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국 치앙마이 그레이스 홈 2021년 8월 소식 *
이번주부터 빨간 송태우가 다니기 시작했다. 국제학교는 개학을 하여 학교에 가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공립학교는 여전히 어렵다. 이곳은 하루 1만2천명이지만 북부 지역은 하루 100명이 안되기에 개학을 결정한 것이다.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도 하루 한대 정도는 풀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붐비던 야시장 등은 1년 반이 넘게 문을 굳게 닫고 있다. 그럼에도 희망이 보이는 것은 므앙마이 시장 등에는 사람이 확실히 많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속히 코로나도 지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간호조무사 인턴을 하기 위해 3개월간 그레이스 홈을 떠나는 아이
아이는 유치원의 2학년때 그레이스 홈에 왔다. 이제는 성장하여 대학에 갈 나이인데 대학에 가기를 거절하더니 1년 동안은 일을 하였고 간호조무사를 하기로 하여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변형 바이러스가 생겨 다니지도 못하고 인터넷으로 공부를 마치고 이번 달부터는 인턴을 하기로 했다. 유치원때 온후 처음으로 그레이스 홈을 3개월간 떠나는 아이, 우리는 그를 격려하며 둥그렇게 둘러앉아 그를 위해 기도했다. 병원에서 3개월 동안 실습을 하는데 코로나로 출입을 금지하여 병원 근처에서 지내는데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 가끔은 잘 있다면 톡을 보내오는 아이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8월은 태국에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도착한 달입니다. 193년 전에 25세인 귀츨라프와 35세의 제이콥 톰린이 이 땅에 와서 중국어 전도지와 소책자를 배포하며 전도하였고 한명에게 침례를 주었고 태국어로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다가 톰린은 9개월이 되는 해에 몸이 아파 싱가폴로 갔고 젊은 귀츨라프는 계속사역하다가 태국어로 된 전도책자를 인쇄하려 싱가폴에 가서 인쇄하고 결혼을 하고 돌아옵니다. 결혼하여 돌아온 부부는 열심히 전도하고 성경 번역과 사전 만드는 일을 하며 보냈고 1831년 2월 14일 마리아 네웰은 두명의 쌍둥이를 낳다가 한명의 아이와 함께 지혈이 안되어 죽고 맙니다. 귀츨라프 역시 건강이 악화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다 어느날 중국으로 가는 배가 ㅃ짜오프라야 강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친구들은 걸을 수도 없이 악화된 귀츨라프를 4명이서 부축하여 배에 실어줍니다. 그는 죽어도 중국에 가서 죽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항구에서 자신의 남은 어린 피붓이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중국으로 떠났다. 1828년 8월부터 1831년 6월까지 근 3년 동안 태국에서 젊음을 불살랐던 귀츨라프가 가끔은 그리워 8월이면 태국 선교의 시작을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최근에 알게된 것은 치앙마이에 처음으로 왔던 그리고 50년을 태국에서 사역하였던 다니엘 멕길버리가 돌아가시기 3주전까지 80세가 넘었음에도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말을 타고 갔다가 낙상하여 2주만인 8월 22일에 귀천한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묘소를 찾았고 그가 개척한 교회와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예배에 참여하였던 교회를 방문하였다. 세월이 흘러 그 흔적을 찾지는 못하지만 역사관에서 잊지않고 아직도 그들을 기리고 있었고 기쁘게 맞아주는 담임 목회자와도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네 간증이 설교보다 감동이 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간증을 써보라고 하였다. 지난 7월에 단기선교 사역을 하면서 2명이대표로 썼고 발표를 하였는데 모든 아이들에게 간증을 쓰고 1주일에 2명씩 설교후에 발표를 하도록 하였다. 예수님을 믿기전의 나의 상태는?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앞으로 나의 삶의 목표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발표를 하였는데 발표를 하는 아이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고 한동안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아이들의 간증을 듣는 아이들의 눈에도 눈물이 그네를 타고 있었고 아내는 눈물을 닦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간증을 들으며 5분으로 이렇게 감동을 주는데 설교자로 더 많은 시간을 쓰면서 왜 나는 감동을 주지 못하는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과 같이 모였을때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의 간증이 아빠 설교보다 낫다고 진심으로 말해주었다. 설교를 준비하기도 해야지만 평소의 삶에서도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어머니 날에 찾은 정종관 /나한나 선교사님을 떠나보내며.
사람이 필요하세요? 우리를 찾은 목사님이 물어보며서 그렇다고 하니까 2008년 4월에 그레이스 홈에 와서 우리가 없는 2009년에는 그레이스 홈을 돌보기도 하셨고 그후에도 아이들에 치앙마이에 계시면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부어주셨던 선교사님이 갑작스레 들어가시기로 하셨다. 직접 그홈 사역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가까이 계시니 의지가 되었다. 연세도 있으시지만 아직은 건강하셨고 아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쳐 주셨다.
마침 8월은 어머니날(왕비 생일)이 있어서 아이들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여 드렸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만남이 있기에 떠남도 있어야 하지만 이별은 언제나 힘들다. 그 동안의 베풀어주신 사랑에 감사하며 어디에 계시든지 늘 강건하시기를 기도한다.
작은 바이올린 연주회
우리 아이들은 지금껏 검도나 축구 등을 해왔다. 나의 바램 한켠에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쳐주면 좋을 것 같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악기를 다루지 못한다. 그레이스 홈에서 기타나 피아노 드럼 등의 악기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국제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그홈에 와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여 우리는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라고 하였다. 봉사점수의 일환으로 가르치는 것이지만 고등학생인 딸과 어머니가 같이 와서 아이들 4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침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기에 원래는 토요일 한번인데 저녁 시간에 3번을 하기로 했다. 아이들도 열심이었다.
가르치는 학생과 엄마가 바이올린 연주회를 하자고 했다. 코로나로 모일 수가 없으니 커피숍에서 우리 가족들과 조촐한 음악회를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도 열심히 준비를 하였다. 아내는 음식을 준비하고 꽃도 준비하고 아이들은 사탕으로 목걸이도 준비했다. 처음해보는 바이올린 연주회에 아이들은 긴장하면서도 열심히 했다. 우리는 열심히 응원하고 박수를 첬다. 가르치는 학생도 우리들의 환호와 진심어린 응대에 감격하며 1주일에 한번 가르치던 아이는 하루에 3번 가르치기로 하였다. 아이들도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도 열심이 가르치는 것을 보는 나의 마음도 즐거웠다.
그레이스 홈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 주십시오.
1) 그레이스 홈의 모든 가족들이 영육간에 강건하며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도록
2) 코로나로 인하여 SNS로 학교에 가지않고 비대면으로 매일 아침 8시반부터 4시까지 공부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지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도록
3) 그홈에서 성장한 아이들의 진로를 위해, 믿음을 갖고 살아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