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기사에 관해서 수업을 하시면서 새로운 측면의 기사도에 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롤랑의 노래에서의 기사들의 용맹과 충성에 관해서 설명을 하셨는데 자료가 없어서 설명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자료 올립니다.
롤랑의 노래 원문은 찾지 못했습니다. 롤랑의 노래 줄거리를 읽어 보니 우리 역사에서도 롤랑과 같은 용맹 스러움과 충성심를 보여준 신순겸 장군이 생각이 나서 신순겸 장군과 비교 해 보았습니다.
백제의 견훤과의 싸움에서 병력이 열세했던 고구려군은 대패하였으며 태조와 장수들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허사였다. 신숭겸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 태조와 겉 모습만은 비슷해 갑옷을 바꿔 입고 태조를 탈출시킨 후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태조로 오인하여 집중 공격 하여 집중 공격하였고, 힘을 다해 싸우다 신숭겸이 장렬히 전사하자 후백제군은 그의 목을 베어갔다. 그 후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공을 기려 순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후하게 장례를 지 냈고 금두상이 도굴될 것을 두려워하며 춘천, 구월산, 팔공산에 똑같은 묘를 만들게 하였다.
자신이 모시는 군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충성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고 주군의 안전을 위해서 마지막 까지 의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롤랑의 노래 [La Chanson de Roland]
----- 출처: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프랑스의 무훈시 중 최고 ·최대의 걸작.
장르 : 무훈시
발표 : 1100년경
작자는 분명하지 않으며, 성립 연대는 1098년부터 110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어(中世語) 10음절 시구 4,002행으로 되었다. 12세기 후반의 옥스퍼드 고사본(古寫本)에 실제 노래로 불리던 이 시의 순수한 모습이 전한다. 그 내용은 778년 8월 15일 에스파냐 원정에서 돌아오던 샤를마뉴 대제(大帝)의 후위부대가 피레네 산속 롱스포에서 바스크인(人)의 기습으로 전멸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치밀한 구성과 기품 있고 힘찬 문체로 황제와 신에게 봉사하는 봉건 프랑스의 무사도(武士道)를 찬양하고, 대장 롤랑의 용감함, 막료(幕僚) 올리비에의 슬기, 간신(奸臣) 가늘롱의 원한을 대립시키면서 사라센 대군을 적군으로 설정, 회교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승리를 노래하였다. 한편 작자 ·연대 ·성립과정 ·구성요소 등에 관해서는 각국의 연구자들 사이에 아직도 이설이 많다.
줄거리
그 전쟁의 발단은.
옛부터 이슬람 제국의 사자로 가면 이슬람사람들이 그 사자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프랑크의 왕이 이슬람에 사자를 생각하던중,
롤랑이 가늘롱을 추천합니다. 그래서 가늘롱은 롤랑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것
으로 생각하고 이슬람제국에 투항합니다. 가늘롱은 몰래 투항해,.
샤를마뉴의 작전을 모두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군대는 휴전협정을 맺는척 하면서 공격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후방 지휘관을 롤랑으로 추천합니다, 롤랑은 이 음모를 모르고
후방을 맡습니다. 매복 하고 있던 이슬람 군대가 습격하자.
롤랑과 같은 샤를마뉴 기사단의 친구인 올리비에가 왕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하자 롤랑은 왕에게 힘을 빌릴수 없다고 그냥 지원 없이 싸우기로 합니다.
그때 프랑크군은 3만 이슬람군은 10만명이 넘었지만. 롤랑의 명검 '듀란달'
으로 열심히 싸워 이길때. 그때 도망친 이슬람 병사가 지원을 요청하자.
20만의 군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몇만명도 채 안되는 프랑크군은 도저히 이길
수 없자 롤랑은 이때 깨닫고 왕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친구 올리비에도 죽고 샤를마뉴의 기사들이 점차 죽어가자.
프랑크 군은 롤랑 혼자만 남습니다. 이슬람 병사들은 그 '듀란달'이라는 검을
얻기위해 사투를 합니다. 그러나 롤랑은 등을 돌리지않고 열심히 계속 싸움니
다 그리고 왕의 지원군이 왔을때 롤랑은 '듀란달'을 손에 계속 꼬옥 쥐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후 프랑크군은 승리를 하고. 그 '듀란달'은 샤를마뉴
기사들에게 물려갑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봉사하는 봉건적 가치를 구현하는
십자군 운동의 정신을 미화하는 영웅적 희생의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