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강. 실패 할 수 없는 구원 (요 18:1-9)
요 18:1-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서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하십니다.
이러한 구원의 시나리오는 하나님이 구성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만드실 때 우리는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 땐 만물이 창조되기 전입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즉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세운 언약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그 시나리오에 의해서 이 세상에 오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일하시고,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전 언약이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홀로 다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것이에요. 왜? 그런가요? 언약을 하실 땐 우리 인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나는 이렇게 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위하여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언약을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예를 들어 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몰랐어요. 그리고 그가 복에 조상이 되고픈 마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너는 복에 조상이 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해 주십니다.
아브람은 저주 받은 땅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죄인에게 복이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의 복이란? 저주 받은 땅으로부터 벗어나 저주가 없는 하늘에 사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땅은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아무리 잘되어도 그건 복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땅에 속한 것은 모두가 저주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의 복은 하늘에 것입니다. 하늘에 것만이 저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에 속한 아브람에게 하늘에 속한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땅 사람에서 하늘에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난 아브람을 죽이고 하늘에서 난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브람은 땅에서 낳고 아브라함은 하늘에서 낳습니다. 아브람은 데라가 낳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낳았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땅 사람인 아브람을 죽이고 하늘에 사람인 아브라함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를 하십니다. 이게 복에 나라인 하늘나라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찾아 오셔서 하신 언약은 하나님이 지켜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게 구원이고 복입니다. 이게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자기 꼬라지와 상관없이 아브라함이 되는 일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못합니다. 아브람의 꼬라지로 인하여 아브라함 되는 언약이 취소되지도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아브람의 꼬라지를 이미 아시고 선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람을 선택하고 복에 조상이 되라는 언약은 아브람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켜내십니다.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우리 성도들의 구원이 이와 같아요. 우리는 우리의 원함으로 이 세상에 오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원함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창세전 언약이 담겨져 있어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겨진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십니다.
반드시 그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내시고야 맙니다. 우리가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린 다만 창세전 언약에 적용당할 뿐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시고자 오신 예수님의 손에 이끌림 당할 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표(豫表)적으로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알다시피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민족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이스라엘이 나중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실 때는 이스라엘이란 없었어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났어요. 그래서 언약 백성이라고 합니다.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땅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빼내심을 입고 하늘을 상징하는 가나안으로 인도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실 때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언약 속에 담겨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이라는 보따리 속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것과 같아요.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의 모형인 겁니다.
출애굽기 2장을 봅시다.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을 몸에 짊어지고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곤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사 에굽에서 빼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태어났지만 그 속엔 아브라함 언약이 내장 되어 있습니다. 이건 마치 지리산 반달곰에 추적 칩을 내장 시켜서 지리산에 방목을 시켜 놓은 것과 같아요. 반달곰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인간들은 그 칩을 통해서 다 알아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칩이 내장이 되어서 애굽이라는 나라에 방생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애굽에서 태어났고! 자기 뜻과는 무관하게 바로의 종노릇을 하였고! 그러다가 자기의 원함과 상관이 없이 출애굽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구조를 누가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 보고 계셨어요. 그러다가 아브람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권념하사 출애굽을 시키십니다.
권념(眷念)이란? 돌아보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늘 기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늘 생각하고 돌아보고 계시기 때문에 실패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구원해 내십니다.
마치 잃어버려진 양을 목자가 찾아내듯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작정을 한 언약의 후손들은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 찾아내십니다. 찾아내서 어깨에 둘러메고 하늘나라로 가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양을 찾고자 함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가서 빼내 오십니다. 예수님이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 오셔서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기 백성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십니다.
마치 모세가 애굽에 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는 것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럼 모세가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떻게 빼내던가요? 그 속에 구원의 시방서가 들어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장자의 죽음 속에서 어떻게 살려냈는가 하면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살려 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대신 죽은 안에서 살아났습니다. 어린 양이 구원을 해 준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어린 양 안에서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건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 되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模型)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구약의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처럼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 예수님을 사용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그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야 할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구약식의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새로운 유월절을 알려 주십니다. 예전에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는 문에다 바르고 고기는 구워 먹으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킵니다. 어린 양을 잡지 않고 피도 바르지 않습니다.
