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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 : 집회 27,30―28,7
제2독서 : 로마 14,7-9
복 음 : 마태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냥 모든 사람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까요?
분명히 잘못되었고 또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판단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으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행동에 관해서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특정한 윤리적 행위를 분석하고 그 행위가 객관적인 윤리 규범과
부합하는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관한 판단은 멈추고, 그 사람의 행위에 관한 판단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행위, 또는 저런 행위는 죄가 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는
사람 자체에 관한 판단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판단하는 것이지 사람을 판단할 권한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며 사랑으로 함께해주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너무나 엄격한 잣대를 세우면서 행위가 아닌 사람 자체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자신도 늘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서 용서의 끝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죄인에게도 언제가 공동체의 문을 열어 두고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 자체만을 바라보면서 용서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으며 지적합니다.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만 탈렌트 빚진 사람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 탈렌트는 당시 노동자의 6,000일 일당에 해당한다고 하지요.
15년 이상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아야지만 손에 쥘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 만 배라면 어느 정도일까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빚을 임금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울까요? 하지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과장된 금액인 만 탈렌트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무한한 용서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본받지 않는 매정한 종의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외치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사람에 관한 판단 자체를 멈추고,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용서 안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순간,
내가 가진 것을 절실히 부러워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라(푸블릴리우스 시루스).
많은 용서를 받고 살았습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한없이 용서하라’,‘언제나’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결코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용서를 받아왔고
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잘못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배반자 유다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당신 오른편에 매달린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침표를 찍어주신 것에 물음표를 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적개심, 원한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며,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 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용서는 무조건적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하지만, 이런 용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도록 청하고 무던히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못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름으로 용서할 뿐입니다.’
1독서의 말씀에 머물러 봅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집회28,2)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네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집회28,6-7).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우리가 관속에 들어갈 때 증오심이나 적개심을 가지고 가서야 되겠습니까?
원한을 버려야 합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미워하지 맙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12,19.21).
용서한다는 것은 ‘다 잊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했을 때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서로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 4.2%가 홧병(분노증후군)에 걸려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화병은 속에서 불이 나는 병입니다. 화날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인데도
가슴 안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입니다.
상처가 뿜어내는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을 내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면
어찌 우리 몸이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분노와 원한으로 치를 떨 때 우리 몸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더 억울한 것은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가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잘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스스로를 파괴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십시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속상한 일이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만큼 나만 손해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미움과 원한을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집착이 얼마나 우리의 진을 빼는지 모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놈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이를 갈다가
결국은 내가 원한 속에 죽고 맙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음으로 해 보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기도를 계속 이어가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탈렌트(한 노동자가 이십만 년을 일하고 받을 수 있는 품삯)나 되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정의에는 항상 자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는 한계가 있습니다.
백 데나리온(한 노동자가 백 일 동안 일하고 받을 수 있는 품삯)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에게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치는 사람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자비로운 사랑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은 모두 합쳐도 ‘백 데나리온’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탕감받은 용서의 빚은 ‘만 탈렌트’나 됩니다.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맺힌 한을 푸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서를 넘어 화해에 이르기까지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 상처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까지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성가신 파리가 왔다가 돌아가고 또 돌아오듯 자꾸 돌아오고 되살아 나는 증오를
몰아내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지지 말고 그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그대를 성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구엔 반 투안 추기경)
“우리가 제비꽃을 밟으면 제비꽃은 우리 발뒤꿈치에 좋은 향기를 남긴다. 용서는 그 향기와 같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일본과 한국을 이야기할 때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부산에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일본의 ‘대마도’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가까운 나라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과 한국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국가입니다.
일본의 해적들이 우리의 바다로 와서, 약탈을 하였습니다.
급기야 전국을 통일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약탈당하였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많은 도공들이 끌려갔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많은 의병들의 활약으로 일본은 본국으로 철수하였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룩했던 제국주의 일본은 1910년에 대한제국을 합병하였습니다.
우리는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만주와 간도로 떠나야 했고,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으면서 패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관계입니다.
한쪽은 끊임없이 침략을 하였고, 한쪽은 그 침략을 막아야 했습니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배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있음에도 일본과 한국은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공산주의에 맞서서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국제관계는 개인과의 관계와 다르기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8월 24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에서 발생하는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최소한 30년은 방출해야 하고, 100년이 넘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일본이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는 것은 비용의 문제라고 합니다.
