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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비밀 <요 3:1-8>
요 3:1-8=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곧 성경은 성령만이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성경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성경을 보면 인간 이야기로 풀어가게 되고, 성령의 지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 이야기로 풀이하게 됩니다.
알다시피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경을 성령에 감동으로 기록한 것은 하늘이야기 즉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자 함입니다.
학문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과 성령으로 성경을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학문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해하지만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신학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니 신학으로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마치 신학이 성경을 해석하는 명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말이 교회 안에서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이 인간들에게 호감은 얻을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하나님께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성경 해석은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성령은 인간의 조건에 가두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녀노소 누구든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면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인간적으로 똑똑하고 지혜와 지식이 출중하다고 하여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면 성경의 본 의도를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신학자가 말을 하였다 하여서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다만 그 사람의 견해일 뿐입니다.
견해야 누구든지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견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만 남도록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성도에게 주신 것은 세상 것으론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 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성경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계시의 책이라고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사설을 서두에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니고데모라는 관원(학자)과 예수님 간의 대화를 통해서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참 어려운 내용입니다.
아니 믿음으로 받으면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육으로 엄청 어려워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요.
영과 육은 대화가 안 돼요.
될 수가 없어요.
서로 이해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을 이야기 하는데 니고데모는 육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문서답이 되고 마는 겁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합니다.
관원이란? 많이 배운 사람이란 뜻입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신학자이면서 정치인이기도 해요.
바리새인이라 함은 그 당시 유대인 세계에선 주류(主流)에 속한 최고의 엘리트 그룹입니다.
주류(主流)란 시대를 이끄는 집단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신앙을 공격하면서 유대인의 정서와 신앙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은 율법신앙입니다.
율법신앙은 하나님 말씀을 문자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파격적인 언행들은 어떻게 보면 율법 무용론 내지는 율법폐기론 자 같은 모습들로 비쳐졌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시 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나 엣세나파 등등 각 종파의 입장에 따라서 약간씩 견해가 달라서 의견이 통일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중엔 예수님을 죽이는 일엔 하나가 되었지만,,,,
그러나 대체적으로 예수님은 모든 종파들에게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나 유능한 하나님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따라 다니니 드러내 놓고 잡을 수는 없고 해서 호시탐탐 탄핵할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이 민족이 이단시 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아무도 모르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도 궁금한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니고데모는 신사적입니다.
누가 어떻더라고 하는 일명 카더라 통신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인을 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카더라 통신이 뭔 줄 이세요.
누가 이렇다더라! 누가 저렇다더라! 라는 식의 소문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의 동향에 늘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니고데모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소상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가르치신 말씀이라든가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자기 능력으로 판단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과연 예수가 이단인가?
이단이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알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말합니다.
내가 보니 당신이 지금까지 행한 일들을 종합해 보면 당신은 분명히 하늘로서 온 선생인 것 같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돌출 행동을 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니고데모 생각은 유대인은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지혜자를 보내었다면 유대민족을 하나로 묶고 지금의 암울한 국가적 현실을 타파할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을 하나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분열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반 율법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던 조상들의 유전도 혁파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낸 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인답게 점잖게 묻는 겁니다.
왜? 그런 행동을 하십니까? 라고,,,,
니고데모의 이런 물음은 구약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성경 지식으로 예수님에게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겁니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냐?
당신 정체를 한번 밝혀 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기 보단 뜬금없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합니다.
아주 공격적인 답변을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말해줘도 넌 몰라! 입니다.
니고데모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예의고 뭐고 없이 니고데모를 아주 묵사발 내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싸가지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암튼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니고데모야!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말해줘도 넌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그럼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거듭날 수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래 예수 당신 말대로 내가 거듭나야 당신 말을 알 수 있다면,,,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방법론을 알려 달라는 겁니다.
알려만 주면 한번 거듭나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사람이 태어나는 것으로 말하는 겁니다.
그럼 내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되느냐 라고 묻습니다.
아니 사람이 태어나려면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것 밖에 없으니 니고데모는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출생 지식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아기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거듭나야 된다고 하니 그럼 내가 이 나이에 엄마 뱃속에 다시 한 번 들어갔다 오렴! 이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 같지 않는 소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니 그런 방법이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이건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말입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난다는 겁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선 말이 안돼요.
아니 남자와 여자가 교미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이 생겨나느냐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게 너의 한계라고 합니다.
내가 뭐라고 했냐!
넌 내 말을 못 알아먹는다 고 했잖아!
니고데모는 인간 쪽에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거듭 날 수 있느냐? 라고 물은 겁니다.
