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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것이 역사다 원문보기 글쓴이: 시리게푸른하늘
1. 삼한시대 때에 최강부족 마한(馬韓)..
한국 고대사에서
삼한(마한, 진한, 변한)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고려때 신라계인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 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발굴된 그 지역의 유적에 특징을 분류하고,
주변국(옛 중국)에 문헌을 참조하여 당시를 추증할 수 밖에 없다.
삼한의 영역을 좀
더 세밀히 말하면 한강 이남지역을 말한다. 경기남부지역과 충청도와 강원도 서, 남부지역, 경상도와 전라도지역이다.
지금의 한반도
전체를 두고는 "삼한"이라는 말을 하면 안된다. 당시(BC 2C ~ AD 3C) 한반도에는 많은 나라(부족국가 형태)들이 새로 생기고, 때로는
힘있는 나라에 병합되어 갔다.
마한의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루었고, 목지국(目支國:
직산, 성환, 아산 일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국(부족)연맹의 형태를 유지했다고 보여 진다. 실제 마한지역 소국 중에는 백제국처럼 북방계 유이민(遺移民)의 정착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되는 집단도 있어 그 형성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일부 후대 기록에서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 = 목지국)을 세웠다.” 라는 견해가 있다.
목지국(目支國)의 현재의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예상하고 있으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직산지역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목지국이 언제부터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재든 마한은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부터 한반도에 한강 남쪽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부족 집단이었고, 그렇게 모인 54개 부족의 (공동)집단의 통칭을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기원전 1C경 마한은 새로 생긴 북쪽에서 내려 온 세력에 의해 한강 유역(현재 경기도 하남시와 서울특별시 강동구·송파구 등 한강 남쪽)을 내어주고 경기도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북쪽에서 내려 온 강력한 세력이 바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인 것이다.
삼한시대 때 한반도 일대 지도
마한의 강역(疆域)은 북쪽으로는 한강 유역에 자리를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온조(溫祚)세력이, 더 북쪽에는 대방과 동예(東濊)가 있었다. 마한의 서쪽은 서해에 접했고, 동쪽(낙동강 동쪽)은 진한(辰韓)이, 남동쪽(낙동강 서쪽과 지리산 일 때)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처음에 한강 이남인 서울남동부를 중심으로 성장한 54개 부족들이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내려온 다수에 세력으로 인해 마한 연합 부족은 한강유역을 저버려두고 현제 경기도 남쪽과 충북, 충남, 전북, 전남에 특히, 충남 직산을 중심도읍으로 54개 부족들을 공통으로 마한이라 불렀다. 그들은 당시 한반도의 중, 남쪽 지역에 주인이었다. 크게 번성할 때는 강원도 서쪽지역과 황해도 남쪽까지 그들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하지만 북에서 내려 온 온조(백제)의 세력에 조금씩 그들의 세력도 약해져 갔다.
마한사람들은 농업을 중요시 하였다. 이와 더불어 마한지역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 동남부 변한이나 낙동강 동쪽에 있는 진한의 초기 철기시대(세형동검문화단계) 유물과 비교해 청동기 유물이 월등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 용범(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위서(魏書: 조조의 나라에서 지은 역사책) 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부족(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거돼 있다.
큰 부족은 약 1만여 가구(家具), 작은 부족은 수천 가구(家具)였다고 한다. 규모가 큰 부족의 지배자는 ‘신지(臣智)’라고 하였고, 작은 부족의 우두머리를 ‘읍차(邑借)’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 현제 충남 천안시 직산면)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했다. 삼한의 초기에는 마한의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마한은 진한과 변한의 왕에게 맹주대접을 받았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부족은 4~5천 호였고, 작은 부족은 약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계통인 온조(溫祚)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이 마한 연맹체를 통일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 6대 왕인 태조대왕이 한사군 중 현토성과 요동 공격 때에 마한의 군사들도 같이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마한의 멸망
백제국이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가 고이왕(古爾王: 백제 제8대 왕, 234년 ~ 286년, 재위기간 52년)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국으로 이동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에도 마한의 일부 세력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백제의 최강 시대를 연 근초고왕(近肖古王: 백제 13대 왕, 285년 ~ 375년, 재위기간 약 11년) 때 마한이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은 369년 백제국과 연합해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정황 상 일본이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 전체를 통일한 기록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한사람들은 부복들이 모여 살았지만 성곽을 축종하지 않았으며 없으며, 활, 방패, 창 등을 잘 다루었다. 그리고 청동기 유물을 풍부하게 활용하였고, 집은 초가지붕에 흙으로 벽을 세웠으며, 문을 윗쪽으로 내었다. 옥(玉)을 좋아하였지만, 금과 은.. 등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농업과 잠업(蠶業)에 힘썼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馬韓)의 54개 연합소국(聯合小國)
