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은 장식성을 배제하고 단출하고 소박한 게 좋다. 1889년 시인 에드워드 카펜터같이 소박한 거처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기다란 창문과 책꽂이 말고는 벽에 아무 장식이 없고, 소파에는 파랑과 노랑 줄무늬의 손으로 짠 리넨 커버가 씌워져 있으며, 참나무 의자에는 골풀 깔개가 덮여 있다. 집안일을 별로 할 필요가 없는 정도로 단출한 공간이다.”(톰 호지킨슨, 「언제나 일요일처럼」에서 재인용) 아무 장식이 없는 거실, 단출한 공간은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소박함 속에 소박한 삶이 깃든다.
주말 밤에 과음을 해서 지끈지끈 머리가 아픈 숙취라든가, 집 고양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든가, 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일요일은 대체로 평화롭다. 국도에서 자동차 접촉 사고가 일어나고, 로드킬 몇 건이 보고되었지만, 그건 늘 일어나는 일이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지도 않고,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8월의 날씨는 화창하다. 벌들은 활짝 핀 꽃들 위에서 붕붕거리고, 울울창창한 숲은 바람에 한가롭게 흔들리고 있다. 산, 사막, 바위, 바다, 별들은 제자리에 있다. 무엇보다도 돌들이 함부로 날아다니거나 움직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돌들은 인생보다도 나이가 많고 삶이 끝난 후에도 차갑게 식은 행성에서 살아남았다가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다시 깨어날 것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돌들은 죽음도 기다릴 필요 없고 표면 위로 모래나 폭우 또는 되밀려오는 파도, 태풍, 시간이 스쳐지나가도록 하는 일밖에는 아무 할 일도 없는 것들이다.”(로제 카이유와, 「Pierres」. 여기서는 다비드 르 브로통, 「느리게 걷는 즐거움」에서 재인용)
지금 이 순간 내가 인간―“약간의 충격, 약간의 타격에도 터질 수 있는 혈관걖걖걖자연 그대로의 상황에서는 무방비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고, 운명의 여신이 내리는 온갖 모욕에 고스란히 노출된, 허약하고 부서지기 쉽고 발가벗은 육체”(세네카, 「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문」, 여기서는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에서 재인용)―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 조엘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자. 평화로운 일요일의 금쪽 같은 순간들을 느긋하게 음미할 수 있다면 인생은 반쯤 성공한 것이다.
일요일은 침묵과 멈춤을 날실과 올실로 짠 피륙이다. 일요일은 ‘정직’과 ‘단순성’을 계명으로 삼는 종교로 개종하기에 좋다. 일요일에 우리는 별식을 즐긴다. 별식을 먹는 것은 배고픔이라는 가벼운 욕구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다. 먹는 것에서 관능적인 기쁨이 솟구쳐 오르고,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즐거움의 원천을 발견하는 일이다. 일요일에는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일요일의 품에 안길 때 우리는 수난과 질곡을 짊어지고 골짜기를 건너는 노동의 희생양이 아니라 풍요와 게으름을 누리는 왕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