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행9:36-43)
갈등
1.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후, 복음 전도가 왕성하게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저자인 누가가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이뤄진 복음 전도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다른 사도들은 각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세계로 흩어져 선교를 하였어요. 베드로는 유대에서 시작해서 사마리아,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에서는 룻다와 욥바에 이르렀어요.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32절) 룻다로 내려갔습니다. 룻다에서 애니아라는 중풍병자를 향해서 베드로가,“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리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애니아(남자 이름)가 베드로의 말을 듣고 일어났어요. 이 소식을 들은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서 베드로는 욥바에서 온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그들과 함께 달려갔습니다. 베드로가 선교계획을 세우고 이동하며 다닌 것이 아니었어요. 성령님께서 때를 따라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셨어요. 베드로가 욥바로 간 것은 다비다라는 여제자 때문이었습니다.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던 제자였어요. 히브리어로는 다비다, 헬라어로는 도르가였어요. 오늘 본문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함께 나옵니다.
2. 선한 사람 다비다가 갑자기 병들어 죽었습니다. 욥바 사람들은 죽은 다비다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였습니다.(염) 다락은 우리나라와는 좀 다릅니다. 윗방을 말해요.(upper room) 선지자 엘리사를 위해서 다락을 만든 이야기처럼요. 욥바 사람들은 베드로가 가까운 룻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두 사람이 신속하게 달려갔습니다. 도보로 서너 시간 걸리는 거리였어요. 베드로에게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을 했어요. 베드로는 그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않고 바로 일어나 욥바를 향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의 장례식은 예나 지금이나 24시간 안에 진행합니다.
날씨가 더우니, 위생 문제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욥바 사람들이 죽은 다비다의 장례식을 미루었어요. 욥바 사람들이 다비다의 몸만 씻어서 다락에 누였어요. 욥바 사람들이 죽은 다비다를 무덤으로 옮기지 않고 다락에 누인 것은 매우 이례적인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던 욥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부른 것은 장례식을 주관해달라고 한 것입니까? 다른 기대감이 있었을까요?
갈등 심화
3. 베드로가 욥바에서 온 사람들의 요청을 듣고 즉시 일어나 출발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베드로를 데리고 바로 다비다가 누워있는 다락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그 자리에 몇몇 과부들이 울고 있었어요. 과부들은 다비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베드로에게 설명을 했어요. 다비다가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과부들을 섬겼다고요. 다비다가 만들었던 옷들을 베드로에게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와달라고 사람들이 온 것부터 시작해서 장례식에 와서 고인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그가 어떻게 평생을 살았는지 드러납니다. 고인과 교제했던 사람들이 부고를 듣고 조문을 하면서 하는 말을 들으면 알 수 있어요. 오늘 본문의 과부들과 같이 증언을 해줍니다. 베드로는 다비다가 어떻게 살았는지 듣고서, 사람들이 모두 다락에서 나가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기도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어요. 베드로는 욥바 사람들과 기도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하다가 베드로가 시체를 향하여 명령했습니다.“다비다야 일어나라!”보기 쉽지 않은 장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죽은 다비다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명령할 수 있었을까요?
실마리
4. 오늘 본문을 성경 공부로 나누면 여러 다양한 시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제로 지난 목요일 아침에, 미리 성경 공부와 설교를 매주 나누는 저희 목회자 소그룹에서도 그랬습니다. 베드로에게 와달라고 요청한 이야기부터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선포한 것까지 본문을 보는 시각 차이가 다양했어요. 욥바 사람들이 다비다가 죽은 후에 장례식을 진행하지 않고, 다락에 시신만 씻어서 놓았어요. 문상은 아래층에서 받고, 시신은 위층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룻다에 와 있는 베드로에게 보냈습니다.
욥바 사람들이 베드로를 청한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다비다를 여제자라고 불렀어요.(36절) 여제자인 다비다가 선행과 구제를 심히 많이 하여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다비다에게 섬김을 받았던 과부들의 증언도 보이고요. 이렇게 인생을 마친 다비다의 장례식에 당시 교회를 대표하던 베드로를 청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 지역의 유력한 인물의 장례식에, 마침 가까이 베드로가 있었으니 장례식에 와서 위로해주기를 원했습니다.
