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3 주일낮설교 /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요1서 3:1,2 /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다(3)!!
(♡ 0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0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 오늘 말씀
오늘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존재감, 자존감, 의미, 가치, 삶의 방향을 연관하며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 태국 - 학교에서 돌아오는 여러 명의 아이가 온몸에 진흙을 묻히고 돌아올 때 어머니의 반응은? .....“웃음이 나와?”
그런데 그 순간 어머니에게 영상을 보여줍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바퀴의 짐수레를 싣고 가시는 아저씨가 넘어지며 그 위 물건들이 진흙이 묻게 되는데... 그것을 본 아이가 놀라서 그것을 도와주고 자랑스럽게 흙이 묻은 모습으로 기다리는 엄마에게 온 것입니다.
-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고, 그런 사람 즉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 월남전 이야기
1965년에서 73년까지 8년 동안 월남전에 35만 명이 참전하였는데... 여기에서 승리한 이유는?
잘 훈련된 좋은 군인들을 보냈고, 6.25와 빨치산(파르티잔 : 유격전 요원. 지리산 등 무장공비와의 전투) 전투 경험을 가진 지휘관들을 세워 잘 지휘하게 하였습니다.
총 5천여 명 전사, 1만여 명 부상.
(전투 처음에 1대 25로 싸우더니, 끝날 때는 1대 100이 됨. 한마디로 저승사자. 야간매복작전에 강함. 베트콩 머리 잘라 매달아놓고 배낭에도 걸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미군이 베트콩 진지를 12년 동안 폭탄과 돈을 써가며 생명 날리며 정복 못한 것 2시간 만에 해결할 정도로 잘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희생으로 경제지원자금 받고 일부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였습니다.
- 짜빈동 전투 ;
1967년 1월 베트콩들이 우리 청룡부대 60명 정도를 매복 기습하여 죽이고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2월 14일-15일 해병대 부대 하나를 전멸시키자고 공격 개시하였습니다. 이것이 해병대 청룡여단 11중대(당시 증원되어 약 300명)가 베트콩과 만나게 되는 짜빈동 전투입니다.
11중대는 300m × 200m의 타원형 전술기지를 만들었는데 (전형적인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인데... 기가 막힌 진지. 미군과 남베트남 전략은 물량을 중심으로 수색 격멸 작전인데, 반면 우리나라는 수비형 구조입니다.)
이중참호 만들고, 외곽에 2중~5중 정도로 철조망 두르고, 네이팜탄과 조명탄과 조명지뢰, 크레모어 등 설치. 최소 3일분의 식량과 탄약을 비축하였습니다.
1,2,3소대 중에 베트콩들이 주로 좌측 청룡부대 3소대 쪽으로 몰려왔습니다. - 계속 몰려오니까 옆에서 분대급 병사들을 지원받으며 싸웠고, 약 20미터 앞쪽까지 적들이 그들의 동료시체를 밟고 들어와 싸우다 백병전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베트콩의 대전차로켓포 쏘는 것들을 추적해 잡기도 하고,
백병전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일병 등이 싸우다가 결국 수류탄 맞고 피투성이 된 후에 수류탄 까고 베트콩 5명과 함께 죽기도하고, 또 다른 병사는 총에 맞은 후에 죽은 체 양손에 수류탄을 쥐고 누워 있다가 3명과 함께 폭사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큰 위기는 적의 포탄이 무기고에 떨어졌으나 모래가 튀면서 덮어서 확산 막아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후방의 포병부대에 지원공격 좌표를 정확히 불러 포로 화력지원을 하게 한 중위도 있었고, 내부까지 들어온 베트콩들을 그들이 한 나뭇가지 위장으로 잘 구별하여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도망치는 베트콩들을 끝까지 쫓아가 사살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과는 적은 1중대로 약 10배되는 3천 명의 연대급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우리측 피해는 15명 사망. 33명 부상. 적은 수백 명 죽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표창 받았고, 미대통령도 표창장 수여하였으며, 미군 교과서에도 실린 전투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베트콩들은 한국군과는 가능한 부딪치지 마라는 전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 사람,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해병대라는 자부심, 긍지, 자존감이 있기 때문에 멋지게 싸운 것입니다.
(참고 ; 저는 지금도 육군제3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200km 행군, 전방에서 다리도 못펴고 작은 침대에서 6개월을 산 것 등 고생하며 지내던 것이 삶에 강한 의지를 준다.)
(예)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 6천여 명... 이들은 대통령궁 지키는 잘 훈련된 근위대들이었고, 이들이 6.25 때 참전하여 253전 253승하며 싸운 아주 용감한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1975년 공산정권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을 도왔다고 연금 등도 못 받고, 오히려 탄압받았고, 감옥까지도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91년 민주화정권 들어섰으나 삶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라 우리나라가 기억하고 초청하고 돕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긍지, 자존감 - 우리보다 못 살고 어려운 나라. 이 나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젊은 날에 희생한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고, 평생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왔습니다.
