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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5일 금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 히브 5,7-9
복 음 : 요한 19,25-27 또는 루카 2,33-35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또는> 루카 2,33-35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33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휴가 때, 경상도의 군위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여기가 너무 멋있다는 평을 인터넷에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위 지역 여행의 첫 번째 장소가 영화 촬영지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무런 감응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주변 경관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고, 촬영했던 집 역시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른 관광객들은 “너무 좋다”를 외쳤습니다.
여기가 주인공이 앉아 있던 곳이라면서 마루에 앉아 사진을 열심히 찍고,
마당에 놓인 자전거를 타면서 주인공이 타던 자전거라면서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찍부터(83년) 컴퓨터 모니터를 봐서 시력이 안 좋아진 후로 영상을 잘 보지 않습니다.
극장에 가 본 지도 거의 10년이 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영화 촬영지라고 해서 기억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자기가 너무 종교에만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외 성지순례를 가서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셨던 분은 계속해서 감탄사를 외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셨던 분은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십니다.
“왜 이렇게 성당만 가는 것입니까?”라는 불평만 하십니다.
주님을 알아야 미사나 기도를 통해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큰 기쁨도 얻을 수 있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날에 맞게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남기신 유언을 들려줍니다.
그 자리에서 이 유언을 들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십자가 곁에 있었던 성모님과 몇 명의 여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특히 성모님께서 아들과 함께하면서 더욱 하느님의 뜻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시메온 예언자에게 들었던
“이 아기는 이스라엘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의 말이 다시금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할 것을 더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큰 희망을 발견하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조금도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미셸 몽테뉴).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삼아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카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고(마태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 구유에서 해산해야 했고(루카2,7),
또한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 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돌아오는 길에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루카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 라고
외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쳤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옆에 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우리 곁에 늘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와 함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모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심은 처음에 예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는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또한 '성모 칠고' 신심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수많은 묵상과 기도문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 시켰다.
@@ 복음서에 근거를 둔 '성모 칠고'는 다음과 같다.
1. 시메온의 예언 (루카 2,34-35)
2. 이집트로 피난가심 (마태 2,13-21)
3. 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 (루카 2,41-50)
4. 해골 터로 오르심 (요한 19,17)
5.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심 (요한 19,18-30)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 (요한 19,40-42)
7. 예수, 무덤에 묻히심 (요한 19,40-42)
예수님의 수난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나 휴양지는 그곳을 대표하는 ‘랜드마크(Landmark)’가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는 ‘성가정 성당’이 있습니다. 뉴욕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북경에는 ‘자금성’이 있습니다. 서울에는 ‘경복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무덤 성당’이 있습니다.
로마에는 ‘바티칸’이 있습니다.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습니다.
물론 랜드마크 이외에도 볼 곳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랜드마크가 있기에 사람들은 그곳을 먼저 찾게 됩니다.
신문 홍보를 하려고 LA에 갔다가 ‘맘모스 산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맘모스 산에도 랜드마크가 있었습니다.
‘데블스 포스트파일(Devils Postpile)과 레인보우 폴(Rainbow Falls)’입니다.
시간이 부족한 저는 레인보우 폴은 다음을 기약하고 데블스 포인트파일을 다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았을 것 같은 높은 절벽에 기암괴석이 있었습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는 ‘브라이들베일 폭포(Bridalveil Falls)와
글래셔 포인트(Glacier Point)’가 있습니다.
폭포도 좋았지만, 빙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프 돔(Half Dome)은 아름다웠습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자비와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고통’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가지는 4가지 고통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처럼
미워하는 사람을 매일 보는 것은 칼에 찔리는 것 같은 아픔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를 원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좌절입니다.
거짓된 자아에 빠져드는 고통입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것은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집착을 버리면 고요함이 오고,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나의 세계에서 찾기도 하고, 깨달음을 삼라만상에서 찾기도 합니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바른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스며들어있습니다.
