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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08
3월23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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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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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_iDrXYf7J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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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나의 등 뒤에서>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까마득한 원시림의 나라로 선교를 떠난 후배신부가 휴가차 들렀습니다. 아직 문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미개척지인 그곳에서의 생활이 정말 흥미진진하고 보람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들이 수시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하기 힘든 문화차이, 너무나 다른 언어, 음식...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리움’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단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어느 날, 신부님은 공동체 내 조그만 경당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제서품식 때를 떠올리며 제대 앞에 길게 엎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또 열렬히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하느님, 도대체 왜 절 이곳까지 부르셨습니까?
솔직히 너무나 힘들어서 죽겠습니다.
절 이곳까지 부르신 당신께서 책임지십시오.
절 계속 이곳에서 살게 하시려면 정말이지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종신서원식 때, 사제서품 때 제대 앞에 엎드려서 마음속으로 바쳤던 기도들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오랜 기도를 끝마치고 일어서서 경당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간 자신을 휩싸고 있었던 ‘힘겨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면서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 다가옴을 확연히 느꼈다고 합니다. 그 순간 떠오른 복음구절이 있었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네 어미가 너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고 외치시는 분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나갈지라도 그분만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가는 순간에도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분, 이 세상에 나 혼자 뿐이라며 울며 가던 순간 나를 밑에서 떠받치고 계시던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탈출구가 안 보이는 분들, 얼마나 힘드십니까? 어깨 위에 지워진 삶의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럴수록 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서십시오. 그럴수록 더 그분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십시오. 그럴수록 더 크게 그분의 이름을 외치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외침을 못들은 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까이 다가서시어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주지 못할 참 평화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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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KJASkGQBa1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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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결국엔 자녀는 아버지가 속한 곳에 속하게 된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요한은 그들이 땅의 아버지에게서 났고 그래서 땅에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향하지만,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땅의 아버지에 묶여 땅의 욕망을 추구하며 죽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44)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느 아버지에 속해있고, 어느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욕망’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하늘 아버지를 믿는 것이 왜 필요한지 잘 설명해줍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아버지가 속한 세계로 향하고 그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보통 자녀에게 인간임을 믿게 하고 인간으로 생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남에게 무언가를 내어 줄 줄 알아야 살아갈 수 있는 수준으로는 들어 높이지 못합니다. 어머니에게만 자라면 아기는 필연적으로 매우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인터넷 카페에 나와 있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외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남편과 사별한 김모 할머니(78·서울 관악구). 남편의 죽음은 살림만 챙기던 할머니를 아무런 준비 없이 냉정한 세상으로 내몰았다. 가진 기술이나 밑천이 없던 할머니는 파출부를 전전했다.
그렇지만 하나뿐인 아들 교육만큼은 소홀하지 않았다. 없는 살림이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 흉을 볼까, 혹 자신의 가난이 그대로 대물릴까 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끼니도 걸렀다. 재혼할 기회도 있었지만 포기했다. 아들만을 ‘삶의 희망’으로 삼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았다.
그런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최고 일류대학’을 졸업했다. 아들이 결혼한 뒤에도 할머니는 입주파출부 생활을 계속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사치란 생각에 조금이라도 목돈이 생기면 아들의 사업자금에 보탰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돌아온 아들 가족의 태도는 냉담했다. 파출부도 힘에 부쳐 1년 전부터 어쩔 수 없이 아들 집으로 들어갔지만, 손자 앞에서 대놓고 무시당하기 일쑤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예 밥도 같이 먹으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더 나이 들어 병이라도 걸리면 양로원에 버리겠다.’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김 할머니는 ‘지금까지 자식 하나만을 위해 내 앞으로 된 통장 하나 만들지 못하고 살았지만 이런 대우를 받으니 너무 억울하다.’라고 하소연했다.”
[출처: ‘자녀에게 올인하는 부모들’, 다음 카페, ‘인천만수초등학교38회’]
김모 할머니가 아들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들이 그렇게 어머니에게 모질게 대하게 된 것일까요? 할머니의 잘못은 없습니다. 다만 아들이 나누는 본성을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무엇을 직접 주지 않고 어머니를 통해 줍니다. 따라서 자녀는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과 아버지에게 받는 사랑을 다르게 느낍니다.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은 자기 자녀를 생존하게 만드는 어쩌면 이기적인 사랑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를 내어주는 사회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따라서 어머니에게 보은할 줄 모르는 저 자녀는 사회생활도 원만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 세상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사랑도 이와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끝까지 알려주시려는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야 아버지의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예수님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속할 수 있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는 삶은 그야말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만들어낸 것 중의 하나가 ‘아기 공장’(레벤스보른)입니다. 아리아인들의 혈통만 남긴다는 신념으로 나치는 금발에 장신, 그리고 푸른 눈을 가진 친위대원과 미혼의 여성들을 말 그대로 ‘교배’시켜 아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치의 선동에 넘어갔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비극 자체입니다.
