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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리 이야기
초가집 처마 아래로 볕살이 깊어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시골집 장독간이나 울타리 밑 작은 화단에는 주렁주렁 열린 꽈리가 붉게 익어간다. 그러면 그것은 바로 가을이 왔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꽈리는 가지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이라고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한 번 화단에 심어 놓으면 매년 봄마다 새로 싹이 돋아나서 어른 무릎 위까지 자라나고, 유월 하순이나 칠월쯤에 희고 작은 귀여운 꽃을 피운다. 꽃이야 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꽃에서 맺은 열매가 자라나 가을이 오면, 열매를 싸고 있던 껍질이 불그레한 색상을 띄기 시작하면서 꽈리는 탐스럽게 익는다. 그 모양은 흡사 “하트”도안의 입체모형을 닮아있고, 꽈리열매는 껍질 안에서 익어, 작은 유리구슬 정도의 크기로 아름다운 주홍색을 띈다. 그럴 때가되면, 동네의 여자아이들은 너도 나도 모두들 그 열매를 따서 꽈리를 만들어 불었다.
지금은 거의 잊히어지고 말았지만, 지난 육십년 대 까지만 해도 이때가 되면, 집집마다 여자 아이들이 꽈리를 따서 불고 다니는 걸 흔히 볼 수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하는 소리가 흡사 개구리 울음소리를 닮았다하여, 집안 어른들이 뱀 나온다며 호통을 쳐서 불지 못하게 했지만, 다 큰 처녀나 심지어 아낙네들 까지도 몰래 재미로 꽈리를 만들어 불었다.
그 시절에 불고 다니던 꽈리 중에는 열매의 속을 파내고 부는 본래의 꽈리 외에도 고무로 만든 꽈리도 있었다. 그것은 꽈리 열매의 속을 파내는 과정이 어려워 십중팔구는 껍질이 찢어져 못쓰게 되곤 했던 까닭에, 장사꾼들이 아예 고무로 만들어 팔았던 때문이었다. 학교문방구나 동네 가게에서 팔던 그런 가짜꽈리야 제철이 아닌 봄이나 겨울을 가리지 않고, 사철 불고 다닐 수가 있었지만, 어디 제 손으로 직접 속을 파내고 어렵사리 만들어서 불어보는 제철의 꽈리에 비길 수야 있었으랴.............
그러기에 꽈리는 어렵게 속을 파내고 제대로 만들기를 한 것만으로도 자랑이었고, 혀를 굴려 소리를 내는 재간도 아무나 부리기는 쉽지 않았다. 보통은 애써 만들어 놓은 꽈리를 불기위해 혀를 굴리다가 입안에서 찢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그런 그 꽈리도, 그 동안의 급격한 산업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다른 우리네 정서들처럼, 이제는 사람들에게서 거의 잊히어져 가고 만 것 같다. 아마도 꽈리를 불고 다닐법한 연령층의 요즘 소녀들은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자란 어린 시절의 우리 집은 경상도 산골의 작은 마을이었고, 비포장도로가 긴 계곡을 꼬불꼬불 지나는 신작로 가에 있었다. 집 앞에는 작은 구릉을 이루는 도랑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구릉에 얹히듯이 지어진 우리 집에는 좁은 마당가에 장독대가 있었으며, 그 장독간에 작은 화단이 있었다. 시골 동네의 여니 집들처럼 우리 집 작은 화단에도 철이면 철따라 갖가지 풀꽃들이 계속해서 피어났고,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그 꽈리도 주렁주렁 열려서 탐스럽게 익어갔다.
그 때가 초등학교 들기 전해였으니, 아마 세는 나이로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였던 모양이다. 그 때 우리 동네에 “바례”라고 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 보담은 숙성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 아이는, 아마 두 살이나 세살 정도 나보다 나이를 더 먹었던 것 같다. 그 아이네 집은 우리 집 뒤를 지나는 신작로 건너편에서 대략 육칠십 메타정도 아래쪽으로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례는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 소녀였다. 어쩌다가 앉은 자리라도 옮기려면,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불편한 몸을 끌며 힘겹게 겨우 몇 걸음을 움직이는 정도였다. 그래서 항상 처마 밑의 같은 자리에 앉아서 혼자 중얼중얼 소꿉장난을 하며놀거나,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그도 아니면 아예 눈을 감고 자는 체를 하는지, 정말로 졸고 있는지 알 수 없이 꼼짝하지 않은 채 앉아 있곤 했다. 그런 그네를 보고 내가 놀래주려고 몰래 다가가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기라도 하는 때는,
“피이, 나는 니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닌 줄 다 안데이. 니 오는 거 모를 줄 아나?”