1.감해국(感奚國), 2.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3.건마국(乾馬國), 4.고랍국(古臘國),
5.고리국(古離國), 6.고비리국(古卑離國), 7.고원국(古爰國), 8.고탄자국(古誕者國)
9.고포국(古蒲國), 10.구로국(狗盧國), 11.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12.구소국(狗素國)
13.구해국(狗奚國), 14.내비리국(內卑離國), 15.노람국(怒藍國), 16.대석삭국(大石索國)
17.막로국(莫盧國), 18.만로국(萬盧國), 19.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20.모수국(牟水國)
21.목지국(目支國), 22.백제국(伯濟國), 23.벽비리국(?卑離國), 24.불미국(不彌國)
25.불사분사국(不斯?邪國), 26.불운국(不雲國), 27.비리국(卑離國), 28.비미국(卑彌國)
29.사로국(駟盧國), 30.상외국(桑外國), 31.소석삭국(小石索國), 32.소위건국(素謂乾國)
33.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34.신분활국(臣?活國), 35.신소도국(臣蘇塗國),
36.신운신국(臣雲新國), 37.신흔국(臣國), 38.아림국(兒林國), 39.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40.염로국(?路國), 41.우휴모탁국(優休牟?國), 42.원양국(爰襄國), 43.원지국(爰池國)
44.일난국(一難國), 45.일리국(一離國), 46.일화국(日華國), 47.임소반국(臨素半國)
48.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49.지반국(支半國), 50.지침국(支侵國), 51.첩로국(捷盧國)
52.초리국(楚離國), 53.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54.치리국국(致利鞠國)
청주 한씨 계보도에 기록된 마한 왕계보도..(일반적으로 이러한 족보 속의 왕계보는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역사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냥 참고용으로 보면 좋다.)
1 무강왕(武康王), 애왕(哀王), 한준(韓準) B.C ?년~B.C 193년 기자조선 마지막 왕, 월지국의 초대왕
2 강왕(康王) 한탁(韓卓) B.C 193년~B.C 189년
3 안왕(安王) 한감(韓龕) B.C 189년~B.C 157년
4 혜왕(惠王) 한식(韓寔) B.C 157년~B.C 144년
5 명왕(明王) 한무(韓武) B.C 144년~B.C 113년
6 효왕(孝王) 한형(韓亨) B.C 113년~B.C 73년
7 양왕(襄王) 한섭(韓燮) B.C 73년~B.C 58년
8 원왕(元王) 한훈(韓勳) B.C 58년~B.C 33년
9 계왕(稽王) 한정(韓貞) B.C 33년~B.C 17년
2. 가야국(伽倻國)의 원조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
기원전 108년 고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하였을 때 부터 지금 한반도의 한강 이남지역과 남부지방에는 기원후 300년까지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는 큰 부족연맹이 있었다. 이들은 서기 300년까지 지속되었다.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진한지역, 남서쪽은 변한지역으로 서로 섞여 살았다. "고 한다.
변한에는 12개의 부족(소국)과 여러 소별읍(小別邑)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구야국(김해). 안야국(함안), 고자국(고성), 반로국(고령)이 나름 큰 부족들이었다.
이들은 구야국(김해)를 중심으로 훗날 이들은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대가야(고령)로 성장 발전한다.
변진(변한)은 진한과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나 법속 등이 모두 진한과 비슷하여 특별히 구분되지 않았다고 하며, 제사지내는 풍습만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고고학 발굴 결과에서도 변한과 진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낙동강 하구 지역에서 양질의 철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마한과 동예(東濊: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지역), 왜(倭), 한사군(중국 요서지역) 등에 수출하였다.
- 이 시기에는 중국 한나라의 문화 영향으로 한반도에도 철기문화의 보급이 가속화되어 본격적으로 철이 사용된다. 또한 철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원전 39년 봄 정월에 변한이 신라(혁거세 거서간 통치 시)에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는 기록이 있으나 조선말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이는 "당시 진한(사로 6부족)의 국력으로 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 했다..
변한(弁韓) 12개국..
삼국지 위서 제30권 오환선비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이 변한을 언급하고 있다.
“有, 已?國, 不斯國, 弁辰 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奚國, 弁辰半路國, 弁樂奴國, 軍彌國, 弁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 馬延國, 弁辰瀆盧國, 斯盧國, 優由國, 弁辰韓合二十四國"
1.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 밀양시 일대
2. 첩도국 (接塗國): 함안군 칠원면 일대
3.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성일대
4. 고순시국(古淳是國): 사천일대
5. 감로국(甘路國): 경북 김천시 개로면 일대
6. 악노국(樂奴國): 하동군 악양면 일대
7. 군미국(軍彌國): 사천군 곤양면과 곤명면일대.
