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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3일 수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콜로 3,1-11
복 음 : 루카 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아이가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습니다.
이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절대 넘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고는 이를 위해 온 힘을 기울입니다.
아이가 일어나 앞으로 한 발짝 가려고 할 때마다 부모는 바로 아이를 안아 올렸습니다.
혹시 넘어져서 다치거나 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겪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넘어져도 바로 일어나고, 아무렇게나 낙서하면서 글을 배우고,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면서 식사 도구를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는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몸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실패를 두려워하며 실패를 통한
성장보다 제자리 지키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만을 추구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조건 기쁨과 행복의 삶일까요?
주님께서는 무조건 좋은 것만을 주셨을까요?
우리를 위해 실패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왜 잊어버릴까요?
실패를 주셨다고 해서, 고통과 시련을 주셨다고 해서 주님을 떠나겠다고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으며 행복이 아닌 불행을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떤 실패에도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우선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을 향해
“행복하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솔직히 그리 행복해 보이질 않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 눈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향해서는 “불행하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향해 좋게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통해, 또 실패를 통해서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왜 우리의 시선과 다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행복 선언의 주인공들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불행 선언의 주인공들은 무엇이든 채워져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굳이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며,
그 반대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까?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고통과 시련,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 성공이란 세월이 흐를수록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나를 점점 더 좋아하는 것이다(짐 콜린스).
천상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행복
반영억 라파엘 신부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하여라.’ 그래서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머리 돈 여자!’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
‘머리 돈 여자!’ 정신없는 여자와 살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하고
오직 사랑만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며 사랑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줍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길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유명인이나 부자 되거나 권력을 쥘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시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기쁨과 마음의 평화가
여러분을 지탱하는 내면의 힘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콜로3,2),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 입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콜로3,9-10).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삶의 만족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불행을 선언하시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려 회개하도록 하는 경고입니다.
앞으로 올 세계를 희망하지 않고 현세만을 생각하는 만족이 불행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께 맡기고 의지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행복이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 넘어지면서도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단정지을 일이 아닙니다.
거죽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행복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8월 23일은 저의 사제서품 32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LA에 신문 홍보를 위해서 가있었습니다.
몇몇 교우 분들이 자리를 마련하여서 ‘맘모스 산’에 갔었습니다.
맘모스 산은 해발 11,000피트가 넘는 높은 산입니다.
마모스 산은 환경보호를 위해서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셔틀버스에서 ‘우리는 운전사를 원합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보았습니다.
저는 광고 문안을 보면서 파격적인 조건에 놀랐습니다. 조건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경험자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비용을 들여서 훈련을 시켜 주겠다.
시급은 21불에서 27불을 주겠다. 정년퇴임 시 연금을 보장하겠다.
스키장 회원권을 무료로 주겠다. 각종 복지제도를 실시하겠다.
년 1,000불의 상여금을 보장하겠다.”
대충 읽었지만, 파격적인 조건이었고, 호감이 가는 조건이었습니다.
제가 운전을 할 수 있다면 지원하고 싶은 조건이었습니다.
신문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서 직원들의 근무 일수를 줄인 저에게는 꿈과 같은 조건이었습니다.
저는 교구 성소국장으로 5년간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는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원했습니다.
교구와 신학교에서는 지원자들 중에서 신학생을 선발하였습니다.
40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교구는 신학생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신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감소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인구의 감소입니다.
인구의 감소로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신학생 감소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인사적체로 인한 사제들의 의욕 감소입니다.
오랜 기간 보좌신부로 지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보좌신부님들의 의욕이 감소하였고,
이는 신학생 감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 번째는 가정의 문제입니다.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님은 학업을 위해서라면 성당에 가지 않는 것도,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눈감아 주는 현실입니다.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고,
가족이 신앙 안에서 대화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성소의 씨앗은 가정에서 키워져야 하고, 교회에서 돌봐주어야 합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우리는 신학생을 원합니다.’라는 모집요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조건이면 좋을까요?
“성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겠다는 열정이면 좋습니다.
사제가 될 수 있는 소양과 지식은 신학교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성지순례를 비롯한 해외연수의 기회를 주겠습니다.
대기업은 아닐지라도 중소기업 수준의 급여를 책임지겠습니다.
부모님의 의료비용을 교회에서 부담하겠습니다.
