 4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학자들은 무릎을 꿇고 앉는다는 말을 듣고 무더위에 옷을 벗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무릎 꿇고 앉는 것을 익혔으며 날마다 일과로 삼았다.
마을에서 푸닥거리를 하거나 광대패가 놀이를 벌이면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달려갔는데 공은 홀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지 않았다. 언젠가는 어린 동생과 마루에서 장난칠 적에 동생이 기어 다니다가 떨어지려고 하였다. 형세가 떨어져 다칠 것이 분명하자 즉시 볏단을 끌고 와 사다리를 만들어 내려가게 하였다. 작은 할아버지 춘담공(春潭公)이 곁눈질로 보고서 기특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4살 아이가 이와 같다면 훗날의 포부를 헤아려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6세에 《소학》을 읽었으며 《소학언해》를 한 번 보고서 즉시 삼성(三聲), 전주(轉注), 반절법(反切法)을 깨우쳤다.
일찍이 이웃에 모자(母子)나 형제(兄弟)간에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서 탄식을 그치지 않고 즉시 “착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효도하지 않으면 자식이 아니다.〔不善非人不孝非人子〕”라는 9자를 종이에 써서 몸에 달고 다녔다. 8세에 《대학》을 읽고서 즉시 몸단속을 할 줄 알아 새벽에는 반드시 세수를 하고 작은 종이 쪽지를 차고 다니면서 어느 날에 무슨 말을 잘못했고 어느 날에 무슨 일을 잘못한 것을 기록하였다. 어른이 등(燈)으로 제목을 내어 글을 지으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사물을 밝혀 아무리 어두운 곳도 다 비추고, 붉은 심지는 본래의 빛을 보여 준다.”라고 하였다.
9세에 어른을 따라 천관산(天冠山)에 올라갔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으니 공의 기상이 비범한 것이 이미 이와 같았다.
천관사에 발걸음을 옮겨 / 發跡天冠寺
허공을 딛고서 봄 하늘로 올라간다 / 梯空上春昊
인간 세상을 굽어보니 / 俯視人間世
먼지가 삼만 리이다 / 塵埃三萬里
《공자가어》에 있는 공자의 초상을 보고 직접 모사해서 벽에 붙여놓고 늘 절을 한 다음에 그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또 쪽지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이름을 써서 자기가 읽는 책의 우측에 두었다. 좌우명을 짓기를 “옛날의 인(仁)은 사랑인데 지금의 인은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다. 옛날의 의(義)는 합당함인데 지금의 의는 강함이다. 옛날의 예(禮)는 공경인데 지금의 예는 거짓을 꾸미는 것이다. 옛날의 지(智)는 지혜인데 지금의 지는 남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타인을 보기보다는 자신을 보는 것이 낫고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동학의 여러 친구와 함께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말한 적이 있었는데 동학은 모두 부귀영화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공만은 유독 말하기를 “책을 읽어 성인을 배우며 출세하여 부모를 드러나게 해 드린다. 만약 풍진세상을 만나면 노을을 캐면서 자지가(紫芝歌)를 부르겠다.”라고 하였다.
독서할 때는 소주(小註)를 보기를 좋아했는데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이해될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고 어른이 독서를 그만두라고 나무랐는데도 중단하지 않았다. 《서경》의 기삼백주(朞三百註)나 《주역》의 선천후천설 등은 몇 번 보고 이해하였다.
10세 뒤에는 제자백가를 더욱 넓게 섭렵하였으며 한 가지 재주로 명성을 이루기를 바라지 않고 천문, 지리, 역법(曆法), 복서(卜筮), 도교, 불교, 병법, 수학 등의 저서를 모두 망라해서 깨우쳤으며 장인들의 온갖 기술 또한 눈길이 닿는 대로 이해하였다. 언젠가는 천체관측 기구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었는데 조금도 오차가 없었다. 역(易)과 예(禮)에 더욱 뜻을 기울여서 주자부터 우리나라 학자의 예설(禮說)과 《주역총목(周易總目)》, 《계몽전의(啓蒙傳疑)》 등의 저서를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전념하였다.