8.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창원시 일대
9. 구야국(狗邪國): 김해시 일대
10. 주조마국(走漕馬國): 경북 김천 조야면 일대
11. 안야국(安邪國): 함안군 일대
12.독로국(瀆盧國): 부산시 동래구 일대
포털 다음에서 스토리펀딩에 " 설화 그 원석을 캐다" 15화에 마한의 왕자와 변한의 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그들이 머문 지리산 골짜기에는 여러 이름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 그 이야기를 여기에 담아 보고자 한다.
지리산 골짜기 명칭에 관하여...
삼한시대 "마한의 다로왕자와 변한의 상아공주 이야기" by 허석..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 한강 이남지역에는 부족 연합체인 삼한이 있었다. 마한, 진한, 변한이 그것이다.
삼한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는데, 마한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에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됐다. 그래서 마한의 왕이 삼한을 대표하는 진왕(辰王)이 되어 느슨한 연합체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한전(韓傳)에는 "마한이 가장 강대하며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세기 중엽, 마한의 왕에게 다로라는 왕자가 있었다.
목지국 왕이 마한의 왕이었고, 마한의 왕이 삼한의 형식적인 대표인 진왕이 되었기에 다로왕자도 머지않아 진왕이 될 것이었다.
목지국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충남 천안의 직산이었다. 다로 왕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지금의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변한지역)를 여행하는 일이 많았다.
다로왕자가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경계지역인 지금의 산청 근처를 지나다 상아라는 아가씨와 우연히 만났다.
알고 보니 상아는 변한의 공주였다.
상아공주 역시 삼한의 경계지역이자 장시(場市)가 활발하게 열려 사람들로 북적대는 산청으로 나들이를 왔던 것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다로왕자와 상아공주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물론 다로왕자는 자신이 목지국의 왕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다로왕자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후일을 기약하고 아쉬운 이별을 한 두 사람은 돌아가서도 내내 서로를 그리워하였다.
다로왕자는 부왕에게 아뢰어 변한의 상아공주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상아공주 역시 허락하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목지국으로 다로왕자를 찾아갈 각오까지 하였다. 그래서 단단히 결심을 하고는 부왕을 찾아갔는데 때가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마한에서 조공을 미루는 자국인 변한을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들어온 것이다.
변한 조정에서는 맞서 싸우자는 강경파와 항복을 하자는 온건파가 대립을 하였다. 결국 원로 중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상아공주는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부왕을 따라 지리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지리산 깊은 곳으로 피신한 변한의 신료들은 서둘러 임시 궁궐을 지었다.
비록 허름하게 지은 임시 궁궐이기는 하지만, 달처럼 예쁘다 해서 달궁이라 불렀다.
변한 왕은 자신이 있는 지리산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달궁 중심으로 서쪽 10리 밖에 있는 고개[嶺]에 정장군을, 동쪽 20리 밖에는 황장군을, 또한 남쪽 20리 밖에는 성(姓)이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북쪽 30리 밖의 높은 고개(령)에는 용맹한 8명의 젊은 장군을 배치하였다.
그즈음 마한 목지국에서는 변한이 지리산으로 피해 전쟁에 대비하고 있다는 말에 변한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한에는 목지국을 비롯하여 54개의 부족(소국)이 있었으니 연락을 취하는 데도 한 달 가까이 걸렸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려면 군량미도 충분히 준비를 해야 하기에 각 씨족과 부족에 군량미를 할당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은 더욱 큰일이었다.
그때 다로왕자가 자신을 변한에 사신으로 보내달라고, 부왕에게 간청하였다. 부왕 역시 전쟁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여 수락하였다. 수소문을 한 끝에 다로왕자는 변한의 왕과 중신들이 피신해 있다는 달궁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다로왕자는 달궁 근처도 못가서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신이 목지국(마한)의 왕자라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산청에서 다로왕자를 본 적이 있는 젊은 장수 덕분에 다로왕자는 달궁으로 가서 변한의 왕을 만나게 되었다.
조공에 관한 조정안을 낸 다로왕자는 “마한과 변한 두 나라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자신과 상아공주가 혼인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다로왕자와 상아공주가 각국의 왕실과 백성들로부터 축복 속에 혼인을 하였다. 두 나라는 전쟁 직전까지 갔던 사이에서 이제부터는 오랫동안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지속되었다.
다로왕자는 훗날 삼진(三辰: 마한,진한, 변한)의 진왕이 되었고, 상아공주는 진왕의 왕비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지리산에는 짓자 마자 쓸모가 없게 된 달궁은 시간이 지나 폐허가 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이름만 전해 내려올 뿐(달궁계곡) 옛 궁궐터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서쪽에 정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서쪽 고개를 정령재, 동쪽에 황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동쪽 고개를 황령재, 남쪽에 세 명의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남쪽 고개를 성삼재, 북쪽에 여덟 명의 젊은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북쪽 고개를 팔랑재라 부른다고 한다. 이들 고개와 골짜기의 이름이 이렇게 해서 생겼다고 한다.
