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3. 1. 금요일.
하늘이 맑고 밝고 푸르다.
어제까지는 겨울이었고, 오늘서부터는 봄이건만 종일토록 영하권. 무척이나 춥다.
오늘은 제105주년 삼일절이다.
내가 사는 서울 송파구 어떤 아파트 벽을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면서 삼일절인 오늘 태극기가 얼마나 많이 내걸었을까 하고 헤아려봤다.
30층 가까운 아파트 베란다에 내걸린 태극기는 2 ~ 3개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태극기를 내걸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나서 전국에 걸쳐서 시위했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 게다.
내 여자고등학교 카페에서 '삼일절'이란 문구로 검색하다가 아래 글을 보았다.
2020. 3. 4.에 쓴 내 글이다.
퍼서 여기에 올린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태극기'
1.
3·1절에 대한 시가 떴기에 내가 아랫처럼 댓글 여러 개를 연거푸 달았다.
생각을 정리한 것도 아니다. 그냥 다다닥했다. 글감이다.
반성한다.
1)
나를 반성합니다.
제 조상이 일본인 계열도 아니고, 또 친일파의 후손도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서울 송파구 잠실 어떤 아파트단지... 베란다에 고개를 내밀고는 태극기를 내 건 숫자를 헤아립니다.
30층에서 고작 2 ~ 3개가 펄럭입니다.
현관문 바깥으로 나가서 아파트 단지를 제대로 조사하면 그제서야 숫자가 늘어날까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1919. 3. 1.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지요. 태화관 음식점에서는 손병희 선생 등이 만세 삼창을 한 뒤에 왜경에 연락하여 체포.
전국 1,542회 만세..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6천명, 체포자 4만 6천 명.
7,500여 명이 죽었는데... 우리는 고작 30여 명 정도의 일본인을 죽였지요.
2)
1919. 4. 1. 천안 병천면 아우내 장터 만세사건... 현장에서 19명 죽었고, 40여 명이 부상.
유관순 여학생의 아버지, 어머니도 현장에서 죽고.. 유관순 등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
다음해 2월 28일 사망... 사체를 바께스에 담아서 서울 용산구 후암동 공동묘지에 매장.
1937년 이곳이 개발되면서 유해는 유실...시신조차 없지요.
아직껏 청산하지 않는 친일.. 그 후손들이 얼마나 잘 살까요?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은 일본인은 신분을 감춰서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겠지요.
오늘이 삼일절... 신종 바이러스 때문에 또 위축되네요.
3)
1919. 3. 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은 33명.
기독교 16명, 천주교 15명, 불교 2명.
유교/사대부 양반은 단 1명이라도 있을까요?
1910. 8. 22. 한일합방에 서명한 이완용, 1주일 뒤인 8월 29일에 조선은 막을 내렸지요.
일본은 조선왕족 사대부 양반 3,159명한테 은사금을 두둑히 하사했으니...
그거 못 받은 사람들은 뭐죠?
3·1 독립선언서를 작성 기여했던 육당 최남선은 33인의 서명자는 아니로되...
훗날 친일파가 되어 해방 이후에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다가 한국전쟁으로 후지부지..
33인 가운데 4명은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어
해방 후 친일명단조차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고...
그래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삼일만세 운동..
4)
저도 답답합니다.
제101주년 삼일절인데도... 행사가 축소되고...
오래 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을 방문했고, 바로 인근에 있는 흑성산에 올라서 독립기념관을 내려다보면서 목이 터져라 독립운동가를 불렀지요. 흑성산 아래 숙소에서 숙박하면서...
아쉽게도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네요.
쪼다 조선조 말기... 1905년 을사보호늑약에 서명한 대신 5명(이완용 등), 왕인 고종은 아니다라고 항의해 봐야 헛탕이고, 1910년 8월 22일 서명, 8월 29일.. 조선조는 막을 내리고 식민통치 시작.
1919년 2월 고종이 죽자 장례 일자가 가까웠고...
서울 태화관에서 위 종교계 33인이 서명한 뒤 일경에 알려서 29명 자진체포당하고,
국민들은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오후 2시에 만세 시작. 평화적인 시위..
5)
평화적인 시위였는데 왜경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왜경, 헌병인은 오로지 일본인만 있었을까요?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경기도 의왕시에 이전하면서..
그 유적지를 축소해서 아파트나 지어서 분양이나 했지요.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
지난해 연세대 류석춘 교수는 '위안부 매춘' 운운하면서... 일본의 지원을 받아서...
아쉽네요.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나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80만 ~ 130만 명이 신분세탁해서 한국사람으로 잘 먹고 잘 살겠지요.
참고
3·1운동 관련 공판기사에 나온 민족대표 48인의 사진.
이 가운데 일경에 붙잡혀 옥사한 분도 계시다.
///////////////////////////////////////////////
오늘은 2024. 3. 1. 금요일.
3년 전에 쓴 내 일기장을 다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조금만 끄적거린다.
1919. 3. 1.부터 번지기 시작했던 삼일운동 만세사건.