총탄이 몸에 박히고, 몸을 가르고 뚫고 지나갔지만 자랑스런 맘을 가지고 살아왔고, 이제는 우리가 이들을 도울 차례입니다.
(예) 어느 고지식한 이씨 아저씨 (이창업) 이야기
일제 말기 양조장 경리들은 여러 가지로 횡령과 장부누락 등이 관행이었고, 이렇게 속이면서 일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이창업이라는 사람은 단돈 1원도 속이지 않는 정직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때 일하던 대구의 조선양조장이 1942년 새로운 사장에게 인수되었어도 그의 평이 좋아 사장도 양조장과 과수원 경영까지 맡기고 서울에서 무역업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6.25 전쟁이 터져 피난을 미처 떠나지 못한 사장과 가족이 운전사의 기지로 간신히 살아서 폐허가 된 서울 사업장을 뒤로하고 대구의 양조장으로 내려갑니다.
사장은 전쟁으로 인해 한 푼도 융통이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양조장에 와보니 이창업씨는 피난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계속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장이 운영이 어땠나 묻자 군납으로 영업이 잘되었다면서 3억 원을 내놓았습니다.
사장님은 울먹이며... “야, 이 친구야 자네가 이렇게 큰돈을 ...”하고 말하며 너무 고마워했습니다.
그 후 3억을 종자돈으로 무역업과 제조업으로 세계적 기업 삼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양조장 사장의 이름이 호암 이병철 회장입니다.
후에 이창업씨도 사장이 되었구요.
- 그 후 1982년 암 수술의 고비를 넘기고 만 72세 노구의 몸으로 이병철은 보스턴 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 수여식을 위해 미국에 방문했는데...
이때 세계 최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 일본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보았고, 삼성도 새로운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반도체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이미 이건희가 삼성 반도체 운영에 경영 위기를 맞았지만 이것을 회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기로 했었으나 실제로 마이크론에 가보니 마이크론측의 태도는 매우 적대적이었고, 단 2명만이 마이크론 사내에 들어 갈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출입도 못했습니다.
들어간 2명마저도 제대로 된 연수는 커녕 질문도 받지 않았으며, 정해진 시설을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초적인 D램 기술 자료를 받은 것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결국 삼성은 자체 개발하기로 방향을 틀었고, 연구진들이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각오로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불과 1년도 안되어 1983년 11월 64K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세계 3번째 개발이었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1984년 10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가 당시 삼성 반도체에서 겨우 수출하기 시작한 64K D램 가격을 기존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기업들이 덤핑 공세에 나서며 가격이 30센트로 폭락한 것입니다.
이에 삼성이 20센트 가격으로 대응하면서 1984년 한 해에만 1,300억 원의 적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직원들이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했으나, 이병철은 "내 눈엔 돈이 보여."라 말하며 꿋꿋이 밀어붙였습니다.
64K D램 가격이 폭락했지만, 다른 1,000여종의 반도체는 이익이 나는 만큼, 앓는 얘기를 자제하고, 계속 공장의 생산라인 증설에 나서며 신제품 개발에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256K D램 개발에 성공하고, 1986년에는 1Mb D램을 출시하였고,
그 후 1989년에 16Mb D램을 1위 기업과의 기술 격차를 1개월까지 줄이며 세계 2번째로 개발하고,
1992년에는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이후로 256Mb, 1Gb D램을 모두 세계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이병철의 이런 도전은 단순한 한 개인의 역사이거나 삼성이라는 한 회사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와 연관된 역사이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나라를 위한 결단과 노력)
오늘날 이건희 회장은 세계 제일의 반도체 회사를 꿈꾸며 도전하고 있습니다.
(예) 상당교회 모 집사님 간증
1)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래서 많은 은혜의 경험이 있었지만... 특히 공사하는데 12층에서 녹슨 나사가 안 뽑혀 온 힘으로 다리를 지지대로 있는 힘껏 뽑다가 떨어지는데 그 순간 강력한 바람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다시 세우셔서 살려주신 하나님.
2) 갑자기 눈 온 날 어느 배고픈 집사가 생각나고, 그에게 쌀을 사다주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마트 가서 쌀 3포대를 사서 나왔는데..
갑자기 택시가 도착하더니 기사가 내려서 “실으시죠” 하더란다.
그래서 어떻게 왔냐고 물으니 “손님이 없어서 이마트나 가야겠다”생각이 나서 왔는데 마침 선생님이 택시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그래서 택시에 싣고 그 배고픈 집사 집 앞에 주고 옴. 돈 만원과 함께.
후에 그 집사님이 말하길... “고물을 줍는데 눈이 계속 와서 며칠 동안 고물도 못 줍고 식량도 떨어져서 계속 굶고 있었고,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 식량을 구하러 나가봐야겠다고 나왔는데 문 앞에 식량이 놓여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게 하십니다.
⇒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