성인이 되자 학식이 뛰어나 거유(巨儒)가 되었다. 재실에서 독서하자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공의 학칙은 한결같이 율곡 선생의 은병정사(隱屛精舍)의 옛 학칙에 의거하였으며 마을에서 활 쏘고 술 마시는 회합은 옛날의 향사례, 향음례를 모방해서 거행하였다. 고을 수령 이진의(李鎭儀)가 공을 추천하면서 말하기를 “재주는 높고 품행은 아름다우며 학식이 깊어 몽매한 사람을 가르칠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공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신미년(1751, 영조27)에 병계(屛溪) 윤문헌공(尹文憲公 윤봉구(尹鳳九))을 스승으로 섬겼다. 경서와 예서를 문답하고 이기(理氣)를 논변하면서 매우 스승의 칭찬을 받았다. 을유년(1765, 영조4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정해년(1767, 영조43)에 병계 선생이 별세하자 공이 다섯 달 동안 애도의 표시로 상장(喪章)을 달고 다녔으며 제문을 짓기를 “옛적 한유(韓愈)가 ‘안회는 성인이신 공자를 얻어 의귀하였으니 그가 근심하지 않고 즐거워한 것은 당연하다.’ 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의귀할 곳을 잃었으니 아, 슬픕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갈 때 시 한 수를 지어 마음을 나타내었다.
쓸쓸히 휘파람을 길게 불며 옥계에서 나오니 / 悵然長嘯出玉溪
공산에 북풍이 불고 눈이 내리는 때이다 / 北風空山雨雪時
지금에는 또 은자가 적어서 / 如今亦少荷簣者
유심하던 무심하던 겁나지 않구나 / 有心無心不怕知
이 시는 예전에 병계 선생이 주자의 〈옥계(玉溪)〉시를 차운한 것을 공이 다시 차운하여 지은 것이다.
공은 스승의 상을 치르고 나서는 마침내 몸소 농사짓고 독서할 계획을 세워 도롱이를 입고 서책도 지니면서 김도 매고 책도 읽었다. 그리고 모임의 규약과 양정숙(養正塾)의 학규(學規)를 지어 마을 풍속을 좋게 만들고 후배를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매년 사계(四季)에는 형제와 일가친척 50여 명을 모아 양친(兩親)을 축수하면서 내외(內外)로 나누고 장유(長幼)를 차례대로 앉도록 하였으며 아래로는 노복까지도 뜰에 차례대로 나열시키고, 유중도(柳仲塗)의 삭망훈(朔望訓)을 모방해서 삭망훈의 내용을 모두 언해로 해석하여 읽어 주어 듣도록 하였으며 항상 군자삼락(君子三樂) 중에서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다행으로 여겼다.
신축년(1781, 정조5)에 모친상을 당하고, 갑진년(1784, 정조8)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전후로 거상하면서 정성과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예서를 읽고 난 여가에는 양친의 언행과 생각을 상세히 기술하여 《사성록(思成錄)》 2편을 저술하였다. 작은 주머니에 태어날 때의 탯줄을 담아 웃옷과 허리춤 사이에 차고 다니면서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을 두었다.
