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바람이 부는 고모산성에 올라 어룡산을 배경으로한 樂山, 海山, 野草의 모습... 10:14:29
樂山의 수고로 진남휴게소에 주차 후 "문경오미자 테마터널"을 지나 고모산성으로 오른다...09:25:56
문경 신현리 고분군 탐방. 1차 발굴지역 1호분 :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구덩이를 파고, 강돌을 사용하여 벽을 만들었다. 이 무덤에서는 벽을 만드는 과정에서 강돌 28개를 일정 간격으로 들여쌓아 만든 선반형태의 구조가 특징인데, 이 공간은 위에서 볼 때 시신이 놓이는 바닥공간과 같은 규모로 만들어져 주검 공간 또는 무기를 놓는 공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신라고분에서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는 특수한 구조에 해당한다.
문경 신현리 고분군 탐방. 2차 발굴지역 2호분 : 발굴하기 전에 큰 봉분이 그대로 노출되어 쉽게 도굴이 되었고, 이로 인해 벽석의 대부분이 파괴된 상태였다. 출입구는 동쪽 벽에 계단 모양의 창문 형태로 만들었는데, 이러한 형태는 신현리 2차 1호분, 7호분 등과 함께 신현리 고분군에서만 나타나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서 명칭 또한 “신현리형 입구형태”로 명명되었다. 시신을 눕히는 공간은 중앙에 마련하였으며, 가장자리는 유품을 놓았는데, 벽석이 토압(쌓인 흙이 누르는 힘)에 밀리면서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2호분은 봉토의 남쪽에 둘레석을 놓아 봉토가 유실되는 것을 막았으며, 북쪽으로는 도랑을 파고 안쪽에 깨어진 돌을 채워 물이 잘 빠지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석재 채취 흔적 : 신현리 고분군에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산에서 채취한 석재와 영강 주변에서 채취한 냇돌로 구분된다. 고분군 석벽은 대부분 산돌이며 시상바닥에 깔려진 석재는 냇돌이 많다. 신현리 고분군을 포함하여 고모산성, 석현성 등지에 사용된 석재는 주변지역의 암반층에서 채취한 석재가 대부분이며, 이곳의 채취 흔적은 고분군에 사용된 석재를 마련하기 위하여 채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경 신현리 고분군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이곳은 삼국시대의 요새로 축조된 고모산성(姑母山城)이 남쪽지역으로 크고 작은 新羅古墳 수십 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주변에도 수 백기의 고분들이 분포되어 있다.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는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고모산성과 주변 문화 유적에 대한 정비사업의 계획에 따라 이곳 고모산성의 남쪽에 분포한 고분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네 벽을 쌓고 위에서 아래로 시신을 안치하는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수혈식석곽묘)과 세 벽을 쌓아 올리고 그 위로 뚜껑돌을 올려놓아 무덤을 만든 뒤, 벽석을 쌓지 않았던 곳을 통해 시신을 안치하고 나오면서 입구를 폐쇄한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 墳횡구식석실분)을 중심 묘제로 사용하였다. 출토유물은 금동제귀걸이(金銅製耳飾금동제이식)와 화살촉(鐵鏃철족), 낫(鐵鎌철겸), 손칼(刀子) 등의 금속유물과 굽다리 접시(高杯고배), 굽다리 긴목 항아리(臺附長頸壺대부장경호), 긴 목 항아리(長頸壺), 짧은 목 항아리(短頸壺), 바리(鉢形土器발형토기), 손잡이 잔(杷杯파배) 등의 신라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문경 신현리(新峴里) 고분군은 출토유물의 연대와 고분의 축조방법에서 6세기 전반 경에 신라가 문경 지역에 진출한 이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문경지역이 당시 삼국의 접경지대였음을 고려할 때, 신라세력이 상주를 거점으로 문경지역을 지켜, 북쪽의 小白山脈의 고갯길인 鳥嶺, 梨花嶺을 넘어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현성의 진남문을 배경으로 樂山, 海山, 野草의 모습.....09:48:41
