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을 읽다 / 안경덕
발바닥이 흔적의 꽃을 피웠다. 나는 남의 발바닥을 특별히 눈여겨보는, 아니 발바닥 관찰자로 등극했다. 오랜 기간 사암침을 맞다 보니 자연스레 그래 됐다. 불편한 부위 반대쪽에 놓는 침은 손가락, 발가락에서 팔꿈치와 무릎 아래쪽까지만 너덧 대다. 사람들은 한의원 침방에서 양말을 벗고, 마주 보는 앉은뱅이 의자에 등 기대고, 두 다리를 쭉 뻗어 발을 세우고 앉아서 침을 맞는다. 자연스럽게 앞쪽 사람들의 발바닥에 저졀로 시선이 머문다. 발이 크다, 작다, 곱다, 거칠다, 통통하다, 야위다는 개념을 넘어 발바닥의 표정을 살핀다. 천차만별의 얼굴처럼 다양하다. 삶의 꽃도 제각각이 다르게 피웠다고 할까.
신체와 발이 닮지 않았다. 몸집은 크지만 발이 작기도 하고, 키는 작지만 발은 크기도 하다. 고운 발바닥은 그만큼 각별한 관리와 대우해주었겠고, 굴곡이 심한 발바닥은 발품을 엄청나게 팔았겠다. 날마다 가꾸는 얼굴의 주름이 골 깊은 데 비한다면 발바닥이 맨드르 해 보이기도 한다.
나는 오랫동안 발 씻을 때 타일 바닥에 발바닥을 밀착 시켜 각질 제거 돌로 아프도록 문질러 댔다. 그래도 발은 아프다고 엄살 부리지 않았다. 홀대한 것에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직립의 몸을 지탱하도록 오롯이 받쳐주는 발바닥은 스스로 빛을 볼 수 없는 운명이다. 늘 체중에 짓눌리며 주인이 가자고 하는 곳엔 다 가야 한다. 끝없이 희생만 하는 셈이다. 최상의 겸손은 온갖 것을 수용하는 땅이라면, 진자리와 비탈길을 마다하지 않는 발바닥의 겸손도 땅과 버금가지 않겠는가. 이렇듯 속 깊은 발바닥을 예우하지 않았으니.
발바닥의 힘은 실로 지대하다. 아기의 첫걸음마도 평평하고 튼튼한 발바닥 덕으로 이루어진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우리나라 태극기를 몇 번이나 꽂았던 것도 발바닥의 높은 견고성 덕이리라. 하늘을 나는 새도 땅을 디딜 발바닥이 단단하기에 가능하다. 세계의 산을 두루 오르내리는 유명한 산행인들, 특정 스포츠 선수들의 발바닥이 궁금하다. 그 생김새와 숨은 저력이 분명 남다르지 않을까. 그들의 발에는 무언가의 공통점이 있을 테다. 시련을 넘어 결실의 꽃, 보람의 꽃을 피운 것도 발바닥의 공이 클성싶다. 그 특수한 발은 머리를 지배하리라. 발바닥에 사방팔방 꿰뚫어 보는 수십 개의 눈과 위험을 감지하는, 미세한 촉과 뛰어난 재주가 잠재해 있을 테니 말이다.
발바닥 하면 고통, 희생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어머니는 농사와 어른 수발에다 칠 남매 자식 뒷바라지로, 땀에 전 발바닥이 뽀송뽀송한 날이 없었다. 엄한 시어머니와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주눅 들어 아픔을 안으로만 감수했다. 나는 양말을 벗을 때마다 발바닥처럼 기도 못 펴고 살다 간 어머니가 생각난다. 내가 화가였다면, 늘 종종걸음쳤던 어머니 발바닥에 깊게 새겨졌을, 그 동선들을 세밀하게 표현하여 인생을 지도처럼 남겼을 테다.
내 발바닥을 세밀하게 살펴보니 손금보다 잔금이 적다. 큰 선도 손금만큼 선명하지가 않다. 손금은 삶의 사연을 나타내는 기록장일까. 헤아려지지 못할 만큼 자잘한 잔금이 많다. 거기에 손가락 마디가 점점 굵어지고 불거진 힘줄이 손등에 더욱더 또렷해졌다. 검버섯도 많이 생겼다. 그래도 손은 마주 보고 손뼉도 치고, 맞잡는 다정함을 지녔다. 또 한 손으로 서로 만져주고 한쪽 손을 못 쓸 때는 대신 보조도 해 준다. 발은 누워서 스트레칭으로 종아리를 서로 쓱쓱 문질러 주는 정도다. 발이 손보다 많이 외로울 것 같아 측은지심이 든다.
나랑 마주 보고 침 맞는 이의 발바닥이 체중에서 벗어나 새색시 볼처럼 발그레하다. 하나 표정은 굳었다. 발바닥 따위는 알 바 아닌 듯 그의 얼굴은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고마운 발바닥은 외부 침투를 철벽 수비 하기 위해 늘 숨죽이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나도 그 공을 모르고 발바닥에 양은 냄비 같은 사랑을 했다. 압핀에 찔렸을 때, 티눈이 생겼을 때 호들갑스럽게 넘치도록 애정을 주었다가 낫고 나면 이내 나 몰라라 하지 않았던가.
나도 모르게 내 손이 오른쪽 발 엄지발가락 옆의 굳은살을 만지고 있다. 앞으로 지속으로 발바닥을 마사지해 주어야겠다. 마음만 먹으면 책 읽을 때, 글 쓸 때, 티브이 볼 때도 한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지 않은가. 무관심과 방치로 외면당한 가여운 발바닥이 위로받을 것이라곤 발걸음에 희망이, 발자국에 그리움이, 발자취에 역사가 담겨 있다는 점일 테다. 이 모두 신체를 든든하게 받들어 주는 발바닥의 공이지 않은가. 발목에 예쁜 발목 걸이로 장식해 주고, 발톱에 매니큐어로 단장해 주는 이의 발바닥은 고단함이 덜어질지도 모른다.
가끔 운동기구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을 본다. 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순간이다. 흔히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을 쓴다. 발바닥에 응축된 울분이 행여 분출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아무튼 혈액을 온몸에 요동치게 하고, 척추를 쫙 펴주는데 이만한 운동도 드물다.
나도 몇 년 전까지는 공원에서 그 운동 기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거꾸로 매달렸을 때 발바닥은 신체 중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입성한 셈이었다. 잠시지만 자유를 만끽했으리라. 음지가 양지가 된 기분에서 쾌재를 불렀을 테다. 내 발바닥은 자주 수직으로 상승시켜 준 그 시절을 가장 그리워할 것 같다. 돼지가 넘어져야 하늘을 보듯이. 그처럼 발바닥의 비애를 덜어 주기 위해 나도 매일 잠자리에서 다리를 높이 들고 흔들어 주어야 하리다. 수고로운 발바닥을 편히 쉬게 해 주는 건 잠 잘 때와 사암침 맞을 때뿐이다. 신발과 양말에 억압된 발바닥이 완전히 해방되는 시간이지 않은가.
발바닥의 굳은살을 조물조물 만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