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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섭씨와 막내아들 황정연씨
옥천읍 귀화리 황하섭(92, 1926년 2월1일생)씨, 그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부친 황길성씨와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 황하섭씨는 죽향초등학교(32회)를 졸업하고, 고등과 2년을 다녔더니 해방이 됐다고 했다. 옥천군 산림과 공무원을 잠시 하다가 6.25전쟁이 일어났고 혼인한지 10일만에 아내 서정숙(88)씨는 동이면 적하리 올목으로 본인은 동네 한 살 후배인 황주표(작고, 옥천사료 황종섭씨 부친)씨와 함께 걸어서 피난을 갔다. 이원면까지 걸어갔지만 그 곳에는 이미 인민군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하룻밤을 묵고 영동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고 다시 부산으로 기차를 타고 내렸다. 부산에서 함께 갔던 황주표씨는 UN군에 입대했고 황하섭씨는 학생 신분은 아니었으나 학도병으로 차출되어 집결지인 밀양으로 갔다.
황하섭씨는 총 한번 안 쏴보고 육군 직할유격대에 소속되어 부산항 제 4부두에서 문산호라는 배를 탔다. 영문도 모르고 나이 어린 학도병 동생들과 함께 배를 탔던 것이 치열했던 역사적 전투 현장이 되리라는 것을 전혀 예감할 수 없었다.
6.25전쟁 시작 후, 남하한 적을 저지하기 위한 아군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전세를 반전시키기 위한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진 당시 드러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상륙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의 성공은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이름 없는 학도병들의 희생이 이룬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7만5천여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 국군과 유엔군의 대대적인 연합작전이었다면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것은 징발된 낡은 상륙함과 구축함 1척, 그리고 정규군 특수부대가 아닌 772유격대라 불린 학도병들이었다. 772명의 학도병 속에 바로 황하섭씨가 옥천에서는 유일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학도병의 대부분은 경상도 지역에 거주했던 초등학교 고학년생, 중학생으로 이뤄진 군번도 없는 학도병이었다. 북한군에게서 노획한 총으로 사격훈련을 했으며 3주간의 체력훈련과 정신교육이 훈련의 전부였다.
'장총 한자루에 미숫가루 몇봉지만 가지고 너희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킬 수 있다 이 한마디에 우리는 배를 탔다' 당시 김영재(장사상륙유격동지회회장)씨가 증언할 정도로 열악하고 사실상 내몰렸다.
■ 유명한 비사, 장사상륙작전의 주인공으로 맹활약
"대부분 16살 내외가 많았어요. 대구 사람은 나보다 3살 더 먹은 사람도 있긴 했죠. 그 당시 이명흠 대위가 대장이었어요. 모집된 772명이 13일 오후 5시에 부산항 제4부두에서 문산호라는 배를 타고 출발했어요." 문산호는 2천700톤급 배로 미국에서 건조돼 47년 2월 한국에 매각됐고 교통부 산하 대한해운공사 소속으로 밀가루, 석탄운반이 주 목적이었다.
육군본부에서 제1유격대대라고 명한 이들은 실탄을 채 10발도 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보급 받은 것이라곤 소련제 장총과 배낭, 인민군 군복, 물약간, 건빵 한봉지, 미숫가루 세봉지가 전부였다.
"배가 출발 할 때는 뒤에 전함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어두워지니 뒤의 배가 싹 철수하고 우리 배만 덩그러니 남아 혼자 가고 있더라구요. 저는 총을 한번도 쏘지 못했어요. 태풍이 불었고 배가 바다 밑 바위에 걸려 좌초되어 내렸는데 상륙하자마자, 1개 중대 1,2,3,4소대원들은 배밑에 깔려 다 죽었어요. 저는 5소대원이었는데 내려서 총을 쏘려고 보니 총에 모래가 들어가 작동이 안 됐어요. 다시 땅을 파고 담요를 깐 다음에 총을 소지해서 3번이나 밀고 당기면서 장전하니까 비로소 작동이 되더라구요. 제가 총을 못 쏘니까 옆에 학도병이 총도 안 쏴봤냐고. 그런데 본인도 15일 정도 훈련받은 거거든요. 소이탄(네이팜탄)이 사방에서 날라오고 정신없었어요."
장사상륙작전은 바로 아군이 동해로 상륙작전을 벌이는 것처럼 위장하고 교란하기 위한 의미있는 전투였다. 이 때문에 적의 주력부대를 동해안으로 유인하여 양동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14일~15일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이다. '작전명 174호'라고도 한다. 9월14일 부산항을 출발한 이후, 9월15일 새벽 6시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의 독립 제1유격대대, 문산호를 타고 장사에 상륙하여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고 철수한 작전이다. 원래 이 작전은 미8군 특공대에 떨어진 명령이었으나 인민군 복장을 입고 특수작전을 해야 하는 사정상 북한군과 외모가 비슷한 남한 출신 학생들인 학도병에게 작전명 174를 맡긴 것이다. 원래는 3일간 상륙한 뒤 귀환할 예정으로 총기 등의 물자도 3일치만 지급되었다. 하지만, 최악의 기상조건인 태풍 케지아로 인해 파고가 3~4m로 풍랑이 거칠었고 설상가상으로 닻마저 끊어져 문산호가 좌초되고 적의 집중사격을 받게 된다. 총알과 식량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7번국도 차단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거센 파도와 빗발치는 적의 기관총 공격 속 벌어진 사투에서 작전 34시간 만에 고지를 점령했다.