하며 반겼다. 동네에 또래 아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그네를 상대 해 주지 않았다. 앉은뱅이 바례는 항상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을 뿐 달리 친구도 없었다. 그네에게 찾아 가 보면 그네는 항상 혼자였었다. 왠지 몰랐지만 나는 그런 그네를 보면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네를 상대로 소꿉장난을 하거나 주머니에 넣어 간 볶은 콩을 나누어 먹기도 했는데, 그러면 참으로 기분이 좋아지곤 해서 거의 매일 찾아가 그네와 놀았었다. 아이들이 그런 나를 함께 싸잡아 놀려대기도 했지만, 나는 별로 아랑곳 하지 않았었다. 놀림을 받아도 그네와 노는 게 좋았던 것이다.
그네는 소꿉장난을 하며 놀다가도 내가 싫증이라도 내는 눈치가 보이면, 곧 잘 옛날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물론 들었던 얘기를 몇 번이고 다시 듣기 일쑤였지만, 그런 얘기도 그네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다시 시작하면 나는 금방 솔깃해지곤 했다. 들을 때 마다 조금씩 달라지거나, 다른 얘기와 겹쳐져서 또 다른 얘기가 되기도 하는 그네의 얘기는 듣고 또 들어도 재미있었다.
어떤 때는 처마 아래 산그늘이 들고 저녁녘이 되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예의 그 우리 어머니가 부르시는 “덕보야아!”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이 드는 때도 있었다. 그런 때면 그네가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덕보야아!”하고 우리 어머니 흉내를 냈다.
경상도 산골 마을에 서울말 쓰는 유일한 여인이셨던 어머니가 나를 부르시는 소리는 흡사 “솔솔도오~”하는 음계를 꼭 닮으셔서, 동네 아이들 모두가 흉내 내며 다니곤 했던 것이다.
지금 그 “덕보야아~”는 나에게 한없이 그리운 “덕보야아”지만, 아버님이신지 아니면 어머니신지 기억할 수는 없어도, 하여튼 “덕보”는 내 부모님이 지어주신 별명이었으며 아호였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들면서부터는 거의 부르지 않게 되었고, 그 후 우리가문의 족보에 올라있는 나의 자호가 되기는 했으나, 지금은 몇 안 되는 내 글친구들이 불러 줄 뿐이다.
그 때의 그 “덕보야”를 부르시던 어머니는 내가 바례와 노는 걸 따뜻이 보아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도 했다. 부엌을 뒤져서 무엇인가를 찾아내 몰래 바례에게로 가는 나의 행적을 빤히 아셨던 모양으로, 찬장 문만 열면 눈에 띄는 곳에 볶은 콩을 종지에 담아 놓으시거나 엿이나 과자를 넌지시 놓아두시곤 하셨던 것이다.
배고프던 시절이었지만 먹을 걸 가져다주는 내가 바례에게는 부담스럽고 걱정스러웠을지도 몰랐다.
“니 왜 자꾸 이런 거 가져오노? 카지 마라. 자꾸 이카만 너 집에서 내캉 못 놀게 한데이........”
그네는 내가 앞자락에 놓아주는 먹을 것을 내려다보면서도, 얼마나 먹고 싶고 배고팠을까만, 그래도 여간 해서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겸양의 미덕을 타고 난 아름다운 그네였다. 내가 몰래 먹을 걸 가져온 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가끔씩 그네가 먼 곳으로 눈길을 준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을 때는, 해맑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그네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내가 까닭 없이 조마조마 해 지기도 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날리며 먼 산을 바라보기만 하는 그네의 옆얼굴에는 어쩌면 가을하늘처럼 싸늘하면서도 고귀함(?)을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네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었다. 동네 아이들이 그네와 소꿉장난을 하며 노는 걸 흠잡아서 나를 놀려대는 때도, 그네는 암 말 없이 물끄러미 먼 산만을 바라보았다. 그런 때의 그네의 눈빛은 너무나도 고요했고 표정이 없었다. 놀려 대는 데도 아무 반응이 없어 아이들이 제풀에 지쳐 어딘가로 가버리고 나면, 불쑥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덕보야. 놀림 받으니 니 부끄럽지? 이제 나하고 안 놀아 줘도 괜찮다. 나는 니 맘만 알면 된다. 놀림은 이제 고만 받거라. 내년에 니 학교에 들면 어차피 나하고는 못 놀 거 아이가 ........”