정조 갑인년(1794, 정조18)에 호남 바닷가에 해일이 일자 각신(閣臣) 서영보(徐榮輔)를 파견해서 위문토록 하였다. 서영보가 평소 공의 명성을 듣고 도착하자마자 탐문해서 공의 행동과 실적을 파악하였으며 또 공의 글을 가져다 보았다. 조정으로 돌아가서 등용해야 한다고 경연하는 자리에서 청하자 상이 윤허를 내려 다시 더 찾아가 방문토록 하였다. 이듬해 겨울에 군직(軍職)을 주라고 특별히 유지를 내리고 관찰사에게 명해서 서울로 위백규를 보내라고 하자 공이 자신의 저서 《환영지(寰瀛志)》를 바쳤다. 공은 당시 나이 69세로 병이 있어 임금의 부름에 달려가지 못하자 다시 하교를 내리기를 “봄날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위백규를 올려보내고 그가 지은 저서 모두를 봉해서 올려보내라.”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선공감 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제수하였으나 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상이 선소(宣召)가 제때에 시행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해당 관아의 당상관 판서를 논죄하고 하교하기를 “봄추위가 여전히 매서워 자력으로 출발하지 못하는가. 이처럼 지체되니 참으로 대단히 의아하다. 관찰사에게 엄히 명령을 내려 빨리 위백규를 올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명에 응하여 병진년(1796, 정조20) 3월에 입경(入京)해서 궐에 들어가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총체적인 내용은 6조(條)로 되어 있는데 ‘뜻을 세우는 것과 현자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 또 6조의 강령이다. 말미에 늙고 병들어 억지로 나아가기 어려운 상태를 진술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총애하였는데, 비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조에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라고 아뢴 것을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긴다. 나의 뜻이 서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뜻이 통일되지 않고, 정학(正學)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사학(邪學)이 종식(終熄)되지 않으니 이는 모두 내가 반성해야 할 점이다. 2조에 보필할 신하를 선발하고 어진 자를 등용하라고 아뢴 것을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긴다. 인재를 등용하여 임금을 섬기게 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다. 폐단을 척결하고 인재를 두루 등용하는 것이 내가 오늘날의 의정부에 바라는 것이다. 다음의 3조, 다음의 4조, 다음의 5조, 다음의 6조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실하고 절실하여 시국의 폐단을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그대가 외진 시골에 사는 하찮은 사람으로서 능히 빠짐없이 논하기를 이렇게까지 하였다. 내가 듣고자 하는 것은 도움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니 즉시 의정부로 하여금 아뢰도록 하여 실효가 있도록 하겠다. 그대의 나이가 칠십인데도 부름을 받고 올라왔다. 단지 원하는 대로 고향에 돌아가게 해 준다면, 그야말로 이른바 ‘가고 옴에 있어 아무 소득이 없다’는 셈이 되고, 또 오래 기다려 벼슬하도록 하는 것은 풍로(馮老)의 낭잠(郞潛)보다도 심한 면이 있으니, 한 고을을 주어 그 포부를 펴 볼 수 있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그길로 이조(吏曹)에 명해서 수령 후보자로 천거토록 하였다. 처음에는 기장(機張)으로 추천하자 상이 말하기를 “노인이 어떻게 먼 곳으로 부임한단 말인가. 전라도의 문음(文蔭) 중에서 서로 바꾸라.” 하니, 다시 태인(泰仁)으로 추천하였다. 상이 또 집과는 조금 멀다고 여겨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특별히 임명해서 말을 지급하고 부임하도록 하였다. 비답이 내려가자마자 사림이 은근히 주시하고 기대하였으나 공이 올린 상소의 내용 중에는 고관대작을 비난하는 말이 많고 이어서 사풍(士風)이 예스럽지 않다고 언급하자 공을 비판하는 말이 떠들썩하였으며 태학과 사학에서는 동맹휴학과 시험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상의 조정에 힘입어서 그치게 되었다. 부임하고 나서는 향약을 실행하고 지역(紙役)을 혁파해서 승려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 물고기 진상하는 것을 없애어 어호(漁戶)를 살렸다. 본읍(本邑 옥과)에서는 싱싱한 은어〔生銀魚〕를 공물로 바치는 것이 고을의 고질적 폐단이 되었으므로 감영에 보고하여 돈으로 대신토록 하였고, 관아에 머무는 각종 장인들을 떠나도록 없앴으며, 각 부서의 계방(稧防)과 관아의 사색보(四色保)를 혁파해서 군역(軍役)에 보충시켰다. 학문을 권하고 무예를 익히도록 하였으며 환곡을 공평히 하고 세금을 줄였으며 관사를 수리할 때는 백성들의 노동력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사적인 것을 줄여서 공적인 일에 보탰으며 자기에게 들어가는 것은 줄이고 백성을 풍족하게 할 것을 마음으로 삼았다.
