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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연기사상과 공사상
인간의 고통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붓다의 잘못된 분석은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인 무아사상뿐 아니라 연기사상,
그리고 공사상까지 위태롭게 한다.
“무아는 곧 연기緣起에 대한 깨달음에 다름 아니다.
모든 것이 인연 화합의 상호의존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가 공하다는 것은 현실세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느껴지고 만져지는 이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관념적인 유희에 빠지거나 또는 아예 세상을 벗어나는 방법일 뿐일
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세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세계를 실체로 보는 방식에 대한 부정’이다.
세계에 독립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텅 빈 듯 아무런 실체 없이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의 조건으로 임시적인 자리를 얻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아를 깨달으면 연기를 이해하고 연기를 이해하면 나와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연기사상은 일체의 존재를 ‘관계’로써 설명하는 사상이다.
현대의 실존철학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된 ‘관계’를 중시하는 사상이 일찍이 동양의 불교에서 있었다.
그러나 연기사상에서 관계는 '실체'를 배제한 관계였다.
동양철학이 그 태동부터 철학의 핵심개념인 ‘실체’를 부정하기 위한 최대한의 논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은 놀랄만
한 일이다.
또한 동양철학에서도 플라톤의 ‘이데아’의 근본적인 특성인 ‘불변하는 실체’의 존재 여부에 관한 깊은 논의가 있었
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만큼 세계 속에서의 ‘변화와 항존성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인간에게, 따라서 철학에서 중요한 과제였다.
‘세계를 실체로 보는 방식’을 부정하기 위한 정교한 사유의 산물이 바로 불교의 무아사상과 연기사상, 공사상이다.
그러나 세상에 독립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텅 빈 듯 아무런 실체 없이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의 조건으로 임시적인 자리를 얻을 뿐이라는 불교의 연기사상은 철저하게 무아사상과 공사상을 뒷받
침하기 위해 고안된 사유의 산물이자 ‘전도된 사상’이다.
또한 불교의 공사상은 ‘실체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자신의 주저 <중론>에서 나가르주나는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즉 모든 것이 공하다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나가르주나가 경계했던 것은 언어에 의한 문법적 착각 때문에 우리가 형이상학적 사유에 속을 수도 있다는 점
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법상 주어에 해당되는 어떤 것이 마치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가르주나에게 있어 형이상학적 사유란 모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모든 형이상학은 불변하는 실체를 가정
하고, 결국 우리를 이 불변하는 실체에 대한 집착으로 이끌기 쉽기 때문이다.
실체의 자기동일성, 자성을 부정한다는 것, 즉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공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철수를 실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철수 그 자체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날 신선한 바람이 불던 카페의 음악소리, 25년산 포도주, 부드러운 이불
등의 조건으로 인해 태어난, 즉 인연으로 태어난 존재에 불과하다.
여러 가지 인연으로 발생한 존재를 공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인연에 의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그 존재의 동일성이란 것이 단지 인연의 마주침으로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개체들이나 사건들이 인연의 마주침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매커니즘을 불교에서는 보통 연기라고
부른다.
모든 것은 자성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일어난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철학 vs 철학>, 강신주)
나가르주나는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모든 것이 공하다’라는 생각과 동일시했으나,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결코 모든 것이 공하다는 사고로 연결되지 않는다.
자신의 현상에 따라 매개적으로 형성되는 인간의 자아라는 ‘변화하는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자아’는 물자체, 신과 함께 실체의 중요한 범주 중의 하나인데, 자아가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고 해서
자아가 공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사고이다.
철수가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단지 인연의 산물이라고 해서 철수의 실체로서의 자기동일성 혹은 자성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아는 우리가 ‘나는 생각한다’라는 식으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에 의한 문법적 착각 때문에 생긴 형이
상학적 사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나가르주나의 사상에서 발견되는 첫 번째 오류는 ‘실체’에 대한 전통적 정의에 입각한 오류이다.
실체를 정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실체를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 혹은 “그 자신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다른 어떤 것이 그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없는 존재”로서 정의하는 전통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실체를 “성질,작용,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받들고 있는 기체”로서 정의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그리고 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이 철학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나누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실체에 대한 전자의 정의에 의하면 단지 인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철수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황당한 일일 것
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로써 정의되는 어떤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에 대한 후자의 정의에 의하면 설사 철수가 어떤 인연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실체로서의 철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철수가 비록 어떤 인연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철수의 성질, 작용, 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받들고 있는 기체인 실체로서의 철수의 자아가 존재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체에 대한 후자의 정의에 의하면 우리는 어법상 주어에 해당되는 어떤 것이 생명체인 한, 비록 그것이 어떤
인연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실체가 그에 대응하여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런 오류도 범하지 않는다는 사
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생명현상에 대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주어로 두고, 모든 생명현상을 술어로써 설명해야 한다.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실체에 대한 후자의 정의에 의하면 ‘불변하는 실체’는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가 되는 것이 곧 실체인데, 생명현상이 그 생명이 죽을 때까지 변화하며 계속되
는 한 불변하는 실체라는 것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특히 매개적이고 반성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의 경우 현상과 실체는 끊임없이 피드백하면서 새로이 형성되므로 불변하는 실체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인연의 산물이라는 점을 들어 모든 것이 공하다고 주장한 나가
르주나의 주장은 명백한 오류이다.
‘항존성으로서의 실체’를 전제로 한 사유체계는 ‘변화로서의 실체’가 설명되면 모두 뒤집어진다.
나가르주나의 사상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오류는 ‘실체’와 ‘실재’의 혼동이다.
사실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존재하는 ‘실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철학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오류이다.
실체는 모든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이면서 생명의 원리가 되는 것을 말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생명의
원리라는 의미에서 ‘영혼’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실재’는 눈앞의 현상과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포함하여 ‘실재하는 존재’로서, 현상과 실체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현상’이 존재하는 한 ‘실재’는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불변하는 실체’는 전통철학의 오류였을 뿐이다.
따라서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든 것은 공하다’는 공사상의 결론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인연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개체나 사건들은 자성을 가지지 않지만,
즉 나가르주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나가르주나가 생각했던 중도의 의미이다.
나가르주나의 생각이 옳다면 우리가 어떤 개체나 사건들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특수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내가 명명했던 것들의 이면에 자성과 같은 형이상학적으로 불변하는 본질이 있다고 가정하지만 않
는다면 말이다.