교회의 핵심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한 생명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라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불교의 고통은 인간의 집착에서 시작되었다면
교회의 고통은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불교에서 고통은 우리의 노력으로 버려야 할 대상이지만,
교회에서 고통은 나의 구원과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원리와 기초에서 교회의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다.”
불교와 교회에서 바라보는 고통의 현상은 비슷하지만,
불교와 교회에서 바라보는 고통의 본질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처님과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부처님상은 자비롭고, 너그럽고, 풍채가 좋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예수님상은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처절한 모습입니다.
불교의 고통이 버려야 할 것이라면
교회의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지고 가야 할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모든 고통은 아드님, 예수님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고통에 함께하시면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성모님은 모든 고통을 받으셨지만, 좌절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고 하지만,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지만,
성모님의 고통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여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신앙의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기념해야 할 일일까요?
어쩌면 고통은 저주요 재앙일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는 고통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고통, 사랑으로 생기는 고통, 사랑하기에 받는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쁨을 배우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마치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건너감이듯이,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넘어가듯이,
사랑에서 피어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건너감이요,
바로 그 고통을 통하여 기쁨으로 넘어감입니다.
우리는 바로 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양’을 통해서 그 신비를 보았습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예수님과 함께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면 성모님도 매 맞으시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성모님의 '통고, 통애(compassio)'를 말합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참여(partitipatio)'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아파하는 것에 참여하신 사랑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교회헌장 58항)
또 바오로 6세 교종의 문헌 <마리아 공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야훼의 고난받는 종의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셨다."(마리아 공경 7)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처참해진 모습을 애끓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있는 성모님의 이 광경은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굳셈이 함께 연출되면서,
그지없이 비장하면서도 동시에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과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나아가 동의만하고 의탁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하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오늘 우리도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바칩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하소서."
하오니 어머니,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고통을 통하여 기도하고, 고통과 함께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 안에서도 희망하고, 고통 안에서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요한 19,25 참조)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믿음으로 서 있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어제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교회는 그다음 날인 오늘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지내는 이유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협력자의 역할을 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에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다.
우리가 작은 마리아가 될 때, 또 다른 구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항상 그 영혼을 찌를 것이라는(루카 2,35)
시메온 예언의 예리한 칼의 전망 속에서 살았다. 이 칼이 바로 그의 십자가이다.
이는 이미 파스카 축제 후에,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잃어버리므로 시작되었다(루카 2,41-52).
마리아의 생애에서 절정의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은
십자가의 발 앞에 있으면서 예수의 외침을 들을 때였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가장 큰 잃어버림의 순간이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일치한다.
아들의 외침은 당신이 전적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응답이다.
마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이 자신의 버림받음으로 실현할
구원된 새로운 인류와 피조물의 가시적 표징으로 십자가 앞에 계시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승리에서 또한 자신을 떼어놓으신다.
그분은 마리아를 더는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보물, 그녀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첫 번 잉태의 결실인 아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행위는 실제로 마리아의 모성을
다른 아들, 인류를 대표하는 요한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요한복음이 가리키듯이 마리아에게는 요한과 함께 십자가의 발 앞에 있음으로써
두 번째 잉태가 실현된다.
그녀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쇄신되고 예수가 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리아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까지 겪으신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도 이제 다른 아들을 가지시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잉태이다.
그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심을 암시한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자기 집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말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삶을 함께했다는 의미이다.
모셨다라는 표현은 제자가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개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와 제자 사이에 새롭게 맺은 가족관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이 어머니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참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예수님의 아픔과 그 결을 같이 합니다.
오늘은 두 복음이 나오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나중에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통 때문에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한 시메온의 예언이고
그다음은 골고타에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아드님을 보아야 하는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마치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는 있어도 교회는
예수님을 새 아담, 성모님을 새 하와라고 부르는 교부들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골고타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을 아들로 맡기시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맡기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함께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아내의 자격은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살리기 위해 밖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힘듦을 얼마나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만큼 구원자로 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분은 없으셨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누가 느껴보았을까요?
그만큼 성모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만약 배우자가 나에게 해주는 고통에 대해 잘 안다면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까요?
