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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도 긴 여행
아침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다,
준비한 음식을 차에 옮기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여러분의 협력이
쉽게 떠날 준비를 끝내고 각자가 편리한 데로 차에 편승을 하고 떠날 수가
있었다. 떠난 시간은 9시가 좀 시간인 것 같았다,
출발을 하면서 여주 휴게소에서 쉬어 가자고 하였다.
반품을 반납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즐기자는 우리의 휴가는 우리 본당 신부님의
배려와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니 이번 단체장 휴가는 특별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너무 서두르지도 말며 편안하게 여행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우리는 모두 받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여주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차에 올랐다.
비는 계속 장대비를 내리고 있었다.
영월 고 씨 동굴을 가는데 울고 넘든 박달 채를 지나는데 그 옛날에는 힘든
고갯길을 넘느라 한양에 과거를 보러 넘든 선비님들께서 피눈물을 흘렸다던
고개를 이제는 문화가 발달하여 터널을 뚤어 쉽게 지날 수가 있게 되어 지나면서
고씨동굴 앞에 이르니 비는 여전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을 보고 오후가 된 지라 점심을 먹고 고씨동굴을 보고 가자고
의견이 모였다. 우리는 산나물 비빔밥으로 통일하여 점심을 해결하고
커피 한잔을 마신 뒤에 고씨동굴입장을 하려고 매표에 갔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경비 절약이라 본다, 그래서 나는 경로 경로우대는 40일이 남았으니
조금은 내세우기가 쑥 쓰러 와도 장애인 증을 보이게 되었다,
몇 천원에 불과 하지만 내게는 그 한 푼이 새롭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고씨동굴은 4억 년 전 고생대의 모습 그대로 자연과 신비가 공존하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굴의 하나로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된 석회 동굴이다.
고씨동굴이란 임진란 당시 고 씨가 족이 피난하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밖에 이곳은 수 도장 등으로 이용되어 됐다고 전하는 곳이라 한다.
그런데 나는 동굴에 1.200미터 길이에 60분에 일밖에 안 되는 30미터를 들어갔는데
뒤 등골이 싸늘하니 기분이 안 좋은 상태를 직감하고 나는 돌아 나간다고 하며
밖으로 되돌아 나왔다.
한참 후에야 일행이 동굴을 나오니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하는데
오래된 굴인데도 답사하기에 불편하여 좀 힘이 들었다고 들 하였다.
예산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편의를 제공할 수가 없어서인지
관광객이 답사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을 배려하지 않은 것에는 좀 불만이다.
강원도 산길을 돌고 돌아 영월에 김삿갓 문학관을 방문하였다.
우리는 김삿갓 동상하며 박물관에는 김삿갓 살아온 흔적을 영상으로 보여 주는데
방랑시인 김삿갓은 조선 순조 11년(1807) 안동 김씨 김 안근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김삿갓은 20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조부를 비판하는 글로 장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아 병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집을 떠난다.
22세에 영월의 집을 나서 삿갓을 쓴 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많은 시를 남긴다. 서민들의
밑바닥을 누비면서 그 실상을 시로 담아 서민문학의 새 장을 열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묘역 주변은 장승과 솟대, 돌탑, 김병연의 시비 등으로 조성돼 있어 볼거리가 많았다.
김삿갓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분도 있었고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인 걸 어쩌랴.
나는 이곳저곳에 다니며 추억 거리를 담아 보느라 노심초사하였다. 대부분 산과
구름을 담기에 바쁘고 김삿갓 생가 아래 묘를 찾아갔다가 계곡에 흐르는 물에
발도 담가보고 어느 형제가 소주 한잔을 주어 마시니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살살 넘어가는 술 잡고 노닐고 싶어라,
태백시에서 운영하는 숙소에서 짐을 내리고 쉬면서 자매님들의 저녁상을
준비가 되는대로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마셨다. 나는 방에서 깨어나고 보니 내가
지난밤도 코를 골았구나 하는 자책을 느끼게 되었다, 옆에서 누군가가 잤는데
아무도 없으니 내가 코를 골아 시끄러우니 피해 갔다는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을
가슴에 묻고 있는데 안 그랬으면 좋을 번 한 자리에서 코를 많이 골고 자니
같이 잘 수가 없다는 얘기가 웃음을 선사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고 보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세면장이 협소하고 물도 차고 하여 나는 샤워를 포기하고 세수만 간단히 하고
미사에 참석을 하였다. 오늘 미사에는 옆집에 든 일산에서 오신 수녀님 한 분과
자매님 일곱 분이 함께하였다. 미사가 끝나자 우리는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 비 내리는 길을 걸어 태백 석탄박물관을 갔다.