이럴 때 우리 자신이나 타자 혹은 사건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도 사라질 것이다.
물론 집착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실존적 고통도 사라질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 자체를 부정한 적이 없다.
그가 부정하려고 했던 것은, 즉 그가 공하다고 판단했던 것은 오직 실체나 자성 혹은 본질에 집착하는 형이상학
적 사유였을 뿐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불변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집착이다.
자신이 가진 삶도, 미모도, 부도 영원해야만 한다고 집착하는 순간 고통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집착을 언어에 대한 형이상학적 맹신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언어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젊음은 오직 늙음과의 관계 속에서만, 미모도 오직 추함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질 뿐, 그 자체로서는
독립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철학 vs 철학>, 강신주)
나가르주나는 “인연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개체나 사건들은 공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세계 속에 존재하는 변화와 항존성과의 관계, 혹은 현
상과 자기동일성과의 관계를 어정쩡하게 ‘중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우리는 '현상'과 그것을 받들고 있는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와의 관계를 통해서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의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고 인연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여기서는 주체도 타자도 자기동일성을 갖지 않는 ‘공’한 존재일 뿐이며, 인연들의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로서의 위상
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인연들의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인 생명체조차도 자신의 실체와 그 특징인 자기동일성을 갖는다.
인간 또한 비록 인연들의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그의 정신의 다섯 가지 속성 속에 세계의식,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과 더불어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성질, 즉 자기동일성을 갖는다.
그에따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비록 똑같은 나는 아니지만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는 존재이다.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없는 인간은 인격이 없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의 고통은 ‘불변하는 실체’라는 언어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맹신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삶도, 미모도, 부도 영원해야만 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
포 그 자체, 나이를 먹어 쭈글쭈글해진다는 그 자체, 가난 그 자체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고,
과거에 대한 집착은 부수적인 고통의 원인일 뿐이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언어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맹신을 버린다고 해서 인간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
니다.
고통조차도 죽음으로 물질로 돌아가기 직전에 생명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물질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그의 존엄
성의 일부인 것을, 왜 이렇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모든 것을 버리려 하는 것일까?
더구나 그것을 위해 인간의 자기동일성, 혹은 자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와 철학의 뿌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정신 나간’ 철학일 뿐이다.
존재의 자기동일성이 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며, 존재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철학은 마치 온 세상의
생명의 잎사귀를 고사시키는 중성자폭탄과도 같이 삶에 대해 치명적인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뒤에서 보겠지만 인간과 세계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고 인연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강조하는 사상은 현대사회의 ‘상대주의’를 위한 최대의 근거로써 악용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이 세상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시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내세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본질론적 질문에 대하여는 답변이나 추론을 피하고, 대신 모든 것을 현실의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입
장을 지향하였다고 한다.
그런 형이상학적 문제보다는 ‘인간이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실존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깨친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기(緣起)로 설
명된다.
이 세계는 신이나 브라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존관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한다는 것
이다.
그러나 연기사상이 바로 세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한 싯다르타의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실은 그것이 바로 무아사상과 공사상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즉 삼라만상이 텅 빈 듯 아무런 실체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의 조건으로 임시적인 자리를 얻을 뿐이라는 연기사상은 필연적으로 무아사상과 공사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싯다르타의 사상은 연기사상을 중심
으로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나름대로 정교한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인 것이다.
만약에 이 세계가 아무런 실체 없이 서로의 조건으로 임시적인 자리를 얻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 뿐이라면 그런
세계에 집착하면서 고통 받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깨달음을 통해 극복해야 할 어리석음일 것이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사상체계에는 결정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는데 ‘실체’라는 개념이 빠져 있다.
불교의 <반야심경>은 ‘일체의 존재가 공이다’라는 중심사상을 토대로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
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 주체, 자성自性으로서는 파악할 길이 없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현상은 긍정하
는 반면에 실체를 부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체의 존재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고 해서 현상들을 받들고 있는 기체인 ‘실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 실체란 있을 수 없다”라거나
“일체의 존재는 모두 인연에 따라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실체가 없다”라는 불교의 제법무아 사상은 실체 부정을 위
한 최대한의, 그러나 헛된 논리 동원일 뿐이다.
아울러 불교의 <금강경>은 “무릇 있는 바 모든 현상은 허망한 것이니, 모든 현상이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와 같고 이슬이나 우레와 같음을 통찰해야 한다”라며 '실체'는 물론 '현상'까지도 부정하려 하나, 이같이 실체를 부정하는 무아사상과 연기사상, 공사상을 토대로 세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 철학의 관점에서 불교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이런 불교사상이 아직까지 동양에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무아사상과 공사상을 따라 ‘현상’과 ‘실체’의
자리를 대체한 ‘공空’을 인간이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도달해야 할 ‘가능태’로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야심경에 의하면 공은 ‘개개인의 참된 마음’이며, 그것은 걸림이 없는 마음, 공포가 없는 마음, 교만하지 않는 마음,
영원히 맑고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마음, 부정을 겪어 그것을 넘어선 대긍정의 마음이라고 하며, 여기서 평화와
통일과 자유와 해탈이 모두 유래된다고 한다.
실체로서의 자아의 자리에 공空을 대체한 ‘공사상’을 통해 ‘개개인의 참된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공사상을 통해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의 성취를 목표로 하며, 이로써 불교는 최대 화두인 ‘집착’
과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이, 즉 처음과 끝이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논리구조를 갖추게 된다.
물론 어떤 사상을 통해서든 ‘개개인의 참된 마음’, 걸림이 없는 마음, 교만하지 않는 마음, 대긍정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문구의 나열"로써 인간이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도덕의 최고원칙'의 최대 효용은 자신의 행위와 선택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자 원칙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이것이
과연 도덕의 최고원칙에 부합되는 것인지'를 항상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 있다.
절대적 가치기준인 ‘도덕의 최고원칙’의 도움 없이 공사상이 설정하는 '가능태'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쉴새 없이 격랑
에 시달리는 바다 위의 배가 나침판 없이 목적지를 찾아가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도덕의 최고원칙’ 또한 자신의 현상과 자신의 실체인 자아를 끊임없이 통일적으로 연결해주는 반성적 자기
의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위력을 발휘한다.
