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정말 슬픈 일이 많다. 아마 만 가지도 넘을 것이다. 아내를 잃고 슬픔에 빠진 한 남편은 “아내가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어요.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내는 어디에도 없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애들은 슬퍼하는 아빠의 눈치를 살핀다. 아빠를 더 슬프게 할까 봐 울지도 못하는 애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말기 암 환자들의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죽음의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살전 5:16). 정말 기쁠 일도 없는데 히죽히죽 웃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분열증 환자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남모르는 기쁨이 있다.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다. 생명에 대한 인간의 애착은 거의 본능적이다.
나는 의사로서 죽어 가는 환자를 여럿 보았다. 죽음이 임박하면 사람들은 초조해진다. 그래서 사이비 의료업자가 나타나서 생명을 한 주일이라도 연장해 줄 수 있는 약이라고 하면 거금을 지불해 버린다. 발악을 하며 가족들을 욕하고 원망하며 죽어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영생의 소망이 있는 성도들은 평안한 얼굴로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천국에서 만나자”라고 작별 인사하며 잠들듯이 떠난다.
영생을 믿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그것도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기쁜 소식보다도 더 기쁜 소식이다. 천국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장소보다도 100배나 더 행복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성경의 기록자는 천국을 묘사할 언어를 찾지 못해서 보석으로 꾸며진 곳이라고 묘사했다. 일상생활 중에도 주님은 좋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기도를 들어주신다. 이것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큰 기쁨이다. 기도 응답을 받은 성도의 기쁨은 누려 본 사람이면 다 안다.
주님은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곧 체포되실 것을 아시면서도 기쁨을 누리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갈릴리 바다처럼 인생에는 자주 풍랑이 인다. 그러나 한밤중에도 파도를 밟고 오셨던 주님이 우리가 고생하는 현장에도 오셔서 풍랑을 잠잠케 해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