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답서스는 날개를 단 흔적이 있다
노향림
베란다 창틀에 쿵! 무언가 부딪치고
빨래 건조대에서 표백되어 가던 햇빛 몇 벌이 출렁거린다.
위층에서 던진 화분이 떨어지고
나는 난간에 걸린 푸른 줄기를 순간 낚아챘다.
날개는 많이 상해 있었지만 잔뿌리와 줄기는
몇 몇 남아 있었다.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뒤 며칠 만에 깨어났다.
기진해 있던 입에서 뭉친 숨길처럼 광합성을 토해내고
철봉 하듯이 제 몸을 늘이는 것이 아닌가.
잎이란 잎에서는 푸른 박쥐들이 튀어나와 날아올랐다.
날마다 허공을 붙잡고 제 몸 늘여 내려오더니
우리 집 베란다를 곧 진초록으로 물들여 놓는다
잠도 자지 않고 제 몸을 늘이고 늘이는
그를 나도 모르게 그만 꺾고 또 꺾어내었다.
자고나면 생기고 생기는 매듭들
통제할 수 없는 그 생명력을 보는 건
왠지 서러운 일이었다.
어느덧 몸 수척해진 스킨답서스
그는 언제고 날아갈 태세로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미세먼지 없는 어느 날 위층 요란한 곤돌라 소리에
열린 창문으로 박쥐 떼처럼 그것들이
정말 날아가 버린 건 얼마 전이었다.
빈 하늘뿐이었다.
⸺계간 《문파》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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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 / 1942년 전남 해남 출생.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K읍 기행』 『눈이 오지 않는 나라』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바다가 처음 번역된 문장』 『푸른 편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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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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