■ 임무 완수하고도 철수도 쉽지 않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고립된 학도병들을 구출하러 조치원함을 보냈지만, 조선인민군 제5사단과 2군단의 정예부대인 북한군 2개 연대의 규모의 부대가 T-34/85전차 4대를 앞세우며 로켓포와 네이팜탄 사격을 하는 등 치열한 전투 끝에 대부분 전사했다. 139명 전사, 92명 부상, 이들을 제외하고 거의 행방불명되어 700여 명 이상이 사망한 걸로 보고 있다.
"무전기도 모래가 들어가 고장이 났어요. 한 사흘간 점령하고 퍼져 있다가 인민군이 포항쪽에서 헬리콥터 타고 오더라구요. 철수 명령이 내려져 좌초된 배로 올라갔는데 거기서 박격포 공격 받아 죽은 전우들도 많았죠. 다시 날망까지 올라가서 있다가 이튿날 조치원호가 와서 39명 정도 탄 것 같아요. 나머지 전우들은 계속 전투를 벌이다가 끝내 배를 못탔죠. 그걸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워요."
학도병들은 포화속을 뚫고 간신히 상륙지점으로 돌아와 조치원호를 타고 귀환할 수 있었다. 1960년 10월31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772유격대 동지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여 수행한 작전은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하며 대원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적 행동은 한국의 젊은이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고 친필로 썼다. 학도병들이 탔던 문산호(lst-120)는 해병대 대원들이 해안을 수색하다가 1997년 3월6일에 난파선으로 발견됐다. 그 배에는 이름없는 부식된 유골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들은 해당 작전이 끝나고 서울을 탈환한 후 북진작전이 시작된 시점인 1950년 10월5일에서야 부대원들에게 입대명령과 036군번이 내려졌다.
도박에 가까웠던 승리가 희박했던 불가능의 작전, 군번도, 군복도, 군화도 없이 군인이 된 청년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값진 승리였다.
2015년 5월 영덕군은 294억원을 들여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을 조성을 시작했으며 현재 2천톤급 규모의 문산호가 거치되어 있다.
황하섭씨가 영덕 위령제에 참여해 찍은 사진.
■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이후 그는 다른 부대에 합류해 안동으로 가서 가평까지 올라갔다가 서울 돈암동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51년 제대했다. 제대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유격동지회 회원들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서울 8명, 대구 8명, 옥천 1명 등 20여 명이 채 안 돼요. 빨리 명예회복이 되고 국가가 직접 추모행사를 해야 하는데 아쉬워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은 95살 되신 분이 한분 계시고 그 다음에 저예요." 그는 강원도에 있는 큰아들 황창규씨가 추모제 소식을 전해 줘 10년 전부터 해마다 영덕에서 9월15일 하는 기념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5년 전부터는 옥천에 같이 사는 막내 황정연(58)씨가 꼭 모시고 동행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비사로 묻혀있던 장사상륙작전을 세간에 알린 이들은 당시 상륙작전에서 생존한 38명의 학도병 유격대원이다. 이들 38명의 대원들은 1980년 7월14일 대구에서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를 결성하고 경기도 양평소재 청운사 주지스님과 함께 전국 모금운동을 펼쳐 1991년 9월14일 장사상륙작전을 감행하던 그 날을 위해 장사리 해안에 위령탑과 전적비를 세워 지금까지 매년 위령제를 올리며 꽃다운 영혼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그는 고향에 와서 이장과 노인회장을 하면서 마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황하섭, 황양섭, 황광섭 등 3형제의 우애가 깊고 마을회관을 지을 때 본인 땅 80평을 마을에 희사하는 등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다. 1958년도 황한지씨가 대전 판암동에서 처음 포도묘목을 들여와 재배하는 걸 보고 7명이 동참해 59년 작목반을 구성했는데 그 때 중추적 역할을 했던 사람도 바로 황하섭씨였다. 노인회장을 맡았던 2006년에는 여든의 나이에도 마을 청소도 도맡아 했다. 2005년 현충일 추념식에는 군수로부터 모범국가유공자로 표창도 받았다. 효심이 지극해 매년 영덕 위령제에 동행을 하는 막내 황정연씨는 "아버지가 정말 어려웠던 시기에 생사를 걸고 힘든 일을 해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며 "옥천 사람이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해서 함께 싸웠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장사상륙작전은 곧 영화화될 예정이다. 태원엔터테인먼트가 '장사리 9.15'란 제목으로 내년 개봉을 목표로 10월 중순 촬영에 들어간다.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과 '포화속으로'의 김태훈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김명민이 이명흠 대위 역할을 헐리우드 스타 메건 폭스가 뉴욕헤럴드트리뷴 종군기자로 625전쟁의 이면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사회에 한국지원을 요청했던 마가렛 히긴스로 출연한다. 마가렛 히긴스는 '한국전쟁'을 집필하며 여성 최초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샤이니 민호가 학도병 중심인물로 출연이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하섭씨가 막내아들 황정연씨 내외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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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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