(이글을 적은이는 변한을 진한으로 적고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즉, 낙동강 동쪽을 진한지역이고 낙동강 서쪽과 남족 지역을 변한지역이라고 봤을 때 지리산은 낙동강 서남쪽에 있기에 진한은 아니라고 봐서 변한으로 고쳤다.)
3. 한반도 동쪽 끝 진한(辰韓)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낙동강 동쪽 지역으로 보면 된다. 그 끝은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馬韓), 낙동강 남서쪽은 변한(弁韓), 북쪽으로는 동예에 접하고 있다. 모두 12개의 부족연맹체로 되어 있었으며,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사로 6부족(알천양산촌= 경주 이씨, 돌산고허촌=경주 최씨, 경주 강씨, 무산대수촌=경주 손씨, 취산진지촌=경주 정씨, 금산가리촌=경주 배씨, 명활산고야촌=경주 설씨)들이 발전하여 신라(新羅)의 모체가 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진한(辰韓)에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첫번째는 중국 진(秦)나라 때 부역을 피해서 온 난민 형태의 중국 전국계(戰國系) 유민과 진나라 망한 후 한나라(한무제) 때 요서와 요동지역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의 압력을 피해 온 유민들로 크게 두부류로 나누워져 마한에서 동쪽의 땅을 분할하여 살게 하였다고 한다.
초기에는 6국이었으나 점차 12국으로 나누어졌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불합리한 전승으로, 고조선 유민 또는 온조(溫祚) 집단의 남주 정착 과정을 반영하는 기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한 지역과는 달리 경상도 지방에서는 전체적으로 위씨조선계(衛氏朝鮮系) 청동기·철기문화의 유입, 한(漢) 철기문화의 보급에 수반한 금속제 유물의 수량이 현저하게 증가된다.
다량의 금속기를 소유한 지배자의 출현은 정치집단의 대두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진한 소국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경주·대구 지역에서는 위씨조선계 금속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다량의 청동기·철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같은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본다면 혁거세(赫居世) 집단의 대두와 6촌(六村) 통합에 관한 문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위씨조선계 주민과 문화의 유입을 계기로 청동기문화 단계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다수 통합되면서 《삼국지》의 진한사로국으로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리고 청동기· 철기 교역을 통하여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던 일정한 세력권을 상정하고, 이를 진한 소국 연맹체 형성의 실마리로 간주한다면, 진(秦)의 망명인들이 진한 형성의 주체가 되었다는 《삼국지》의 기록도, 넓은 의미에서 위씨조선계 유민의 경상도 방면 이주와 이에 따른 이 지역의 정치·경제적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국 연맹체로서 진한의 실체가 확립되는 것은 이 단계부터 내재하던 경주·대구 중심의 세력 토대가 12국으로 확대 발전되고 사로국 중심의 정치적·경제적인 종연맹조직이 성립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위략 魏略》의 기사에 나오는 왕망(王莽) 지황연간(地皇年間, 20∼30)에 낙랑군에 조공하였다는 진한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는, 12개 소국 연맹체로서의 진한이 아니라 경주·대구 세력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유력한 소국의 신지(臣智)로 간주된다.
《진서 晉書》에 의하면 진한 소국 연맹체는 서기 280년, 281년, 286년 세 차례에 걸쳐 ‘진한’의 이름으로 중국 진(晉)에 견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원거리 교역의 실시는 진한 소국 연맹체의 결속력과 조직력이 3세기 말경에는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진한의 이름으로 대외통교를 전개하고 있던 진한 소국의 대부분은 신라 국가의 기본세력으로 편제되어갔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창녕의 소국(불사국 또는 난미리미동국에 비정됨)과 같이 3, 4세기 이후 진한 연맹체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가야 소국으로 발전한 것도 있는 듯하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12개의 소국 중 큰 나라는 5 ~ 6천 가구 작은 나라는 6 ~ 7백 가구라 하였다.
1. 사로국(斯盧國)
2. 기저국(己?國)
3. 불사국(不斯國)
4. 근기국(勤耆國)
5.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
6. 염해국(?奚國)
7. 군미국(軍彌國)
8. 여담국(如湛國)
9. 호로국(戶路國)
10.주선국(州鮮國)
11. 마연국(馬延國)
12.우유국(優由國)
그밖에 소국들..
13.감문국
14.골벌국
15.다벌국
16.비지국
17.소문국
18.실직곡국
20.음즙벌국
21:초팔국:
<출처: '세미신선의 반도원의 꿈' http://blog.daum.net/toyotal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