아기는 먼저 어머니를 만나고 집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며 아버지를 만나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춥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믿고 따르는 아버지의 세상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읍시다. 그래야 하늘 나라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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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내가 나가 되는 길>
아마 제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친정은 부산입니다.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친정에 잠깐 오셨습니다.외가에 간 첫 기억입니다.
경상도 말을 처음으로 듣는지라 저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들리는 말은 어머니가 저를 놓고 가면 당신들이 대신 저를 키워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른들 말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 안팎을 돌아다녀 봐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정말 저를 두고 가셨다는 생각에 서럽게 많이 울었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놀라셔서 나와서 왜 우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없어서 그런다고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어머니는 목욕을 하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외가댁이 목욕탕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말 조금 있다가 어머니가 목욕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저는 이 기억을 마음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해질 때마다 이 기억을 되살려내곤 합니다.
이 경험은 원초적인 불안이 나 혼자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그 심장소리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안정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는 아기를 달래는데 어머니의 품결만큼 빠른 방법은 없습니다. 어머니만이 아이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목소리와 심장박동소리, 향기 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몇 달 동안 익숙해져 있는 아기에게 어머니가 그만큼 안정을 준다면 언제인지 모를 때부터 주님과 함께 있었던 우리의 ‘영혼’이야 주님의 존재가 함께 한다고 느낄 때 얼마나 큰 안정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하느님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어린 아이가 어머니가 함께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것과 같이 우리 영혼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하면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좀처럼 느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주시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다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짓는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 합당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고 느끼고 자신이 하느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공기와 같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공기처럼 우리 안에도 계시지만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나 많이 잊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즉, 당신께서 그분의 뜻대로 사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당신을 절대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나의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뜻이 살아있으면 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죽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을 살리신 신비가 바로 십자가 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내가 나’임을 깨닫는다는 말은, 모세에게 당신 이름이 ‘나는 곧 나다.’라고 일러주신 대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으로는 가장 나약한 모습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그분의 ‘나’를 공유하고 또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내가 되는 이 신비는,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라는 말씀 속에 집약됩니다.
우리도 매일매일 지고가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의 나를 버려야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존재적 안정감 입니다. 아이에게 어머니만큼 중요한 존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존재만큼 안정감을 주는 존재는 없습니다.
내 자신을 죽일 때 비로소 하느님 안에서 내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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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21-30: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21절) 그분을 미워했던 사람들은 박해하려고 찾았으며, 그분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그분을 찾았다. 바리사이들은 악의에 차서 잘못된 방식으로 그분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24절) 하신 것이다. 자기 죄 속에서 죽는 것은 그리스도를 잘못된 의도로 찾는 이들에게 일어난다. 예수님은 악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시는 데 이들은 선을 악으로 갚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21절) 하셨다. 자기 죄 속에서 죽는 이는, 진리에 관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와 지혜를 믿는 이는 불의를 행하지 않고,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25절) 하고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25절) 이 말씀은 그들은 그분의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 “처음부터”라는 말씀은 당신 자신이 이미 “한 처음”(요한 1,1)이신 말씀이심을 나타낸다. 그분은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미래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당신도 참된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참되신 분의 아들로서 당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세상에 이야기하셨으나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27절) 한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28절)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신이 수난을 통하여 들어 올려지기 전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들어 올려짐’은 십자가로 들어 올려짐이며 이 들어 올려짐은 그분의 치욕이었다. 이 수난은 이 말씀을 들은 이들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으나 언제나 함께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이 가신 곳이면 어디나 계시다. 아드님을 버려두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29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셔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경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기회는 부여되어 있지만,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다시 그 은총의 때를 맞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깨어있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때를 잘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는 결단을 내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결단을 내릴 기회가 주어져 있으므로 거기에 관한 결과도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책임 있는 선택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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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잊지 말자고 다짐하였던 어떤 분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보고 싶을 때 찾아가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분과 함께하였던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의 목소리, 함께 나누었던 대화, 호탕한 웃음소리, 호기심 어린 눈빛. 우연히 듣게 된 그 이름 때문에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추억을 다시 꺼내어 봅니다.