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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27강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말씀/눅19:41-20:18
요절/눅20: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권위 논쟁입니다. 예수님은 완악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해 자신의 권위가 무엇임을 밝힘과 동시에 그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또 이 예수님의 권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복이 주어질까요?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가까이 오셨을 때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탔다는 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역함으로 멸망당하게 될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얼마나 예루살렘을 사랑하셨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거룩한 성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인 눈이 감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루살렘 심판에 대한 예언은 40년 후,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유대인들은 AD 66년부터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기 시작했고 로마의 디도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은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쉽게 정복할 수 없었던 로마 군대는 토둔을 쌓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습니다. 결국 수십만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44절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성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45,46절을 보십시오. 이 대목은 그들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 이렇게 일 년에 세 차례 대 명절에 성전에 와서 제사해야 했습니다. 본래는 자신이 기르던 짐승을 끌고 와 제물을 드려야 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 근처 감람산에 시장을 개설해 제사할 짐승을 살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성전 안 이방인의 뜰에서 짐승을 사고팔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습니다. 성전세를 위해 환전도 해주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장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사꾼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결탁해 뇌물을 바치고 자신들은 폭리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제사와 기도가 있어야 할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성전이 이런 모습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타락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노하시고 장사하는 자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지상에서 마지막 한 주간에도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백성들도 다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죽이고자 꾀했습니다. 예수님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던 어느 날,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20:2).” 이들은 성전 업무를 맡은 기득권자들로서 예수님의 일로 인해 많은 물질적 손해와 권위에 타격을 입었으므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고발할 꼬투리를 잡고자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찌합니까? 직접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이들에게 역질문을 합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3,4)?” 예수님의 역습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늘로부터라고 한다면 왜 요한의 말을 믿지 않았느냐고 추궁받을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백성들이 다 자기들을 돌로 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며 정치판처럼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방법으로 대응해줍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같이 그가 말하는 예수님 자신의 권위도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이미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해준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를 통해 자신의 권위가 무엇인지, 또 그 권위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좋은 포도원 농장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나가 오래 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받게 된 큰 은혜에 농부들은 심히 기뻤을 것입니다. 더욱이 주인이 타국에 나가 오래 있었다는 것은 옆에서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농부들에게 전적으로 자율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부담 없이 마음껏 자율적으로 일하게 한 것은 농부들을 신뢰하고 사랑한 주인의 큰 배려였습니다. 구약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또 여기 농부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택함 받아 포도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기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성전과 말씀을 맡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은혜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때가 되자, 주인은 농부들과 맺은 약속대로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이는 주인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주인과 농부 간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지속하여 맺으며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주인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농부들은 마땅히 주인이 보낸 종을 극진히 대접하고 감사함과 기쁨으로 세를 준비하여 주인에게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10b)” 농부들은 처음 주인의 부름을 받을 때 농장을 맡기고 일하게 해준 일방적인 은혜에 눈물로 감사하며 세를 내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농부들은 종을 몹시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당장에 악한 농부들을 해고하고 다른 농부들을 고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장사꾼은 아니었습니다. 농부들과 좋은 관계성을 맺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이 풍성한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먼저 보낸 종이 갑질하며 무례하게 했는가 의아해하며 이번에는 훈련을 많이 받은 겸손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냈습니다. 주인은 그러나 이번에도 참고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세 번째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갈수록 더 악해졌습니다. 농부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첫째, 받은바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너무나 감사하여 힘든 줄 모르고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먹고 살만하니까 “오뉴월 뙤약볕과 겨울 추위로 고생하는 동안 주인은 뭣하고 있다가 갑자기 종을 보내는 것이야!”하며 자기들이 고생한다는 생각에 은혜와 감사는 사라지고 자기 의와 보상심리가 충만해져 불평이 생겨났습니다. 주인은 해준 것 없이 요구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할 일이 없어 수치와 불안 속에 방황하던 그들을 포도원에 불러주신 주인에 대한 감사가 충만했던 그들이 어찌 이토록 교만하고 배은망덕하게 된 것일까요? 이는 주인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한량없는 은혜는 흐르는 강물에 새겨 다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고생하고 힘들었던 것만 가슴에 새겼기 때문입니다. 점차 감사하는 마음은 싹 사라지고 마음이 완악해져 조금만 건드리고 힘들어도 불평이 튀어나왔습니다.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때 사탄이 공격해 들어와 결국 사탄의 종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의 뿌리요 시작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여기서 우리는 일생 죄만 짓다가 심판받을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으로 불러주신 크신 은혜를 얼마나 쉽게 잊게 되는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를 섬기고 세월이 흐를수록, 과거에 내가 어떤 자였는데 지금 이렇게 쓰임 받고 있는가, 주님께 받은 구원과 부르심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탐심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을 일꾼으로 불러준 주인의 크신 아량과 은혜에 감사함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막상 소출이 생겨 세를 바치려 하자, 손해심정이 들고 자신의 수고의 열매로만 생각하며 세내는 것을 아까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들 마음 가운데 탐심이 생겨나자, 주인이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셨기에 포도 소출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그러자 주인과 농부들 간의 모든 질서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열매를 풍성히 맺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내 것처럼 착각하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주와 복음 역사에 헌신하는 것에 대해 손해심정을 갖게 됩니다. 