정사년(1797, 정조21) 봄에 중풍을 앓아 사직서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랜 병 때문에 6월의 인사 고과에서 낮은 점수를 받자 상이 말하기를 “위백규의 치적은 병과 관계가 없으며 또 그의 고과 제목을 보니 표창을 해야 마땅하지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전적으로 이것은 무른 땅에 말뚝 박기이다.”라고 하면서 관찰사를 책망하고 즉시 경직(京職)으로 뽑아서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에 임명하였다. 공은 더 이상 벼슬할 뜻이 없어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에서 교체할 것을 청하자 상이 또 하교하기를 “위백규의 학식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그 집안의 품행과 명성은 지극히 순수한데 어찌 포부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조정에서 위백규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백규에게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결코 그가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하고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 본도(本道 전라도)의 묘(廟)나 전(殿)의 영(令) 벼슬과 자리를 서로 바꾸라.”고 하였다. 10월에 경기전 영(慶基殿令)에 다시 임명하였으나 끝내 병으로 교체되었다.
무오년(1798, 정조22) 11월 25일에 별세하였으니 향년 72세였다. 다산(茶山)의 임좌병향(壬坐丙向) 언덕에 안장하였으며 9년 뒤 병인년(1806, 순조6)에 유생들의 건의에 따라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부인 김씨는 사인(士人) 시성(始聲)의 따님으로 남편을 섬기는 데 어김이 없었다. 공보다 7년 뒤에 작고하였으며 공의 묘에 부장(祔葬)되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립(道立), 도급(道及)이며, 딸은 조광근(曺光根)에게 시집갔다. 도립은 1남 4녀를 두었으며, 도급은 2남 2녀를 두었다.
공은 문장을 일찌감치 이루었으며 학식이 넓었다. 과거 공부를 여사(餘事)로 하였으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능하였고 특히 대책문(對策文)에 장기가 있어 동당시(東堂試)에 네 차례나 장원하였다. 매번 회시(會試) 때가 되면 부귀한 자제들이 여관에 가득차도 조용히 문을 닫고 만나지 않자 서울 사람들이 괴물이라고 지목하였다.
일찍이 2시험장에 정시(庭試)를 보러 가는데 마침 대간(臺諫) 이진의(李鎭儀)가 1시험장의 주시(主試)였다. 이진의는 평소 공을 존중하여 1시험장으로 가기를 요구하였으나 공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본래 2시험장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지금 좌주(座主)를 따라서 시험 장소를 바꾸는 것은 구차하게 가는 것이요 평소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가정에서는 더욱 지켜야 할 도리에 독실하여 네 명의 남동생과 세 명의 여동생과 늙을 때까지 화목하게 지냈으며 집안사람을 대할 때는 인자하면서도 엄하여 가정이 화목하였다. 이런 마음을 확대해서 일가친척과도 돈독히 지내고 이웃 마을과도 화목하게 지냈으며 화수회(花樹會)의 규칙과 모임의 규약 같은 여러 조항도 질서 정연하여 볼만하였다. 게다가 빈궁해서 배우지 못한 친족의 자식이나 마을의 우수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농한기에 불러서 《소학》, 《통감》 등의 책을 자상하게 열심히 가르쳤으며 재주에 따라서 성취가 있도록 하였다. 남의 선행을 들으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였으며 그 사람을 보지 못했어도 자주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남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인정과 도리를 참고해서 옳고 그름을 타일러 주어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먹고 화해하게 하였다. 아주 궁벽한 마을에 탁월한 행적이나 뛰어난 자취를 가졌어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들을 위해 전기(傳記)를 지어서 표창하였다.