석탄은 우리 가정에 유일한 부존 에너지 자원으로 우리 생활에 연료 공급과 국가
모든 산업에 중추적인 역할로 국가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여 물질문명의 발달로
급격히 줄어들고 그간의 석탄산업 변천사를 한 곳에 모아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도록 하고 후세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학습장으로 활용하고자 태백 석탄박물관을
건립하여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와 후세에게 볼거리를 받고 있는 것이란다,
제일 전시장에서 제8전시장까지 구경하는 동안 많은 것을 보며 사진에 담아보기도
하였다. 나는 연탄을 사용하던 시절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때문에 죽음의 기로에서
3일 만에 깨어난 기억이 새롭게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있었다. 병원 두 곳에서
의사는 사망을 하였다며 장례를 치르라고 하였는데 동생 시어머님이 살려야
한다고 택시는 가버렸으니 지게꾼을 불러 지게꾼 등에 업혀 도립병원 응급실에
침대에 얹어 놓고 깨어나기만 기다렸다는 뒷얘기를 듣고 사둔 할머니의 은혜 늘 감사
하게 마음에 담고 가슴에 묻어 왔거늘 그분은 소식도 없이 세상을 뜨셨으니 그
은공을 어느 세월에 갚을까?
돌아오면서 가까운 곳에 단군의 동상과 비각을 둘러보고 야생화를 보며 숙소에
와서 차에 올라 점심은 콘 두레 만 두레 밥을 먹기로 하였다. 산속 2차선 길을
돌고 돌면서 얼마를 갔는지 분간이 안 되는 곳에 허름한 아주 태백의 전형적인 허술한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서니 내실이나 밖이나 옛날의 주막집 같은 방에는 밥상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우리는 한 상에 네 사람씩 앉아 차려주는 콘 두레 밥을 큰 사발에
이미 콘 두레와 밥이 골고루 섞여있는 밥을 자기 양껏 옮겨 담고 처음에는 된장국에
다음에는 간장에 비벼 드시라는 데로 하여 먹는데 맛이 일품이었고 김치와 총각김치가
무공해로 만들어서인지 너무나 입맛에 땅겼다.
내가 정선 시장에서 먹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음식이라 서울에서 가까우면 우리 집
루시아와 꼭 한번 오고 싶은 곳이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으니 정말 싫은 비였지만 더운 줄 모르고 다닐 수 있어
감사하는 마음이 앞선다. 용연동굴을 구경 가는 데는 전기로 움직이는 차를 타고
올라가서 동굴에 들어갈 때는 안전모를 쓰고 안전 수칙을 듣고 들어간다.
나는 경로우대로 활인 아니면 무료로 입장을 한다. 용연동굴은 철책으로 계단을
잘하여 놓았기에 끝까지 돌아 나오며 묘하게 보이는 석순이나 모형을 사진에
담기에 바빴다,
다음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역 추전역을 갔다.
이역은 1973년10월16일 험준한 산악과 협곡을 따라 부설된 태백선이 개통되면서
해발 855미터의 높은 지대에 있는 싸리 밭골이라 전해 내려옴에 따라 추전역이라
이름 지었단다. 추전역에서 기찻길과 驛 舍를 사진에 담고 돌아 나왔다.
이번에는 한강 발원지를 찾아간다.
계곡에는 물이 마른 곳이 있어 살펴보니 물은 자갈과 돌 틈 사이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黃 池 성당에 주차를 시키고 낙동강 발원지를 찾아갔다.