바다가 방사능에 오염되는 것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오염수라면 자국에서 공업용수로 사용해도 될 것이지만
그렇게 못하는 것은 역시 비용의 문제라고 합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공업용수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과 같은 바다를 공유하고 있는 중국은 일본의 수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으로 안전하다면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습니다.
한국의 주교회의도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하였습니다.
바다는 어느 한 나라의 바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은 문제 해결의 본질은 아닙니다.
수산물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문제 해결의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다와 인간이 서로 공존하려는 자세입니다. 바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바다에 오염수를 방출한다면 바다는 오염된 물을 우리에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방관, 외면, 묵인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맡겨주셨던 베드로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공정과 정의를 외면한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회개와 용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의 전제는 치유 받고자 하는 간절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할 것이다.”
진정한 회개 없이 ‘나는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돌아온 아들과 자캐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워하겠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왔기에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였고, 잔치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행동으로 보여주었을 때 참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
공정과 정의에 따른 용서를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는 결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의 맑고 푸른 드넓은 하늘처럼 우리 마음이 너그럽고 맑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드넓고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입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인간이 죄인을 용서해 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그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8) 라고 고백합니다.
곧 주님의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사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는
말씀을 듣고서 하는 것이기에,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한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일흔일곱 번’이라는 이 말씀이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시각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일흔일곱 번’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이는 누구든지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받았던 것보다
일곱 배나 더 큰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셨는데, 이는 카인에게 내리는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를 보호하기까지 해 준다는 큰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에게 가볍게 상처를 입힌 사람과
막대로 자신을 건드린 사내아이를 무자비하게 살해했다고 두 아내 앞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이는 누구든지 일곱 배가 아니라
‘일흔일곱 배’로 앙갚음을 할 것이다!”라고 자랑삼아 떠벌립니다(창세 4,23-24).
여기서 보듯이,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되갚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클수록 앙갚음도 더 격렬해서,
눈에는 눈, 손에는 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더하여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느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 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악함보다 항상 더 큰 선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를 보호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도와주고, 그가 잘되도록 기도하고, 돌보아주라는 말입니다.
곧 용서를 넘어서는 용서, 용서한 다음에, 거기에 더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곧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 주는 ‘자비로운 왕’과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마태 18,30) 카인의 루손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용서'는 빚진 종을 왕이
'가엾이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곧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 자비는 단지 놓아줄 뿐만 아니라, 빚을 탕감해 주고 잘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더구나 그것은 청하기도 전에 미리 헤아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 되는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왕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이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해주신,
‘먼저’ 베풀어진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용서에 더하여 선으로 앙갚음 되는 더 큰 은총의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호의’(헤세드)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6)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겠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이제는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되도록 기도합니다.
이제는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고,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렵니다.
아멘.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전례는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대목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랑과 형제애에 관한 주제와 용서에 대해 강조한다.
이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예수께서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들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경우로 가르치신다.
용서와 화해에 대한 것은 집회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집회 28,2-4).
이미 신약의 정신이 나타난다.
오늘 복음에서의 형제의 용서에 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자.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1-22절).
이는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베드로의 마음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베드로의 역할이 조심스럽게 고려되고 있다.
베드로는 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맡은 책임이나, 그가 차지한 위치 때문에
가장 심하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기에 용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에 이어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는 것보다는
순수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해 준다(35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무한히 용서하시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 비유는 세 가지 행위로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왕에게 큰 빚을 진 종이 셈을 바쳐야 하는데
왕은 관대하게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있다(23-27절).
그 종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다.
한 탈렌트는 금으로 따지면 42kg(11,200돈)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것이 일만 달란트이다.
어떻든 그 딱한 종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기 재산을 다 팔아도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뜻하지 않게 왕은 관대함을 베풀어 그 종을 탕감해 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주었다.”(27절).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나타내며,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적 불행을 위로하시는 측은지심을 뜻한다
(9,36; 14,14; 15,32; 20,34 참조).
즉 왕의 관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두 번째 행위는 우울하다.
그 종은 주인과 같은 자비를 가진 것이 아니라, 편협한 마음이다.
그 종은 왕에게서, 물러 나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서
왕의 태도와는 반대되는 모습이다.