평소 주관이 없는 속유(俗儒)를 가장 싫어하여 항상 말하기를 “성리학을 아주 모르는 사람은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더라도 끝내는 문장의 오묘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오묘함을 이해하는 자만이 또한 스스로 즐길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귀천영욕(貴賤榮辱)은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고 거경(居敬)의 공부는 노년이 되어서도 더욱 독실하였다. 스승이 써서 준 ‘경의(敬義)’ 두 글자를 배접해서 작은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머리맡에 두었으며 종일 엄숙한 모습으로 있어 집안사람도 그의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일찍부터 경륜(經綸)의 뜻을 품고서 전국의 산천과 토지의 비옥과 척박, 정치 폐단, 풍속, 원근의 형세 등을 두루 고찰하고 연구해서 손바닥을 가리키듯 쉽게 기록하여 그 책 이름을 《정현신보(政弦新譜)》라 불렀다. 이어서 폐단을 구제할 방도를 말하면서 《분진절목(分賑節目)》을 지었는데 흉년이 든 해에 고을 수령이 이 책을 취해서 내용대로 실천하여 남쪽 주민들이 도움을 받았다. 경전 속의 격언이나 지론(至論)을 초록해서 《고금(古琴)》이라 부르고 매번 술이 얼큰해 생각이 나면 그때마다 암송하였다. 학규(學規), 예설(禮說), 경서조대(經書條對), 독사차록(讀史箚錄), 시, 소(疏), 전(傳), 기(記), 서(序), 설(說) 등을 합쳐 90여 권의 잡저로 만들었는데 그 중에 24권은 조정의 부름에 갈 때 내각(內閣 규장각)에 넣었으며, 그 이외에 한가롭게 읊으면서 지은 글도 또한 운치가 있었으니, 문장가의 공허한 말이 아니다. 일찍이 탄식하기를 “만약 후대에 양자운(揚子雲)이 있다면 천 년 후에 그 사람과 나는 조석으로 만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공은 뛰어난 자질로 남쪽에서 일어나서 학문을 쌓아 명망이 대단하고 재주도 풍부하여 세상에 쓰일 만하였지만 끝내 한 번 급제를 못하였으니 정해진 운명이다. 돌이켜보면 공은 먼 시골의 빈한한 가문의 사람으로 세상에 발탁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흰 머리 되도록 운수가 막혀 뛰어난 재주가 묻히는 탄식이 있었다. 만년에 성군을 만나 융숭한 은혜를 입었으며 부름을 받고 달려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지방관을 맡겨서 가진 학식을 시험하였다. 이것은 공의 명망과 실력이 대단해서 임금을 감동시킨 것이 있기는 하였지만 참으로 은거해 있는 사람을 발탁하고 벽촌에 있는 이까지 등용하는 우리 성상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군신 관계를 살필 수 있지만 공이 너무 나이가 든 것이 애석하다. 지은 글의 원고는 여전히 규장각에 있으니 훗날에 다시 빛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공은 유현(儒賢 윤봉구를 말함)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만년에 나아간 경지가 의당 더욱 심원할 것인데 나는 연배가 뒤떨어지고 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공의 고견을 얻어 들을 길이 없었던 것이 유감이다. 공의 손자 영한(榮翰)이 나를 찾아와 행장을 부탁하였다. 나는 참으로 적임자가 아니며 또 노병으로 오랫동안 손에서 붓을 놓았고 누차 되돌려 보냈는데도 더욱 힘써 부탁하였으니 그의 정성을 저버릴 수 없다. 마침내 공의 가장(家狀)을 참고해서 대략 편찬하여 훗날 공의 덕을 아는 사람이 고증해 주기를 기다린다.
[주-D001] 위공 : 위백규(魏伯珪, 1727~1798)로,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이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의 제자이며 저서로 《존재집(存在集)》이 있다.[주-D002] 삼성(三聲) : 한글이 초성(初聲 첫소리), 중성(中聲 가운뎃소리), 종성(終聲 끝소리) 글자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주-D003] 전주(轉注) : 한자를 만든 원리인 육서(六書)의 하나이다. 육서는 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 등을 가리킨다. 전주는 이미 만들어진 한자의 뜻을 다른 뜻으로 확대하여 새로운 뜻을 나타내는 원리이다. 예를 들면 악(樂)은 음악을 뜻하는 악에서 즐거울 락으로, 좋아할 요로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나타난다.