만약 니고데모의 질문대로 인간 쪽에서 거듭 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천국도 인간의 방법으로 가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고 사람이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 쪽에서 알고 있는 방법으로 거듭나서 천국을 가면 되요.
인간 쪽에서 천국 가는 방법이 있다면 신앙생활도 아주 간단해 집니다.
그 방법대로만 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기도하고 성경보고 할 필요도 없어요.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요.
니고데모는 지금 그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이런 말은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이 목사들에게 묻는 말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은혜를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라는 말은 방법 좀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목사님 시키는 대로 구원도 받고, 은혜도 받고, 복도 받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구원이란? 외부에서 끄집어내는 것이고,
은혜란? 그냥 퍼부어 주는 것이고,
복이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구원이나, 은혜나, 복은 내 쪽에서 할 수 있는게 없어요.
그럼에도 교인들은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고 목사들을 알려 주겠다고 해요.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이런 것이 이 시대 교회에서는 말이 돼요.
참 웃기는 얘깁니다.
이에 질세라 목사들은 자기가 신학교에서 배운 방법론을 제시해 줍니다.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해요.
이렇게 되면 꼼짝없이 그 교인은 목사의 꼬붕이 되고 말아요.
왜냐하면!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구원도, 은혜도, 복도 못 받기 때문입니다.
그럼 목사는 의기양양하고 하루에 성경 열장씩 읽고, 기도 한 시간씩 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꼬박꼬박하고,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고, 목사가 가르치는 성경공부 시간에 꼭 참석해서 배우라는 등등의 방법론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무식한 중생들은 구원을 따내고, 은혜를 따내고, 복을 때내기 위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경쟁적으로 열심을 다해서 순종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들입니다.
아니라고 해도 니고데모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영으로 난 것은 영이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합니다.
이는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라는 말입니다.
즉 영과 육은 완전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육이 육을 낳고 영이 영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육에서 육이 나오고 영에서 영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인간과 개가 종자가 다르듯이 완전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개는 개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개는 개를 낳고 인간은 인간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개를 인간으로 만들고 인간을 개로 만들 수 없어요.
이처럼 육으로 난 사람 따로 있고 영으로 난 사람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육이 영이 되고 영이 육이 되는 것은 없어요.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예요.
이 둘은 본질이 완전히 달라요.
마치 빛과 어둠처럼 말입니다.
빛과 어둠은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 되거나 만날 수 없어요.
빛이 오면 어둠은 사라져야 하고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니고데모는 어둠으로 빛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달리 소경이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경에게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아무리 잘 설명을 해 줘도 알 수 없어요.
소경에겐 설명 자체가 불가능해요.
소경은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는 하늘이 있고 태양이 있어요.
그러니 누가 하늘이라고 말하고 태양을 말하면 자기가 상상하는 그 하늘을 말하고 그 태양을 말해요.
그러나 그 하늘과 그 태양은 다른 하늘이고 다른 태양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육은 안다고 답을 내어 놓아도 틀린 답이 되는 겁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아본다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마치 갓난아기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기 부모를 알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부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모님께서 내가 너를 낳은 부모라고 알려 주셨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이를 낳자 말자 부모와 떨어져서 키우면 그 아이는 자기를 키워준 사람이 부모인줄 알아요.
자기 지혜로 부모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부모라고 한 부모는 낳아준 부모가 아니라 키워준 부모일 뿐이에요.
진짜 부모는 따로 있어요.
나중에 진짜 부모가 나타나서 내가 네 부모라고 말해 줘야 알게 되요.
이와같이 세상에선 하늘에 정보를 알 수 없어요.
하늘에서 스스로 땅에게 정보를 주기 전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어요.
육이 스스로 거듭나고자 하는 그 어떤 시도도 헛짓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을 쫓겨난 인간이 에덴동산의 정보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문을 닫아 버린 것은 죄인에겐 에덴동산의 정보를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이 하늘나라예요.
에덴동산이 예수님입니다.
에덴동산이란 말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란 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자기들 상상으로 에덴동산을 그리고 있어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게 생겼을 것이야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에덴동산은 진짜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진짜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초대해야만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해도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알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늘나라 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하늘나라 사람은 성령이 알려준 정보로 하늘나라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러니 새삼스럽게 알려고 하지 않아요.
알려고 하지 않고 성령이 이미 알게 해준 것을 믿을 뿐이어요.
예수님이 믿어지니 믿는 것이고,
천국이 믿어지니 믿고,
하나님이 믿어지니 믿고,
하나님 약속이 믿어지니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나를 위한 대신 죽으심이라는 것이 믿어지니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진다는 것은 이미 믿게 해주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받았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성경이 다 믿어져요.