그 종은 화를 내고 그가 주인에게 한 것과 똑같은 간청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고 그 동료를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30절) 감옥에 처넣는다.
이 경우에는 그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거나 연기해주는 일이 앞의 경우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백 데나리온은 백일 간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금액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편협성과 폐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 번째 행위가 극적이다.
다른 종들이 그 광경을 보고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일러바치고,
주인은 모든 것을 취소하고 무자비한 종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겼다(32-34절)고 한다.
이 태도는 가엾게 여기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인은 정의의 규범을 초월하는 사랑의 법을 세워주었는데,
그 무자비한 종은 율법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과 용서를 다시 나눔으로써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종은 무상으로 받은 선물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다시 나누어줄 줄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서 그 사랑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제 우리가 형제들 상호 간에
어떻게 형제애를 실천하느냐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일흔일곱 번까지라도”(22절)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서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이 주님께 끊임없이 용서받고
또 서로 간에 용서를 나눌 수 있을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를 거부하는 자는 이미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제외하는 죄가 바로 이 죄이다.
그러므로 화해의 성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도 로마서에서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의무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용서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순교는 일상에서의 끊임없는 부활 체험의 결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순교는 순종의 피로써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신앙 행위입니다.
따라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살아내야 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거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순교의 정신을 함양할 수 있을까요?
바로 더 확고한 ‘부활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4)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희망 없는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도 당신 죽음을 말씀하실 때 반드시 부활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순교의 열매를 위해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의 확신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투수 겸 타자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 선수가 있습니다.
그 선수는 땅에 버려진 쓰레기가 남이 버린 운이라고 생각하여 경기 중에도 잠깐씩 쓰레기를 줍습니다.
‘나’는 더 가지려 하고 더 평하려 하고 더 높아지려 합니다.
그런데 쓰레기를 줍는 일은 그러한 소유욕-육욕-지배욕과 반대의 행위입니다.
그러니 그가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순교입니다.
이렇게 작은 순교를 하는 것은 그가 반드시 그렇게 해서 운이 온다는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너무나 큰 모험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를 그런 모험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자아의 종살이 할 존재가 아니라는 ‘자존감’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마약 중독자였다가 억만장자가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을 쓰고 강연도 합니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 된 계기는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한 일 때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부유하게 자라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다시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 공허함을 마약으로 채우려 하였고 점점 정신과 몸이 피폐해졌습니다.
아무리 마약을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을 넘기고 재활 센터에 들어가 한 달을 있었습니다.
그는 마약을 하지 않고도 한 달을 버틸 수 있다는 것에 자신도 놀랐습니다.
더 놀란 것은 마지막 날 그에게 “당신은 절대로 마약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인격적인 모욕을 들은 것이었습니다.
카돈은 집에 돌아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해보겠다며
앞으로 가족을 돈 걱정 시키지 않게 하겠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는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심이, 집착이 되었고 그 집착이 그를 이전의 삶으로부터 구해 주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대한 집착이 결국 이전의 자신을 죽이는 힘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집착을 하도록 살과 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자아의 종살이 할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자존감으로 이 세상에서 이미 부활, 곧 천국을 체험해야 하고
그 체험들이 쌓여 나중에는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복자 황일광 시몬은 당시 가장 낮은 계급인 백정 출신입니다.
그러던 그가 당대 위대한 가문의 사람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하게 되니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늘이 있다.
하나는 이미 이 세상에 또 하나는 후세에, 이렇게 해서 두 개다”라고 기뻐하였습니다.
작은 순교를 통해 천국의 부활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모진 고문을 이겨내게 하였고 순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는 모진 고문에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님을 배반하지 않겠으니
저를 마음대로 해 주십시오” 하면서 의연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박해를 피해 도망치다가 신자들을 버릴 수 없어 되돌아왔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사제로 부활하게 되었는데
자신도 신자들을 부활의 믿음을 심어줄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삼구(三仇)와 끝까지 싸우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이는 두 분 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곧 부활로 이어짐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으로 나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이것들이 쌓여 결국 기쁨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고 싶은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에게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먼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하느냐는 물음입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은 너무 많다는 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은 어렵게 용서하지만, 두 번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느냐?’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일곱 번까지’라는 베드로의 물음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까지 하라는 말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7×70=490번, 곧 한없이 하라는 말 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일만 탈란트를 빚진 종이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자,
그 주인은 그를 가엾이 여겨 부채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그를 가엾이 여기지도 않고,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가 주인으로부터 받은 일만 탈란트에 대한 용서가 취소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일 탈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일만 탈란트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용서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이라는 적은 액수의 빚을 용서하지 않았다가
먼저 받았던 혜택마저 취소되는 큰 불행을 당하였다고 말합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고,
사람들의 잘못에 복수하는 분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세상의 심술궂은, 높은 권력자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내는 데에 필요한 절차들을 만들었습니다.
