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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들 왜 슬픔이 없었겠느냐
1.
신혼여행길에 오른 건 그 해 시월 이십팔 일, 가을빛 좋은 날이었다.
도리짓고땡으로 치면 망통이니, 나머지 두 패만 잘 잡으면 대길이었다.
제주공항에 내려 여장을 풀고 몸을 풀기로 했다.
색시를 먼저 목욕탕에 들여보냈다.
쉬아아 쉬아아~
물소리 요란한데 나는 티브이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쉬아아 쉬아아~
하지만 티브이가 눈에 들어올 리 있으랴.
쉬아아 쉬아아~
채널을 돌려도 마찬가지 더니
이윽고 무엇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쉬이이 쉬이이...
물소리는 조금 잦아들었지만
색시는 냉큼 나올 기미가 없었다.
점점 더 밀려오기 시작하는데, 이걸 어쩌란 말이냐...
마침내 막무가내,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가
맨 엉덩이를 내밀고 마지막 정리하는 색시의 몸을 뒤에서 덮쳤으니
이걸 어쩐다...
여체의 몸은 신비다.
그중 옥문과 가슴은 생명의 탄생과 육아의 성소다.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남녀가 결합하는 것이라면
푸른 숲 속에 찾아들어 옹달샘에 동전(동정) 한 잎 던져놓고
파문이 일기시작하면 달이 가장 크게 뜨기를 기다려
이태백이 바다에 풍덩 뛰어들 듯 선경으로 들어야 하는데
엉덩이를 보고 실신해 버렸으니
어쩌란 말이냐.
마치 선머슴이 뒷산에 올라 선녀를 등에서 덮치듯 범했으니 말이다.
엉덩이는 관능의 상징이다.
섹스의 심벌이요 사랑의 이미지인 하트도 엉덩이에서 나왔다.
관능미를 유발할 땐 엉덩이를 흔든다.
슬쩍 터치하고 싶을 때도 엉덩이를 툭 치지 않던가.
하지만 좀처럼 날로 그 엉덩이를 내보이진 않는다.
화가나 조각가에게만 살짝 내보일 뿐이다.
불란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베르니니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관능적 엉덩이를 표현한 대표작이라 할 만한데
나는 내보인 엉덩이에 아무런 祭儀 없이 관능만 탐하고 말았으니
아쉽게도 첫날밤의 신비한 제의가 나에겐 아직 없다.
이제라도 누가 묵정밭 한 뙈기 내놓는다면
참새 눈물이라도 흘리며 신비를 체험해 보련만 그게...
이튿날 산방굴사를 찾아갔다.
복전 하나 올려놓고 부처님께 무언가를 빌었다.
아마도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 하지 않았을까?
허나 부처님께 빌기도 전에 일을 저질렀으니
패가 좋지 않을 건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이다.
2.
아내가 없는 사이의 일이다.
나와 눈을 마주하더니 무언가 바라는 기색이다.
옳다, 하고 덥석 안아 밖으로 나왔다.
배꽃 환한 밤에 달빛은 왜 그리도 교교하던지
밤바람소리만 들리는 봄밤이었다.
바지를 아래로 잡아 내리고
하얀 팬티를 가만히 벗겼다.
백옥 같은 엉덩이가 달빛에 부셨다.
아, 이 천사를 내 가슴에 안겨준 게 누구시던가...
조심조심 가슴과 허벅지에 밀착시키고
함께 힘을 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흘러나온 말
“아빠, 다 너쪄.”
“응, 다 눴어? 어이구우.”
그래 밤바람이 서늘도 하니 어서 들어가자.
그게 커서 유학길에 올랐는데,
3.
What's the matter?
작은 것이 이국의 땅에서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조한 마음으로 지새우기 열사흘 만에
버지니아 행 트랩에 오르기로 한다.
무슨 일일까?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낀 때문일까?
학업에 지친 때문일까?
조교 탈락에 충격을 받은 때문일까?
고국에 대한 향수병일까?
아니면 이성 간의 갈등에 시달리는 것일까?
그 작은 것이 가슴은 얼마나 아픈 것이며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
우선은 입원비가 문제일 테니
여기저기 분산 예치된 통장잔액을 서둘러 긁어모아
천여 달러를 환전해 놓는다.
불안하다.
결국 비씨카드 두 개를 여행 가방에 집어넣고 위안을 해본다.
Fasten seat belt while seated
좌석벨트를 졸라매고 허리를 고추 세운 후
옆자리를 넘겨보니 몇 년쯤 위로 보이는 사내,
S 대의 영문과 교수란다.