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그 이름으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여쭙니다. “당신이 누구요?”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나는 나자렛 사람 예수요.’라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임을.” 이 대답은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들었던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있는 나,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 이름을 깨닫는 사건은 오늘 독서의 ‘불 뱀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불 뱀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기둥에 구리 뱀을 달아 그것을 쳐다보면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신과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나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름을 듣고 누군가는 하느님과의 추억과 관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 이 이름을 듣고 어떤 추억을 떠올립니까? 그분께서 보여 주신 삶의 이야기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고 우리는 그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만약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 이름을 잊고 살았다면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불러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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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24)
1) 여기서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언’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나를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라는 경고인데, 반대로 생각하면, 너무 늦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는 간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활동 기간이 곧 끝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하시는 날이 곧 다가온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날이 닥친 뒤에 예수님을 찾는 것은 너무 늦은 일이 될 것입니다.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날이 닥치기 전에, 즉 ‘지금’ 서둘러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날이 되면 회개할 시간은 없고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곳입니다.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자기 죄 속에서 죽는 사람은(멸망하는 사람은)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2)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라는 말씀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이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고서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지적하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아래에서 왔다. 이 세상에 속한다.”라는 말은, “죄에 물든 세상에 속해 있다. 죄 속에서 살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위에서(하늘에서) 오신 분, 그래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죄에 물든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쪽으로 가야 합니다. ‘위’와 ‘아래’에 동시에 속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쪽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 누리는 것들이 아무리 좋게 생각되어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쓸모없는 것들과 허무한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정말로 중요한 것과 영원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3) “꼭 예수님만 믿어야 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론들도 많습니다.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와 다른 이론들을 사이비라고 공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유일한 ‘참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말씀만이 ‘구원의 진리’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인은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고, 그 진리 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고, 그 생명 외에는 다른 생명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요한 8,26)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라는 말씀은, “너희에게는 심판에 관한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즉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꾸짖을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라는 말씀은, “나를 보내신 분은 진리 자체이신 분인데”, 즉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신데”라는 뜻입니다.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이고, 나는 그분의 뜻에 따라서 구원을 선포할 따름이다.”라는 뜻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구원’이 선포되는 시간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지금’이라는 시간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갑자기 닥치는 ‘심판의 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은 모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깨닫는 일을 언제 하느냐?”입니다. ‘심판의 날’이 닥치고 나서 뒤늦게 깨닫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지금’ 믿어야 하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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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문틀에 곧바로 서서 볼펜으로 선을 그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문틀의 선에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작은 형의 표시는 한 뼘은 높은데 있었습니다. 형제들 중에서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빛바랜 선들이 기억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다른 지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건강 검진을 통해서 ‘몸무게, 체지방, 혈당, 간수치, 지방간, 청력, 안압’과 같은 지표를 살피게 됩니다.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 몸의 다른 부분들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운동, 규칙적인 식사, 긍정적인 생각,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지는 사람의 건강지표는 파란 불일 겁니다. 반면에 과도한 스트레스, 지나친 음주와 흡연, 불안과 불면의 날을 보내는 사람의 건강지표는 빨간 불일 겁니다. 지난 1년은 코로나19로 많은 분들이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백신이 나왔으니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학교의 긴 담에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이라는 표어가 신동우 화백의 그림과 함께 있었습니다.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에는 경제성장의 지표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가발을 수출하고, 월남전에 파병하고,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가 가고, 중동으로 근로자들이 갔습니다. 지금은 학교의 담벼락에 경제지표를 표어로 그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경제지표는 더 이상 전 국민이 알아야 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제 다른 지표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합니다. 전 국민 의료보험을 통해서 건강을 지켜나갑니다. 검표원이 없어도 기차를 탑니다.
복지, 신뢰, 교육, 문화와 예술의 지표를 생각합니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중산층이 많아지는 나라가 됩니다. 빈부의 격차가 큰 나라는 경제지표가 높아도 코로나19의 파도를 쉽게 넘지 못하였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적은 나라는 경제지표가 높지 않아도 코로나19의 파도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큰 나라는 우울증, 중독, 자살, 범죄의 비율이 높았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적은 나라는 우울증, 중독, 자살, 범죄의 비율이 낮았습니다. 미국의 아메리카 드림은 빈부의 격차가 적고, 중산층이 많았을 때라고 합니다.