인간적으로 보면 의심이 갈만 한데도, 의심이 되지 않고 믿어져요.
그러니 미쳤지요.
맞습니다.
성도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밀이죠.
세상 쪽에서 보면 예수쟁이들은 말이 안 통하는 이상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니 니고데모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것은 하늘나라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고 싶다는 말은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이고,
은혜 받고 싶다는 말은 은혜를 못 받았다는 말이고,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복을 못 받았다는 것입니다.
받은 사람은 달라고 하지 않아요.
이미 받은 것을 누리고 즐길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도 다 받았지요.
받을 줄로 알겠습니다.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은 신앙생활 하는 것 보면 표시가 나요.
받은 사람은 받은 것으로 여유만만하게 살고, 못 받은 사람은 받고자 엄청 힘들게 살아요.
누가 말하기 전에 본인이 알아요.
누가 저에게 물어요.
목사님 제가 구원 받았습니까?
그걸 왜? 저에게 묻습니까?
본인이 먼저 잘 알 텐데!
저도 모르겠어요.
집사님이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지금 니고데모가 하늘나라 밖에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겁니다.
서울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이미 서울 대학을 알아요.
서울대학이 어떻게 생겼느냐 라고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은 서울 대학생이 아니란 말입니다.
서울 대학생이 아닌 사람에게 서울대학을 말해줘도 추상적일 수 밖에 없어요.
서울대학이 어떻게 생겼어요? 라고 물으면 한 번 와 보세요! 라고 해야 돼요.
이처럼 하늘나라 밖에 있는 사람에게 하늘나라를 아무리 예기해 줘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알려주려고 하지 않고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 하는 겁니다.
하늘나라 사람이 되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 사람이 되는 길은 거듭나야 된다고 했지요.
어떻게 거듭난다고 했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했지요.
그럼 거듭난 사람 속에는 성령이 거하지요.
맞잖아요.
성령으로 거듭난다면서요.
그러면 거듭난 사람 속에는 성령이 계실 것 아닙니까?
이해되지요.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물론 거듭난 사람에 한해서요.
자기 안에 성령이 거하면 성령이 하늘나라에 대해서 알게 해 줘요.
즉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보세요.
사도요한은 기름부음이 그 안에 있으면 누구한데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잖아요.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부음이 알게 해주신데요.
기름부음이 뭡니까?
성령님이잖아요.
성령님이 예수가 누구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게 해 줘요.
믿어지게 해 줘요.
그러니 믿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 동일한 성령을 받은 사람이 천국에 대해서 말하거나,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거나,
믿음에 대해서 말하거나,
구원에 대해서 말하거나 하면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이 아! 그렇지! 그렇군! 그렇구 말구! 라고 해요.
만약에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말하면 아니야! 그건 아니야! 라고 거부해요.
그러니 성령 받은 사람은 거짓 목사들에게 안 속아요.
여러분 눈뜬 사람이 소경에게 속겠어요,
안 속겠어요.
당연히 안 속지요.
그런데 소경한데 속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눈뜬 사람일까요?
소경일까요?
당연히 소경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빛에 속한 사람은 낮에 다니고 밤에 다니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빛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게 해요.
예수님께서 성도와 예수님을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셨지요.
그러면서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했지요.
요 10:4-5=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보세요.
자기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르지만 거짓 목자가 부르면 음성이 틀리기 때문에 도망간다고 하잖아요.
분명히 말하는데 거듭난 성도는 절대로 거짓 목사의 말을 듣지 않아요.
목사가 지옥으로 데리고 가는 귀신들이에요.
이 시대 무당 같은 목사들을 따른다는 것은 다 지옥 갈 놈들이기 때문에 지옥에 사자인 거짓 목사를 따르는 겁니다.
그들을 안타까워 할 필요가 없어요.
왜? 그런가요.
하나님께서 지옥 가기로 작정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갈 놈은 반드시 지옥에 가도록 하나님을 일하세요.
그러니 거듭나서 기름부음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가 가요.
십자가 피를 이야기 하면 다 알아 들어요.
그래서 제가 복음을 설득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이 땅에 그 어떤 인간도 설득해서 복음을 알아들을 인간은 없어요.
다만 거듭나면 예수님이 믿어져요.
믿어지니 믿는 것입니다.
믿는 척 하는 것하고, 믿는 것은 달라요.
하늘나라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하늘나라가 믿어지는 겁니다.