하며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울 엄마는 나보고 자꾸 죽어버리라 카는데, 그 소리 들으마는 참말로 죽고 싶을 때도 있다. 마 먹어도 아픈 줄 모르고 죽는 약만 있으면 나는 그만 죽는 게 편할 거 같다. 배도 안고프고 울 엄마도 날 안 미워할 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미동도 않고 허공을 보았다. 나는 모진 욕지거리를 퍼부어 대는 바례네 엄마의 목소리도 들었고, 무조건 잘못 했다고 애원하며 비는 바례도 봐왔었다. 어떤 때는 매질까지 해댔지만 나는 그네가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은 없었다. 그네는 매를 맞으면서도 울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네가 울고 있다는 걸 마음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맑고 투명한 그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음을 느끼면, 그만 그네의 절박한 슬픔이 그대로 내 가슴으로 저미고 들었다. 그런 때는 오히려 내가 그만 “엉엉”소리치며 울고 싶어지곤 했다.
“바례는 눈물도 소리도 없이 매일처럼 저렇게 울고 있을 거야. 몰래 .......”
그러면서 나는 그런 그네의 슬픔을 가슴으로 아파했었다.
무더운 여름이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산산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이었다. 처마아래, 포개 접은 가마니를 깔고 앉은 바례에게 비취는 햇빛이 따사로워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 집 작은 화단에서는 주렁주렁 열린 꽈리가 보기 좋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바례를 찾아가 놀았다.
“덕보야. 너 집에 꽈리 많이 열었지? 울 집에는 윗집 개가 와서 다 뭉개고 하나도 없는데 너 집 꽈리 좀 따다 줄래?”
그날은, 부탁 이란 걸 한 적이 없었던 그네가 조심스럽게 내게 꽈리를 따다 달라고 했다.
“그래. 우리 집에는 많이 열었다. 내 좀 따다 주꺼마. 그런데 니 꽈리 뭐 할라 카노?”
“나도 꽈리 한번 만들어 불어 볼라 칸다. 너 집에서 야단 안치겠나? 너 누나야가 야단치면 어쩔래?”
“그까짓 거 따는데 왜 뭐라 카노? 괜찮다. 내 한 보따리라도 따다 주꺼마.”
나는 한 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우리 집 화단에는 물론, 탐스럽게 익은 꽈리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나는 단번에 여남 개를 따서는 바례에게로 달려갔다.
“자아, 여기 따 왔다. 니 꽈리 만들어 불어봐라.”
내가 반색을 하는 그네에게 꽈리를 건네주자, 그네는 옷핀으로 조심조심 속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속 파내던 구멍이 그만 찢어지고 말았다. 다음 것도, 또 그 다음 것도 그렇게 찢어져 버렸다. 꽈리 만들기는 모두 실패였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만 그네가 울상을 지었다.
“괜찮다. 내 금방 또 따다 주꺼마. 쪼금만 기다려라.”
나는 또 다시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달려가서 꽈리를 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네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 없이 마구 따다 보니 화단 한 쪽이 허전해 진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야단맞을까 걱정스러워진 나는, 장독대 뒤의 구릉 쪽을 살펴보았다. 그 쪽에는 더 많은 꽈리가 붉싯붉싯(경상도사투리-고추나 과일 등이 붉게 익어가는 모양)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그 곳이라면 얼마든지 따가도 아무도 뭐라고 할 것 같지 않았다. 그 아래는 사오메타가 넘는 벼랑이었다. 구릉의 바닥은 청석으로 깔려있었고, 우리 집은 절벽을 이룬 구릉과 연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딱지와 팽이 등을 모두 꺼내놓고, 한 쪽 주머니에 가득 꽈리를 따 담았다. 그러고도 또 한쪽 주머니마저 꽈리를 따 담고 싶어졌다. 바례를 놀라게 해 주고 싶고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조심스레 장독대 뒤 벼랑 쪽으로 돌아 간 나는, 한 손으로는 꽈리나무(사오십 센티 정도 자란 꽈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정신없이 주머니에 꽈리를 따 담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꽈리초가 뿌리 채 뽑히고, 거기에 의지하여 경사진 벼랑에 서 있던 나는, 그만 절벽 아래 구릉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청석 바닥에 심하게 부딪힌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의 고함소리를 가마득히 들으며 눈을 떴을 때는 우리 집 방 아랫목에 누워 있었고, 식구들이 나를 둘러 앉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근심스런 눈으로 내려다보시며 내 머리에 물수건을 얹어주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왠지 큰 죄를 진 것 같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정말 구사일생이야. 아무데도 다친데 없이 말짱하게 살아났어.”