신앙의 지표를 생각해 봅니다. 성당, 신자 수, 헌금과 교무금, 사제와 수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단체와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교계제도와 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8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외적인 성장이 있었습니다. 많은 본당이 신설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습니다. 매 10년마다 100만 명의 신자가 늘었습니다. 70년대에 100만 명이었던 신자는 2020년 5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의 수도 늘었습니다. 이렇게 외적인 지표는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지표는 박해시대를 견뎌왔던 70년대 보다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신앙생활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의 전례를 지키기보다는 여행과 여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기 어려워집니다. 성적이 오르면, 좋은 대학에 가면, 성공하면 신앙생활은 나중에 해도 좋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는 가지는 말라서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코로나19를 지내면서 신앙의 지표를 돌아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서필사를 하고,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고, 영상을 통해서 영성강의를 듣습니다. 위기는 위험은 또 다른 기회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지표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부모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의 형제요, 부모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 만큼 소중합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기본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전율이 일어납니다. 혁신과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사람의 아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희생과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보았습니다. 가야할 길을 알고, 충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 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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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광야를 지나갈 때 양식과 물이 부족하여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회상합니다. 양식과 물이 부족하게 된 그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이가 물려 죽습니다.
백성은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주님께 기도하여 불 뱀들을 치워 달라고 모세에게 청합니다. 그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은 용서이고, 모세가 주님의 명에 따라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은 그 용서의 표징입니다.
불 뱀에 물린 자는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조잡한 비밀 예식일까요? 아닙니다. 지혜서(지헤서 16장 6절 이하 참조)에서 말한 대로,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를 구하면서 믿음으로 쳐다볼 줄 아는 사람을 위한 하느님 구원의 초기 표징입니다.
그런데 열왕기 하권은 경건한 히즈키야 임금의 종교 개혁에 대하여 이렇게 들려줍니다. “그는 ……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조각내었다.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열왕기 하권 18장 4절) 이 사실은 예로부터 중동 전역에 널리 퍼진 구원의 신에게 드린 우상 숭배의 흔적을 보여 줍니다.
두 마리의 뱀이 감기어 있고 꼭대기에 쌍날개가 있는 지팡이의 표상을 고대 문명이나 근동 지방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옛 그리스인들도 그런 표상으로 나타내는 치유의 신에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한 복음은 구리 뱀의 표징과 모세보다 더 뛰어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접 연관시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복음 3장 14절-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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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온 곳을 모르면 가는 곳도 알 수 없다.>
요한복음 1장은 프롤로그(서문)와 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의 퇴출과 예수의 등장을 다루고 있다. 2장부터는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활이 시작되어 12장에 이르기까지 꼬박 3년간의 자기계시적 가르침과 활동을 들려준다.
13장부터 17장까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제자들과의 만찬석상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고별사를, 18장에서 19장은 체포, 심문, 사형선고, 수난, 죽음과 무덤에 묻힘을, 20장에서 마지막 21장은 예수부활, 발현사화, 그리고 에필로그(맺음말)로 요한복음은 끝난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교 신학 전반에 걸쳐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에서 하느님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정립할 수 있도록 제공된 정보들은 참으로 심오하고 귀중하고 값진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 1장은 '전실존적(前實存的) 그리스도론'을 2장부터 12장은 '하향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 신성의 하느님 본성과의 일치성을, 13장부터 17장은 성령론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값지고 귀중하고 심오한 진리가 당장 그 자리에서 진가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의 진리는 유다교의 지식층으로부터 많은 반대와 오해를 받았고, 갈등과 논쟁을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진리선포와 자기계시는 계속되어야 했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일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29절) 요한복음 7장에서 8장은 어떤 특별한 육체적 활동 없이 예수님의 순순한 자기계시적 가르침을 피력하고 있다.
물론 후대에 삽입된 요한 8,1-11(간음한 여인에 대한 유다인의 고발과 예수님의 용서의 이야기)을 빼고 봐도 좋고, 넣고 봐도 무방하다.
7장이 예수의 메시아적 기원에 관한 논쟁과 증언을 다루고 있다면, 8장에서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자기증언으로 예수님의 자기계시가 고조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7장은 나자렛 예수의 인성(人性)에 대한 논란을 통하여 메시아적 신성에로의 도약을 꾀하고 있는 반면, 8장은 예수님의 신성에 중점을 둔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정말 그리스도인가? 질문하는 편과 대답하는 편의 간격은 갈수록 멀어지고 더 이상 오갈 수 없는 절벽으로 벌어진다. 이 점에 있어서는 법대로 처리하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냉정함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자비로 용서를 베푸는 예수님의 입장(8,1-11)이 한 몫을 한다.