‘실존의 변증법’에 의하면 자신의 실체를 부정할 뿐 아니라 심지어 현상을 부정하는 철학으로써는 자신의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시도는 자신의 현상을 통해 자기의식을 형성하는 매개적인 자기의식과 자기 정신의 세계의식과 자기의
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되돌아보며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현상을 바로잡는 반성적 자기
의식의 '내면의 힘'을 원천적으로 소멸시킨다.
그것은 불교적 ‘관조’를 통한 해탈의 시도일 뿐이다.
‘실존의 변증법’이 인간의 본질에 입각한 실존에 이르는 길인 한, 자신의 본질인 정신적 실체와 도덕의 최고원칙을
토대로 주위의 생명과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병행하지 않는 불교
적 관조만으로는 실존의 상태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에따라 평생 ‘옴마니반메홈~’을 외우며 온 세상에 부처님의 자비가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티벳불교를 비롯하여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지향하는 여러 불교사상이 점차 발전하게 된다.
불교의 핵심은 ‘우주의 본체는 마음이다’라고 요약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힌두교에서 보는 바와 같은 ‘존재의 층구조상의 문제’이다.
‘마음’은 인간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뿐, 물질이나 다른 생명들의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은 ‘우주’의 본체가 될 수 없다.
‘마음’은 만능이 아니며, 인간의 마음대로 세상만물을 재단할 순 없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정립하는 가운데 실존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의 ‘마음’은 자신과 세계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의 생명력과 우주의 생명력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불교의 최대 발명품인 ‘공’이나 ‘마음’은 세상의 모든 현상과 실체를 공한 것으로써 부정하고 마음을 텅 비움으로써
세상이나 현세에 대한 인간의 ‘고통’을 내면화하고, 감사와 축복의 대상이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모든 생명의 순간
들을 ‘집착’으로 규정하면서 ‘무화無化’시키는데 기여할 뿐이다.
따라서 불교의 공사상은 ‘현상’과 ‘실체’를 인정하고 ‘생명의 현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사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불교에 대한 실존적 문제의식
불교의 또 다른 측면인 윤회사상은 불교의 고향인 인도의 힌두교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어리석은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즉 밝음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태어남을 반복하는 윤회에 빠지게 된다.
왜 윤회가 반복되는가? 그것은 인간이 업을 짓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업은 쉽게 말해 행위의 결과 또는 흔적 같은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행한 행위의 결과에 따라 다음 생애를 규정
받는다. 풀이나 나무는 물론 개나 돼지로 태어날 수도 있고 귀족이나 왕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현세의 탄생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에 내가 지은 업이다.
문제는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이다.
윤회는 인도의 고유한 관념이지만 불교는 윤회를 좀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
윤회가 반복되는 원인은 사실상 개인의 행위의 결과 즉 업이 아니라 무명 즉 어리석음에 있다.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보지 못하고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진정한 모습도 바라보지 못한다.
욕망에서 벗어났을 때 인간은 자기 삶이 왜 윤회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이 현재의 생활에서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책무를 자각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문제의
근원으로 들어가 자신과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의하면 본능적 감각령으로써 눈앞의 감각의 현재를 사는 즉자존재인 다른 생명들과 정신적
실체로써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를 조망하며 자신의 현재를 조절하는 인간과는 까마득한 거리에 있다.
인간이 풀이나 나무는 물론 개나 돼지로 태어날 수도 있고 귀족이나 왕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불교의 윤회사상은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이 다른 생명들과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던 고대적 사유의 흔적일 뿐이다.
불교는 인간이 ‘욕망’에서 벗어났을 때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진정한 모습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자기 삶이 왜 윤회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지금까지 생명이 왜 윤회하는지, 아니 실제로 윤회하는지 밝혀낸 사람은 하나도 없다.
윤회사상은 결코 현대과학의 '검증가능성'이나 '재현가능성'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며, 힌두교나 불교의 독단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동안 수많은 승려들이 경전공부와 참선수행에 매달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교의 교리는 난해하기 짝이
없다.
물론 붓다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철학을 했다. 그러나 붓다가 자기도 모르게 인도사상으로부터 물려받
은 윤회사상은 사람들이 내세를 중시할 뿐 현세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만들었다.
현세는 행위의 결과를 통해서든 깨달음을 통해서든 내세에 더 나은 생명으로의 환생이나 윤회로부터의 탈피를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욕망을 벗어나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과거에 ‘생존의 역사’를 살면서, 그리고 현대에 ‘보다
많은 물질’을 최우선 가치이자 절대선으로 추구하는 물질문명 속에서 살면서 ‘욕망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근본
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면서 욕망의 노예상태를 벗어난다는 것은 '어법상' 이미 모순이며 위선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물질’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절대적 의미와 목적을 두는 생명중심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비
로소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명중심적 세계관에서 발견되는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현세가 내세에 윤회로부터의 탈피를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로 ‘현재의 생명’이 절대적 의미와 목적을 획득한다.
언뜻 보면 윤회사상은 자기 삶에 대해 책임지고 스스로 윤리적인 결단을 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다음 생애를 결정
하기 때문에 인간을 실천적이고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로 만들 가능성이 높은 사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윤회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세의 고통을 욕망과 집착의 산물로, 따라서 '내 탓'으로 생각하게 하면서 현세의 어
떤 고통도 인내하게 만들고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내면적인 수행에 전념하게 만듦으로써 계급사회의
안정을 위한 최고의 이데올로기로써 역할하게 된다.
그것이 고대의 동양사회에서 싯다르타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왕실을 비롯한 계급 상층부의 전폭적인
비호 하에 불교가 빠른 속도로 확산된 근본 원인이었다.
니체는 “어떤 난해한 사상체계의 핵심을 이해하는 지혜로운 방법은 ‘그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가’를 이해하는 것
이다”라고 주장했다.
니체는 그것을 ‘권력의지’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 사상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가 불교의 난해한 사상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왜 저런 주장을 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상의 허망함과 실체의 무의미를 주장하면서 ‘업’을 강조할수록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현실 모순에 대한 사
람들의 문제의식이 사라진다.
‘집착의 고통으로부터의 해탈과 자유’를 추구했던 불교는 결코 이런 결과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욕망과 집착으로부터의 해탈을 중시하는 불교의 긍정적인 면은 살려야 한다.