나중에 그런 소리를 들었지만, 그 때의 충격 때문이었던지 말짱하다던 나는 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없이 자꾸만 잠에 빠져들었고, 잠 속에서 무서운 꿈을 꾸기도 했다.
“얘 덕보야. 그만 자. 먹고 또 자야지?”
그런 어머니의 목소리를 수 없이 들었던 것 같았는데, 언제 부터인가 갑자기 볼과 귀가 아프기 시작했다. 볼치기(이하선염)였다. 음식을 먹을 수도 없을 만큼 몹시 앓았다. 어머니가 떠 먹여주시는 미음을 받아 삼키기도 어려웠다.
그 볼치기를 시작으로 독감과 홍역을 앓기 시작했고, 나는 지금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길고 긴 고통의 터널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정신은 혼미 해 지고, 무서운 꿈이 계속됐다. 신열과 고통으로 헛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작은 언덕에 서 있었다. 놀랍게도 저 만치서 바례도 성한 아이처럼 두 다리로 일어서 있었다. 그네가 자꾸만 손짓해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달려 가 보았지만, 그네는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내가 다가갈 때 마다 번번이 다시 멀어지곤 했다. 그래서 도저히 가까이 다가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언젠가 솥공장(주물공장)에 구경 갔을 때 보았던 검붉고 뜨거운 쇳물이 산더미처럼 밀려와서 바례를 휩쓸어 버렸다. 바례는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뜨거운 쇳물 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나는 아! 하고 놀라 소리쳤다. 그런데 그 쇳물이 다시 내게로도 밀려왔다. 다급해진 나는 정신없이 도망쳐 보았지만, 걸음마저 떨어지질 않았다. 이내 나도 그 무서운 쇳물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쳐 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것은 처절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무서웠다. 그 절망과 고통은 오래도록, 끊임없이 되풀이 하며 나를 괴롭혔다.
악몽과 신열은 계속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밤과 낯도, 아침과 저녁도 구별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고통으로 사경을 헤매는 동안 반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흘러갔던 모양이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겨우 기운을 차려 미움도 먹고 일어나 앉을 수도 있게 되자, 어머니가 나를 마루로 데리고 나오셨다.
“얘 덕보야. 저기 장씨네 밭에 보리 좀 보렴.”
우리 집 앞 작은 구릉 건너편 장씨네 밭에 보리가 파아랗게 자라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계절이 두 번 씩이나 바뀌고, 해도 바뀌어서 어느덧 봄이 된 것이다. 그것도 늦은 봄이.........
나는 이듬해 봄에야 참으로 오랜만에 회복을 도우려고 애쓰신 어머니의 정성으로 바깥 구경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나는 빠르게 회복 해 갔다.
“바례는 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금도 매일 먼 산을 바라보며 앉아있을까? 아니면 혼자서 중얼거리며 소꿉장난을 하고 있을까?”
바례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지만, 쇄약해진 나는 아직 혼자서 찾아 가 볼 형편은 못됐다. 그러고도 며칠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내가 다닐 초등학교를 가게 되었다. 앓아 누워있는 동안 미리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가셔서 입학은 시켜주셨지만, 아직 나는 가보지 못했던 학교였다.
처음으로 학교에 가던 그날, 학교에 다녀와서 초등학생이 된 나는, 궁금하고 보고 싶던 바례를 찾아 가 보았다. 그런데, 늘 앉아있던 그네만의 자리에 바례가 보이지 않았다. 그네가 앉아있던 가마니 포개접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해맑게 웃으며 반겨줄 것 같은 그네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 갔을까? 지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항상 그 자리에만 있었던 그네를 불러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용기를 내서 큰 소리로 나는 바례를 불렀다.
“바례야!”
그네는 대답이 없었다.
“바례야!”