낙동강 발원지는 黃 池 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낙동강 천삼백 리로부터 시작된 발원지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신라 가야의 문화를 꽃피우며 겨레의 숨결을 같이한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 전설에 의하면 옛날 황 부자의 집터인데 어느 날 노승이 시주를 청하자
외양간에서 두엄을 치우고 있던 인색한 황 부자는 시주 대신 두엄을 한 가래
퍼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본 며느리가 노승에게 사죄하며 용서를 청하니
노승은 며느리가 무슨 죄가 있느냐 싶어 따라오노라 뒤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돌아보지 말라라. 신신당부를 하였는데 뒤에서 천지개벽하는 요란한 소리에
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단다. 황 부자 집은 간 곳이 없고 웅덩이만 남고 며느리는
업고 가든 아기와 같이 망부석이 되었단다.
연못 둘레가 100미터인 上 池와 中 池 下 池로 구분되고 하루 5.000톤의 물이 용출되고
있으며 이곳은 황 부자 집터가 연못이 되었다고 黃 池라 상지는 집터 중지는 방앗간
터. 하지는 화장실이었다고 전해진다. 황지 주변에는 黃 池 시장으로 많은 건물 안에
위치하여 있음이 특이한 낙동강 발원지로 알려졌다.
우리는 黃 池시장에서 삼겹살을 사들고 태백숙소에 와서 밖에서 도람 통을 반으로
절개한 통에 숱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굽는데 신부님은 고기를 안 드신다고 하시며
우리가 먹는 모습 보시기에 좋아서 불목을 하고 계셨기에 우리는 상추에 싸서 술
한잔에 취하며 즐겁게 지냈는데 이슬비가 내려 흥취는 더 했던 것 같다.
오늘은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일찍 자리에 들었다. 온종일 피곤하게 다니며 구경을
했으니 말이다,
8월29일 날이 밝았으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곳을 떠나 설악으로 가야 하니 짐을 차에 실어야 했는데 비가 내리니
어려움이 많았다. 여러 형제 자매님의 협력이 있었기에 비를 맞으며 하는 일이
순조롭게 끝을 내고 출발을 하는데 굽이굽이 안개 낀 산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망 항 재 (정선군 고한읍 산상의 화원 해발 1330 미)를 올라 바람이 너무나 세차게
불어 감자녹말로 만든 떡을 회장님이 사 오셔서 맛을 보며 하산하였다,
산속에 집들은 옹기종기 모여 사는데 허름한 판잣집과 홉사 하였고 지붕은 대부분이
스렛트로 덮여 있었다, 얼마를 내려오니 정암사가 보이니 잠시 둘러보았다.
추녀에 달린 풍경을 찍고 가는 길옆에 백두대간 함백산 사북탄광 탄광촌 사택이
주인을 잃은 체 낡은 모습이 보였다. 주변은 검은 돌들이 흐트러져 있어 탄광을
연상케 하였으나 주인 없는 빈집이 초라하게 보였다.
강원 랜드를 지나며 많은 사람이 허황된 꿈을 불사르고 인생을 망치고야 돌아서는
씁쓸한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카지노 주변에는 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전당포가
우후죽순처럼 늘어서 누구를 유혹하는지 내온 싸인 만 번쩍인다.
화암동굴을 지나며 얼마 전에 다녀갔음에 눈인사를 내리고 길가에 옥수수밭
수수밭이 눈길을 끓었다, 메밀꽃이 하얗게 피어 비를 맞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가누며 정선 시장입구에 식당으로 들어가 올 갱이 국밥에 조 겁 데기
술을 마시고 시장을 둘러 본 다음 출발하였다.
정선 레일바이크를 타는데 비가 내리니 우의를 입고 4인용을 타는데. 나는 다리가
불편하여 앞에 앉아가고 뒤에 탄 두 사람은 자전거 타는 식으로 발로 저어가면
되는데 거의 내리막길이니 많은 힘을 들지 않아 보인다.
레일 바이크는 미국 골드러시 시절 부설된 철로가 그 기능을 잃자 버려진 철로에서
무동력으로 사람들이 즐기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레일 바이크의 효시라고 할 수 있으며
시속 15-20KM 정도로 주변 경치를 즐기며 갈 수 있고 정해진 레일 위를 사람의 힘으로
운행하므로 남녀노소 누구나 안전하게 탈 수가 있는 온 가족 레저 스포츠라 한다,
옛날 기차가 다니든 철로를 이용하여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는 7.2K인데
가는 동안에는 굴(터널)이 둘이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굴이 길었는데 정선아리랑이
구슬프게 울려 퍼지고 있어 애간장을 다 녹이는 듯싶었다.
