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첫 만남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한 여재구(80) 선장. "아임 캡틴 비포(I'm captain before)" 지금도 선장의 '아우라'가 여전한 여 선장은 "한번 마도로스는 영원한 마도로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신 옛날 사진 보니 멋지네. 어깨가 딱 벌어졌어." 여 선장과 함께 온 조계환(81) 선장은 여 선장의 부산수산대학 한 해 후배다.
이날 부경대 백경탑 앞에서의 만남은 주영순(83) 선장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얼마 전 한국수산개발공사에서 근무했던 이를 찾아 수소문 하던 중 주 선장과 뒤늦게 연락이 닿아 인터뷰가 성사됐다. 다만 주 선장은 "나이가 여든이 넘어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만큼, 인터뷰에는 후배 선장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했다. 과거는 물론, 이들의 현재 삶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마도로스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일주일 넘게 조업 포기 구조 작업
희생 동료 추모 기념사업 제안
끈끈한 동지애 '십시일반' 성금
부산수산대에 백경탑 세워져
마도로스, 신랑감으로 인기 좋아
한 달간 선장하면 집 한 채 값 벌어
대학교수 하다가 배 타는 경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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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부경대 백경탑 앞에 다시 모인 여재구, 주영순, 조계환 선장(왼쪽부터). 김병집 기자 bj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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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끈한 동지애"이 배야. 이게 1966년 1월 제동산업이 밴 캠프에서 빌려쓰다 조난한 아뚜에(ATU-E)라는 배야. 그 때 사모아에서 다른 배는 다 들어오는데 아뚜에가 안 들어오는 거야. 사모아에 나가 있던 우리나라 배 27척이 모두 수색을 나갔지. 대단했어. 일주일 넘게 조업도 포기하고 자기 기름 떼서 동료들을 찾아나섰으니 요즘 같으면 가당키나 해? 니 배 내 배가 없고, 니 회사 내 회사가 없었어. 동료의식이 대단했지. 그 때 27척 배가 부채꼴로 쫙 퍼져나가 수색에 나섰어. 그 27척 배를 진두지휘했던 사람이 주영순 선배야. 카리스마 넘쳤지."
조 선장의 얘기를 주 선장이 이어받았다. "결국 시신은 하나도 못 찾았어. 일주일 넘게 수색했는데 구명정 발견한 게 전부였어. 아뚜에 호는 첫 항차 나가서 허리케인을 만나 조난됐어. 첫 항차에서 사고나는 경우가 많지." 사고 직후 당시 제동산업에 속해 있던 배의 선장이었던 주 선장에게 회사의 지시가 내려왔다. "조난선 구출을 좀 해줘야겠소."
하지만 일주일을 수색해도 유품만 찾을 수 있었을 뿐, 시신은 한 구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이 사고로 22명의 목숨이 수장됐다. 당시 주 선장이 매일 수색하며 쓴 수색일지는 매일 밤 전보로 한국에 보내졌고 본보에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주 선장은 사모아에서 제동산업 사모아 주재소장과 부산수산대 양재북 교수를 만나 동료들이 희생을 많이 당한 만큼, 기념사업을 해달라고 제안했다. 양 교수가 돌아와 동창회에 의견을 개진했고 1971년 드디어 백경탑이 세워지게 됐다. "그 때 공성산업에서 첫 월급 받은 게 5만 원이었는데, 기념탑 만드는 데 써달라고 그걸 봉투째 들고 갔지." 당시 5만 원은 일반 직장인 7~8개월치 월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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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의 전통 꽃모자를 두른 원양선원들 모습. 주영순 선장 제공 |
머나먼 바다에서 매일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조업을 해야 했던 이들의 끈끈한 동지애는 통신으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환자가 생길 때마다 항구에 들어갈 순 없거든. 그러면 그 항차는 뻥인거야. 왔다갔다 20일이 걸리는데 기름값이며, 조업 못하는 일수를 생각해봐. 그러면 선장들끼리 통신을 하지. 서로 공유를 하는데 다들 반의사야. 항생제 몇 미리를 먹이면 된다까지 다 나와. 기계가 고장나면 기관장들을 불러모으지. 대양 위에서 하나의 수리공장이 탄생하는 거야. 부품이 없으면 서로 갖다주기도 하고. 그 공동체 덕분에 그만큼 큰 이익을 낼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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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울 게 없던 시절 |
1966년 250t 짜리 배로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있는 장면. 조계환 선장 제공 |
1970년대 좋았던 시절 배를 탔던 누군가는 휴가 나와 있는 보름만에 스무번 가까이 선을 보기도 했다고 했는데, 한 커피숍에서 '두 탕'을 뛸 만큼 신랑감으로서 인기가 좋았던 시절이었다.
"좋고 말고. 말도 못했지.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00달러일 때, 우리 월급이 60달러였으니. 우리 잘 나갈 때는 광복동, 남포동에서 돈이 필요 없었어. 외상 사인만 하면 끝이었지. 부산 경제를 이끌다시피 했어." 당시 광복동, 남포동에서는 배가 들어오는 시기만 되면, 이른바 마도로스들이 그 일대를 주름 잡았다. 가게 주인으로서는 이들이 돈도 있을 뿐더러 외상을 줘야 다음에 외상을 갚으러 또 오니, 너도 나도 마도로스를 '유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솔직히 어린 나이에 돈을 너무 쉽게 벌게 되니, 쉽게 생각하는 것도 있었어. 저녁만 되면 술을 마시러 다니고 많이 썼지." 주 선장은 북양에 처음 선장으로 갔을 때 1개월 조업해서 받은 돈이 160만~170만 원에 이르렀다고 했다. 당시 광안리에 25평짜리 집이 150만 원 할 때였으니 얼마나 많은 돈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그래서 당시 부산수산대에는 경기고, 부산고, 경남고생들이 상당수였다고.
초창기 워낙 선장이 귀하던 시절이기에, 항해사 1년 경력만으로 선장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1961년부터 해기사 면허가 국가고시 시험이 됐는데, 나 같은 경우 두번째 시험에서 면허를 따서 빨리 항해사로 나갔지. 당시 수요가 급격히 늘 때니까, 배는 만들어놨는데 선장이 없으니 우리 같은 사람을 부를 수밖에 없었지." 조 선장의 얘기였다. 그 때는 공무원 하다가, 형사 하다가, 대학교수 하다가 배를 타는 경우도 수두룩 했다. 월급 차이가 워낙 컸으니 이해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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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낙에 걸려들어온 거북이를 살려 보내주는 장면. 조계환 선장 제공 |
"당시 해외로 나가는 게 쉽지 않았던 시절이잖아. 근데 우리는 선원수첩 하나면 무사통과였거든. 더 넓은 세계로 나간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지." 여 선장은 원양어선을 탄 게 지금 생각해도 백번 잘한 일이라고 했다. 1960년대 말 당시 로마 교황청, 미국 백악관을 다녀온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하고.
하지만, 여든을 넘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우리 세대가 가면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 "역사적인 기록만은 꼭 남겨줘. 사람들이 서독광부, 간호사는 알아도 우리 원양선원들은 잘 몰라. 목숨을 바다에 맡기고 외화를 벌었고 국민 식탁을 책임져왔다는 걸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