떡과 포도주로 대신하여 지킵니다. 떡을 주시면서 내 살이라고 하시면서 받아 먹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내 피라고 하시면서 받아 마시라고 합니다.
그냥 피가 아니고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새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그냥 피가 아니고 새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이건 새로 만든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새 언약이 뭐냐?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신하여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대신하여 죽어 줌으로서 너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너희가 어린 양을 피를 발랐지만 이제는 내 피를 믿으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대신 죽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에는 어린 양의 피를 발랐지만! 새 언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를 믿으라고 합니다. 이제 그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가는 길을 가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지요.
예수님이 이제 유월절 양으로 죽어야 하는 그 수순(隨順)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것이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물에 잠기거나 물을 건너는 것은 죽음을 상징해요. 이건 마치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과도 같아요. 사도 바울은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했어요.
세례란? 죽음을 말해요.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지요. 이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해요. 이 죽음의 실체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나타났어요.
그러니 바다를 건넌다! 혹은 시내를 건넌다! 라는 것은 죽음의 바다를 건너는 것을 싱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죽음에 바다를 건너게 하고 있는 거에요.
구약에 보면 기드론 골짜기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면 우상들을 불살랐어요. 즉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죽이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의미로 보면 기드론 시내를 건넌다는 것은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보면 되어요.
죄인을 일컬어 우상숭배자라고 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잖아요. 이건 죄 아래서 난 자들을 심판하고 살려내는 것을 의미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면 죄(우상) 아래서 난 제자들(우상숭배자)이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무슨 죽음입니까? 자기 백성들의 죄에 대한 죽음이잖아요.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거에요.
다른 말로 우상숭배에요. 죄인은 우상숭배자들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곧 자기 백성들의 우상이 불살라지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겁니다. 이걸 우상을 불태우는 곳인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것으로 상징화 하여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로마 군사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죽음에 세력에게 잡혀서 죽게 되어요.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죽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하루 전 날에 붙잡히고 그 다음 날인 유월절 날에 어린 양이 죽는 그 시간에 딱 맞추어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군사들에게 붙잡힐 때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항거하지 않았어요. 아주 순순히 잡혀 주었어요.
그럼 다시 본문을 살펴봅시다.
요 18:1-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때는 유월절 전 날 밤이에요. 군사들이 무장하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옵니다. 하나님이 내일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 죽여야 하니까 마귀를 시켜서 예수를 붙잡도록 보낸 것입니다.
어두운 밤이라 군사들은 횃불을 들고 왔어요. 하지만 군사들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군사들이 모인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야! 여기 예수가 누구냐! 그러자 예수님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 앞으로 나서면서 “내가 바로 너희가 잡고자 하는 예수다!” 라고 합니다.
이에 군사들이 헉~ 하고 화들짝 놀라서 자빠집니다. 예수가 앞으로 나오면서 “내가 예수이니 날 잡아 가라” 고 하자 군사들이 놀라서 넘어진다는 것은 이건 군사들이 예상치 못한 일이란 말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두려우면 숨고 피하고자 해요. 신변에 위협을 당하고 죽음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도망치고자 해요. 죽음을 피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군사들이 놀라서 자빠지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자기를 죽이고자 잡으러 온 놈들 앞에서 숨거나 도망치지 않고 날 잡아 가시오! 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느냐 입니다. 이건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행위에요. 인간의 본성은 죽음은 본능적으로 피하고자 해요.
인간의 행동은 본능에 우선해서 움직여요. 자기에게 위험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숨고자 해요. 누가 죽인다고 하면 살려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어요. 도리어 당당하게 날 잡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건 본능에 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군사들이 겁이 나는 겁니다. 도리어 자기들이 무서운 거예요. 속으로 뭐! 이런 인간이 있느냐? 그러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있었는가요? 알다시피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어요. 인간의 육신은 본능적으로 죽지 않으려고 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위험에 닥치면 본능적으로 살 궁리를 하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를 보세요. 죽음 앞에 서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잖아요. 죽음 앞에선 의리나 각오나 의지는 소용이 없어요. 본능적으로 일단 숨고 피해요.