"나는 간다. 그러나 너희는 그곳에 오지 못한다. 나는 위에서 왔지만, 너희는 아래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21절)
이러한 언명은 예수님과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에 절벽만 있을 뿐 더 이상 이해 가능한 지평이나 공감대가 없음을 뜻한다.
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르는 유다인들이 예수가 어디로 가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오신 곳으로 다시 가실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더욱 확실한 대답을 주신다. 물론 질문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이지만 군중으로부터는 믿음을 얻는다.(30절)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데 있어서 하느님 자기계시의 한 방법인 '나는 ~ 이다'(ego eimi; 에고 에이미)라는 도식을 이용하신다고 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주 이 도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다.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 할 것 없다"(6,20)라고 하신 부분이다.
그 외에도 예수께서 '나는 빛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착한 목자이다.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모두 이 도식에 속한다.
이 도식은 참으로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다. 일찍이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조리 있는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탈출 3,14)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는 뜻이 '야훼'라는 말이다.
'야훼'라는 하느님 이름의 참 뜻이 무엇인가?
① 이는 '나는 있는 자 그로다'는 뜻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自存者)임을 말한다. 즉 창조주(創造主)임을 말한다.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필연자(必然者)임을 뜻한다.
③ 이는 '나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자 그로다'는 뜻으로 하느님의 자유와 초월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도식을 사용하실 때에는 하느님께서 본성(本性)에 의거하여 소유하시고 누리시는 모든 특성이 예수님께도 가감없이 똑같이 해당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유다인도 이런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결국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높이 달려질 때 가서야 예수님의 정체가 어느 정도 밝혀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십자가는 예수님의 운명이다. 수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듯이, 십자가 없이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정확한 진리도 없다.
그렇다고 십자가가 목적이거나 끝은 아니다. 예수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목적이요 끝이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로 내몰아 죽이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께서 오신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목이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더 많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십자가의 운명을 목전에 두고도 아버지께서 기뻐하는 일을 한다(29절)는 예수님의 입가엔 미소가 도는 듯하다. 나의 십자가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나도 웃으며 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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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이 불안한 탓이겠지요.>
온갖 예언이 떠돌고 수많은 예측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권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도 한결같기만 합니다.
오직 진리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만 세상에 사셨던 그분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기 위해서 세상의 도전을 이기고 세상의 의심을 내쳐야 한다는 지혜를 배웁니다.
“당신이 누구요?”라고 묻는 이들에게 위에서 와서 세상에 속하지 않았던 주님, 땅에서 하느님의 삶을 살아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야기할 것도 많고 심판할 것도 많다”고 고백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에게서 들은 것만”을 이야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왈가왈부, 말 많은 세상을 살아가되 하느님의 이야기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계신 것이라 싶습니다.
사탄에게는 우리를 이길 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피조물 중에 하느님의 지혜를 얻은 것은 오직 인간뿐이니까요.
사탄이 인간을 유혹하고 죄를 짓도록 유인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영으로 채움 받은 인간이 사탄에게 굴복할 때에 하느님께 받은 영의 지혜를 사탄에게 넘겨주게 되는 까닭입니다.
사탄은 오직 인간이 넘겨 준 지혜를 이용하여 힘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참입니다.
죄는 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지 않는 일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일이 곧 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황에 조급해 하는 마음이 죄의 지름길이며 세상의 것을 좀 더 탐하는 마음에서 죄의 첫 단계가 열립니다.
불뱀의 고통은 현재에 족하지 않았던 불평하는 마음이 불러들인 재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죄를 불러들이는 일이 없도록 마음의 불평을 단속하고 조급한 심사를 평화로 바꾸기를 바랍니다.
죄에 단호하여 죄악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차단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와서 함께 일하려 하십니다. 성령께 손을 내밀어 하느님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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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묻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받기 전에, 자신의 신원을 이미 밝히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곧 그가 누구에게서 왔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그의 신원을 알려줍니다.
나는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속해 있으니, 분명 올리베따노회 수도자입니다. 또 하느님께로부터 뽑혀 왔으니, 분명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고 위에 계신 분께 속하시니, 분명 위에서 오신 하느님이시고, 위에 계신 분의 아들이신 성자이십니다.