그러나 욕망과 집착의 극복을 위해 자아를 부정하는 무아사상이나 공사상, 혹은 연기사상이나 윤회사상을 내세운
불교의 해법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철학적으로, 따라서 실존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니체의 통찰으로부터 자체의 사상체계 속에 숨겨진 자폐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 즉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존귀하다고 말했다는
대목과 ‘팔정도’에서 불교의 유의미한 통찰을 읽어낼 수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선언은 싯다르타가 출생과 함께 신분과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믿던 시대에 하늘 아래 땅
위에 그 어떤 것보다도 오직 나 자신만이 운명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선언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불교가 시작된 바탕에 깔린 인간중심주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서, 당시 주류 계급사회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넘어 우주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절대적 존재인 인간존재에 대한 통찰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리고 불교의 ‘팔정도’는 붓다가 집착의 소멸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바른 방법으로 제시한 바른 마음, 바른 행동,
바른 생활방식, 바른 노력, 바른 마음가짐, 바른 마음 집중, 바른 생각, 바른 견해를 말한다.
붓다가 가르친 고통의 원인과 해법, 그리고 사상체계의 옳고 그름을 떠나 팔정도의 계율만으로도 이후 승려들을
욕망에서 벗어나 참된 삶의 방향으로 이끄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현상을 통해 매개적으로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을 형성하는 존재’라는 철학의 성
과를 통해 볼 때, 불교의 금욕과 참선수행보다는 바른 마음, 바른 행동, 바른 생활방식 등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관
계를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반대의 방향으로 현상하도록 노력하여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의식을 올바로
정립할 때, 마침내 인류의 영원한 과제였던 욕망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붓다가 제시한 팔정도는 ‘인간을 실존으로 인도하는 지혜’인 실존의 변증법과 기본적으로 합치한다.
욕망의 세계인 속세에서 벗어나 평생을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 고통 속에 정진하는 승려들의 삶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아와 실체를 부정하는 무아사상과 공사상, 윤회사상에 매달리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방향이다. 그것은 존재의 생명력을 해친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현세가 본래의 가치와 목적, 생명력을 회복해야 한다.
"생명의 기준점이 물질이란 것을 감안하면 고통조차 아직 생명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는 이상
의 문제의식이, 깨달음을 위해 치열한 자기희생의 길을 걷고 있는 승려들에게 건강한 자극이 되길 바란다.
변화에 대한 이해와 중국불교의 공사상
‘변화’ 속의 본질과 실체에 대한 이해의 혼란은 동서양의 모든 사조에 공통적인 것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근원을 ‘집착’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세상과 인생을 집착할만한 실체가 없는 허
무한 것임을 주장하는 무아사상과 공사상의 설파에 주력하기 때문에, 공사상을 토대로 ‘변화’를 설명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매우 난해하여 아무리 들여다봐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잘못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만물을 낳는 근원인 브라흐만이 있는 반면에 만물 안에는 외적인 변화에 관계없이 언제나 영
원히 존재하는 참된 존재로서의 아뜨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붓다는 참된 존재인 아뜨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현상의 배후에 영혼이나 자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사상 또는 공사상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붓다의 사상은 중국 내의 지적 기반이 완숙해진 시점에 중국에 전래되었고 그 지적 기반 위에서 중국의 토
착사상과 결합하여 인도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로 성장하였다.
“중국의 노장사상은 불교와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인도불교는 노장사상을 교두보로 삼아 중국에 진출하게 되었다.
도가는 유가가 주장하는 사회제도와 도덕원리를 부정하는 한편 유와 무에 관한 논쟁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세계와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벗어날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도가의 사유와 언어는 좋은 교두보가 된 것이다.
현학玄學은 도가사상에 뿌리를 둔 위진 남북조시대의 철학사조인데 유가와 도가의 절충적 사유를 시도했다. 현학玄學에서 현玄은 <도덕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 눈에 보이고 구별이 가능한 현상계 밖의 근원적인 본질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당시 현학자들은 유有로 대표되는 현상세계와 그 ‘현상세계의 근원’인 무無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었다. 이들의 유무논쟁은 현상세계와 그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토론의 맥락은 모든 존재가 공하다고 보는 불교의 세계관과 연결된다. 당시에 전해진 불교의 핵심이 바로 <반야경>에 근거한 공空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야경에서 말하는 공空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 나아가서 형이상학적 본체로서의 무는 더구나 아니다.
경전의 말을 빌리자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 즉 유무의 대립을 넘어선 상태에 가깝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실은 비어있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 공이라는 가상적 개념을 붙인 것이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란 말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세계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아니다.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생성 변화의 과정에 있다. 지금 있는 듯하지만 언제든 없어질 수 있다.
현상의 한 면만 잘라서 본다면 유와 무를 말할 수 있겠지만 현상세계의 전체 모습을 통찰한다면 우리는 논리적
으로 유와 무를 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계는 유라고도 무라고도 할 수 없다.
사물은 항상 유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무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공空이다.”
현상세계와 그것의 근원에 관한 형이상학적 탐구를 다룰 때 중심이 되는 개념은 ‘본질’이 아닌 ‘실체’이다.
왜냐하면 본질은 ‘어떤 존재의 불변하는 공통성’으로 정의되는 반면에 실체는 ‘현상의 근원이자 기체’로써 정의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생명에 대해서만 '실체'를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생명은 항상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성 변화의 과정에 있는 현상세계 존재들의 원인이자
기체에서 어떤 고정된 실체를 찾으려 할 때는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그에따라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지금 있는 듯 하지만 언제든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유라고도 무라고도 말할
수 없다며 세계의 상태를 공空이라 부른다.
그러나 현상세계 존재들의 생성 변화를 보면서 “변화와 항존성과의 관계”를 ‘본질’과 ‘실체’에 의해 설명하려 하지
않고, 본질과 실체를 모두 부정하면서 지금 있는 듯하지만 언제든 없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세계의 상태를 공空으
로 파악하는 것은 불교만의 독특한 사상체계이다.
현상을 현상으로써만 포착하면 지금 있는 듯하면서도 언제든 없어질 수 있는 공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현상’을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와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세상은 결코 공하지 않고 ‘실체 중심적’으로 보이게 된다. “생명으
로서 현상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받들고 있는 기체”가 바로 ‘실체’인 것이다.
현상세계의 전체 모습은 유와 무를 가를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그 현상에 통일성을 부여
하는 ‘생명의 실체’에 의해 일관되게 뒷받침되어 있다.
따라서 생명세계의 변화는 유무의 대립이나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공의 상태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고 생명
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의 현상과정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즉 백합이나 호랑이의 생성변화는 백합의 실체와 호랑이의 실체가 일관되게 백합과 호랑이로서 자신의 본질을 실
현하는 과정인 것이다.