그래서 베드로는 죽음으로부터 위협을 당하자 본능적으로 예수를 저주하고 부인한 겁니다. 나중에 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앞서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죽을 지라도 예수님을 지켜 준다고 장담을 한 것이 생각이 난 겁니다. 그래서 통곡을 한 거에요. 통곡했다는 것은 지못미에요.
지, 못, 미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장담을 했는데 그 장담이 수포로 돌아가니 원통한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죽음 앞에 서면 살고자 한없이 비굴해지고 작아지는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죽음 안으로 성큼 성큼 다가가고 있는 겁니다. 죽음아! 어서 와라!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예수님은 이미 이러한 일이 닥칠 것을 다 아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건 뭔가 예수님을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군가의 다스림에 예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아버지의 언약을 위하여 일을 하도록 간섭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누가복음 22장을 봅시다.
눅 22:42-44=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殘)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使者)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듯이 간절하게 기도 하셨지요.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에게 십자가에 죽음이라는 이 잔(殘)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땀이 피가 되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잖아요.
얼마나 큰 고통이었으면 땀 구멍에서 피가 나오겠어요. 의사들의 말을 빌리면 사람이 엄청난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에 피가 섞여 나온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겁니다. 그토록 죽음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잔(殘)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였어요. 이 잔(殘)이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도리어 십자가에 죽으라고 간섭을 하십니다. 아버지가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라고 수종을 들도록 하셨어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고자 아버지께 기도 하셨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 죽고자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죽음 안으로 성큼 성큼 들어가고 있잖아요. 그럼 이것도 예수님 스스로 하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이 도우시고 있다는 증거에요.
성령이 예수님을 주장하고 있어서 날 잡아 가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이는 모두가 자기 백성을 지키고자 하는 “하나님 말씀을 응하게 하고자 함이라” 고 합니다.
9절을 보세요.
9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자기 백성을 지키려는 말씀을 응하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제자들이 잡혀서 죽게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신하여 날 잡아 가라고 나서신 겁니다. 이는 자식을 살리려고 부모가 죽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광해” 라는 영화에 보면 임금이 “내 백성은 내가 지킨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광해 임금처럼 내 백성은 내가 끝까지 지킨다고 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주신 자들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 지켜주신다고 하시잖아요.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말이에요.
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 말씀인가요. 예전에 방영했던 근초고왕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근초고왕”이 사랑하는 여인인 ‘여화’가 정략적으로 고구려 왕에게 시집을 갈 때에 “여화 네가 어디에 있든지 누구에게 있든지 너는 내 여자” 라는 말을 적어 준 것과 같아요.
지금 예수님이 그러고 있어요.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이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자기를 잡으려고 온 원수들 앞에서 내 백성들은 손대지 말고 날 잡아 가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끝까지 지켜 줄게!” 라고 하고 있어요.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기인가요.
우리 신랑이 정말 자랑스럽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예수라는 신랑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너희들을 끝까지 지켜 줄게! 라는 말을 믿지 않아요.
머리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고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의 삶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어요.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 않아요.
우리의 신앙으로 한번 점검해 볼까요? 우리가 지금 법으로 사는지 아니면 은혜로 사는지 살펴봅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늘 우리 행위로 인하여 울다가 웃다가 하고 있어요. 우리의 행실에 따라서 신앙의 좋고 나쁨을 확인하고 있잖아요. 열심이라도 있으면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실제로 우리는 자기 열심에 따라서 신앙을 희비하고 있어요. 그러니 믿음으로 살지 않고 행위로 살고 있는 겁니다. 말로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행위로 살고 있어요.
왜? 그런가요? 이는 우리 몸에 본성은 법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몸은 반드시 법에 의하여 정죄당하고 심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우리 스스로가 자기 행위로 희비하고 있어요. 이건 본능이에요.
복음을 알아도 이 본능은 사라지지가 않아요. 늘 법이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정죄를 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몸이 죽기까지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가 믿어지도록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이 믿음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행실을 보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고 간섭을 하세요.