남편은 분명 자신이 번 모든 돈을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내어놓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믿으면 아내도 그 돈을 피같이 아껴 쓸 것입니다.
TV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 보면 아내의 과소비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편이 나옵니다.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 ‘금전적 신뢰 깨진 폭탄 부부’를 보니
남편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내도 귀걸이 사는데 300만 원 쓰고 피부 관리받는 데 900만 원을 쓰는 내용이 나옵니다.
남편은 월 400씩 꼬박꼬박 가져다주며 자신은 한 달에 10만 원 이상 써 본 적이 없다는데
아내가 그렇게 과소비하고 빚만 늘어나니 신뢰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도 비싸게 술을 마시고 다니고 한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은 남편이 아는 것들이었지만,
카드 지출 내역과 통장 지출 내역은 남편에게 보여주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신뢰가 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치미에서 배우 주우와 김선희 부부도 비슷한 이유로 출연하였습니다.
김선희 씨가 지나치게 과소비한다고 남편이 고발하듯이 아내를 데리고 나왔지만,
사실 그렇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며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남편은 자신이 매달 500씩 주는데
생활비는 700씩 들어가는 것에 신뢰를 잃어갔던 것입니다.
저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모든 돈을 다 주는데 아내가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혹은 아내가 돈을 얼마나 저축해 놓았는지의 재정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말은
남편이 돈 벌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느끼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돈 쓰는 것을 일일이 남편이 안다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둘은 서로 신뢰를 잃게 되고 결국 그 피해는 아이들이 보게 됩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해 부부싸움을 많이 하게 되면
자녀는 생존 욕구가 강해지고 그러면 나쁜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내는 돈에 대해 불투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신자들은 본당 사제를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제와 신자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가운데 좋은 자녀들이 탄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솔직하게 공개하고 혼날 게 있으면 혼이 나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본당에 내는 돈이 그들의 살과 피와 같은 아픔을 공감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레위기에도 신자들이 낸 봉헌은 거룩한 것이니
사제들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과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 잘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의 아픔보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더 중요하게 여겨
두렁이로 몸을 가린 것을 보면 연결이 쉬워집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그러면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관계에서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합니다.
남편이 모든 것을 다 가져다주었다면
아내도 모든 지출 내역과 통장 잔고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영화 ‘허삼관’에서 하정우는 아내가 이전 애인의 아이를 배어
자신에게 시집왔었다는 것을 10년 뒤에나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남의 아이를 키웠다는 생각에 분노하였지만,
키운 정이 작지 않아 아이를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팔며 자신은 죽어가다시피 합니다.
하지원은 남편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판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 신장을 아들에게 줍니다.
서로 상대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 때문에
나도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이 사랑일 것입니다.
신뢰를 잃으면 내어줄 수 없습니다.
상대가 나와 가정을 위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알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가 나를 위해 흘리는 피의 고통을 함께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으로 상징되는 교회를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은
당신의 피를 결코 헛되이 쓰지 않는 마음을 가지셨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은
아마도 먼저 재정의 투명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모칠고 – 하느님 은총과 자비의 물리적 순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는 교회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심으로써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며,
나아가 부활과 생명, 구원과 해방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십자가 안에는 말 못 할 고통이 묻혀있다.
바로 십자가 아래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아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한 여인의 고통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일생을 통하여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받으신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한다.
아울러 구원의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며,
그 고통이 그분만의 고통이 아니라 아직도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세상 구원을 위한 우리 모두의 고통임을 각오하려한다.
그러므로 오늘 기념일이 어제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직접 연결되어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에 대한 구원사적 反省은 이미 중세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중세기에 이르러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
즉 聖母七苦를 일부 지방교회에서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1600년대에는 수도회로 확산 되었고, 1814년 비오 7세 교황이 전체 교회에 보급 시켰다.
성모님께서는 평생을 두고 아들로 말미암아, 마음 쓰시고 속을 태우셨겠지만
그 가운데 일곱 가지 고통을 알아보자.