다시 한 번 불러 보았지만,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평소에 그네의 홀어머니는 읍내에 일 나가시고, 낯에는 늘 혼자 집에 있었다. 집을 지키며 비울 날이 없었던 그네였다. 그런데 그네가 없었다.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그네가 달리 갈 곳이라고는 없었던 까닭에 나는, 집에 없는 바례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파뜩 이상하고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이사를 가버린 건 아닐까? 멀리 내가 갈 수 없는 다른 곳으로.........”
그 이상한 설마의 불안은 형체가 없는 그 무엇이었지만, 나에게는 어쩐지 두렵고 충격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 바례네 어디로 이사 갔어요? 바례네 집이 빈집 같아요.”
서둘러 집으로 들어서며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읍내로 이사 갔으면 엄마랑 같이 가보면 되는데요........?”
나는 중얼거리듯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지만 어머니는 쉽사리 대답을 해주지 않으실 것 같았다.
“어디로 이사 갔는데요, 멀리요 아주?”
어머니로부터 무언가 궁금하고 불안하던 것에 대하여 해답을 얻고 싶었으나, 어머니는 한 동안 나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시기만 하셨다. 그리고는 한참만에야 대답하셨다.
“그래. 그렇게도 바례가 보고 싶으냐? 그런데 바례네는 먼데로 이사를 갔는데 어쩌지?”
“정말 이예요 엄마?”
“그렇단다. 덕보가 놀러 갈 수 없는 먼데로 이사를 갔단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
“덕보야. 이제 학교에 다니니까, 네가 글씨를 쓸 수 있게 되면, 바례 한태로 편지를 써 보면 어떻겠니? 그럼 우체부 아저씨가 바례네로 갖다 주실 텐데, 그러면 되겠지?”
“바례는 학교에도 안 가니까 글씨도 모르잖아요!”
나는 고개를 떨군채 서 있었다. 뜨거운 것이 목으로 치오르는 듯 했다.
“사나이 자식이....... 울면 쓰나, 참을 줄도 알아야지? 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을 때도 있는 거란다. 그리고 바례는 똑똑한 아이라서 덕보처럼 글씨를 배울 수도 있을 거야.”
내가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자아 우리 덕보 착하지? 우는 사람은 바보! 엄마가 뭐 맛있는 거 해 줄까? 어디 말해보렴?”
나는 그때, 그대로 오랫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서 얼마가 지난, 그해 초여름쯤이었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동내 풀밭에서 공차기를 하고 놀던 끝인데 짓궂은 한 녀석이 그랬다.
“덕보자슥 바례가 없으께네 공차는 것도 영 션찮다. 시껀 좀 차봐라 자슥아!”
또 한 녀석이 그랬다.
“금마 그거 바례 골로 간 줄도 모르는 갑다. 니 암만 케봐라 자슥아. 바례가 다시 살아나나. 어디 힘 쫌 내 봐라 자슥아!”
그때야 비로소 나는 나를 그토록 불안하고 무섭게 하던 그 두려움의 실체와 접하게 되었다. 어둡고 긴 터널 같았던 지난겨울의, 그 신열과 고통의 악몽 속에서 보았던 바례는, 검붉고 뜨거운 쇳물 속으로 정말 휩쓸려 사라져 갔던 것이다.
가슴이 떨려왔다.
테연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바례는 바로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지난겨울의 어느 날엔가 몰래 숨기고 있던 금계랍(키니네)을 삼키고 홀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배고프지도 않은 곳으로..............
나는 어렸지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절실하고 확실한 사실을 깨달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는 절대로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거였다. 그것은 단절이었다.
꽈리 따던 날.
나는 바례를 마지막으로 보았고,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덕보야. 너 집에 꽈리 많이 열었지? 니 꽈리 좀 따다 줄래?”
“그래. 니 뭐 할라 카는데?”
“나도 꽈리 한번 만들어 불어 볼라 칸다.”
“자아, 여기 따 왔다. 꽈리 만들어 불어봐라.”
그네의 해맑고 투명한 얼굴이 허공에서 창백하게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몇 해 동안인가를 나는 문방구에서 파는 고무꽈리를 사서 아무도 모르게 주머니에 넣고 다녔었다.