한편 중국 후진시대 승조는 유와 무의 대립을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여 공에 대한 이해를 높인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공사상은 어떤 것이었는지 한번 살펴보자.
“그는 유와 무를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결국 공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아 유무 양극단을 넘어서서
‘모든 것이 참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는 이론을 내놓는다. 이를 부진공론不眞空論이라 한다.
모든 것은 생성 소멸하는 변화의 과정에 있는, 단지 텅 빈 것일 뿐이다.
무나 유에 집착하면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닌 채 서로 기대어 있는 이 세계를 바로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언어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어와 대상은 서로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사물의 본질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일 뿐 그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는데 언어에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게 되면 우리는 현상세계에 집착하게 된다.
공空도 마찬가지다. 공은 우리가 붙인 임시적인 명칭일 뿐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이란 말에 해당하는 어떤 본체가 있다면 이미 그것은 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는 현상세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세계에 대한 경험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격의格依 불교에 대한 승조의 비판은 현상세계뿐 아니라 공까지도 실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공은 언어로 설명되는 순간 현상세계에 들어오게 되므로 인식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공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다.
언어에 의존하는 일반적인 인식으로 포착하려 할 경우 공은 굳어진 개념으로 떨어지게 된다.”
중국의 격의불교는 '도를' 모든 사물의 근원이자 근거로 여기는 노장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현상세계의 근원으로 도를 대체한 '무'의 개념을 통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난해하기만 할 뿐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유무의
대립을 넘어선' 불교에서 설명하는 '공'의 개념에 도달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
현상세계의 근원이라는 '무'의 개념 속에 이미 '실체'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승조는 ‘모든 것이 참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모든 것은 생성 소멸하는 변화의
과정에 있는, 단지 텅 빈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는 실체가 없이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닌 채 단지 서로 기대어 있는 것일 뿐이며, 세계를 실체로서 생각하는 것
은 실체가 없는 것들을 실체처럼 우리가 언어로써 부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착각이자 집착일 뿐이라는 것이다.
싯다르타의 무아사상과 연기사상에 가장 충실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공사상 자체도 어떤 실체가 아니라며 자신의 이론을 신비화한다.
그러나 승조의 공사상 또한 ‘현상세계의 근원’에 대해 ‘실체개념’이 아닌 ‘본질개념’으로 접근함으로써 발생한 혼란에
다름 아니다.
생성 소멸하는 변화의 과정에 있는 세상 사물들을 ‘불변하는 공통성’이라는 본질개념으로 접근하면 아무 것도 잡히
지 않는 단지 ‘공空’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아무 근거 없이 그냥 생성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근거
를 두고 생성 변화한다.
생명들의 현상을 실체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식물은 식물답게, 동물은 동물답게, 인간은 인간답게 현상하고 있
는 것이다.
생명의 특징은 어떤 ‘불변하는 공통성’이 아니라 ‘일관성’과 ‘통일성’이다. 생명이 생성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그 생명
체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를 이루는 ‘실체’의 중요한 특징이 일관성과
통일성에 있기 때문이다.
‘운동하고 변화하는 현상들 속에 과연 항존적이자 불변하는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하는가’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모두의 과제였다.
세상 사물들이 생성소멸의 변화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해서 참되지 않거나 텅 빈 것이 아니다.
아직도 철학의 방황은 계속되고 있다. 세계의 운동과 변화의 현상들 속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뒷받침하는 실체에
주목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항존적이자 불변하는 궁극적인 어떤 실재를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실체의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모든 것은 생성 소멸하는 변화의 과정에 있지만 단지 텅 빈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불교의 공사상은 ‘불변하는 실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그 어느 철학보다 깊이 통찰하고자 노력했으나,
세상의 생성 변화에서 ‘불변하는 실체’를 찾으려 하지 않고 ‘생명의 현상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실
체’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경우 세상은 텅 빈 ‘공空’이 아니라, 우리는 오히려 ‘실체’로 가득한 세상을 보게 된다.
생명의 생성 소멸은 단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 아니라 ‘생명의 실체’가 자신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즉 참나무의 모든 생명과정에는 그 원인이자 기체로서 '참나무의 본질'인 '참나무다움'을 뒷받침하는 '참나무의 실체'가 숨어 있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엄연한 생명의 주권을 갖고 끊임없이 실체로서 자신의 통일성을 완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저 신비로운 생명들을 보면서 ‘참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라고 주장한 승조의 해석에는 생명에 대한 겸허함이 결여
되어 있다.
세상의 존재들은 '참된 실체'로서 서로 기대어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세계’이다.
화엄의 공사상과 개체의 존엄성에 대하여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에서 자리를 잡고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의 이념은 개인적인 수행을 통해 자신의 해탈을 목표로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보편적 구원을
종교적 수행의 목표로 여긴 대승불교였다.
대승불교는 복잡한 교리 연구에 몰두하여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초기의 엘리트 중심적이고 보수적인 불교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일종의 교단혁신운동으로, 개인적인 성향에 반대하여 이타적인 활동을 통해 대중을 구원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대승불교에 이르러 불교는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은 ‘집착’이라고 주장하며 탐욕을 버림으로써 갈애를 소멸
시켜 집착이 없는 상태, 즉 열반涅槃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싯다르타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의 모든 욕구와 집착을 소멸시킨 인간은 더 이상 바람직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실존을 위해서는 ‘어떤 욕구이고 어떤 집착인가’를 분별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한 욕구나 진실과 도덕, 정의를 향한 욕구를 긍정해야 한다.
대승불교에 이르러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자비심을 가지고 위대한 이타(利他)의 완성을 지향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의 깨달음을 위해서 힘쓰는 수행자인 ‘보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설정하게 된다.
대승불교에서는 자력이 아니라 타력의 구원을 긍정했기 때문에 부처나 보살의 도움을 통해 개인이 쉽게 오를 수 없
는 깨달음의 경지를 오를 수 있다고 믿었다.
실존의 변증법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자비심을 가지고 이타(利他)의 완성을 지향하는 대승불교의 ‘보살상’은 인간의 실존을
향한 훌륭한 계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대승불교 또한 ‘공사상’에 토대를 둔 까닭에 그것이 여전히 사상체계의 혼란의 근원이 된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잎이 커지기 시작한 불교는 수,당시대에 들어와서 꽃을 활짝 피우게 된다.