운강이강년의 한말 의병항쟁과 고모산성....문경지역 운강 이강년 유(전)적지 안내판...09:51:46
진남교반 일원 : 이곳은 1933년 대구일조사가 주최한 경북팔경 선정에서 일경으로 꼽힌 진남교반 일원으로서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옛길의 1번지답게 지난 2007년 명승 31호로 지정된 토끼 비리 옛 길이 있으며, 길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던 주막, 길손들의 안녕을 빌었던 성황당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지역은 교통 관련 유적뿐만 아니라 지형상의 특성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서 5세기 신라가 북진정책을 펼치면서 쌓은 고모산성과 고부산성, 조선시대의 관성인 석현성 등의 성곽유적과 6~7세기 고분군이 남아 있다. 한 지역에 이렇게 시대별로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곳은 국내에서 이곳이 유일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지도의 범례 ① 동문지 ② 남문지 ③ 서문지 ④ 북문지 ⑤ 석현성(진남문) ⑥ 주막거리 ⑦ 성황당 ⑧ 문경토끼비리 ⑨ 봉생정 ⑩ 고분군 ⑪ 진남숲 ⑫ 영강 ⑬ 경북 팔경비 ⑭ 문경오미자테마터널
고모산성을 오르는 언덕에 원두막이 있어 잠시 쉬었다가 간다....09:55:58
고모산성 남문 : 이곳은 고모산성의 남문(산성에 출입하기 위하여 설치한 남쪽에 위치한 성문)이다. 2004년 (재) 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발굴 조사 결과 남문터와 성내 옹벽시걸, 투석용 몽돌무지(싸움으 ㄹ항때 던지기 위한 주먹 크기의 냇자갈돌 무지), 성외 보축성벽(체성벽을 보호하지 위해 성벽 바닥부분에 덧대여 쌓은 또다른 벽체) 등이 확인 되었다. 남문의 구묘는 길이 16m, 너비 5~5.8m이며 주향은 남동향이다. 남문의 구조는 성벽을 쌓아올려 성벽의 높이가 중단부 이상 높아진 다음성문을 축조하기 위해 개구부를 내고 성벽과 직교하는 통로부 측벽을 축조한 현문(縣門) 형태의 성문이다. 산성 바깥에서 성문을 바라볼 때 입면 凹(요)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문에는 문루가 있으나 발굴조사 결과 고모산성은 축성기법에서 삼국시대 축조기법을 보이고 있으며, 문터에는 건물과 관련된 유구 및 유물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산단부에 문루(門樓) 시설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남문 안쪽의 고모산성 남문지 투석(姑母山城 南門地 投石) : 문경 고모산성은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산30-3(임) 일대의 고모산(해발 231m)에 위치하는 둘레 1300m 규모의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내외협축(內外夾築)의 수법으로 석축하였고, 동서남북의 안부(鞍部산마루가 움푹 들어간곳)에 성문을 만들고 2곳에 곡성(曲城성밖으로 둘러 가려서 구부러지게 쌓은 성)을, 가장 낮은 서쪽 계곡 중앙에 2개의 배수구를 만들었다. 주변의 신현리 고분에 대한 2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가 낙동강 상류유역으로 진출하였던 5세기 후반 경에 축성되었으며,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에 있어 소백산맥 이남의 전진기지로서 거점성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지 발굴 시 발견된 투석(投石돌을 던짐)더미는 삼국시대 산성 전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투용 무기로서 고모산성 인근의 영강주변에서 채집한 돌로 투석전을 치룬 것으로 보인다. 투석더미는 이곳 이외도 성곽 발굴지역 전체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투석전은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까지도 유용하게 사용된 무기이자 전투방법이다.
