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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입점리 고분(사적 347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입점리 고분군 상단에 위치한 고분 모습 |
백제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금강변에 위치한 고분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의 새터마을 뒷간 능선에 조성된 백제시대의 고분군으로 사적 제347호로 지정되어있다. |
▲ 입점리 고분 입구에 위치한 고분 전시관 |
▲ 상공에서 바라 본 입점리 고분군 모습(전시관 사진) |
이 무덤은 1986년 2월 우연히 발견되어 금동제 관모 등 귀중한 유물이 수습되었고, 그 해에 두 차례에 걸쳐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무덤의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모두 8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으며, 상당수의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
▲ 입점리 고분전시관 내부 전경 |
무덤 가운데 특히 금동제품이 출토된 1호분은 이곳 새터마을에 거주하는 한 고등학생에 의해서 발견된 굴식돌방무덤으로 발견 당시 돌방안에서 금동제신발, 금동제 관모, 철제 발걸이, 말재갈, 은제말띠 드리개, 백제토기, 중국청자 네귀단지 등이 수습되었다. |
▲ 입점리 고분군의 무덤 양식 |
▲ 입점리 고분군 출토 모습 |
그리고 발굴조사를 통하여 금동제관장식편, 금동제 드리개,화살통 꾸미개, 금제 귀걸이,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이 1호 고분의 무덤구조는 널방과 널길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으로 경사진 자연상태를 이용하여 구릉상의 풍화된 암반을 ‘ㄴ’자 모양으로 파내 축조하였다. |
▲ 입점리 고분군 출토 전시 유물 |
▲ 성남리 고분군/웅포리 고분군 출토 전시 유물 |
널방의 평면은 정방형에 가깝고 네 벽은 자연산 돌을 사용하여 면을 고르게 맞추어 쌓아 올리면서 80~90cm 까지는 곧바로 쌓고 그 위로는 네 벽을 맞조여 가면서 쌓음으로써 천정부가 줄어드는 궁륭형(穹窿形)천정이 되게 한후 뚜껑돌 4매를 사용하여 천정을 마감하였다. |
▲ 율촌리 동산무덤 출토 전시 유물 |
▲ 입점리 1호분 출토 전시 유물 |
바닥은 풍화암반을 파냄으로써 생긴 凹凸의 바닥을 굴껍질과 조개껍질을 부숴 점토 및 모래흙을 섞어 면을 고르게 하고 그 위에 다시 돌을 깔았다. |
▲ 입점리 1호분 금동관 모형 |
▲ 입점리 98-1호분 출토 전시 유물 |
이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관모 뒤편의 휘어진 긴나팔모양 장식은 가야지역인 경남 합천 반계리 돌널무덤에서도 출토되었으며, 또 일본 구마모토현에 있는 후나야마(般山)고분에서 발견되고 있어 백제와 가야, 백제와 일본 큐슈지역과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 고분 전시관 뒷편에 위치한 입점리 고분군 |
또 주변지역인 웅포리 일대와 옥구군 나포리 일대에서도 상당수의 백제고분이 발견되고 있어 금강하류에 위치한 웅포 일대가 백제시대에는 귀족층이나 지방 유력자들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여겨진다. - 익산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 웅포리 백제 무덤군 안내판과 24호분(굴식돌방무덤) 모습 |
익산 입점리 고분 출토품 - 백제의 지방 간접 지배 방법 상징 전북일보 2012.07.05
삼국시대의 익산이라고 하면 서동요의 무왕과 선화공주를 떠올릴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다룬 이 이야기는 백제 무왕 때 제2의 수도로 부상했던 익산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 시절 익산이 차지했던 높은 위상은 그보다 100년 이상 앞섰던 5C 무렵의 유물들을 통해서도 입증할 수 있다. |
▲ 웅포관광지 조성사업 부지에서 발굴(2004년) 이전 복원(2007년)된 앞트기식 돌덧널 무덤 |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에 위치한 사적 347호 입점리 고분군은 5세기 무렵 백제와 익산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입점리 칠목고개로부터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의 중턱에 분포하고 있는 이 곳에서는 모두 8기의 무덤이 조사됐다. |
▲ 앞트기식 돌덧널 무덤(13호분) |
▲ 앞트기식 돌덧널 무덤(9호분) |
▲ 앞트기식 돌덧널 무덤(31호분) |
▲ 앞트기식 돌덧널 무덤(28호분) |
그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1호분의 출토품들이 이번에 소개할 것들이다. 입점리 고분군의 무덤들 중 유일하게 돌로 방을 짠 무덤(橫穴式石室墳)인 1호분에서는 관장식, 중국제 청자사이호, 장신구, 토기, 말갖춤, 철기류 등이 출토됐다. |
▲ 웅포관광지 조성사업 부지 7지구에서 발굴(2004년) 이전 복원(2005년)된 돌널무덤(석관묘) |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금동관모(金銅冠帽)와 금동신발(金銅飾履)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금은 잘 변하지 않는 성질과 특유의 색상을 지니고 있지만 원료를 구하기 힘들다. 또한 고급 금공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훈련과 기술을 갖춘 전문 공인이 있어야 했는데, 이 때문에 금공제품은 부의 원천이자 권위의 상징이었다. |
청자사이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스스로 유약을 바른 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삼국시대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청자가 높은 가치를 가졌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를 시작했던 만큼, 자기가 출토되는 유적들은 대부분 백제의 옛 땅에 있다. 고고학자들은 익산을 비롯하여 금동관모나 금동신발이 출토됐던 유적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백제의 지방에 대한 간접적인 지배 방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 입점리 고분군을 오르며 전시관 방향으로 내려다 본 모습 |
금동제품과 청자사이호는 백제와 입점리 집단의 위계질서나 협력관계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입점리 1호분에 묻혔던 사람은 아마도 익산에 근거지를 두었던 토착 세력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독자성이 보장된 관계 속에서 관모의 수여를 통해 위계질서를 재확인했던 것이다. 백제가 익산을 직접적으로 지배했던 때는 무왕이 활약했던 시기인 6~7세기 때의 일이었고,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백제지역에서는 금동관모가 사용되지 않았다. |
▲ 계단을 따라서 언덕을 오르면 드문드문 작은 봉분들이 보입니다. |
▲ 봉분 앞에는 고분 발굴 번호와 발굴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
지금까지 금동관모나 금동신발 등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을까. 아니면 고이 모셔두었던 것들일까. 아마도 금동관모는 모자처럼 정수리에 올리고 끈을 둘러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동신발은 평소에 신을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장송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다음 세상에서도 부귀와 영화를 누리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은 아닐까. /최경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 입점리 고분군 좌측 계곡으로 산사태가 난 모습입니다. |
▲ 능선을 오르며 고분을 올려다 보고, 내려다 본 모습 |
▲ 능선 정상 부분 좌우로 10여기의 작은 고분들이 산재하여 있습니다. |
익산 입점리 고분 위치도 |
지도 좌측에는 입점리 고분군이, 우측에는 이전 복원된 고분과 전시관이 있습니다.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 산174외 |
지도 우측 상단의 화살표 지점에 익산 입점리 고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군산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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