이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한국 사람은 한국말 알아듣는 게 쉬워요.
천국백성은 천국에 소리가 쉽게 들려요.
믿어지면 믿어지는 대로 살고 믿어지지 않으면 안 믿어지는 대로 살아야지 괜히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믿으려고 하면 머리에 쥐가 나요.
그럼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앞서서 거듭난다는 것은 태어난다고 했지요.
즉 부모가 낳아 주는 겁니다.
부모가 낳아 줘야 내가 태어나지 낳아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있습니까?
출생은 스스로 하지 못해요.
부모가 낳아 줘야 해요.
내가 낳아지는데 내가 힘을 보탠 것은 아무도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는데 생겨난 겁니다.
엄마 아빠 둘이서 사바사바해서 생겨난 거에요.
성도가 태어나는 것도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서 사바사바해서 거듭났어요.
낳는다는 것은 새로 만든 다는 말입니다.
고물을 바꾸거나 변화시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늘나라 백성을 거듭나게 할까요?
그냥 인간을 고쳐서 천국에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고쳐서 데려가지 않고 새로 만들어서 가느냐 입니다.
그건 천국은 헌 것은 안 받게 때문입니다.
천국은 새 것만 들어가요.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헌 것 고쳐서 새것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새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고쳐서 천국에 데리고 가지 않고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서 천국에 데리고 가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들어진 피조물들 속에는 예수님의 흔적들이 들어가 있어요.
즉 예수님의 유전인자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천국에선 어린양의 아내라고 해요.
부부란 같다는 말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거듭나게 한다고 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했지요.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들읍시다.
물과 성령이란? 물세례와 성령세례란 말입니다.
우리 지난번에 세례에 대해서 살펴보았지요.
세례란 뭐라고 했지요.
연합이라고 했지요.
맞습니다.
연합을 세례라고 합니다.
어떻게 연합이 된다고 했는가요?
세례를 받는 사람이 세례를 주는 사람에게로 연합이 된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님이 죄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지요.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라고 했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는 것은 난 이제 너를 대신해서 죽으러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목숨과 예수님의 목숨을 바꿔치기 하신 것입니다.
즉 의인이신 예수님은 죄인이 되고 죄인인 성도는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게 물세례였어요.
그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했으니 성도도 물세례를 받아야 하겠지요.
물세례는 뭐라고요,,,
죽음!
예! 죽음입니다. 죽음!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난 죽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언제 죽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같이 죽은 것입니다.
아까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음으로서 죄인과 연합이 되었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우리는 가만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 안으로 쳐들어 온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혼자 죽은 것이 아니고 자기백성들을 몽땅 데리고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어 있지 않고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부활 하실 때 예수님 혼자만 부활 했습니까?
아니면 자기백성들 몽땅 데리고 부활했습니까?
당연히 자기백성 몽땅하고 부활 했지요.
아니 죽을 땐 같이 죽고 살 땐 혼자 살아나는 것이 없어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 겁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하나님께서 오공본드(접착제) 보다 더 강력한 하늘나라 본드로 붙여 놓았습니다.
이건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요.
그 누구도 떨어뜨릴 수가 없어요.
마귀도 못해요.
그래서 성도의 구원이 영원하고 취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 중에 물은 이해가 되었지요.
물은 물세례를 말한다고 했으니까.
물세례는 뭐라고요.
죽음! 죽음입니다.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 혼자가 독단적으로 죽인 겁니다.
죽었으면 이제 남은 건 뭡니까?
살려내는 것이겠지요.
맞아요.
죽였으면 살려 내야지요.
그 살려내는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어요.
성령은 살려내는 영입니다.
그런데 그 살려내는 성령세례를 누가 준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 올 때 요한이 알려 줬지요.
요 1:32-34=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성령세례는 누가 준다고요.
예수님이지요.
맞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냅니다.
성령은 오직 자기백성들에게만 오세요.
성령이 오면 아!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구나 가 믿어져요.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났구나 도 믿어져요.
이렇게 믿어지는 것을 일컬어 바람이 불었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지요.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와 같다고 하셨지요.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어요.
그러나 흔적이 남아요.
뭡니까?
나무가 흔들리잖아요.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아 바람이 부는구나! 라고 하잖아요.
그래요.
성령으로 거듭 난 사람도 뭔가 흔들림이 일어나요.
그 흔들림이 뭔가하면 예수님을 알아보는 흔들림입니다.
아까 예수님은 육으로 알 수 없다고 했지요.
그럼 이제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누가 스쳐 갔기 때문이겠지요.