고모산성에 올라 바라 본 전경... 좌로부터 눈 덮힌 둔덕산, 우측의 눈덮힌 백화산의 모습....10:11:13
고모산성에서 바라 본 어룡산의 높은 능선 전경....10:12:16
봉생마을이 산으로 둘러 쌓인 아늑한 모습과 뒤쪽의 높은 산봉우리들....10:15:17
석현마을에서 바라 본 주흘산 전경....10:38:08
돌고개 주막거리 안내도....10:42:31
돌고개 주막거리 : 예로부터 주막(酒幕)은 오고가는 길손들의 휴식처로서 술과 식당 여관을 겸한 곳이다. 이곳은 영남대로 구간 중 가장 통행이 빈번해 오래전부터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달리 꿀떡고개로도 불렀다. 주막을 복원하고자 문경시에서 지난 2003년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2006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건물 중 윗편은 문경에 남아 있는 마지막 주막인 영순주막을, 아래편은 예천지역에 남아 있는 주막인 삼강주막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주막거리 앞의 원두막에서 간식을 먹고 담소하며 휴식....10:44:10
석현산성과 연결된 고모산성의 원경....10:55:35
고모산성 : 고모산성은 삼국시대 5세기경 신라에서 계립령로(鷄立嶺路: 문경→충주 미룩사지)를 개설하던 시기에 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주흘산 이남이 한 눈에 보이고, 남쪽으로 불정지역 외의 다른 곳으로 길을 만들 수 없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임진왜란, 동학농민은동, 한말 운강이강년 선생의 의병 항쟁 시 요충지로 많이 이용되었다. 이 성은 할미성이라고도 불리며, 둘레는 1270m로서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의 높이가 낮은 곳은 1m, 높은 곳은 11m이고, 폭은 2~3m이다. 동쪽에 암문 1개가 남아 잇고, 서쪽 1km위치에 옛길인 토끼비리(串岬遷관갑천)가 있다. 고모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마고산성, 고부산성, 희양산성 등 믾은 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문경 토끼비리 ....11:02:30
지정번호 : 명승 제31호 지정일자 : 2007.12.17. 소유자 : 문경시 소재지 :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산 41, 42
문경 토끼비리는 오정산이 영강과 접하는 험한 벼랑의 바위를 깍아서 선반처럼 만든 길이다. 영남대로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위치하여, 길 중에서는 최초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산천조에는 “串岬遷(관갑천)은 용연의 동쪽 벼랑을 말하며 兎遷(토천)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만든 잔도가 구불구불 6, 7리나 이어진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할 때 이곳에 이르러 길이 막혔는데, 마침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경북팔경의 제1경으로 꼽히는 진남교반에 있으므로 경관이 매우 뛰어나며, 주위에는 고모산성과 고부산성, 신현리고분군 등의 역사유적이 있다. 길 전체의 길이는 500m 정도이며 벼랑의 석회암 바위를 인공적으로 절단하여 암석 안부를 파낸 곳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이 길을 지나다니던 선인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조선후기의 여행가로 알려진 권섭(1671~1759)의 손자인 권신응(1728~1787)이 그린 그림 「봉생천」에 당시 토끼비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나타나 있다.
토끼비리를 지나가는 것이 매우 험난하고 힘이 들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시....11:08:39
串岬棧道(관갑잔도) 관갑의 사다리길
設險函關壯(설험함관장) 요새는 함곡관처럼 웅장하고
行難蜀道奇(행난촉도기) 험한 길 촉도 같이 기이하네
顚隮由欲速(전제유욕속) 넘어지는 것은 빨리 가기 때문이요
跼蹐勿言遲(국척물언지) 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나.
※ 函谷關(함곡관) : 중국 하남성 영보현에 있으며 전국시대 진나라가 설치한 요새로 유방이 선정하여 항우를 견제한 곳
※ 蜀道(촉도) : 중국의 서쪽 운남성 서역으로 이어지는 험로로 옛날 촉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촉도라 한다. 모두 험준한 곳으로 유명함.