그런데, 나는 위에 속해 있는가? 그래서 위를 바라보며, 위에 계신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속한 이입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그분께 속해 있는가?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소유로 살고 있는가? 그래서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진정 그분의 소유, 그분께 속하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될까? 그렇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처럼 죽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톨스토이가 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예를 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제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임금님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먼저, 임금님은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 지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양치기는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임금님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양치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하느님은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교부들은 이를 ‘거룩한 교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분께 속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아, 하느님과 같아지도록 우리의 것을 받으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옷을 입히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옷을 입히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 인간을 하느님의 옷으로 입히십니다. 당신께 속한 당신의 소유로 만드시고, 우리를 당신께서 오신 ‘위’로 데리고 가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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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의 손길로 저를 바꾸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오니, 당신께만 속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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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8,28)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이어서 유다인들에게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간다."
"나는 죽으러 간다."
그때 '당신의 신원'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나다', 곧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Ergo sum qui sum)"
이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들었던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금방 잊어버리고, 고통 앞에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불만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불 뱀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간청하자, 구리로 만든 불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게 하여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게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구리 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들어 올린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신원,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주는 표지이며, 나를 살게 하는 표지입니다. 그러니 정성된 마음으로 하느님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특히 내게 고통이 찾아왔을 때 더 정성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통을 이겨내고 부활합시다!
오늘 복음 끝 말씀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요한8,30)
예수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던 반면에,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끝까지 믿지 않은 사람, 예수님을 죽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굳게 믿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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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요한 8,21-30 (예수님의 신원)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나는 가야 하니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를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소중히 여겨야 하니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니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절망하지 말아야 하니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유혹하지 말아야 하니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를 통해 몸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충실해야 하니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만족해야 하니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를 나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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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계기가 있어야 변화가 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계기가 없다면 변화의 이유조차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큰 변화도 자그마한 계기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2001년부터 시작했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은 당시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면서 신부 같지 않은 생활을 하는 저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했습니다. 부족한 실력을 채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기도와 묵상을 소홀히 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반 사회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이런 생활을 반년 정도 하다 보니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생겼습니다. 신부로 살려고 시작한 것이 매일 새벽마다 쓰고 있는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입니다. 20년을 꼬박 썼습니다. 어떻게든 신부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글 쓰는 재주도 없었고 게을러서 작심삼일에 그칠 때가 많았던 저의 모습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그런데 나를 변하게 할 계기는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계기로 만들어낼 변화의 크기가 아닐까요? 그러나 이 크기를 결정하는 시작은 늘 작은 계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계기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계기도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계기 하나하나에 집중할 때마다 변화의 크기는 더 커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적대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을 때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믿음 없음을 보시고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엄포를 놓습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이런 엄포가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구는 이 계기를 통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했고, 또 다른 이는 이 계기를 무시해서 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던 이들을 바라봅니다. 그 기적들도 분명히 자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변화를 가져올 큰 계기인데, 이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주님께서 주시는 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작은 계기도 소홀히 하지 않는 모습에서 큰 믿음을 키울 수 있고, 이로써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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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적 영향?>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는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란성 쌍둥이라 누가 누군지를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성격이나 하는 행동도 그리고 말투까지도 거의 똑같았습니다.
이 쌍둥이를 고등학생 때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얼굴만 똑같지 모든 점에서 달랐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란성 쌍둥이는 DNA가 똑같습니다. 즉, 유전적으로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똑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신체적 특성 중에서 90%만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전적 영향은 사춘기 때부터 쇠퇴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정신적인 요인, 환경의 차이 등을 비교할 때 일치의 확률이 현전하게 낮아지는 것입니다. 유전적으로 DNA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도 똑같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춘기를 시작으로 한, 자기 삶의 모습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유전적인 이유를 붙여서 자신의 부족함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지 않았을 뿐입니다. 유전적 영향은 사춘기 전에 이미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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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 마음과 하나되길>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으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갖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났다면 큰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없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기왕이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과를 보내되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엮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아래에서 왔다고 아래 것만 생각하고 아랫것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갇히면 죽는 것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 위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순응해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삽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이 세상에 옮겨 놓고자 하셨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 것에만 관심을 두어서 하늘의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8,29)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 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0)
사랑의 하느님을 잊지맙시다. 하느님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잊지 맙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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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봄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 봅시다-
어제는 참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입니다. 집무실의 하수구를 깨끗이 청소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친애하는 어느 본당 신부가 상담고백성사후 집무실의 하수구의 기구를 철물점에서 사다가 일부 교체하며 깨끗이 청소하여 웬지 모르게 불쾌하게 나던 악취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주고 받는 메시지입니다.