성령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으라고 해요. 그러므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자기 행위에 대한 율법의 정죄를 믿음으로 이겨내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될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난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를 존재케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내가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잖아요. 누군가가 나를 보내서 온 것이잖아요. 육적으로 말하면 부모가 날 낳아 주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아버지란? 나를 낳아주신 분을 말해요. 그럼 하나님이 나를 낳아 주셨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나를 존재케 하셨단 말입니다.
그럼 또 물으세요. 하나님이 왜? 날 이 세상에 보내셨지! 왜? 날 살게 하셨을까? 목적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있지 않아요.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이 포기 하지 않아요.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루어 가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언약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꼬라지는 이래도 하나님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구원해 주겠다고 창세전에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다 하여도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내세요. 두들겨 패서라도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참 아들들은 징계를 해서라도 반드시 지켜 내신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인생은 우리를 살게 하신 분의 목적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원치 않아도 그렇게 살도록 간섭을 받게 되어 있어요.
왜 인줄 아세요? 나를 살게 하신 분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우리를 살게 하신 분을 이길 수가 없어요.
피조물은 절대로 창조주를 이길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니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 창조의 목적을 벗어 날수가 없어요.
이걸 긍정적으로 보세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죽게 내 버려두지를 않아요.
요나를 보세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요나가 타고 가는 배에 풍랑을 일으키자 요나가 선원들에게 날 바다에 던지라고 하잖아요.
이건 자살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기 뱃속에 있던 요나를 토해내게 합니다. 그리고는 기어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시킨 일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고 만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고집이 요나의 고집보다 더 쎈 것으로 판명이 난 겁니다. 그러니 신자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기 전에는 우리 맘대로 죽을 수도 없어요.
이 말을 꺼꾸러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가지고 하실 일이 있으면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말이에요. 그 목적이 다할 때까지 말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준 백성들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지켜낸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제자들 대신 예수님이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그 목적이 다 하기 전에는 죽지 못하게 하세요. 그러다가 목적이 다하면 이번엔 반대로 더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게 하고 죽게 해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우리의 조건에 의해서 변개 되지 않아요. 반드시 이루어 가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중에 짓기 전에 이미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셨어요. 우린 그 결정에 따라서 이 세상에 왔어요. 그러니 창세전에 하신 그 결정이 우리 조건으로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5-9=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다고 합니다. 이건 창세전에 알았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했다고 합니다. 태어나기 전에 구별했다는 말은 태어나기 전에 사명을 맡겼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는 사명을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어떤 사명입니까? 열방의 선지지로 세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야!~ 너 선지자 해! 그래서 선지자가 된 거에요.
이건 예레미야의 조건과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말까지 예레미야 입에다 넣어 주세요. 예레미야는 자기 맘대로 말을 할 수도 없어요. 하나님이 자기 입에다 말씀을 넣어 준 것만 전하면 되어요. 이건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네 꼬라지를 보고 선지자 노릇을 한다 못한다 하지 말라는 거에요. 네가 말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개의치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할 말을 네 입에 넣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너는 주둥이 닫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에요.
우리 모두가 그래요. 우리가 바로 예레미야에요. 그러니 자기 꼬라지로 한단 못한다 하지 말란 말입니다.
나는 못 배웠다느니! 나는 약하다느니! 나는 무식하다느니! 하지 말라는 거에요. 너는 가서 내게 너에게 준 말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예레미야처럼 복 중에 짓기 전에 알아진바가 되었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정한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리 조건을 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꼬라지를 가지고 판단을 해요. 이게 교만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철저히 하나님의 힘으로만 하세요. 그러니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 꼬라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많이 배웠든지 못 배웠든지 상관이 없어요. 똑똑하든지 멍청하든지 상관이 없어요. 어른이든지 아이든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문제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사용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전 예레미야의 이 모습을 보고서 엄청 은혜를 받았어요.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배짱이 들기도 해요. 든든하다니까요.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겠구나! 하나님이 필요하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겠지! 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차피 복음 전하는 것은 내 능력 바깥에 일이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사로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어서 복음을 증거케 하신다는 것을 알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에 은사와 지식의 말씀에 은사를 달라고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에게 좋은 총을 주듯이 설교하는 목사에게 복음을 깨닫는 지혜를 줄 것이 아니냐! 그러니 그 지혜를 달라고 하는 거에요.