누가 스쳐갔습니까?
성령이지요.
이처럼 성령이 자기 백성에게 스쳐 온 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성령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어요.
바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 예수님이 그냥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주님이시고 메시야이구나를 알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도가 누구에게 연합이 됩니까?
성령에게 연합이 되지요.
이렇게 연합 되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이제 성령이 임하면 전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나는 겁니다.
죄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나는 거예요.
비록 육신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으로 취급을 해요.
세상 사람과 성도의 차이는 예수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왜? 성령세례를 주셨어요.
예수님을 알라고 주신 겁니다.
니고데모에게 너도 성령이 임하면 날 알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늘나라도 볼 수가 있어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늘나라를 보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보는 거지요.
직접 눈으로 본다는 뜻이 아니고 믿어지고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직접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마세요.
이 땅에서의 천국은 믿는 것이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사이비 이단들이 하는 짓입니다.
안 믿어지니 자꾸만 보려고 해요.
안 믿어지니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확인하려고 해요.
그러니 마귀가 미혹해서 가짜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특징이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을 받지 않으니 안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눈으로 보려고 하는 겁니다.
보고 믿겠데요.
그런데 히 11장에서 믿음을 뭐라고 합니까?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요.
즉 믿음은 뭔가 실체가 있어요.
그런데 그 실체가 지금은 안 보여요.
그래서 믿음으로 실체를 보라고 믿음을 준 겁니다.
그러면 믿음을 받은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본 것을 증거하겠지요.
이들이 본 것이 뭡니까?
예수님을 보았고 하늘에 있는 본향을 보았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히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에 선진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하잖아요.
믿음을 받은 사람은 땅에 것을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믿음은 새 사람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새 사람이라고 하지요.
새 사람이라는 말은 헌 사람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 헌 사람은 무엇입니까?
육신이라는 몸이지요.
흙으로 난 몸 말입니다.
그럼 새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몸 안에 감추어져 있어요.
이름 하여 속사람이라고 해요.
속사람은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이지요.
속사람은 보려고 하면 안되요.
분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믿을 일입니다.
그러니 이 몸뚱이 속에 성령으로 거듭난 속사람을 담고 있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해가 쉽나?
아! 바울의 말로 이해해 봅시다.
고전 15:36-38=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바울은 육이라는 몸을 알갱이라고 합니다.
알갱이란 씨란 뜻입니다.
여러분 사과 씨 속에 사과나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다만 지금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요.
씨를 죽이면 그 속에서 뭐가 튀어 나옵니까?
사과나무가 튀어나오지요.
씨가 죽으면 씨를 내는게 아니고 나무를 내요.
씨와 나무는 전혀 달라요.
씨는 볼품이 없지만 씨가 깨어져서 토해낸 나무는 화려해요.
그래서 육에 몸과 영에 몸을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토해낸다고 하는 겁니다.
육에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토해 낸다고 하지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는 다만 씨처럼 볼품이 없어요.
하지만 그 속에 영광된 몸을 담고 있어요.
겉 사람하고 속 사람하고 전혀 달라요.
겉 사람 속에 속 사람을 담고 있어요.
겉 사람이 죽으면 전혀 다른 속 사람이 튀어 나와요.
즉 육신 속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드러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겉 사람을 깨트려야겠지요.
그러니 성도는 겉 사람이 깨트려지면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새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났지요.
그럼 겉 사람이 깨어질 때마다 속 사람의 속성들이 툭툭 튀어나오게 됩니다
마치 화약을 터트리면 불꽃이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듯이 말입니다.
속 사람의 속성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일입니다.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2:4-7=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은 그 은혜를 찬미하게 함입니다.
겉 사람이 살아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자랑되어지지 않고 자기 자랑만 난무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십자가에 끌고 가서 옛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세요.
그래야 속 사람이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도의 육신을 날마다 깨트리는 일을 해요.
그래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고 하늘에 것을 바라보도록 해요.
전 이것을 하나님의 불꽃놀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성도가 깨어질 때마다 불꽃놀이를 즐기고 계시는 겁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성도는 고난 속에서 감사를 더 깨닫게 되요.
고난을 당하면 평상시에는 감사하지 않다고 감사가 튀어나와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고난이 당하면 원망을 쏟아내는데 거듭난 성도는 고난당하면 도리어 천국을 더 소망하게 되요.
참 신기합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면 성령이 여러분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생각하세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세상이 당신 뜻대로 안 살아진다고 울지 말고 웃으세요.
성령이 스쳐지나간 현상을 사람들에게 자랑하세요.
이 속에 천국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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