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번 못 밟고 올겨울을 보내는 것이 아쉬워 눈 산행을 계획한 것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한라산을 오르며 녹지 않고 남아있는 눈이라도 밟아보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성판악에 모이기로 했다. 바로 전날 밤 11시까지도 김립이 제주시에 볼일을 보고 성판악을 지나며 날씨가 좋아 내일은 승용차로 와도 좋겠다는 전화를 걸었었다. 그러던 것이 새벽이 되자 날씨가 급변했다. 비에 섞여 눈이 조금씩 내리더니 날이 밝으며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승용차로는 곤란하다 싶어 버스로 가기로 하고 터미널에 모이기로 했다.
처음에는 8명으로 예상했었는데 아침에 산하부부가 합류하는 바람에 일행에 생기가 돌았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성판악 표를 달라니 대설로 인해서 한라산 등반이 전면 통제되었다고 헛걸음하지 말고 아예 포기하란다. 그래도 이왕 나온 김에 눈이라도 실컷 보고오자는 심산으로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가면서 전화해보니 서귀포 친구들은 벌써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단다.
산천단을 지나자 길에 눈이 쌓여 버스 말고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눈길을 걷는 등반객 만이 울긋불긋한 차림으로 길을 수놓고 있다. 버스 한 대가 미끄러져 길을 가로질러 서있다. 9시 40분 경에 눈이 하얗게 덮인 성판악휴게소에 도착하였다.
터미널에서 들은 것처럼 한라산 등반은 전면 통제되고 있어서 일찍부터 눈산행을 위해 나온 등반객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커다란 눈사람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한라산 오르기를 포기하고 눈치를 보아가며 앞에 있는 물오름이라도 오르자고 그 곳으로 향하던 차에 기쁜 소식이 들렸다.
조건부로 등반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단체에 한해서 그리고 사라악 대피소까지만 연락처를 적고 등반해도 좋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온 등산 관광객 수십 명이 관광버스로 도착하여 항의하는 바람에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 우리는 당당하게 C오동, 남6명 여4명, 계10명을 적고 눈이 쌓여 종아리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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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 긴 행렬을 이루며 산을 오른다. 방금 내린 눈이라서 가볍고 폭신폭신하다. 눈가루를 차며 걷는 맛이 기막히다. 스패츠에 아이젠까지 완전무장 했으니 발에 눈이 들어갈 염려도 없다. 빽빽한 나무로 바람을 막아주어 그렇게 춥지도 않다. 잎을 떨구어버린 겨울나무들에 하얀 눈꽃이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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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에 작은 분실사고도 있었다. 꼴찌의 카메라가 눈 속에 무단가출한 것이다. 기온이 차면 카메라가 작동을 못한다는 소리에 안 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이 그만 밑창이 없는 헛주머니에 넣는 바람에 눈 속에 빠뜨린 것이다. 카메라가 없는 것을 알고 뒤돌아가 찾아보았지만 눈 속을 어이하리.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C오동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우리의 즐거운 모습을 기록했던 작고 귀여운 우리의 마스코트였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이 이런데 당사자인 꼴찌의 마음은 어떨까? 애처롭게 찾고 불러본들 무슨 소용이랴. 하루빨리 잊고 새로 구입하는게 상책이라고 선배로서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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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표지점인 속밭에 닿았다. 조금 더 가면 사라악이지만 우리의 욕심을 여기서 접기로 했다. 눈발이 더욱 심해진다. 앞이 안 보일 정도다. 이러다가는 무슨 사고라도 당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점심 먹을 장소로 꼴찌가 기막힌 궤를 찾았다. 옹색한 대로 여자들을 안으로 모시고 우리는 밖에서 노다지 눈을 맞으며 자리를 깔았다. 그래도 김밥과 순대가 아직도 완전히 식지 않아 온기를 유지하는 것이 고맙다. 사진으로 보기엔 피난민처럼 가련하게 보이지만 우리는 가장 행복하다. 지금 이 시각에 60대 후반에 접어든 이 나이에 이런 높은 곳에서 이런 눈보라 속에서 김밥과 순대와 오름 속의 비아그라인 오가피주를 마시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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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즐거운 점심을 먹고 있는데 누가 눈 속에서 우리를 부른다. 관리사무소에서 나온 친구다. 지금 이 눈 속에서 뭐하고 있느냐고 핀잔이다. 대설주의보가 경보로 바뀌어서 모두 하산 시키고 우리만 남았단다. 그러면 이 시각에 한라산에 우리만 남았다는 얘긴가.
눈보라가 거세진다. 그러나 우리는 유유자적 즐거운 마음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이정표 팻말은 4학년 13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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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때 보니 눈꽃이 더 아름답다. 금방 눈꽃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는 스릴 그만이다. 일부러 눈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어린아이처럼 눈밭에 뒹굴기도 하며 우리는 어느새 열두 살 소년소녀가 된다.
성판악 휴게소에 내려와 보니 휴게소는 텅 비어있다. 짐을 맡긴 상점주인이 우리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닫고 내려가야 하는데 우리는 오지 않고, 얼마나 속상했을까?
아쉬움 속에 억지로 계획한 눈 산행, 기막힌 타이밍으로 우리에게 오래도록 남을 추억을 선사한 셈이다. 정말 목요일이 즐겁다. (2007. 2. 1.)
첫댓글 눈보라를 피해 찾은 곳이 엉덕아래 포근한 곳, 점심을 김밥으로 허기를 채우는데, 그 맛이 꿀맛, 도원행님이 손이 곱아 젓가락질이 안된다고 투정,입이 살아 있는게 ㅅ.망입주. 건배 제의도 잊은채 삶은 문어를 고추장에 푹 찍어 소줏잔에 크 하고 마신 그맛 어찌 ㅇ잊겠능교? 나루 여사님.고맙습니데이.
야 !!! 기가 막힌다. 1950년 한국전쟁 1.4후퇴 당시 피난민 대열의 그모습 그 몰꼴들이다. 움막속이라야 원룸이고, 다들 노천에 함박눈을 뒤집어 쓴 꼬락사니 들이 거지중에 상거지들이로다. 그중에도 선달 각설이가 제일 잘 생기고 웃는 여유까지 있으니 복받을 껴.ㅎㅎㅎㅎ
c오동은 참말로 복받은 것 같다. 헛걸음하지 않고 눈구경 실컷 했으니. 그런데 꼴찌 애석하겠다. 눈속에서 찾는 건 불가능이고 눈이 다 녹는데는 한두달 걸리겠고, 찾은들 제기능 할까? 안타깝다.
정말 멋진 추억을 만드셨군요. 사라오름을 오른다기에 2월 1일 부터는 사법권을 가진 감시원들이 발각되는 대로 고발한다고 했는데...안돼는데 큰 일 나는데...관리직원들이 통제하겠지.... 그리고는 그럭저럭 정신없는 생활을 하다가 오늘 들렸드니 대박이네요.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