보좌신부 근무 기간을 10년 이내로 줄이겠습니다.
휴가를 비롯한 각종 복지제도를 마련하겠습니다. 차량지원을 교구에서 하겠습니다.”
교구와 본당 그리고 가정에서 사제성소를 위한 고민과 대책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국립공원에서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가 꼭 필요했기에 파격적인 조건으로 모집 광고를 했던 것처럼
교회도 사제성소가 정말로 필요하다면 그에 합당한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을 모았을까요?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과 표징으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함께 지냈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의 기적과 새로운 권위를 지닌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시면 그 옆에, 자리에 있겠다고 서로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도 나를 떠나겠느냐?”라고 하셨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선생님을 두고 저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나에게 와서 쉬어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마라.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함께 하는 것, 말씀과 표징 그리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흠뻑 빠져서 제자가 된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받은 이도 할례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성직자들이, 수도자들이, 교우들이 예수님께 흠뻑 빠져서 산다면 사제성소는 늘어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곧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라는 두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이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중에서 마지막 것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 맞추며 눈치 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인간관계나 단순히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혹은 그저 오손도손 미워하지 않고 재미나고 즐겁게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당신이 하신 것처럼,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진정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신다. 루카는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20절)
이것은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죄에서 가난한 사람, 악덕에서 가난한 사람,
세상 우두머리에게 빼앗길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요한 14,30 참조).
부유한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분처럼(2코린 8,9 참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우리가 몸과 마음, 모든 힘을 다하여, 가진 것을 다해서
하느님께 충실하고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생활할 때,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는 바보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영원으로 그리스도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물론 현세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원하신다.
문제는 하느님과 세상의 가치관이 마음에 어떠한 순서로 정리되어있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면 모든 것은 잘 되어있는 것이다.
반대로 재물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하느님께나 인간에게나 제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진정으로 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아들 때문에 박해도 당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살 수 있다.
우는 것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의 잘못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진정으로 울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울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유하다는 것은, 마음이 세상의 일로 차 있으므로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가실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일에 즉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 때문에 결정적으로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복음에 나오는 불행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뜻하며, 애통하여 소리친다는 뜻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바람직한 태도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보듯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던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선행을 하는 데 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행복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명 강론가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생명력이 있었으면
사람들은 그에게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가 강론을 펼칠 때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그의 입만 바라봤답니다.
그리고 마치 금실처럼 술술 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듯,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고 눈물을 흘리곤 했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삼십 년 가까이 강론대에 서고 있지만 설 때마다,
늘 고민되고 부담스러우며 언제나 두렵고 떨립니다.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없습니다.
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준비가 덜 돼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하느님께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펼치려는 강론과 내 삶 사이의 큰 괴리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강론이
그토록 감동적이고 생명력이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강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선포하는 말씀을 온몸으로 살아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면서 묵상하면서 강론을 열심히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렇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며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명 강론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사제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론대에 섭니다.
때로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참 어려운 것이 강론입니다.
길면 길다고 뭐라 하십니다. 짧으면 준비 안 했는가보다고 수군댑니다.
살짝 양념이라도 치려면 또 삼천포로 빠진다고 걱정들 하십니다.
강론을 듣는 대상은 너무나도 천차만별입니다. 누구에게 수준을 맞춰야 할지 언제나 걱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성당을 찾아오면서 가장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피곤에 지친 일상에 위로와 힘을 건네주는 맑은 샘물 같은 신부님들의 한 말씀입니다.
그 한 말씀에 큰 위로를 받고 다시금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합니다.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인, 흥미진진하면서도 의미로 충만한 신부님들의 한 말씀에
신자들의 한 주간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니 강론 더 잘 준비해야겠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께서는 얼마나 강론 준비에 철저했는지 모릅니다.
강론에 앞서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지금, 이 시대, 이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고민하고 성찰했습니다.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섰고,
자신의 삶을 통해 걸러낸 순금 같은 강론을 사람들에게 건넸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분의 강론 말씀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강론하는 동안 회개의 눈물을 흘렸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났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기도 중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 하느님의 음성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 대상이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말씀을 전했고, 언제나 꿋꿋하고 떳떳했습니다. 그야말로 쌍날칼 같았습니다.