[주-D004] 반절법(反切法) : 한자의 음을 읽는 방법. 첫 글자의 앞의 음과 뒷 글자의 뒤의 음을 조합하여 음을 표시한다. 삼(三)은 《광운(廣韻)》에 ‘蘇甘切’로 되어 있다. 즉 蘇에서는 ‘ㅅ’, 甘에서는 ‘암’을 합하여 ‘삼’이라고 발음되는 것이다.[주-D005] 자지가(紫芝歌) : 진(秦)과 한(漢)의 교체기에, 상산사호(商山四皓) 즉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가 세상을 피해 은거하면서 부른 노래이다.[주-D006] 기삼백주(朞三百註) : 기는 기년(期年)으로, 《서경》 〈요전(堯典)〉의 “기년은 366일이다.”를 주해(註解)한 채침(蔡沈)의 주석을 말한다.[주-D007] 은병정사(隱屛精舍) 옛 학칙 : 이이(李珥)가 1578년(선조11)에 황해도 석담 동쪽에 은병정사를 짓고 문인들을 가르칠 때 지은 은병정사 학칙을 말한다.[주-D008] 시 한 수 : 이 시는 《존재집(存齋集)》 권1에 보인다.[주-D009] 주자의 옥계(玉溪) : 주자의 시를 말하는데 정확한 제목은 〈이빈로의 옥간시를 읽고 우연히 읊다.[讀李賓老玉澗詩偶吟]〉이다.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거문고 홀로 안고 옥계를 건넜더니 / 獨抱瑤琴過玉溪
낭랑히 퍼지니 맑은 밤 달이 환할 때이다 / 琅然淸夜月明時
이미 무심의 경지가 된 지 오래 되었지만 / 祗今已是無心久
그래도 산 앞의 은자가 알 까 걱정된다 / 却怕山前荷蕢知
《朱子大全 卷7 讀李賓老玉澗詩偶成》[주-D010] 양정숙(養正塾) : 위백규가 29살에 세운 서당을 말한다.[주-D011] 유중도(柳仲塗)의 삭망훈(朔望訓) : 중도(仲塗)는 송나라의 학자 유개(柳開)의 자이다. 유중도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자신의 부친이 남긴 가르침으로 집안 식구들에게 훈계한 것을 말한다. 《小學 嘉言》[주-D012] 군자삼락(君子三樂) :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주-D013] 선소(宣召) : 임금이 신하를 불러들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주-D014] 만언봉사(萬言封事) : 위백규가 1796년(정조20)에 올린 상소문을 말하는데 《존재집》 권2에 〈만언봉사〉라는 제목으로 전문(全文)과 함께 정조의 비답도 실려 있다.[주-D015] 풍로(馮老)의 낭잠(郞潛) : 풍로는 한(漢)나라 때의 풍당(馮唐)을 가리킨다. 풍당은 안릉(安陵) 태생으로, 문제(文帝) 때에 낭관(郞官)이 되어 머리가 하얗게 늙은 나이에 이르도록 승진을 하지 못하고 낭관에 재직하였다. 낭잠(郞潛)은 보통 불운하여 오래도록 낮은 벼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주-D016] 문음(文蔭) :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덕행으로 벼슬한 문관을 말한다.[주-D017] 지역(紙役) : 종이를 만들어 바치는 부역으로 주로 사찰에 많이 시행하였다.[주-D018] 어호(漁戶) : 물고기를 잡아 나라에 진상하는 민호(民戶)이다.[주-D019] 계방(稧防) : 공역(公役)의 면제와 그 외 도움을 얻을 목적으로 관청 아전에게 곡식이나 돈을 주던 일을 말한다. 계방(契防)이라고도 한다.[주-D020] 사색보(四色保) : 조선 후기에 무명이나 곡식을 바치고 군역(軍役)을 면제받았던 네 종류의 보인(保人)으로, 곧 군기보(軍器保), 관장보(官匠保), 지물보(紙物保), 진상보(進上保)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사천(私賤)으로 충당하였다.[주-D021] 무른 …… 박기 : 우리나라 속담이며 한문으로 표현하면 ‘연지삽목(軟地揷木)’이다. 보통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첫째는 몹시 하기 쉬운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며 둘째는 세도 있는 사람이 힘없고 연약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학대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둘째의 뜻으로 사용되었다.[주-D022] 주시(主試) : 시험 감독관인 시관(試官)의 우두머리이다.[주-D023] 좌주(座主) : 일반적으로 과거 급제자 자기를 뽑아 준 시관(試官)을 존경하여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주시(主試)를 말한다.[주-D024] 양자운(揚子雲) : 중국 한(漢)나라의 학자 양웅(揚雄, 기원전 53~기원전 18)의 자가 자운이다. 주요 저서로 《태현경(太玄經)》, 《법언(法言)》이 있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임재완 김정기 (공역) |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