주인이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한 것도 그들 마음에 생기기 쉬운 탐심을 다스리고 주인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주인과 농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탐욕은 눈을 멀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장 한가운데 벌려놓은 보석 상인의 금덩어리를 넋이 빠진 듯 쳐다보다가 갑자기 그것을 집어 들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산인해의 시장 바닥에서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재판관이 도둑에게 묻습니다. “시장에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훔칠 생각을 하였소?” 도둑이 대답합니다. “그때는 황금만 보였지,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눈을 멀게 하고 탐욕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셋째, 주인을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자율적으로 가꾸는 은혜와 특권을 받았지만 자기의 직분은 어디까지나 세로 든 청지기였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주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주인을 주인으로 공경하며 질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럴 때 주인의 포도원에서 계속 일하며 소득을 가져가는 즐거움과 은혜를 누릴 텐데 포도원을 자율적으로 열심히 가꾸다 보니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하고 주인을 가볍게 여기고 교만해졌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에 젖고 탐욕에 사로잡히고 교만에 빠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단숨에 조치하지 않고 끊임없이 종들을 보내는 주인은 어떤 분입니까? 주인은 농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농부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계약을 밥 먹듯 위반하는 그들에게 당장 진압군을 보내 쫓아내지 않고 계속 종들을 보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참고 또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하나님의 기다림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으셔서 심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찌하든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악한 죄인들을 보는 주인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어찌할까?” 안타까워합니다. 안타까움이 주인의 마음입니다. 이 안타까움은 세를 받지 못한 데서 오는 것도 아니요, 종들이 받은 억울한 대접 때문도 아닙니다. 막가파 같은 농부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멸망의 길로 가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중대 결심을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농부들의 성질이 악하고 거칠고 포악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아들을 어떻게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농부들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완악한 그들에게 보내시며 사랑하는 아들만큼은 그들이 존대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아들을 존대하기만 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이로 볼 때 주인이 원하는 것은 결코 소출 얼마가 아님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주인에 대한 공경과 사랑의 관계성임이 확증되었습니다. 사실 이들이 지금까지 종들에게 한 행동을 보면 아들에게도 좋은 행동, 존대하는 마음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아들까지 보내고자 하는 주인의 마음은 곧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나큰 모험적 사랑입니다.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나, 그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나, 독생자를 보내실 때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기대와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소망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눈먼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은 눈이 멀어 하나님의 사랑을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나 완악한 농부들은 이 하나님의 마지막 사랑과 기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너무나 배은망덕하고 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인의 아들을 죽일 생각까지 했을까요? 주인의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주인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요, 선전포고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도 점점 성장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를 아까워하는 작은 욕심에서 출발한 죄는 후에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고자 하는 죄로 발전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들까지 죽이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과 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이로써 모든 것이 그들 뜻대로 되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들은 주인의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랑을 힘이 없어 그런 줄 착각했습니다. 주인을 호구 취급했습니다. 주인은 분노하고 당장에 돌아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저 공경하지 않는 이들에게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시편 118편 22절에 기록된 말씀이 성취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모퉁이의 머릿돌은 성전의 시작이 되는 중요한 기준석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놓이지 않으면 성전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건축자들은 왜 이렇게 귀한 돌을 버렸을까요? 이는 자기들이 짓고자 하는 건물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건축자는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자기들이 짓고자 하는 건축에 맞지 않는 걸림돌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버린 돌이 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이 땅에 직접 오셨지만 죄악된 인간들은 예수님을 필요 없는 돌처럼 배척하고 버렸습니다. 그들은 결국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18).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예수님을 배척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계획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영적 성전 건축역사에 보배로운 산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신앙적 핍박으로 소아시아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4,5).”
베드로는 핍박으로 흩어져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권면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공경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보배로운 산 돌이 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지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척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돌이 되셔서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과 심판의 최종 결정권자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비유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지금 우리도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오, 나는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받고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복 받은 농부임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성실히 일하고 많은 소출을 거두었을지라도 나의 노력이나 힘, 경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포도원을 만들어주셨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골고루 내려주시고 때마다 햇빛을 주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과 사역의 열매들, 양들, 우리의 소유와 재산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무엇보다 성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영적 성전을 건축해가는 구원역사에 참여하는 은혜와 특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인지요? 만입이 있어도 다 감사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찬송23장 1절).”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영적 질서를 지키며 지속적인 관계성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준석 삼아 인생을 설계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전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심령 깊이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 위에 인생의 집을 건축하는 복된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