그 옛날 선포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 우리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아 신기했습니다.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을 본받아
우리들의 입에서 진리와 사랑의 메시지, 희망과 격려, 기쁨의 말들이 흘러나오길 바랍니다.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위로의 말로 인해
우리 이웃들의 삶이 한층 밝아지고, 행복해지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른 배로는 기도할 수 없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한적한 산에서 밤을 새워 가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다음 날 12제자를 따로 불러 사도로 세우셨다.
예수의 일행이 산을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보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뿐 아니라
이방인 지역인 띠로와 시돈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가르침을 목말라하고, 병고에 허덕이고,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를 고쳐 주셨다.(루카 6,12-19)
이제 예수님의 설교가 시작된다.
청중은 12제자, 다른 제자들, 그리고 모여든 백성들이다.
오늘 복음은 루카가 전하는 예수님의 “평지설교”(6,20-49)의 시작이다.
루카복음의 평지설교는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5-7장)에 비해 그 분량이 매우 적다.
루카의 평지 설교는 행복 선언(20-23절), 불행 선언(24,26), 원수 사랑과 보복 금지(26-36절),
형제에 대한 판단 금지(37-42절),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에 관한 내용이다.
마태오 복음이 산상설교의 첫머리에 “9개의 행복 선언”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
루카는 4개의 행복 선언과 4개의 불행 선언을 들려준다.
原典이 되는 예수 어록에는 4개의 행복 선언이 전해지는데,
마태오는 5개를 추가하여 9개로 편집하였고,
루카는 4개를 충실히 옮겨 쓰면서 4개의 불행 선언을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행복(불행) 선언의 짜임새를 보면, 우선 對象이 언급되고,
다음에 행복(불행) 선언이 따르고, 마지막으로 그 이유가 될만한 補償이 언급되는 구조를 이룬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이 구조를 따라 선언문을 살펴보자.
마태복음의 9개 행복 선언 :
① 마음이 가난한 사람 – 하늘나라
② 슬퍼하는 사람 – 위로
③ 온유한 사람 - 땅
④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만족
⑤ 자비를 베푸는 사람 – 자비
⑥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하느님 대면
⑦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 하느님의 아들
⑧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 하늘나라
⑨ 예수님 때문에 모욕, 박해, 비난을 받는 사람 – 하늘의 큰 상.
루카 복음의 4개 행복 선언 :
① 가난한 사람 – 하늘나라
② 굶주린 사람 - 배부름
③ 우는 사람 - 웃음
④ 예수님 때문에 미움, 추방, 모욕, 누명 받는 사람 – 하늘의 큰 상
루카 복음의 4개 불행선언 :
① 부유한 사람 – 위로 끝
② 배부른 사람 - 굶주림
③ 웃는 사람 – 슬픔과 웃음
④ 칭찬받는 사람 – 거짓 예언자와 동급
예수께서는 지금 가난함, 굶주림, 울음, 미움과 추방, 모욕과 누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으로 선포하셨고, 그 반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셨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이런 상태 자체를 두고 행복하다고 선언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좋을 ‘부정적인 것’, 즉 惡의 범주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부유함, 배부름, 웃음, 칭찬 그 자체를
불행한 것으로 선포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되려 “긍정적인 것”, 즉 善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요소들이다.
그런데 왜 부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행복한 자로,
긍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불행한 자로 선포되는 것일까?
그것은 각각의 상태가 가지고 있는 수용 능력 때문이다.
가난함과 부유함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잘 수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세에서 물질의 부유함과 넉넉함을 누리는 사람에게
청빈을 요구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회개의 경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른 배로는 기도할 수 없다.”는
브라질 까마라 대주교의 말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오 베르타 수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기도할 때 은연 중에
내가 아는 하느님을 그려놓고 그분을 마주하며 앉아 기도할 때가 많았다.
지식적으로 배우고 들은 하느님,
내 머릿속에 있는 하느님,
혹은 과거에 만났던 하느님의 모습이 고정되어
기도 중에 나는 하느님을 잘 아는,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유한 자의 기도는
단지 자기內 생각과 기억의 메아리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마음이 가난한 기도가 있다.
내가 알고 만나선 하느님 상이 부서지고,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 수 없음을 철저히 인정하는 기도,
맨바닥에서 온전히 그분을 찾는 기도가 그것이다.
그러할 때 하느님께서는 침묵의 여백 중에
당신의 나라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신다.
그리고 가난한 이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게 된다.
[출처] 루카 6,20-26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