-“하늘의 영성뿐만 아니라 땅 현실의 디테일에 강해야 온전한 영성인 것 같습니다. 땅 현실의 디테일에도 강한 영적 사제가 되길 바랍니다.”
“하수구 정리를 해드려서 저도 마음이 개운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마음의 하수구 정리도 참 중요합니다. 오물의 악취보다 죄로 부패해가는 영혼의 악취는 더 고약합니다.”-
참 재미있는 상징적 배치가 오묘합니다. 위에는 제 고백상담실이요 아래에는 화장실입니다. 간혹 모르는 분은 집무실이자 고백상담실을 화장실로 착각하고 오는 분들을 보며 순간적 깨달음에 빙그레 웃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위에서는 입으로 영혼의 오물의 죄를 배설하는 고백상담실이고, 아래에서는 대소변으로 육신의 오물을 배설하는 화장실의 배치가 참 절묘하구나. 그러니 고백상담실은 영혼의 화장실이네!’
그러니 ‘영혼의 화장실’인 고백소에서 고백성사를 자주 보며 영혼을 깨끗이 할 때 죄의 악취는 사라지고 그의 인품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이 화두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속에서 죽을 것이다.”
하여 자기 죄속에 죽지 않기 위해 위의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어야 합니다. 위에서 오시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만날 때 구원입니다. 위에 높이 달린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우리가 늘 바라봐야 할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지혜의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은총으로의 축복된 삶입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 감으로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아래에서 살지만 위로부터 온 사람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주제는 ‘구리뱀’입니다. 기둥위에 높이 달린 구리뱀이 상징하는 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까맣게 잊고 당장의 곤궁함을 견디지 못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며 죄를 짓다가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을 대신하여 모세가 간청하자 구원의 처방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이 참 고맙습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에 물린 사람은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합니다. 그대로 구리뱀이 상징하는 바 구원의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회개와 구원의 표징인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불평하며 죄를 짓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예수님을 늘 바라봐야 합니다. 엊그제 교황님의 삼종기도후 복음 말씀 강론도 참 은혜로웠습니다.
“십자가의 표지는 전 세기를 통해 가장 탁월한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이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인정하게 된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가정 안에서, 십자가의 목걸이나 묵주반지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난다. 복음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생명나무 십자가는 사랑과 섬김, 무제한적인 사랑의 자기증여(self-giving)를 표현한다. 이런 십자가의 예수님을 늘 바라볼 때 1.가까이 있음(closeness), 2.연민(compassion), 3.부드러움(tenderness)이란 하느님 스타일의 세 삶이 특징이 형성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늘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왜 믿어야 하는지 다시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이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그대로 ‘나는 나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자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을 통해 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되니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예년보다 10일은 빨리 개나리, 진달래, 매실 등 무수한 나무꽃들에 이어 무수한 풀꽃들인 봄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의 죽음을 통과하여 봄을 맞이한 파스카의 꽃들이라 한결같이 청초한 아름다움입니다. 벌써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활짝 피어나는 봄꽃들을 보니 예전 써놓은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1999.3
그렇습니다. 봄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날 때 절망은 희망의 꽃으로, 어둠은 빛의 꽃으로, 죽음은 생명의 꽃으로, 불화는 평화의 꽃으로, 불평은 감사의 꽃으로, 슬픔은 기쁨의 꽃으로 피어나는 우리 영혼의 꽃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치유하고 자유롭게 하고 세상의 빛이,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하는 파스카 예수님과 일치의 삶입니다. 발광체發光體인 예수님의 반사체反射體가 되어 살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절정을, 부활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파스카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업되는(lifting up)’ 우리들입니다. 어제 받은 ‘세븐 업(Seven Up)’이 재미있어 소개합니다. 위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다 특히 노년분들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다음 사실을 꼭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1.클린 업(clean up); 몸을 항상 깨끗하게 하고 생활 주변도 청결을 유지하라.
2.리슨 업(listen up); 자기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상대방 말을 듣는 자세로 전환하라.
3.셧 업(shut up); 가능한 입을 다물고 지갑을 열라. 가능한 말을 아껴라.
4.드레스 업(dress up); 옷은 날개다. 아무렇게나 옷을 입지 말고 당당하게 잘 차려 입어라.
5.쇼우 업(show up); 자기를 적당히 노출시켜라. 일이나 모임이 있을 때 잘 분별하여 참석해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라.