이건 계시 받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올바르게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목사 만드신 그 뜻을 위하여 사용해 달라는 말입니다. 목사가 내가 원함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함으로 되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사용하세요.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요. 그리고는 그 용도에 맞게 사용을 하세요.
어떤 그릇은 밥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그릇은 국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그릇은 살 독으로 만들고! 어떤 그릇은 구정물 단지로 만듭니다. 그리고는 그 만든 토기로 각자의 용도에 맡게 토기장이가 그 그릇 속에 물건을 담아요.
오늘 본문도 이러한 의미로 보세요. 그럼 훨씬 은혜가 되어요. 또한 이해도 쉬워요.
예수님도 우리처럼 아버지의 필요에 의해서 이 세상에 오셨어요. 아버지로부터 예수라는 이름을 받고 왔다는 것은 곧 피조물의 입장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사용하겠다는 말이에요.
아버지가 예수라는 이름에 걸 맞는 일을 하게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을 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시지요. 자기 죽음으로 말이에요.
아버지가 그렇게 몰고 가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죽으라고 유월절에 맞추어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죽게 하시는 일을 진행시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를 맞추어서 가룟 유다에게 사단을 집어넣어서 예수를 팔게 하셨어요. 그리고 군사들을 예수를 붙잡으러 보내신 겁니다. 그래야 구약의 유월절 어린 양의 실상으로서 죽을 수가 있어지기 때문이에요.
예수님도 이를 알아요. 자기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로마 군사들이 무기 들고 잡으러 오니까!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내로다” 하고 나서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왜? 내로다 하고 나섰다고 합니까? 이는 아버지가 예수에게 주신 자들을 위해서라고 하잖아요.
9절을 보세요.
9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지요. 이 말은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버지하고 약속을 한게 있어요.
무슨 약속인가 하니! 하나님이 주신 자기 백성들을 지킨다는 약속이에요. 죄 아래서 구원하여 다 살려낸다는 약속이에요. 그래서 지금 그 약속을 지키고자 자기가 죽을 줄 뻔히 알고서도 “내가 예수니 나를 잡아 가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를 붙잡으러 온 놈들이 기겁을 하는 겁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러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지는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 바로 뒷집에 이야기입니다. 이 집은 부부싸움을 너무도 자주해요. 밥을 먹다가도 해요. 그래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해요.
이 집에 아주머니가 얼마나 독한가 하면 신랑이 화가 나서 낫을 들고 와서 죽인다고 하면 목을 신랑 앞에 갖다가 대고 죽이라고 악을 악을 써요. 죽여라! 죽여라! 해요. 그럼 신랑이 기가 막혀서 혀를 끌끌 차요. 이 집에서 싸움 소리가 나면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을 하곤 했어요.
신랑이 낫을 들고 오면 도망을 가야 정상이잖아요. 아니면 잘못 했다고 하든가! 이걸 위해서 신랑이 낫을 들고 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낫을 아랑곳하지 않고 죽여라 죽여라 하면 낫을 들고 온 사람이 기겁을 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로마 군사들이 그 꼴이에요. 예수님이 살려 주세요! 그래야 자기들 위신이 서는데 도리어 날 죽여 그러고 있어요. 이러면 감당을 못해요.
물론 우리 뒷집 아주머니는 객기이고 깡이지만 예수님은 객기도 아니고 깡도 아니에요. 자기가 죽어야 창세전 언약대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길로 나선 것입니다.
자 보세요. 지금 군사들이 예수를 잡으러 왔어요. 예수님이 이러한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4절에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라고 하는 겁니다.
4-5절을 봅시다.
4-5=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님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계시지요.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것이에요. 자신이 유월절 양으로 죽어야 할 것을 알고 있어요.
내일이면 유월절이에요. 그럼 자기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잡혀야지요. 그래서 날 잡아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마귀는 힘으로 예수를 잡으려고 왔어요. 무기로 잡겠다고 온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기 때문에 잡힌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마귀가 예수를 잡은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잡혀 준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를 죽인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어준 거에요. 예수님이 죽는 일에 마귀를 이용한 거에요.