‘중국의 불교문화’ 하면 당나라가 떠오를 정도로 당나라는 불교의 시대였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경전의 연구와 이해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론 불교는 화엄종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화엄종은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깨우침을 얻었을 때의 궁극적이고 체험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화엄경>을 가장 중
요한 경전으로 보고 사상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종파이다.
화엄종에 이르러 우리는 불교의 ‘공사상’에 기초한 세계관과 가치관, 인간관이 어디까지 전개될 수 있는지 그 극치
를 보게 된다.
그럼 화엄종의 체계를 세웠던 승려 법장이 당대 독실한 불교도였던 측천무후에게 강의한 내용을 중심으로 화엄경
에 대해 살펴보자.
법장은 ‘금으로 만든 사자상’과 ‘금’과의 관계를 통해 ‘사법계’와 ‘이법계’의 범주를 설명한다.
사법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인 세계이고, ‘이법계’는 불교적 진리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법계는 절대 평등한 경지나 만물의 공통적인 본질의 세계, 즉 공의 세계다.
우리는 금사자상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세계, 인식이 가능한 현상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금사자상은 금덩어
리가 모습을 바꾼 것일 뿐으로, 금사자상의 독자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금사자상의 어떤 부분도 금이라는 본질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은 눈, 귀, 갈기 등 금사자상의 모든 부분에 참여하고 있다. 금과 금사자상은 서로 포함하면서 동시에 존재한다.
현상세계는 공의 세계인 리理가 드러난 세계다.
하지만 리理의 세계는 현상세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주의 모습을 화엄종에서는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라고 표현한다.
법장은 또한 우주 전체의 유기적 통일을 설명하기 위해 보석이 달린 그물망의 예를 든다.
힌두교 신중의 하나인 인드라가 살고 있는 궁전에는 거대한 그물망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이 그물에는 그물코 하나하나마다 보석이 달려 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는 하나로 표현되고 하나는
전체를 품고 있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다.
만약에 보석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결코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보석이 빛나는 이유는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영역은 전체와 부분이 유기체적이며 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바다도 파도도 실체가 아니며 바다 없는 파도, 파도 없는 바다가 성립하지 않는다.
먼지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있는 것이다.
일과 다는 시간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을 작은 단위로 나누지만 화엄의 세계에서 시간은 한 순간
에 영원이 들어와 있고 영원이 곧 한 순간이다. 과거도 미래도 이미 현재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한 순간의 마음에 이미 백천대겁 즉 무한한 시간이 들어와 있다.
이미 한 순간이라는 것 자체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무한한 시간 또한 실체가 없다.
따라서 작은 것과 큰 것은 그대로 통해 있다. 이처럼 우주 안의 어떤 것도 겹겹이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적 전체상
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과 갈등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이런 세계관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유기체 밖에 존재할 수 없으며 독자적인 지위를 얻을 수 없다.
화엄사상은 우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형적인 관계론적 사고를 보여준다.”
불교의 금강경은 현상도 실체도 부정하는 입장이고, 반야심경은 현상을 긍정하면서도 ‘실체는 파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격의불교나 승조 또한 현상세계인 유를 긍정하는 가운데 그 근원인 무와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다. 모두 불교의 무아사상과 공사상에 충실한 세계관이다.
그런데 화엄경은 무아사상과 공사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현상계’만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면서 그 원인이자 기
체인 실체를 아예 외면하기에 이른다.
<화엄경>에서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불성’의 현현으로 보면서 현상계 밖에 따로 진리의 세계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존재의 근원을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계’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면서 현상계의 존재들을
부분과 전체가 서로 통합되어 있는 관계로써 설명한다.
<화엄경>의 ‘법계연기설’은 현상 세계의 개개의 사물들이 겉으로는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개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다 같이 서로 원인이 되는 무한한 연관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그에따라 화엄사상은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여서 우주 만물이 서로 원융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루
는 세계관을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생성 변화하는 현상세계는 금사자상과 금과의 관계나 파도와 바다의 관계로써 비유될 수 없다.
인간이 궁금해 하는 세상의 의미 있는 생성 변화의 중심은 생명현상인데, 생명현상이 아닌 금사자상이나 파도의
비유를 통해 존재 전반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물질의 비유를 통해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논리적 비약을 초래한다.
법장이 우주 전체의 유기적 통일을 설명하기 위한 ‘보석이 달린 인드라의 그물망’의 비유는 경탄을 자아내지만,
현실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현상계에서 존재들의 ‘관계’는 거대한 그물망 속의 그물코처럼 그렇게 필연적이지 않고,
대부분 우연적이다.
여기서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현상계 중에 생명현상의 경우 그것이 단지 그 생명체 고유의 주권과 실체에 의해 뒷받침되는 ‘생명현상’인 한 “전체는 결코 하나로 표현될 수 없고 하나는 전체를 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생명의 주권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표현되거나 대표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현상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 현상을 가능케 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체를 무시할 경우
물질과 생명, 인간이라는 독특한 현상을 뒷받침하는 독특한 ‘실체’를 간과하게 되고 그 결과 물질과 생명, 인간의
구분이 사라지고 만물을 다 똑 같은 ‘현상’으로 환원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는 세계 속 물질과 생명, 인간 간의 ‘존재의 층구조’가 완전히 무시되고, 인간도 물질이나 동물과 똑같은 자격
으로 단순히 일과 다로써 유기체적 세계관 속에 포함되며, 이런 사상체계는 엄청난 전체주의적 논리를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과 다의 관계를 ‘화엄의 세계에서 시간은 한 순간에 영원이 들어와 있고 영원이 곧 한 순간이다’
라고 설명한 대목 또한 경탄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과거도 미래도 이미 현재에 들어와 있다’는 시간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최고의 통찰을 당나라 시대의 화엄사상
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인간은 ‘과거에 근거한 현재’와 ‘미래에 근거한 현재’로써 현재의 의식 속에서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최고로 실존하는 인간의 삼차원적 시간성 속에서 영원의 시간은 순간의 시간 속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화엄사상은 ‘한 순간의 마음에 이미 백천대겁 즉 무한한 시간이 들어와 있다’는 최고의 통찰을 엉뚱하게도
‘한 순간이라는 것 자체도, 무한한 시간도 실체가 없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인간의 의식과 물질의 시간이나 동물의 의식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간과는 달리 물질의 시간이나 동물의 의식 속에서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끊임없이 과거
로 소멸되는 현재는 실체가 없고 그만큼 ‘공’한 것일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시의 고대적 사유에서 인간의 시간과 물질이나 동물의 시간의 구분을 기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무리한 일이
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물질과 동식물을 설명하는 원리로써 인간을 설명하려 하는, ‘존재의 층구조’상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전체는 하나로 표현되고 하나는 전체를 품고 있어서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로 표현되는
화엄종의 세계관이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제를 위하여!”라는 기치로 전체주의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뒷받침하는데 활용되어왔다.