죄인이 지켜야 하는 율법도 만들고, 바쳐야 하는 제물 봉헌 절차도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상상하여 하느님을 만들었더니, 그 하느님은 이 세상의 심술궂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사람은 율사가 시키는 대로 정해진 율법을 지켜야 하고,
사제들이 지시하는 대로 제물도 바쳐야 합니다. 여기 돋보이는 것은 율사와 사제들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믿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시는데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용서하신다고, 믿고 있는지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과연 베푸시는 분, 은혜로우신 분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 이웃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지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인데, 우리가 있습니다.
그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사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베풀고, 사랑하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가 흘러서 세상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우리의 삶이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흐르는 그 자비를 우리가 차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일만 탈란트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 자비를 자기 선에서 차단해 버렸습니다.
그 자비가 자기의 주변으로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비롭습니다.
사랑은 사랑하고 자비를 실천할 때, 인간다운 희열과 행복을 맛봅니다.
대단히 제한되고, 단편적이지만 우리는 그런 희열과 행복을 가끔 체험합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돌보면서 느끼는 희열과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릴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사랑도 자비도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미움과 복수가 지배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느님도 우리와 같이 미워하고 복수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소중한 나머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날,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이 된 것은 우리도 그 사랑과 자비의 흐름 안에 합류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나를 통해서 내 이웃에게로 흘러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유로운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흐름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우리가 자유로울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남이 시켜서 시키는 대로 하는 마음은 사랑도 자비도 모릅니다.
자비와 사랑의 실천도 우리가 자유로울 때 가능한 일입니다.
율사와 사제들이 군림하였을 때, 이스라엘 안에 사랑과 자비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도 사랑과 자비는 모르고, 그냥 지킬 것, 바칠 것만 요구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은폐되면서 하느님은 무서운 존재가 되었고,
율사와 사제들은 그 후광을 입어 행세하며 재물이나 욕심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격언은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탈출 33,19)이라는 모세의 깨달음을
기초로 한 이스라엘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생명을 살아서 은혜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여, 이웃을 섬기고 용서하며 살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惡貨가 良貨를 구축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저항을 받고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그분이 아버지라 부른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기에,
그분은 죽음을 넘어서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과연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사랑과 자비 안에 자기 생명의 기원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와 사랑이 자기의 주변으로 흐르도록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율사와 사제가 행세하고 명령하였을 때, 이스라엘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은폐되었습니다.
오늘 교회에도 사람이 행세하면, 사랑과 자비는 사라집니다.
신앙인은 성직자들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자유를 배우는 신앙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실천안에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것을 원하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마중물
물길 인도하는 한 바가지
나로 인해 다른 누군가 넉넉해질 수 있다면
빛나지 않는다고 서러울 것 없지.
Sr. 이 테라 수녀
마중물이 된다는건
설렘보다 두려움이 크게 느껴지는
용기가 필요한 일
예수님은 스스로 마중물이 되어
우리에게 무한한 구원의 은총을 끌어주셨는데
나는 누군가에게 한 모금 시원한 마중물 되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려운지..
나는 마중물 덕 보고 싶고
내가 마중물 되고 싶진 않은
이 지독한 이기심이
세상에 어두움을 끌어오는 마중물 되고 있음을 슬퍼하자.
또한 내 땅에 내린
헤아릴 수 없는 마중물의 이끄심을
언제나 기억하고 감사하며 나아가자.
서로를 위한 마중물이 모여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하느님 자비로 그곳을 밝게 비추면
더 이상 눈물도 아픔도 분노도 없는
기쁨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마중물이 되자.
주님께 의탁하여 그 힘으로
마중물이 되어보자!
[출처] 루카 9,23-2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