마귀는 이 사실을 몰라요. 그러니까 마귀는 힘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겁니다. 그래서 마귀의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예수를 잡으러 온 겁니다. 와서~ 위협을 가합니다. 제자들과 쭈욱~ 둘러 서 있는 사람들 숲에서 누가 예수냐고 윽박지릅니다.
밤이라서 어두컴컴해서 누가 누구인지를 분간하기 힘들어요. 심정적으로 생각하면 숨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앞으로 나서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십니다.
그리고는 “내가 예수다” 내가 너희들이 올 줄 알고 기다렸다! 그러는 겁니다. 이건 예수님은 모른 척 하고 잡혀 준 거에요.
이러면 잡으러 온 놈들이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가룟 유다도 놀랍니다. 가룟 유다는 이런 그림을 상상하지 않았어요.
가룟 유다 생각에는 예수님이 반발을 해 주길 바랐어요. 알다시피 가룟 유다는 열심당원이에요. 민족주의자에요. 쉬운 말로 이스라엘의 민족에 해방을 꿈꾸는 독립 운동하는 자에요.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일제의 항거하는 독립운동가란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바라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에요. 민족을 하나로 결집하여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지도자를 바라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서 갖가지 기적을 행하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거에요. 가룟 유다의 눈에는 예수가 민중 봉기를 일으켜서 독립운동을 하기에 딱인 겁니다.
로마가 보는 앞에서 갖가지 기적을 베풀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을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야! 저 사람이면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로 결집을 시켜서 민족 해방을 이룰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가만히 따라다니다 보니 예수가 전혀 이스라엘의 민족을 해방 시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일을 택한 겁니다.
사람이란 자기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살고자 반항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도 죽음에 처하면 살고자 반발을 할 것이 아니냐 라는 생각으로 예수를 죽음에 내 모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팔아 버린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룟 유다를 가지고 도리어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를 죽여서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한 군데로 모으는 일을 하시고자 합니다. 즉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가 반발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 안 죽으면 안 됩니까? 라고 하면서 이 잔(殘)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 주었어요. 도리어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는 잔(殘)을 마시라고 설득을 시킨 겁니다.
야! 예수야! 넌 십자가에 죽으려고 왔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안 죽는다고 하면 어찌 되겠느냐! 그러니 고집 피우지 말고 죽어 주렴! 살살 꼬시는 겁니다.
이걸 천사들이 수종을 들더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가 알았습니다! 하고 로마 군사들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에요. 그런데 때 맞추어서 로마 군사들이 왔어요. 기세등등하게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 여기 있다! 잡아가! 그러는 거에요.
그러자 로마 군인들도 놀라지만 가룟 유다도 놀라는 겁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힘없이 죽자 가룟 유다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고 엉뚱한 사람 하나를 죽였구나! 라고 하여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자살해 죽었어요.
참 재미있지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무섭지요. 그래요 무서워요.
이걸 무섭다고 생각하지 말고 반대로 안심으로 생각하세요. 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시켜 준다고 했으니 걱정 할 필요가 없겠네! 라고 생각하세요. 생각에 전환을 가지란 말입니다. 아! 예수가 끝까지 우리를 지켜 주시는구나! 라고 말이에요.
그럼 어! 이거 우리 구원이 장난이 아니네! 이건 엄청난 거구나! 난 내 맘대로 실패도 할 수가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살이가 넉넉해 져요. 삶이 가벼워져요. 불안에서 해소가 된단 말입니다.
인간들이 왜? 앞날을 근심 걱정하고 두려워합니까? 모두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에요. 자기 장래에 되어질 일을 알지 못하니까 불안한 거에요.
그러나 성도는 이미 구원이 완성된 자로서 이 세상에 보내어 졌어요. 야곱처럼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되어서 왔어요. 그러니 완성이 된 것이나 같은 겁니다. 우리는 창세전 언약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거에요. 이미 끝난 게임을 다시보기 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2002년도 한국 축구가 4강에 든 경기를 비디오로 보는 것과 같아요. 이미 끝난 경기를 보는 것은 불안하지가 않아요. 이긴 것을 알고 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삼층천에 가서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구원된 자신을 보았지요. 사도 요한도 밧모 섬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에 가 있는 자기 자신을 보았잖아요. 그러니 바울이나 사도 요한은 자신들은 이미 구원이 완성된 자로서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미 끝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죽음이 오히려 반가운 거에요.