5. 욥바 사람들은 이런 위로도 기대했고, 또 한편으로 베드로를 통해서 다비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오순절 성령님이 강림하신 이후, 베드로의 삶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의 언행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성경의 근거를 정확하게 말씀하며 풀어주었어요. 그의 설교를 듣고 3,000명이 회개를 하기도 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구걸하던 40년간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사람을 향하여 베드로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의 말을 들은 걷지 못하는 사람이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일은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감동을 주셔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선포를 듣고-말의 능력-기적이 일어났어요. 룻다에서도 베드로가 애니아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고 선포했어요. 이렇게 베드로를 통해서 불치의 병에서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었던 욥바 사람들이 다비다의 장례식을 미뤘습니다. 베드로가 와서 기도해주면 다비다가 살아날 수도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요.
6. 기적은 항상 은사자가 아니라 환자나 가족들의 믿음이 좌우합니다. 예수님도 여러 기적을 행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는 걷지 못하는 자나 중풍 병자가 아니라 죽은 자였어요.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선포했어요. 베드로나 바울이나 평생 선교사역을 하며 수많은 기적이 있었지만, 죽은 자를 살린 것은 단 한 번씩이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은 아무 때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은사자들이 아무 때나, 아무 환자를 보고서 일어나라고 선포하지 않습니다.
일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누구나-아무 때나 하지만, 일어날 것을 명령하는 기도는 조심스러운 일이에요. 은사자는 언제 환자나 죽은 자가 일어나도록 선포할까요? 성령님께서 지식의 말씀을 주실 때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데 첫째가 지혜의 말씀의 은사, 두 번째가 지식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기도하는 대상에 대해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알게 하는 일입니다. 저도 기도 섬김을 하면서, 그런데 목사님 어떻게 아셨냐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늘로부터-성령께서 주신 지식은 100% 정확합니다.
7. 제가 선교지 신학대학 순회사역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미리 몇 가지 행하실 일들을 알게 하세요. 현장에 가서 도전을 주고 선포합니다. 후에 간증이 그대로 들립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걷지 못하는 자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선포할 때, 베드로는 성령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울 줄 미리 알았을 것입니다. 룻다의 중풍병자 애니아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선포할 때도 그랬고, 오늘 본문의 죽은 다비다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선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언제 베드로에게 알게 했는지는 모릅니다. 40절,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이 자리에서 베드로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감동을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 제시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하나님은 구약 시대나, 사도들의 시대에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십니다.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시고 지켜보세요. 때로 징계도 하시며 깨닫도록 몰아붙이십니다. 아파하며 울 때 우리를 찾아와 위로해 주십니다. 복음 전도의 문을 열고 교회를 세우도록 큰 기적을 행하십니다. 사도 시대만 아니라 오늘도 그래요. 우리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암환자들을 고치시고 온갖 질병을 오늘도 치유하십니다. 일부 교단에서는 은사중지론을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사도 시대에 끝났다, 이후는 은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참 기가 막힌 성경 이해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잘못된 성경 해석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무기력한 가운데 있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이런 식의 주장입니다. 교단의 교리가 성경 위에 서 있어요. 오늘 베드로의 모습은 그때로부터 수백 년 전, 엘리야와 엘리사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런 예언자들이나 사도들이 뛰어난 것이 아니었어요. 그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위대하십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고전4:20)
기대
9. 오늘 본문을 나누며 복음의 능력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다비다를 살리신 것은 42절,“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이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에요. 은사는 도구입니다. 무기입니다. 군인이 전쟁에 나가는데 무기 없이 나가지 않아요. 어떤 무기를 소유하고 있느냐의 따라 전쟁의 승패가 나눠집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하며 고전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유럽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첨단 무기를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영적인 전쟁은 종말이 오기까지 쉬지 않아요. 사탄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모두가 영적인 무장을 강조했어요. 말씀과 기도로 완전 무장을 해야 합니다. 요즘 SNS에 제 목회 이야기를 나누며 반응을 보면, 성경 통독 이야기나 붕어빵 전도, 선교지 신학대학 순회사역, 금식 기도 등에 관심을 많이 보입니다.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질까 싶은데, 복음의 본질 이야기에 사람들이 갈급해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사명을 계속해서 잘 감당하며 포항 땅을 거룩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다 같이 일어나 찬양하며 기도합니다.(오늘 찬양: 주와 같이 길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