문학과 인생, 그리고 유학열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잠을 설쳤으나
그의 두 스승에 대한 자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입시참고서 편집에 열을 올려 큰 수입은 얻었으나
문학사적으로 별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장모 교수,
학처럼 살면서 담백한 시와 수필을 내고 있으나
격정적 대작이 없다는 피모 교수.
모두 양지와 그늘이 있겠지만
나는 그 그늘에라도 다가갔는지 자문해 본다.
듣고 보니 미국사회에선 아픈 사람에 대한 교육비 지원은
냉정하게 외면한다니 나의 작은 것은 어찌 되는 것일까?
‘감우정담’ 한 권 건네고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헤어진다.
안녕!
How do you do!
샤로스빌 공항의 크리스마스 밤 열 시 반,
중년의 신사와 숙녀가 다가온다.
작은 것의 지도교수 부부란다.
이국의 밤하늘아래 처음 만나는 이방인,
우리는 서로 산타라도 되는 것이던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면서 그들의 차에 올라탔지만
점점 길어지는 질문에 귀가 막혀오기 시작한다.
아예 고백해 버리고 말자.
“I have some trouble in speaking and hearing english.”
"please, let me see with writing."
자택에 당도하니 나의 작은 것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매우 유감이라는 표정이다.
여러 가지를 묻고 있으나 속속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결국 필담으로 질문을 이해하고는
내일 병원을 방문해 나의 작은 것으로부터
직접 상황을 들어보겠다고 마무리하고 이국의 첫 밤을 맞는다.
어찌 이다지도 영어공부를 엉터리로 하였던가.
A psycho ward
담당교수의 안내로 당도한 곳은 정신과 병동.
내 생애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철문 사이로 환자들의 거동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발을 모두 벗었다.
신발 끈으로 자해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초점 잃은 모습도 보인다.
백인들과 유색인들의 얼굴이 골고루 눈에 들어온다.
내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면회 수속을 마치고 들어서니 태연스레 다가온다.
마치 여기가 놀이터인 줄 알고 들어온 철없는 아이 모습이다.
그저 어깨에 손을 가만히 얹어볼 뿐,
어찌 된 일이냐고 물을 수도 없구나.
그러나 이렇게 성성하면 되는 게 아니던가.
삼십여 년 전, 군대생활이 떠오른다.
어느 부대의 인사과에 근무하던 중
병사들의 후송카드를 점검하다 중학교 동창 녀석의 이름을 발견했다.
어찌 된 일인지 걱정되어 급히 내무반으로 찾아가 보았더니 괜찮단다.
그런 저런 사유로 군 병원에 후송되었다가 조기 제대하여
지금은 잘 살고 있으니 꾀병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나의 아이는 어찌 된 일일까?
그래, 이렇게 성성하면 되는 거지.
보호자의 사인(sign)에 따라 퇴원수속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만다.
나는 참 큰일도 하고 있구나.
자, 잠시 고국으로 돌아가자.
In the university of virginia
그들의 안내로 대학 구내를 둘러보기로 한다.
강의실 안,
가지런한 책걸상들 사이로 드문드문 넘어진 의자.
그 의자의 주인들은 활기찬 모습으로 학교를 잠시 떠나
방학생활을 즐기고 있을 터이다.
칠판에 알 수도 없는 복잡한 수식들과 물음표들,
그 물음표에 주눅이 들었던 것일까?
기숙사에 당도하니 한국 유학생 몇몇이 모여든다.
한 손엔 빈 가방을, 다른 한 손엔 보자기를 든 모습이
마치 죽은 송장을 치우러 온 저승사자들 모습이다.
방바닥에 너부러진 컴퓨터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책들과 이부자리.
여독을 핑계로 고개를 돌리고 교수 댁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국에서의 학우애가 아름다울 뿐이구나.
In the farm
교수 댁의 목장 규모가 백 헥타(ha)라니 우리말로 삼십만 평이다.
그 규모에 걸맞지 않게 방목되고 있는 소는 스무여남은 마리,
본인이 직접 풀을 베고 건초를 만들며
야생 사슴이 많이도 출몰하여
가끔은 한두 마리씩 잡아 소시지를 만들어 먹기도 한단다.
울창한 숲, 작은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
멋들어지게 휜 나뭇가지에 그네 줄도 걸어놓았다.
숲을 일구어 초지를 조성하다 보면
가끔은 인디언들의 생활용품들이 발견되기도 한단다.
미국의 번영은 이렇게 원주민들의 등을 짓밟고 피어났으니
바로 여기에 그들의 한계가 있으리라.