고린도후서 6장을 봅시다.
고후 6:1-10=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가라사대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육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소리에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헛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은혜로 보면 다 성공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고! 우겨쌈을 당하여도 당하지 않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고 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는 자라고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은 가진 자라고 하고! 죽은 자 같으나 산 자라고 합니다.
바울이 너희들 눈에는 우리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잖아요. 실상은 우리는 성공한 자라고 하잖아요.
어째서 그런가요? 이미 삼층천에서 묵시 속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빼앗기고 넘어지고 욕을 먹는다 하여도 실패가 아니란 겁니다.
이게 세상을 이기는 거에요.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라고 했어요. 이 사실이 믿어지면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을 이길 수 있어요.
우리의 구원이 이러해요. 우린 이미 이긴 자로서 세상에 보내졌어요. 이미 구원이 된 자로 세상에 보내어졌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보면 천국에서 어린 양과 더불어 안식하고 사는 자로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은 이걸 삼층 천에 가서 보았어요. 성령의 감동으로 삼층 천에 가보니 거기에 이미 이긴 자로서의 바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 있는 바울은 그 어떤 인생을 산다고 하여도 성공한 인생인 겁니다. 죽어도 성공한 인생이어요.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린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해요.
바울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가 이렇게 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살도록 간섭을 하시고 인도 하세요. 바울이 받은 성령이나 우리가 받은 성령을 동일해요. 바울이 받은 믿음이나 우리가 받은 믿음도 동일해요. 차별이 없어요.
우린 바울과 동일한 믿음을 받았어요. 바울처럼 살라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거에요.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다 이 간섭하심을 입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 누구도 스스로 여기에 서 있는 자는 없어요. 저 역시도 여기까지 등 떠밀려서 왔어요.
저는 없어야 할 자인데 생겨났어요. 아버지가 58세에 어머니가 47세에 저를 낳았어요. 어렸을 때 많이 아파서 이 놈이 살 놈인가 죽을 놈인가 생각이 들어서 몇 년 동안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다고 해요.
전 어렸을 때 산삼을 엄청 먹었어요. 너무 약골이라서 기운을 북 돋운다고 산삼을 먹였다고 해요. 엄마 젖이 나오지 않아서 동냥젖도 먹었다고 해요. 저는 젖배를 너무 곯아서 지금도 허기가 지면 마치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이 헉~ 하고 푹 주저 앉아 버려요. 설교 하다가도 배가 고프면 말이 헛 나가요.
이런 모자란 자가 죽지 않고 지금 버젓이 이렇게 살고 있어요. 목사 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욕을 먹는 복음을 전하고 있어요. 이건 제 바람이 아니에요.
전 교회를 해도 큰 교회를 하고 싶었어요. 모든 목사들의 로망이잖아요. 그런데 제 바람과는 전혀 다른 목회를 지금 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누구의 원함인가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원함 때문이에요.
내 인생 내 맘대로 안 살아지는 것만큼 확실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어요. 하나님이 내 인생을 간섭 하셨기 때문에 내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았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복음 전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을 보세요. 성경 속에 하나님의 간섭으로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을 보세요. 어느 누구 하나도 자기 뜻대로 살아진 인생이 없어요.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과 다윗과 수많은 선지자들과 12제자들을 보세요.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 등 떠밀려서 살아갔어요. 이들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도 간섭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복인 거에요. 믿음으로 보시면 엄청난 복인 것을 알게 되어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는 택배 속에는 세 가지가 들어있어요.
과거적(過去的)으로는,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죄 사함 받는 의(義)도 들어 있고! 현재적(現在的)으로는, 예수의 의(義)를 입은 자로서 세상에서의 고난도 있고! 미래적(未來的)으로는, 이긴 자로서의 천국에서의 영생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어요.