지금 세상에야 누가 그런 꽈리 같은 걸 만들어 불어보고 싶어 하랴만, 오늘 산책길에, 늘 지나다니던 꽃집 앞에서 그 꽈리를 만날 수가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보는 반가운 꽈리였다. 붉고 탐스럽게 익어가는 꽈리를 그 꽃집에서는 아주 다발로 묶어 놓고 팔고 있었다. 꽃꽂이를 하거나 벽걸이 장식용이라고 했다. 가을꽃과 함께 화병에 꽂거나 다발채로 벽에다 걸어보면 아름다울 것도 같았다.
환갑 줄에 들어서서 허옇게 서리를 이고서도, 오늘은 쳐다 본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이 가을에는, 나도 그 꽈리 한 단 사다 벽에 걸고 가을을 장식해 보았으면 싶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덕보님 탁월한 글솜씨로 꽈리이야기를 해주셨네요 주황색 갓을 씌운 등처럼 앙증맞던데요
꽈리를 아시는 군요. 랑랑님. 어설픈 글에 머물러 주시어 고맙습니다.
너무 재밌게 봤네요....저도 꽈리 불며 살았던 세대지요....정말 지금도 벽에 꽈리 몇 줄기 꽃아 두며 살구요....근데 윗 글이 사실인지요?????...아름답고도 슬픈 글에 놀랐네요....
들국화 여인님. 보잘것 없는 글에 머물러 주시어 고맙습니다. 단편으로 썼던 글인데, 수필로 개작하면서 참이 아닌 부분은 모두 걸러냈답니다. 개작이라 소설도 수필도 아닌것 같은 어정쩡한 글이 되었습니다. 어떤 잡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덕보님 긴 글 올려주셔 잘 읽어 보았는데요... 꽈리 이야기보다는 참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랑이야기 같아요 그 쇳물이 어찌해서 두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는지 어찌해서 그런 불행한 일을 겪게 되셨는지 상세한 설명이 없어 넘 아쉽네요 지금 덕보님은 어떤 상태 이신가요 이 글을 읽으면서 아니 어쩜 이럴수가...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만드네요 가슴에 담으면서 잘 읽고 갑니다... 주말..잘 보내시구요..
알라뷰님. 보잘것 없는 제 글에 머물러 주시어 고맙습니다. 누구나 하나 쯤 잊어버릴 수 없는 슬픈 기억이 있을것입니다. 그런 기억 속의 이야기를 쓰고싶어 했던것입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가슴의 저 깊은곳 밑 바닥으로부터 무엇인가 꿈틀거림을 느끼는 되는 아주 절절하고 순수한 사랑을 하셨군요! 짧은 삶으로 마감을 하게된 바레라는 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덕보님 보다도 더 반짝이는 마음으로 아지랑이 처럼 따스함으로 덕보님을 바라 보았을것으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주고 자기와 놀아주고 자기의 이야기도 들어주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친구이며, 희망이며, 빛이며, 사랑인 덕보님을 자기가 그렇게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아주 절박하고 절망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생각을 해 보게 되네요. 오호~ 애재라! 덕보님 마음도 아팠겠지만 바레라는 사람의 그 순백의 영혼은
얼마나 긴 고통의 터널을 걸어서 갔을까요! 이제는 배고픔도 없고 자기를 놀리는 사람도 없는 아주 평온하고 좋은세상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겠지만 님의 글을 보다가 순간! 현기증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애절한 순백의 사랑에......
보잘것 없는 글에 머물러 칭찬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누구나 잊을 수없는 어린시절의 이야기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한권의동화를 잃고난거같습니다..글을정말잘쓰시는군요.가슴찡한내용이마음아프게하네요,바례는 좋은곳으로같을꺼라고 믿고십습니다.
k나리님. 부실한 글에 머물러주시어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덕보님 어린시절 애기가 너무 슬프네요 바려가 너무 불상하고요 지금은 시골에 가도 꽈리보기가 힘들어요 아름다운 추억 고이고이 간직하세요 ...감사합니다...
art바라님. 부족한 글에 머물러 주시어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읽으면서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가 생각나네요...눈물이 많은 제가 글을 보면서 가슴속으로부터 밀려오는 슬픔에 눈물도 흘리구요...바례란 아이 결코 외롭지는 않았을겁니다 마음 따듯한 덕보님의보살핌?...에 위안이 되었을터니요...추억속의 바례와 꽈리...덕보님의 아련한 추억속을 함께 공유하며....항상 좋은날만 있으시길요...
신여성님. 고맙습니다. 님께서도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시월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