드디어 여기에서 우리네의 우월감을 느껴본다.
다만, 잠시 교수 부부를 부동산 투기꾼으로 생각해 본 게 부끄럽다.
사는 멋이란 그런 게 아니던가.
Family concert
밤이 깊어지기 시작하자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가족들이 다 모여든 모양이다.
교수 부부와 아들 하나, 딸 하나.
바이올린과 기타의 선율 속에 아메리칸 컨트리 송이 울려온다.
아래로 내려와야겠다는 작은 것의 말들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가족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다.
한참이나 듣고 박수만 치고 있으려니 자존심이 조금은 상해 온다.
연주를 잠시 멈추게 하고 코리안 송 하나를 부르겠노라고 제의하니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까 농장에서 본 그네를 생각하니
한국의 가곡 중에서 그네가 생각납니다.
세모시 옥색치마 입고 금박 물린 댕기를 맨
아름다운 색시가 그네에 올라 발을 구르니
나풀거리는 모습이 푸른 창공을 날아 하얀 구름까지 이릅니다.
지나가던 제비도 신기한 듯 나래를 쉬며 보고 가더라는
그런 이야기의 노래입니다.”
한 목청 뽑았더니 다시 박수가 터져 나오는데
감흥을 받았다는 것인지 에티켓의 소산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잠시 침울함을 잊고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한국의 전통북인 장고 미니어처, 안동 하회탈 미니어처,
홍삼 진액 한 병을 내놓고 설명하니 잘도 즐거워한다.
다시 ‘감우정담’ 한 권과 ‘시와 꽃’ 캘린더를 내놓고 차례로 설명하니
글의 사실적 내용과 내포하는 의미,
그와 같이 느끼게 된 동기를 설명해 달란다.
장황한 나의 설명에 고개를 잘도 끄덕이는 교수와 그 아들 딸,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는 부인,
너무 긴 설명이어서 일까? 난해해서 그랬을까?
피아노 연주를 해달라는 주문에 악보 탓을 하고
손사래를 하는 것으로 가족음악회는 끝이 났다.
Good night.
Monticello and Mt. apalachia
미국 헌법의 기초자요 3대 대통령이요
버지니아 주립대 설립자이며 초대 총장인 제퍼슨 기념관을 돌아보고
선각자의 면모를 느껴본다.
그 위에 우리네의 다산 정약용 선생을 떠올려본다.
그네들의 선각자는 대통령에까지 이르렀으나
우리네의 선각자는 유배지에 이르게 되었으니
유구한 정치의 난맥사를 한탄해 볼 뿐이다.
기념관을 뒤로하고 아팔라치아 산맥을 후련하게 넘으며
한인 학생들에게 들려줄 덕담을 생각해 본다.
“ 아팔라치아 산맥을 후련하게 넘듯
그대들의 과업 앞에 가로놓인 난관을 후련하게 넘으시오!”
Fare well!
미국의 상류층 가정에 머물러 잠시 즐거움을 맛보다가
이별을 고하려니 서글픈 여행목적이 갑자기 떠올라
서러움이 북받침은 어쩔 수 없구나.
나는 나의 작은 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How can I help her with her works?
I don't know what to do.
But she will do well in the future.
Because I love her, and you.
Good bye,
and I can't forget you for long.
짧은 만남, 긴 이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버지니아여, 안녕! (2003. 12. 30.)
4.
지난 일기장을 뒤적이며 아픈 흔적을 들여다보노라면
사내들도 때론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서울대생의 10% 이상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단다.
상담을 신청한 학생들 중 75%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도 한다.
학력 경쟁에 너무 치우치다 보니 그리된 게 아니던가.
자연적인 귀결이리라.
시대는 바야흐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도 학력 엘리트에 후한 점수를 주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정치권에 뛰어들어 정쟁을 일삼는 게 일상이다시피 됐다.
법학도는 법조계에서 정치계로
경제학도는 경제계에서 정치권에 대한 로비로
그렇게 뛰어들어 세상을 쥐락펴락해 왔으니
그 반동으로 지난번 비학력 엘리트들이 정권을 잡은 게 아니던가.
수백 년 동안 학력 엘리트의 길로 내달리던 그들이
갑자기 제 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건 뻔한 이치니
오늘날 젊은이들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학력 엘리트들의 갈 길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과학입국으로 가는 길, 인문학을 떨치는 길,
다양한 가치관을 찾아 살아나가는 길,
그 길은 많고도 많다.