① 예언자 시므온의 예언 :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카 2,34-35)
②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하고 일러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마태 2,13-15)
③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사흘 동안 찾아 헤맴 :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하고 말하였다.” (루카 2,41-52)
④ 골고타로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母子 서로 상봉하심 :
“예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손에 넘어가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 밖을 나가
히브리말로 골고타라는 곳으로 향하셨다. 골고타라는 말은 해골산이라는 뜻이다.”(요한 19,16-17)
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 :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마태 27,35)
⑥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품에 안으심 :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아리 마태아 사람)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내렸다.”(요한 19,38)
⑦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십 :
“그 시체를 내려다가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 만든 무덤에 모셨다.”(루카 23,53)
성모칠고 중 ④~⑦에 관한 성서상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동행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멀리서나마 비켜보았던 여인들을 일일이 언급하고 있으나
(마태 27,55-56; 마르 15,40-41; 루카 23,49),
성모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성모님에 대한 유일한 성서상의 언급은 요한 복음사가의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던
어머니 마리아와 愛弟子 요한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복음서를 종합하여 보면 성모 마리아는 과월절을 시작하던 새벽 시간에
예수께서 붙잡혔다는 소식을 도망쳐 나온 제자들로부터(마태 26,56) 전해 듣고 달려와,
줄곧 아들 예수 근처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아는 아들의 십자가 길을 동행하였고, 가능한 십자가 곁에 있었던 것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마리아는 어떻게 이 모든 시간들을 이겨내었을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을 에는 비통 중에 하염없이 우시네.”(부속가 4)
인간의 어떤 말도 표현도 성모님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이 어디 七苦 뿐이겠는가?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수많은 고통이 늘 그분과 함께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절)
오늘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당신이 어머니 마리아와 하나임을 확인하신다.
그리고 애제자에게도 말씀하신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27절)
이렇게 성모님은 마음을 에는 고통 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탄생 되는
교회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로 우뚝 서신다.
그분은 일생을 고통으로, 그러나 포기나 좌절함이 없이
아들과 하느님의 뜻을 좇아 끝까지 인내와 겸손으로 구원 사업에 협력하셨다.
그러기에 성모께서 받으신 고통과 아픔은
하느님 크신 은총과 자비의 物理的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고통도 구원도 함께하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제 주님의 십자가 현양 축일에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나눔을 했습니다만
오늘 주님의 어머니 통고 축일에는 긴 병에 성인 난다는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성인이라면 긴 병에도 환자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요.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아들은 어머니가 오래 앓게 되면 엄마를 버려 불효자가 되지만
엄마는 아들이 아무리 오래 앓아도 그 아들을 버리지 않는데
이 면에서 성인과 어머니는 같습니다.
그런데 성인과 어머니의 공통점이 또 있습니다.
어머니나 성인 모두 내리사랑을 한다는 점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적인 내리사랑이라면
성인의 사랑은 성스러운 내리사랑이겠지요.
그런데 성스러운 내리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내리받아서 하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충만해져야지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과 성모님 사랑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아들의 고통에 버리고 떠나지 않고 함께한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인류 구원과 사랑에 함께한다는 면에서 성모의 사랑은 다릅니다.
보통의 엄마는 자기의 아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함께하지만
자기 아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싫어하고
자기 아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제가 신부 되는 것을 처음에는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고
나중에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게 되셨지만 그런 다음에도
북한 일과 같이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의 경우는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이 자신을 바치실 때
그것을 말리지 않으시고 다만 십자가 밑에서 함께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아들을 성전에서 봉헌하실 때
가슴이 꿰 찔리는 고통을 당하실 것이라는 얘기를 시므온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냐는
매정한 핀잔을 아들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이미 예견하고 각오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이 죽은 다음에도 이어졌을 겁니다.
얼마 전 읽은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남은 생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아들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모자란 부분이 혹 있다면 당신이 채우시겠다는 마음으로 여생을 사셨을 겁니다.
아들의 고통을 함께하신 마리아는
아들의 구원도 함께하신 우리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분이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