아우라지 역까지 오는데 비바람이 불어 춥기도 하였고 따스한 커피 한잔으로 훈훈한
가운데 다시 되돌아올 때는 두 칸의 작은 열차를 타고 왔다,
설악으로 가는 길에 차 안이 춥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휘 타를 틀기까지 하였다.
비가 내려 시원한 덕분에 더위를 모르고 지날 수가 있어 다행으로 보인다.
오장 폭포수에서 기념사진을 각 동에 단체장을 모아 찍는데 1동은 나
혼자는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가슴에 묻어 버렸다,
5시가 되면서 비는 끝이고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그냥 바라만 보고 지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고 푹 빠져 쉬어 가고 싶다는 마음이 나만은 아니겠지만 운전을 하시는 회장님은
얼마나 피곤도 하시고 힘드실까? 마음속으로만 미안한 생각을 가져 본다.
38 휴게소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허리도 펴보고 바다의 비릿한 향도 마시고 지는 해가
아쉬운 시각에 물 치 항에 활어 장에 갔다. 미리 전화를 하였기에 차려놓은 상은 우리를
기다려 반겨 주었다, 술과 회를 먹고 매운탕에 밥까지를 먹었는데 운전을 하시는 회장님
외의 몇 분은 좋은 안주에도 술을 드실 수가 없으니 마신 우리는 또 한 번 미안한 마음을
마음으로만 간직하였다.
대명콘도에 와서 짐을 풀고 쉬었다.
설악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날이 밝자 미사를 드린 다음 밥을 먹고 설악산에 안
가보신분만 몇 분만 가고 나머지 사람은 자유 시간이었다. 오늘은 비가 아니
오고 있다. 나는 미시령 고개에 가는 형제를 따라 갔는데 바람도 심하게 불고 몹시
추웠다, 밑에 터널을 뚫기 전에는 모두가 이리로 올라 다니었으니 쉬어 가는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심심치 않게 팔렸을 터인데 지금은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니 어려운
실정일 것으로 보여 진다,
차에 부속을 갈아 끼우고 아래로 내려오니 시간은 남았다.
그래서 주변을 다니며 구경을 하고 12시에 들어가 설악산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점심을 들고 대명 콘도를 떠났다. 갈 때는 미시령 고개로 아니 가고 터널로 가니
잠시 잠간사이에 백담사 주차장에 당도하여 이번에도 백담사를 안 가신 분들만
갔다. 신부님은 사진을 찍어 주신다며 함께 동승하여 가셨으니 신자들을 위한 배려가
대단함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는 주위를 돌아보고 막걸리도 한 잔하고 주차장에
자리를 펴고 앉아 맥주도 마시고 안주는 옥수수였다, 일행이 돌아 온 다음에 출발 하였다,
오면서 원통을 지날 때는 64년도에 군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졸병으로 전입하여 힘겨운 군 생활이며 보초를 서면서 고향생각에 눈시울을 적시든
그때 그 시절이 그래도 좋았던 것은 부모 형제가 고향에 있다는 자부심 때문도
있겠지만 피 끓는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스쳐가는 원통을 돌아보며 인제를
지나 홍천으로 가면서 피곤에 눈을 감고 있었다. 양평에 와서는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여 비를 맞으며 양평군 옥천면 막국수 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서울로
달렸다,
서울에 오니 서울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3박4일 동안 좋은 구경을 많이 하였고 처음으로 강원도에 볼거리가 많은 것을
알았으니 이 모두가 우리 신부님의 도움이 아니면 가능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하느님을 위서 무엇을 했기에. 본당을 위하여 무엇을 했기에 이처럼 좋은 여행을
다녀올 수가 있었나? 감사한 마음을 드리며
나는 단체장도 아니면서 회장님의 양보와 신부님 이하 여러 단체장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어찌 꿈이라도 꿀 수가 있었겠는가. 감사합니다.
평생을 통하여 이러한 짧고도 긴 여행은 할 수 없음을 알기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첫댓글 관광하고 고적답사하고 기행문과함께 감사드립니다
아~공 한참 읽었답니다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 ~^*^
여행다녀오신 소감을 쓰셨군요 읽어보는순간 민정이도 그곳에 간기분이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복 많이 받으시는 금요일이 되시구요늘 건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