5.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사랑이던지
어린것이 사랑을 만나 웃음을 회복한 게 십몇 해 전의 일이었다.
그 어린것이 결혼해 남매를 두고
아들이 지난해 여름 캘리포니아로 유학을 갔다.
이번에 중학을 졸업하고 잠시 서울에 들렸기에
제 할미와 함께 영화 '오펜 하이머'를 보여줬다.
눈물이 나도 이런 눈물은 참 따스하더라.
(손주의 졸업사진, 할미와 영화관람 뒤에 귀가 중)
위 글은 지난해 8월에 쓴 것이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되었지만
가끔 이 글을 열어보면 눈물이 난다.
그러나 그 눈물은 메마르고 쓰린 눈물이 아니라
초가지붕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아내리듯
개운하기까지 하다.
지나간 추억은, 그게 슬픔이든 기쁨이든
맺혔던 게 풀리는 이완(弛緩)의 기전도 있으니
그래서 우린 견딜만 한 게 아니던가.
첫댓글 여러개의 에피소드가 마치 영화의 장면전환처럼
잘 엮어져 한방향으로 가고 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선배님 평안한 밤 되세요.
네에 고마워요.
인문학적 사고도 잘읽었습니다.
사랑 에로틱 결혼 생육하고 번성하여 다음 세대를 이어가게 내놓은 것만도 대단한 일이거늘
그 사이 사이 우리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는 각자 부모마다 농도가 틀리려나요
잘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젠 여한이 없으셔야지요
사람으로서 부모로서 할 일은 다 충분히 하셨으니 말입니다
삶이란 사실 그런 경우의 연속이지요.
자식 사랑이
뭉클합니다
저는
그냥 돈만 벌어주는
아빠였습니다
글 전개가
엄청납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평온한 삶이 제일입니다.ㅎ
석촌님
글을 읽어가다 보니 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들어있는 규모가 꽤 큰 파노라마 같습니다.
희귀성 선천성 지병이 있는 딸을 둔 어미여서인지 석촌님 글을 읽으며 저도 모르게 뭉클해 지는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
그러시군요.
그런가운데 평안을 찾아가야겠지요.
아버지의 마음… ㅜㅜ
한국에서 처녀 어머니가 주소만 들고 보스턴에서 유학하던 총각 아버지를 찾아가서 동거중에 내가 거기서 태어나고 일곱살 때 박사된 아버지와 엄마손 잡고 한국에 왔을 때 눈물로 안아 주시던 조부모들. 귀한 손자로 세수도 내 손으로 안 시키려던 할머니. 그런 손자인 나를 다시 먼 나라로 떠나 보내던 마른 눈의 떨리던 할머니 가슴. 잡은 손에 힘이 꼭 주어진 할아버지. 한 걸음 떨어져 서 있던 부모의 미소.
사랑이 많으신 석촌님. 아무리 어린 자식이었더라도 마음은 어른들의 심정을 다 일아요. 그래서 어렵고 외로운 생활을 굳굳히 어른들 심정을 힘으로 삼아서 견뎌냅니다. 사랑만이 인생에 힘이 되요.
도깨비불님의 이런 댓글이 나오리라고 기대했다네요.ㅎ
장장의 긴..
인생의 삶의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네에 고마워요.
석촌 님의 글은 깊이가 있어서
저 같은 사람은 댓글 달기도
조심스럽습니다.
응가를 도와주셨던 따님이 저렇게
잘 성장했군요.
유학 중에 아픔이 있었군요.
그 따님을 찾아 가신 이야기에 깊은
아버지의 정을 느낍니다.
잘 읽고 갑니다.
네에 고마워요.
글은 어제 읽었습니다.
먹먹한 석촌님의 그 사랑이 오롯이 전해저 오며,
자식으로도 모자랐고 부모로써도 한없이 부족한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런가요?
사정이야 저마다 다르지만
누구나 애환이 있게마련이지요.
삶이 무엇인가요.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요
네에, 고마워요.
긴 글 잘 읽었습니다
다복한 가정을 꾸리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한 가지 학력엘리트라고 쓰신 글 중
쓸데없는 욕심내는 이 들에 대한 부분
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극소수라고 봅니다
각자 배운 전공분야에서
평생을 일하며 기여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저도 제 전공을 잘 찾아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이겠지요.
다 그런 거야 아니지요.
잘 읽고 감사 드립니다!.
각자 자기인생 개척,
특히 2개국 3개국 이상을
하며 외국 살이 경쟁 교육은
살벌하고 우울증의 벽에
부딛이는가 싶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잘해냈으니 박수로
존경 합니다!
네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