만세 불렀다고 해서 일경에 체포된 사람, 죽은 사람, 다친 사람 등은 엄청나게 많다. 숫자가 약간씩 다르기는 해도 무척이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다쳤고, 징역살이를 했다.
이 당시 조선사람 모두가 일제에 항거했을까?
일본제국주의로부터 극직한 대접을 받은 친일파들도 엄청나게 많았을 게다.
하나의 예로써 '윤웅렬, 윤치호' 등의 인명으로 검색하거나 '해평윤씨', '윤보선' 등의 이름으로 '가계도'를 검색하면 많은 자료가 뜬다(가계도 인명 사진 등).
관계, 정치계, 재계, 학계, 결혼 등으로 서로 연결되어서 두각을 나타낸 특정 가문을 엿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써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등을 역임한 '윤치영'은 훗날 공적이 취소되어 친일파로 분류되었다.
이처럼 윤보선 대통령의 집안은 엄청난 가문이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임.
인터넷에 많이 나도는 사진이다.
* 1960년대 윤치영은 정치학교수.
최근의 한국정치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는 빙빙 에둘러서 피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그 당시에는 몰랐다.
훗날 그 분이 친일파로 국가공훈이 취소되었다는 뉴스를 보고는 나는 놀랐다.
'역시 그랬구나.'
대한민국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행적은 어떠할까?
아쉽게도 이승만은 1948. 8. 15.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친일파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하는 척하다가는 그만 두었다.
1950. 6. 25. 한국전쟁이 터지자 '달려라. 런승만'으로 알려져 있다.
현행 우리나라 국사교육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제대로 못할 게다.
친일행적을 감춰야 하는 현실이기에.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병천면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던 '유관순열사'와 그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아우내장터에서 만세를 함께 불렀던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현장에서 살해당했고, 유관순은 체포되었으며 ....
유관순 가족들이 죽음으로써 얻은 게 과연 무엇일까?
이와는 달리 친일했던 친일파 후손들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살지 않던가?
나는 지금껏 1919년 3월 1일을 나타내는 문구로 '3·1절'로만 알았는데 '국어연구원'에서 '3.1절'로 개정했다는 것을 어제에서야 알았다.
<아름다운 5060카페> 회원 '섭이.'님이 '2014년에 3.1절'로 개정되었다'고 아래 자료를 첨부해서 알려주셨다.
세상에나. 나는 전혀 몰랐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오래전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단기과정인 국어교육을 두어 차례 받았던 나는 국어연구원의 처사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3·1절' 가운뎃점을 찍으면 특별한 뜻을 지닌 날짜로 인식하는데도 이를 '3.1절'로 표현하는 일상적인 날짜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당시 '국어연구원'에서 교육받으면서 교수들이 '혹시 친일파 후손들은 아녀?' 하는 의구심이 일렁거렸다.
국어연구원(원래는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에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의문시했던 나였다.
지금은 2020년대.
또다시 일본이 일어서는가 보다.
지난해 2023년 우리나라 영해 동해안에서 <미·일·한 합동군사훈련>이란 명목으로 일본 자위대 군함이 들락거리고,
독도를 '다케시마(竹島 )'라고 주장하는 일본이라니....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친일 명단조차 제대로 없는 현실이다.
'진실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
이 말을 되뇌이면서 이쯤에서 줄인다.
모두 잘 알고 있을 내용들이기에.
2024. 3. 1. 금요일. 최윤환 글 씀.
세로로 읽으면 '자위대'
...... 오늘은 1919. 3. 1.에 일어났던 '대한독립만세의 날' 제 105주년이다.
그 당시 '자유'를 주장하는 만세운동이었을까?
'자유'의 반대말은 '독재'로 해석하면 그 당시에 '독재타도'를 외친 삼일만세였을까?
* 자유의 반대말 : 독재, 굴종, 억압, 핍박, 탄압, 결박, 구속, 규제, 부자유 등
지금은 2024년이다.
105주년 삼일절에 대해서 '자유'를 운운하다니... 이해가 안 된다.
동해안으로 '자위대' 군함이 또 들락거리겠구나. '다케시마' 운운하면서....
자위대는 일본 방위성에서 운영하는 준군사조직이다.
이만 쓸란다.
비윗장 거슬린다. 구토할 것 같다!
첫댓글 네 역사 교육 배웁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조금만 썼지요.
뒤집어서 보면 더 많이 보이겠지요.
많은것을. 배우고 갑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역사는 강자가 새롭게 고쳐 쓴다'라고 말하지요.
위 기미독립선언서를 초안했던 육당 최남선은 위 33인에는 속하지 않지만 해방 이후에는 친일파로 분류되어서.....
위 33인 가운데 4명은 훗날 친일파가 되어....
기미독립선언서 서명은 33인이나 그날 행사에는 29명이 참가했지요.
태화장 음식점에서 선언문을 읽고는 일경한테 연락해서 스스로 검거되었지요.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한 만세운동.....
이씨왕조, 사대부, 양반들이 참가했을까요?
가난한 자들이 태극기를 휘둘렀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처형당했겠지요.
반민족 친일파 명단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지요.
서로 얽히고 설힌 권력층 가문들이니까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친일파 묘소가 아직도 잔뜩 남아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