※ 顚隮(전제) : 넘어지는 것 ※ 跼蹐(국척) : 등을 웅크리어 펴지 아니한 모습 (跼天蹐地)
면곡 어변갑(綿谷 魚變甲) 1380(고려 우왕6)~1434(조선 세종16)
조선 초기의 문신 字는 子先. 號는 綿谷 1399년(정종1) 생원이되고, 1408년(태종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校書館의 副校理로 발탁된 뒤 成均館主簿를 거쳐 司諫院 左正言·右獻納을 역임. 1420년(세종2) 새로 발족한 集賢殿의 應敎로서 知製敎·檢討官과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했다. 排佛崇儒가 쇠미해가던 1424년(세종6) 闢佛(벽불소)를 내어 성리학으로 國是(국시:국가이념이나정책의기본방침) 판을 정착시키는 주역으로 선도하였다. 증직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 경남 固城의 綿谷書院에 祭享 되었다. 위의 시는 면곡 어변갑 선생이 길을 지나며 쓴 시로서 토끼비리를 지나가는 것이 매우 험난하고 힘이 들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시다. 이 외에도 권근(1352~14029), 서거정(1420~1488)등 수많은 과객들의 시가 전한다.
孺人南陽洪氏之墓(유인남양홍씨지묘).....11:11:51
바위가 달은 고개에서 왼쪽 눙선은 오정산(4km), 삼태극전망대(1.1km)로 오르고, 오른쪽 능선은 병풍방위전망대(120m)로 오른다....11:12:37
병풍바위 전망대에서 진남교반을 배경으로 樂山, 海山, 野草의 모습....11:20:08
아름다운 진남교반의 전경.....11:20:34
병풍바위 능선을 지나서 예비군이 만든 방공호 모습.....11:28:20
국도 3호선의 아름다운 진남구간의 모습....11:33:08
된섬교를 건너서 옛 34호 국도로 나간다....11:39:35
[총연장 132.3m 교폭 10.5m 설계하중 DB-24 공사기간 2002.10.31~2004.6.30]
옛 국도에서 바라 본 병풍바위의 모습.....11:47:51
오래 전에 문사회에서 일년에 한 번 찾았던 "영남메운탕"의 변한 모습....11:49:28
옛 철교를 건너서 진남휴게소에서 중식을 한다....11:59:23
첫댓글 小寒과 大寒中間쯤이니 寒波가 猛威를 떨칠만도 하다.鎭南橋 入口에 서니 멀리 白華山 山頂에는 白雪이 눈부시다.姑母山城 西門은 凍結 되었으리라 斟酌되어 오미자터널을 經由하여 古墳群에 入場하니 20餘年前 發掘當時 큰 話題였는데 50餘其의 古墳은 放置되고 있었다.元三國時代 또는 高句麗 古墳으로 學界에선 서로 다른 主張이었는데 그 以後론 關心밖인 듯 硏究가 없다.姑母山城에 올라서니 엄청난 雪寒風에 몸을 움츠린다.原形은 形體도 없고 現代式으로 復元아닌 新築된 城郭을 보면 失笑가 나온다.史劇撮影用으로 本意아닌 變質이지만 文化材復元은 좀 더 愼重하자.城을 迂回할려고 東門으로 길을 잡으니 氷板에서 落傷하고 말았다.冬季에는 크게 警戒할 일이다.城隍堂은 예나 다름없고 뜬금없는 永順酒幕에 아연 失色한다.石峴城 懸板은 深耕 黃圭郁 先生의 筆體가 힘찬데 님은 가고 없으니 애닮다.串甲遷은 찾는이 없어도 지난날의 覺光받든 交通路 痕迹이 지금도 뚜렷하다.屛風바위에 서니 鎭南橋畔 一帶가 한눈에 든다.그 중에도 白華山,主屹山,屯德山의 威容이 斷然 으뜸이고 烏井山의 莊嚴한 稜線은 고장의 中心에 遜色없다.된섬교를 돌아서 原點回歸하니 正午가 되어 鎭南休憩所에서 中食나누고 日程을 終了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