그 근본 원인은 화엄사상이 이처럼 개개의 생명현상을 뒷받침하는 ‘실체’의 주권과 존엄성을 부정하는 공사상을 핵
심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 하나하나의 실체와 존엄성이 부인될 때 남는 것은 ‘전체의 목적을 위한 개체’와 ‘개인의 수단화’뿐이다.
따라서 화엄사상의 근본적인 문제는 "생명현상과 실체와의 관계"를 간과한 것에 기인한다.
생명에는 하나의 생명현상에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가침의 주권을 가진 하나의 ‘실체’가 대응한다.
오늘 나의 생명현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아라는 나의 주권으로서의 실체가 대응한다. 다른 동식물들의 생명현상
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생명의 세계’에서는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라는 화엄의 세계관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같은 정교한 전체주의적 논리에 대항논리를 갖추지 못한 채 속절없이 희생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전체를 대표하는 자는 좀처럼 어떤 하나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
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이라는 구호를 내세울 때 그 개개의 구성원들이 내
놓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이지만 그 전체를 대표하는 자가 내놓는 것은 ‘전체의 목적’이라는 보편이해를 내세워 사
적 이해를 취하려는 ‘이데올로기’뿐이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자라면 애초에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슬로건을 내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라면 “모든 개체가 고유의 빛과 존엄성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전체의 목적과 이해
에 부합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고유의 실체에 의해 뒷받침되는 고유의 주권과 존엄성을 가지며, 그렇게 이루어진 ‘하나’는 결코 ‘전체’
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개체와 개인이 주권을 가진 생명과 인간으로서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앞으로도 전체주의 논리
에 대한 인간의 휘둘림은 계속될 것이다.
화엄사상은 ‘생명의 실체’를 부정하는 공사상에 토대를 둔 사상체계가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불교계는 싯다르타가 인류의 고통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한 ‘공사상’이, 동시에 세상의 모든 개별 존재들에 대한 실체
와 존엄성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허무하고 헛된 것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인류가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이데올로
기에 저항력을 갖는 것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공사상과 선종의 딜레마
경전의 자구에 얽매이지 않은 채 깨달음을 구하는 불교의 선종은 석가모니가 설법을 끝낸 뒤 사람들 앞에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제자 중에 마하가섭만이 가만히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석가모니가 마하가섭에게 문자와 경전
에 묶이지 않는 진정한 깨달음의 비법을 전수한 것이 그 시초라고 전해진다.
이것이 이어지고 이어져 달마에게 전달되었고 달마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에서 선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수행을 했다는 달마는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인내를 바탕으로 한 각고의 수행이 무엇인지
를 각인시켰다.
선종, 즉 선불교는 인도 선禪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중국에서 새롭게 열매가 형성되었다.
선종이 형성되고 발전한 것은 당나라와 송나라 때였으며, 선종이 성립된 이후 동아시아 전체가 선종의 영향력 안에 들어왔다.
한국 불교 역시 단적으로 선불교, 즉 선종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불교 종단인 조계종도 선종 계열의 종단이며, 조계종을 연 지눌도 선사禪師였다.
불교를 새롭게 혁신함으로써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끼쳤던 선종은 현대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새로운 가르침으로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주요 사상이 되었다.
선종에 이르러 불교는 무아사상과 공사상을 토대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복잡다단한 세계관 논쟁에서 벗어나, 탐욕을 버림으로써 갈애를 소멸시켜 집착이 없는 상태인 즉 열반의 아라한에 도달하려던 불교의 원래 주제로 되돌아간다.
달마는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참선을 통해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혹은 청정한 본심을 체득하는 깨달
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자신의 청정한 본심을 깨달아 집착이 없는 아라한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방향성인 것이다.
달마가 전한 가르침이 중국에서 꽃을 피운 것은 송대 선종의 5대 조사祖師 홍인의 제자였던 혜능과 신수 대에 이르러
서였다.
홍인의 선법은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불심을 확인하여 자신의 청정한 마음을 관조하면서 잘 지키는 수심
守心에 있었다.
홍인이 죽음을 앞두고 법통을 물려주기 위해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가 깨달은 바를 짧은 시로 지어보라”고 하자 신수
가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으니 수시로 부지런히 닦아 먼지가 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라는 시를 써 올렸고,
이에 대해 혜능이 “밝은 거울 또한 실체가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라는 시를 써 올리자, 홍인이 혜능이야
말로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혜능에게 법통을 물려줬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신수가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자아라는 실체를 맑은 거울과 같이 유지하는 것을 수양의 목표로 내세운 반면에, 혜능
은 불교의 무아사상과 공사상에 충실하게 “자아라는 실체가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끼겠느냐?”라고 신수를 반박한
것이다.
여기서 이후 선종의 큰 흐름이 좌우된다.
“단번에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선종의 돈오頓悟는 본래 깨달음은 시간과 관계없다는 의미다.
인간은 누구나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미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과감하고 극단적인 선언이 바로 돈오다.
평생을 두고 경전을 공부하거나 뼈를 깎는 수행을 하지 않아도 자기의 본성을 보고 그 안에서 불성을 찾을 수
있다.
돈오는 자기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바로 보는 과정, 즉 견성見性일 뿐이다.
이런 바탕에서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혜능의 선언이 성립한다.
결국 혜능의 가르침은 나를 벗어난 고결한 진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계, 나 자신에게서 문제의 근원을 발견하려는 태도는 ‘사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통찰에서 비롯된다.
깨달을 것이 없다는 사실까지 가야 진리에 발을 들이는 셈이 된다.