6.오픈 업(open up);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 마음을 활짝 열라.
7.기브 업(give up);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주고 나누라.
그러고 보니 세븐 업은 빛나고 향기로운 인간품위를 유지하는 구체적 지혜로운 처방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당신을 닮아 향기롭고 빛나는 구원의 고양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이리라.”(요한12,32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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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존재'와 '행위'의 골자가 모두 드러납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유다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 엄청난 자기 계시의 발언을 하십니다. "내가 나"라는 말씀은 오래 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시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모세에게 당신을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드러내셨던 바로 그 거룩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하느님과 한 분이신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을 통해 당신이 하느님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로, 이스라엘의 구원이고 주인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예수님을 두고 왈가불가하며 좀처럼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던 유다인들이 이 말씀에 담이 서늘해진 듯, 곧바로 그분께 질문을 던집니다. 유다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역사 안에 남기신 이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오셨던 바를 다시 묻는 이유는, 그동안 그들이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탓이겠지요. 그리고 이 무지와 회피는 그들의 때가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 것이다."(요한 8,28)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께서 하실 행위를 언급하십니다. "들어 올려지심"은 광야에서 모세와 주님께 대들다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을 구해 준 구리뱀의 표상을 소환합니다.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 21,8)
제1독서는 이 사건을 다루며 구체적으로 구리 뱀이 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합니다. "물린 자"는 뱀으로 인해 상해를 입고 죽어가는 이들입니다. 원죄의 상처로 고통 받는 이들, 죄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 갇힌 이들, 악의 독소로 영혼의 생기를 상실한 이들이 뱀에 물린 이들입니다.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비록 죄의 상처로 죽음의 올가미에 걸려든 이들이라도 처방을 믿고 구리 뱀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바라봄"은 절실한 생의 욕구와 믿음, 희망의 표현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는 미사 초입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지요.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입당송)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와 구원 행위에 대해 명확한 답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한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 나무에 높이 달리시어 구원을 보증해 주신 어린양이십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 9,5)
유다인의 거친 질문을 가다듬어 우리의 목소리로 다시 주님께 여쭈어 봅니다. 그분께서 여러 방식으로 당신이 누구시며 왜 우리와 함께하시는지를 누차 밝히시는데, 마냥 의뭉하게 모르는 체하며 주님과 거리두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되지요. 이제는 정말로 진지하게 여쭙고 답을 찾고 자신의 목소리로 고백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어떻게 구원의 업적을 이루어가고 계시는지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존재와 이름이 하나이신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며 그분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듯, 우리에게도 그러하심을 생생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있는 나"이신 주님과 함께 머무르며 사랑으로 일치하여 하나가 되고자 나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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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교회 탄생도, 성자가 창에 찔린 예수성심 안에 제정된 것도 교회 탄생도, 성자가 창에 찔린 예수성심 안에 제정된 것도 십자가 아래에서였다.
교회가 탄생한 것은 십자가 아래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영적인 어머니로 주신 것도 십자가 아래에서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상에 살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신뢰하는 한, 결코 고아일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사도 성 요한이 성령의 성전인 하느님의 양자가 되어 천국의 상속자가 된 것도 십자가 아래에서였습니다. 지극히 위대한 성사들이 창에 찔린 예수성심 안에 제정된 것도 십자가 아래에서였습니다.
-「고통의 가치」: 제물의 내적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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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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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4snEYC-ce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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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요한 8, 29)
위로와
응원으로
봄꽃과
새순이 새롭게
번져간다.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시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함께 계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머무름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삶의
새로운
방향이다.
함께
머무르는
법을 다시
배운다.
머무름은
참된
결합이다.
결합은
집중이다.
좀더
하느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삶의 동반자로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삶의 모든
여정에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함께 하시는
사랑의 힘은
관계의 힘으로
드러난다.
사랑을
깨닫는 것이
치유이다.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곳은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이다.
최고의 동행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중한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십자가이다.
우리 삶에
십자가로
동행하시는
주님이시다.
울고 웃는
인생 여정을
응원하시는
사랑이시다.
++++++++++++++++++
(2)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 24)
우리의 죄를
결코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끝은 언제나
죄 속에서의
죽음뿐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적당히가 아니라
단호한 결단이
중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갈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반복되는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죄를 치유하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죄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고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애절한
예수님의 울림을
귀 기울여 들을
회개의 때입니다.
저마다의 마지막이
교만한 죄 속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 속에서
주님과 결합되는
마지막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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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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