예수님만 그런게 아니에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자들이에요. 우리는 영생을 현재로 살고 있어요. 역사 속에서 묵시적 존재로 살고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위에 묵시가 흐르고 있다고 보세요. 보이지 않는 세계인 묵시가 보이는 역사 위에 같이 흐르고 있다고 보세요.
그럼 우리 위에서 흐르는 묵시 속에도 우리가 있겠지요. 삼층 천에 바울이 역사 속에 바울과 같이 가고 있었어요. 그러니 역사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묵시에 살고 있는 나의 “아바타” 에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삼층천에 자기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세상에 살고 있는 바울은 삼층천에 살고 있는 바울의 아바타인 것입니다. 그림자와 같단 말입니다.
이해되나요. 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이게 믿어져요. 그러니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살라고 하신 명령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살게 하셔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새 한 마리도 천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이는 곧 참새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 지켜 주세요.
이 생명 지킴을 구원으로 보세요. 구원이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행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셨다는 말은 우리의 조건을 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조건으로 변개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처럼 든든한 은혜가 어디에 있나요? 내 꼬라지와 상관없이 언약으로 구원이 주어졌다는 이 사실이 믿어진다고 한다면 우리의 인생으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든든함으로 살 수가 있어요.
구원은 우리의 잘잘못으로 인하여 취소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애초부터 우리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홀로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3장을 봅시다.
렘 33:1-10=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로 돌아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해방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하셨다가 다시 회복시킨다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여호와가 하세요.
2절을 보세요.
2절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고 하지요.
여호와가 일을 계획하시고! 여호와가 그 일을 행하시고! 여호와가 그 일을 성취하시는 분이라고 하잖아요. 여호와께서 계획에서부터 실천과 성취까지 이루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 자기 백성들을 이방에 포로로 만드셨다가 해방을 시켜 주신다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죄 아래 가두었다가 구원을 시켜 준다는 말입니다.
언약 백성을 이방인에게 사로잡히게 한 것은 우리 성도의 모습이에요. 우리 성도들은 창세전 언약에 속한 백성이에요. 그런데 이방 나라와 같은 죄악 된 세상에 포로로 잡혀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어요. 율법에 종 노릇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을 구원해 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신약에서의 우리 성도들의 이야기를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죄악을 사해주시고! 열방 앞에서 찬송이 되게 하시고! 기쁨이 되게 하시고! 복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웃음꽃이 피어나게 하신다고 합니다.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 신부의 소리가 들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 감사제를 드리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뻐하게 해 주시고! 찬송할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가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쟁취하고 따내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것이에요. 한마디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병(病)주고 약(藥)주고 하시는 거에요.
이걸 시편 23편에서는 여호와가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 하시고 푸른 초장 맑은 물가로도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와 같아요.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염려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든든하게 살 겁니다.
성경 한 군데만 더 보고 마칩시다. 요한복음 10장입니다.
요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었어요. 우리가 따낸 것이 아니고 공짜로 받았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주셨어요.
그러니 우리의 영생이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에요. 영생의 주인이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영생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엄마처럼 우리를 지켜 주시는 거에요. 여러분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엄마의 사랑이에요.
엄마는 예수님을 상징해요. 엄마가 아이를 낳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낳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모성애적으로 지켜주시는 겁니다.
이게 변호사 역할이에요. 예수님이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 하세요. 자기 피로 말이에요.
우리의 허물을 마귀가 참소하면 예수님이 자기 손과 발 옆구리를 아버지에게 보여 주시면서 내가 저 아이를 피 흘려서 낳았다고 감싸 안으세요. 내가 저 놈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신 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하려고 제자들을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실패 할 수도 없거니와 취소 될 수도 없어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눈을 들어서 이 크고 귀한 은혜를 보시기 바랍니다. 깊디 깊은 사랑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삼층천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세요. 언약으로 우리의 인생을 보시란 말입니다. 그럼 우리의 구원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이루심으로 완성이고 완료 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부디 이 사실이 믿어지고 깨달아져서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구원이 완성이 된 것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눈을 여셔서 묵시 안에서 역사를 살게 하옵소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넉넉함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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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