우리의 본성은 더 이상 닦을 것도 새롭게 찾을 것도 없다. 일상 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깨달음이란 애초에 존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집착과 갈애를 소멸시켜 마침내 고통이 사라진 깨달음과 자기 구원의 열반에 이를 것인가?’라는 불교의 과제
에 대해, 선종은 경전에 의존하지 않는 깨달음을 통해 자기의 본성 안에서 불성을 찾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선종은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참선수행으로 자신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교경전을 통해 세상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던 격물치지의 성리학에 반대하여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
良知’를 강조하는 양명학과 궤를 같이 하는 입장이라 하겠다.
선종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궁극적인 깨달음은 경전 안에 있지 않으므로 문자에 기대서는 안되며,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이 선언의 배후에는 당시 불교계에 있던 다른 주류와의 대결, 즉 대승불교의 복잡다단할 정도로 치밀하고 복잡한
이론에 치우친 경전을 파고드는 화엄종을 위시한 이론적 종파에 대한 반발이 있다.
확실히 선종에 이르러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화엄경에서와 같은 질릴 정도의 두꺼운 경전으로 무아사상이나 연기
사상, 윤회사상, 공사상을 설파하면서 현상과 실체와의 관계에서 공을 논하는 사상체계가 없다.
선종에서는 진리는 매일 매일 부딪치는 이 일상의 영역 밖에, 즉 삶의 자리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며, 문자를
벗어나 경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별도의 수행단계 없이 곧바로 자기 마음을 가리키는 것만으로도 본성의 깨끗함
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마음은 그 자체로 고착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이므로, 변화
하는 마음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그 변화과정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때 우리는 자기의 본성이 근본부터 깨끗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혜능에 의해 설립된 남종선은 불성은 모두 자신의 본성 속에 갖추어져 있으나 중생이 미혹하여 밖에서 찾고 있으
므로 자신 속에 있는 불성에 귀의하는 방법으로 형식적인 일체의 형상과 의례를 배척하고 오로지 자신에게 서약
하고 귀의하는 것을 수행의 기본으로 하였다.
이후 전개된 조사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평범하면서도 소탈한 시골풍의 토착적인 불교로서, 평범하고 예사로운 일상의 마음이자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이고 일체의 차별과 분별과 조작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인 ‘평상심’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평상심’이 곧 도(道)이고 그 마음이 곧 부처이므로, 도(道)는 따로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오염시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설하였다.
그러나 선종 또한 기본적으로 불교의 핵심사상인 무아사상, 연기사상, 공사상을 토대로 해탈을 도모하는 까닭에
붓다의 무아사상과 ‘자기의 본성 안의 불성’을 결합하고자 한다.
결국 선종의 불성은 무아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아라는 실체를 부정하는 신비한 본성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아라는 실체를 부정한 바탕 위에서 어떤 불성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일까?
자아라는 실체를 부정하는 바탕 위에서 성립하는 불성은 인간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알쏭달쏭한 선종의 난해함이 근원한다.
교종의 반야심경은 복잡한 사상체계를 따라서 인간이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도달해야 할 ‘가능태’로서의 ‘공空’을
개개인의 참된 마음, 부정을 넘어선 ‘대긍정의 마음’으로 설정하는 반면에 선종은 불교가 경전의 자구에 막혀 그
본래의 유연성과 구체성을 잃는 데에 대해 반발하면서 개별적 인간과 현실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이 긍정에서 파격
의 자유와 창조적 정신을 찾는 사상이다.
확실히 선종에 이르러 경전을 떠난 현실에서 어떻게 집착을 버리고 열반의 자기 구원과 나아가 중생의 교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한 선사들의 실존적 노력이 두드러진다.
물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흔들림 없는 평상심의 도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자아라는 실체를 부정한 상태에서 이데올로기에 겹겹이 둘러싸인 현실의 변화과정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면
서 어떻게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해탈하여 깨끗한 불성과 평상심을 유지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선종에는 근본적인 논리적 비약이 있다. 무아사상과 공사상을 바탕에 두고 유연성과 구체성, 파격의 자유와 창조적
정신을 내세우는 선종의 주장에서 ‘세상의 모든 변화와 하나가 되기 위해 마음을 텅 비운다’는 장자의 심재心齋와 상대주의가 떠오른다.
선종 가운데서도 가장 파격을 보여주는 종파라고 불리는 임제종의 핵심적 가르침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살불살조의 표어에 잘 드러나 있다고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선학禪學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임제종에 의하면 이런 자유를 얻게 되면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가 주인으로 설 수 있으며, 이런 상태에 이르러야 인
간은 최대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구속을 넘어선 자유로운 인간을 ‘무위진인’이라 한다.
결국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은 ‘자기와 세계에 대한 집착을 놓고’ ‘스스로가 자신을 놓아주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인간의 자아는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정신적 실체이다.
그런데 불교의 무아사상과 공사상을 통해 실체를 부정할 때, 그리하여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뒷받침하는 자아
라는 실체를 부정하면서 파격의 자유를 주장할 때 거기에 남는 것은 ‘상대주의’ 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주체성과 가치의식을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뒷받침하는 ‘실체로서의 자아
를 부정하면서 무아사상이나 공사상에 기초한 임제종의 자유는 ‘상대주의’를 위한 최대한의 정교한 논리체계로 악
용될 수 있다.
무아사상과 공사상을 버리지 않는 한 선종의 사상체계가 갖는 이같은 위험성은 근본적인 것이며, 선종은 이 딜레마
를 해결해야 한다.
인간이 자유를 얻으면서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가 주인으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와 세계에 대한 집착을 놓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을 놓아주는’ ‘넋을 놓는 자유’여서는 안되며, ‘자아의 일관성과 통일성’ 속에서 ‘도덕의 최고원칙’을 토대로 자신을 놓아주는 ‘주체성의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임제종은 자신의 용감한 표어에 입각하여 부처의 무아사상과 공사상, 연기사상 자체에 대하여 치열한 문제
의식과 대결의식을 가져야 한다.
만약 혜능의 새로운 불교운동이 아니었다면 불교는 동아시아에서 현재와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을 거라고 한다.
많은 현대인들이 선의 가르침이 자유와 해방, 창조적 정신과 관계 깊다고 생각하면서 선종으로부터 종교적 영적
예술적 영감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선종의 영향력만큼 동아시아 사람들 또한 상대주의에 경도될 위험을 안고 있다.
바야흐로 세계는 지금 동서양 모두에서, 모든 논리와 근거를 총동원하면서 세상의 본질을 부정하고 실체를 부정하
는 사상들에 의해 ‘상대주의’의 파도가 범람하고 있다.
(태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