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요구'와 '내면의 욕구'
▲ 빨리 다시 가보고 싶은 파리, Paris 2017, 75JEROME
‘드로잉은 내면의 욕구를 다루는 일이다.’
지난 글에서는 잘 그리지 않기, ‘못(멋대로) 그리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호기심을 따라 자연스럽게 시도하는 그리기, 잘 그려야 할 것 같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방해받지 않고 몰입하는 그리기, 그리는 경험에 대해, 그리고, 그리고자 하는 욕망을 억압하고 방해하는 부담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될 수 있는지도. 오늘은 그 이야기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시 해보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 그리기를 시작(시도) 하는 것이 어렵다면 왜 어려운 것일까? 아직 그림을 많이 그려보지도, 배워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누구한테나 있을 수 있는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자연스럽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종이 위에 선을 긋기 시작했고, 어쨌든 그리기에 발은 담근 상태임에도, 그리기를 시작하기 전보다 더 격렬하게,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급격하게 자신을 잃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호기심을 가지고 내가 그려가는 그림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내가 부끄럽기만 할까?
잘해야 할 것 같은 부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낯선 것들에 대한 경계심 등 여러 가지 이유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드로잉을, 그림을 그리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다루는 일’로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역시 내 내면의 욕구를 다루어 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 불안, 경쟁, 긴장 속에 살아간다. 어쩔 수 없이 ‘내면의 욕구’보다는 ‘외부에 요구’를 우선하게 된다. (감성, 인격, 고유성을 형성해가는 중요한 시기 또한 이런 상태에서 보내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내면의 욕구’를 다룰 시간은 늘 부족하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다. 손에 든 번호표는 한심하기 그지없다. 오늘은 글렀다.) 그래서 내 ‘욕구’를 다루는 일에 서투르고, ‘내면의 욕구’를 다루는 일은 점점 더 부끄러워진다.
‘내면의 욕구’는 나를 위해 善(선)이고, ‘외부의 요구’는 惡(악)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둘 다 중요하고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이 둘을 동시에 하면서 살아간다. ‘외부의 요구’에 충실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또 내 생활에 필요한 보상을 얻는다. 생존,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외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보상만으로는 내가 나로 충분히 행복할 수 없다. 나를 나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할 것이다. (내 ‘그리기’가 그러하다!)
내면의 욕구를 다루는 일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충분한 시간과 힘을 쏟아야 한다. (이 일은 사실 더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내 ‘내면의 욕구’를 최후 순위로 밀어낼 정도로까지 ‘외부의 요구’에 과몰입한다. 외부의 요구를 다루는 일에는 점점 더 탁월해지지만, 내 내면의 일을 다루는 일에는 그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
이제 다시 ‘그리기’로 돌아와 보자. 일단 드로잉은 ‘내면의 욕구’를 다루는 일이다. (그리고 싶지 않다면 그릴 수 없는 일이다.) 드로잉은 내 신체,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 세계에 대한 감흥에 내가 반응하는 일이다. 눈을 통해 내 내면이 드러나는 일이다.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그리는 상태, 그리는 과정 속에 있을 때,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보고 있는 대상과 더불어, 그 관계 속에서) 잘 살펴야 한다.
이때 이것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건 바로 타인의 시선이다. 그 시선들에 대한 내 불안과 두려움이다. 외부의 요구에만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내 태도다. 내 관심이 방어적으로 밖을 향하는 순간, 나는 내 안을 볼 기회를 잃는다. 등화관제, 내면을 밝히던 불은 꺼지고, 내면은 어둠 속에 잠긴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나를 살필 수 없다. 내 그림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볼 수 없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그 모든 순간에, 서서히 기지개를 켜듯 일어나는 미세하지만 놀라운 내 안의 ‘감촉’들을 놓치게 된다. 선을 긋는 그 순간의 황홀함과 감미로움을.
그림을 그려보고 싶지만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모르고, 그림을 그리는 나와 내 그림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한 나는 어떻게 그리기를 시작하면 좋을까? 계속 그리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그려진 내 그림을 나는 어떻게 봐야 할까? 어떤 대상을 바라보며,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내 감각(몸)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따라가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이렇든 ‘그리기’는 사실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다. 그 단순한 것을 풍부하게 하는 것, 그게 ‘그리기’다. 당황하지 말고 그 단순한 그리기를 충만하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리기에 대한 ‘감촉’을 느끼는 것. 매우 자연스럽게, 누구에게나 일아날 수 있는 그 일을 겪는 것. ‘내면의 욕구’로서의 건강한 내 그리기의 시작이다.
‘탁월함 뒤에 쌓인 원망과 분노로는 내 그림(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제롬 (www.75jero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